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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 (조선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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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항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으나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며 중종반정에 참여했다.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 실세로 부상했으나, 김안로 일파의 탄핵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사후 복권되었으며, 학문적 능력과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기묘사화에 동조하고 말년에 국정을 전횡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나, 중종반정에 동참하여 중종 옹립에 기여했다. 김안로를 귀양 보내는 등 권력 투쟁에 참여했으나, 결국 김안로 일파의 탄핵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사후 김안로가 제거되면서 복권되었다.

2. 1. 관직 진출과 정치 활동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으나,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여 간언하면서 연산군을 바른 정치로 이끌어보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중종반정에 동참한다. 이후 중종 때 시독관, 장령, 첨정, 전한 등을 거쳐 다시 시강관, 시독관을 하다가 1512년에 홍문관직제학이 되고 동부승지로 임명된다. 이후 참찬관을 겸했으며, 곧 우부승지로 승진했다. 연이어 형조참의가 되었고, 이후 사헌부대사헌과 형조참판을 역임했지만,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외직인 경상도관찰사로 밀려난다.

하지만 기묘사화에 동참하여 다시 대사헌이 되고 동지경연사를 겸했으며, 이후 예문관제학, 형조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형조판서로 승진하면서 국정을 문란시키던 김안로를 귀양보냈다. 이후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도총관, 우참찬,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우찬성, 대사헌 등을 하면서 심정, 김극핍 등과 권력 실세로 부상했다. 대사헌, 우참찬, 좌참찬 등을 했으며, 다시 지의금부사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참찬이 되었으며, 판의금부사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잠시 우의정이 되었지만, 대간들의 탄핵으로 우의정 임명이 취소되고 우찬성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계속 이조판서와 좌찬성을 하면서 심정, 김극핍과 권세를 부렸고, 판중추부사, 판의금부사,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좌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조정으로 복귀한 김안로와 그 일파의 탄핵으로 심정, 김극핍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고, 1533년에 배소에서 사사된다. 사후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이후 복권되었다.

2. 2. 평가와 비판

이항은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사헌으로 재직할 때 김안로의 국정 문란과 전횡을 비판하여 귀양 보내기도 했으며, 시강원에서는 무오사화의 원인이 재상과 대간의 반목에 있다고 간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곤, 심정, 김극핍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일파를 몰아냈으며, 말년에는 심정, 김극핍과 결탁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국정을 전횡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는 기묘사화 가담과 권력 남용을 비판적으로 본다.

3. 교우 관계

남곤, 김극성, 심정, 박상, 이현보, 박은 등과 교류하면서 사주를 즐겼다.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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