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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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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림 운동에 헌신하며 단경왕후 복위 상소를 올리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 1474년 광주에서 태어나 149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하여, 연산군 시대에 우부리를 처벌하고 중종반정 후 사간원 헌납으로 활동했다. 훈구파의 전횡을 비판하며 한직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 등 사림을 돕고, 김인후를 가르쳤다. 1526년 병술 중시에 장원 급제했으나 훈구파의 견제로 승진하지 못하고 나주목사를 지내다 낙향했다. 1530년 55세로 사망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월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국사략》이 있으며, 고양이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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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박상 영정
박상 영정
출생일1474년 (조선 성종 5년)
출생지전라도 광주
사망지전라도 광주
사망일1530년 (조선 중종 25년)
국적조선
본관충주
별명자 창세(昌世)
호 눌재(訥齋)
직업문관, 학자, 정치인
종교성리학
학력
과거1501년(연산군 7년) 식년시 을과(乙科) 급제
중시1526년 (중종 21년) 병술(丙戌) 중시(重試) 갑과(甲科) 장원급제
가족
박지흥(朴智興)
나주 서씨
배우자문화 류씨, 하동 정씨(후처)
자녀3남. 박민제, 박민중, 박민고
친척형: 박정(朴禎)
동생: 대사헌 박우(朴祐)
조카: 박개(朴漑), 박순(朴淳)
수상
주요 경력순천부사(정3품 당하관), 이조판서(吏曹判書) 자헌대부(資憲大夫) 추증

2. 생애

박상은 1496년(연산군 2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상경한 후 교서관[3] 정자(정9품)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년) 식년시[4] 을과에 급제, 교서관 박사(정7품), 별제(종6품[5]) 등을 역임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전라도 도사(종5품 외직[6])에 자원하여 연산군에게 횡포를 부리던 우부리(牛夫里)[7]를 곤장으로 때려죽이고 금강산 정양사에 숨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1509년(중종 4)까지 3년간 현감 임기를 채운 그는 고향 광주로 돌아와 독서에 힘썼다.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담양부사로 재직하던 중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단경왕후 복위를 상소했다가 정현왕후의 분노를 사 오림역(烏林譯-[8])으로 유배되었다.

1519년(중종 14) 3년상을 치르고 의빈부[9] 경력(종4품)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기 직전,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심정경기도 양천에 지은 소요당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조광조 등 희생된 후배들을 생각하며 왕안석가사도를 빗대어 읊은 시 때문에 심정의 원한을 사 외직으로 쫓겨났다.

1526년(중종 21) 병술 중시에 장원 급제했지만, 훈구 권신들의 눈 밖에 나 승진하지 못하고, 1527년(중종 22) 나주목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1474년(성종 5) 광주 송정리에서 박지흥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박지흥은 사돈 권람의 천거도 뿌리치고 처가가 있는 광주로 낙향하였다. 박상은 환갑이 넘어 늦둥이로 얻은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8살 터울의 형 박정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2]

당시는 사림 운동이 막 시작되어 전국 곳곳에서 성리학 연구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형 박정은 호남 사림 최산두(崔山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종직은 전라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박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나라의 큰 그릇이 되겠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 2. 관직 진출과 좌절

1496년(연산군 2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상경한 후 교서관[3] 정자(정9품)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년) 식년시[4] 을과에 급제, 교서관 박사(정7품), 별제(종6품[5]) 등을 역임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전라도 도사(都使-종5품 외직[6])에 자원, 연산군을 믿고 전횡을 일삼던 우부리(牛夫里)[7]를 곤장으로 때려죽이고 금강산 정양사에 숨었다가 곧 중종반정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1506년(조선 중종 1년) 중종반정사가독서를 허락받고 사간원 헌납(獻納-정5품)이 되자마자 반정공신 책정의 난맥상을 줄기차게 지적했다. 중종은 그들의 추대로 즉위한지라 눌재의 간언이 크게 부담스러웠다. 그는 왕실 종친들의 중용을 극구 반대하는 한편 훈구파들의 전횡에 대해 끊임없이 탄핵 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임금과 훈구파 모두의 공분을 샀다. 곧 그는 한산군수(韓山郡守-종4품)로 발령됐는데 이는 품계만 올린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사헌부대간을 외직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임금과 1년이나 실랑이를 벌이자, 중종은 종묘서 령(宗廟署令-종5품), 소격서 령(昭格署令-종5품) 등 한직을 내렸다. 이에 마음이 상한 눌재는 모친 봉양을 핑계로 임피(臨陂-전북 군산)현감(縣監-종6품)을 자청해 자신이 품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는 궁을 떠나버렸다.

2. 3. 지방관 생활과 사림과의 교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이후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나, 반정공신 책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왕실 종친 중용에 반대하며 훈구공신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임금과 훈구파의 미움을 사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사헌부의 반발로 종묘서 령, 소격서 령 등 한직을 거쳐, 모친 봉양을 이유로 임피현감을 지냈다.[2]

1511년(중종 6) 홍문관 수찬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하여 응교를 지냈다.[2]

1515년(중종 10) 담양부사 재직 중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단경왕후 복위 상소를 올렸다가 정현왕후의 분노를 사 오림역으로 유배되었다.[2]

1516년(중종 11) 조광조 등 사림파의 등용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의빈부 도사, 장악원 첨정 등을 역임했다. 1517년(중종 12)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사직했다.[2]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이후 훈구파 심정의 소요당 잔치에서 왕안석가사도를 언급하며 훈구 세력을 비판하여 심정의 미움을 샀다.[2]

1521년(중종 16) 조광조와 함께 화를 입은 선비들을 보살피고, 김안국, 김세필 등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다.[2]

2. 4. 후기 생애와 죽음

1524년(중종 19년) 사복시 부정(司僕寺 副正-정3품) 등을 지냈다.[2]

1526년(중종 21년) 병술 중시(丙戌 重試) 갑과(甲科)에 장원 급제했으나, 사림파로 낙인찍혀 훈구 권신들의 눈 밖에 나 승진하지 못했다.[2] 이듬해 1527년(중종 22년) 나주목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2]

1528년(중종 23년)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2] 눌재는 김인후를 보고 "예로부터 기동(奇童)치고 끝이 좋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이 사람은 마땅히 잘 마칠 것이다."라고 평했다. 사람들은 눌재를 사람을 알아보는 거울을 지녔다고 칭송했다.[2]

1530년(중종 25년) 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5세.[2]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서거정(徐居正) 이후 성현(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사가(四家)로 칭송되었다.[2] 이조판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되고,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되었다.[2]

눌재는 훈구파와 사림파 교체기의 시작에서 사림 운동에 헌신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조광조(趙光祖)는 단경왕후 신씨 복위에 관한 상소를 강상(鋼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칭찬했고,[10][11] 퇴계 이황은 눌재를 '원우(元祐)의 완인(完人-명예와 신분에 전혀 흠이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 칭찬했다.[12] 고양이 전설로도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동국사략》(東國史略)이 있는데, 권근의 《동국사략》과는 다른 책이다. 권근의 《동국사략》은 삼국 시대까지만 다루었고, 박상의 《동국사략》은 고려 시대까지 다루었다.[2]

3. 사상과 평가

박상(朴祥)은 성리학적 이념에 투철한 사림파 관료로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며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중종반정 공신 책정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왕실 종친 중용에 반대하며, 훈구공신의 전횡을 탄핵하는 등 개혁 정치에 앞장섰다.[2] 1515년에는 단경왕후 복위 상소를 올리는 등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8]

조광조는 박상의 단경왕후 복위 상소를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라고 칭찬했다.[11] 퇴계 이황은 박상을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이라고 극찬했다.[12]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당대의 문장가로서 성현, 신광한, 황정욱과 함께 서거정 이후 사가(四家)로 칭송되었다.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되었다.

눌재는 훈구파와 사림파 교체기의 시작에서 일생을 사림 운동에 헌신하고 물심양면으로 그 성공을 도왔다.

4. 저서

권근이 지은 《동국사략》과는 다른 책으로, 박상의 《동국사략》(東國史略)은 고려 시대까지 다루었다.[12] 권근의 《동국사략》은 삼국 시대까지만 다루었다.

5. 고양이 일화

연산군 때, 전국에 채홍사(採紅使)[13]가 내려져 미녀를 찾던 중 나주 천민 우부리의 딸이 뽑혔다. 우부리의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자, 우부리는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고, 전라도 관찰사[14]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박상은 전라도 도사(都事[15])를 자원하여 부임한 뒤, 우부리와 그 집안 사람들을 금성관(錦城館-나주 관아) 마당에서 곤장으로 때려죽였다. 우부리 집에서 서울로 급히 알리자 연산군은 크게 분노하여 사약을 내리려 했다.

박상은 우부리의 죄상을 글로 조정에 낱낱이 밝히고 임금에게 대죄(待罪)를 청하려고 상경했다. 나주목사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전남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 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들고양이 한 마리가 바짓가랑이를 물어 따라오게 했다. 바로 그때 금부도사가 반대쪽 큰길로 지나가 서로 엇갈려 위기를 모면했고, 얼마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 사건은 불문에 부쳐졌다.[16][17]

박상은 고양이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논 중 수십 결을 묘답(苗畓-고양이의 은혜를 갚는 논)이라 이름 붙이고, 거기서 나온 소출을 매년 금강산 정양사에 공양했다. 박상의 후손들은 고양이를 은혜로운 동물로 여겨 귀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공양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후손들이 계속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게 역둔토(주인 없는 땅이라 국유화한다는 뜻)라며 묘답을 몰수당했다.

참조

[1] 문서 《국역 국조인물고》 속고8 기묘(己卯) 박상의 시장(諡狀)
[2] 문서 국조인물고 권17 경재(卿宰) 육봉(六峰) 박우(朴祐)의 묘갈명(墓碣銘)
[3] 문서 교서관
[4] 문서 식년시(式年試)
[5] 문서 별제직은 영조 때 [[속대전]]제정시 폐지됨
[6] 문서 도사(都使)
[7] 문서 우부리(牛夫里)
[8] 문서 오림역(烏林譯)
[9] 문서 의빈부
[10] 문서 유교의 기본 덕목
[11] 웹사이트 민족문화대전 눌재 박상(朴祥)편 http://encykorea.aks[...]
[12] 웹사이트 한국향토문화대전 데이터베이스 박상(-祥)편 http://m.grandcultur[...]
[13] 문서 채홍사
[14] 문서 관찰사
[15] 문서 감찰과 규탄을 맡은 종5품 관직
[16] 뉴스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16번 김개(金漑)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10-31
[17] 문서 반정 공신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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