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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거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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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거부권은 폴란드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기원한 만장일치 제도로, 세임 의원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모든 법안이 무효화되는 특징을 가졌다. 17세기 중반 이후 자유거부권이 발동되면 세임에서 심의된 모든 법안이 무효화되었고, 18세기에는 외세의 개입과 맞물려 국가의 쇠퇴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791년 5월 3일 헌법으로 폐지되었으나, 1793년 흐로드나 세임에서 무효화되었고, 결국 폴란드 분할의 원인이 되었다. 자유거부권은 긍정적 평가도 존재하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정치 부패와 국가 쇠락의 주요 원인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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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거부권
자유 거부권
얀 마테이코의 그림 '세임', 그림에서 얀 지에모위츠가 자유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얀 마테이코의 그림 '세임', 그림에서 얀 지에모위츠가 자유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유형의회 절차
국가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다른 이름라틴어: Liberum veto
폴란드어: Wolne veto
시작1652년
종료1791년
상세 정보
설명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세임에서 단 한 명의 의원이 반대하더라도 법안을 무효화할 수 있는 의회 절차
영향정치적 마비
외국 간섭 증가
원인귀족 민주주의
만장일치제 전통
역사적 맥락
황금기16세기 ~ 17세기 초
약화17세기 중반 이후
폐지1791년 5월 3일 헌법

2. 기원

자유거부권은 폴란드 왕국의 만장일치 의사 결정 전통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연방 국가적 성격에서 기원했다. 각 지방 세이믹(지방 의회)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해당 지역의 이익을 대표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다수결로 소수파(단 한 명이라도)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은 귀족들 간의 평등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초기에는 다수파가 설득이나 협박을 통해 소수파의 이의 제기를 철회시키는 방식으로 만장일치를 유지했다. 또한, 초기에는 개별 법안에 대해서만 거부권 행사가 가능했고, 거부권이 행사되더라도 그 회기에서 통과된 다른 법안들까지 모두 무효화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역사가 브와디스와프 차플린스키는 1611년 세임에서 일부 법안은 거부되었지만, 다른 법안들은 순조롭게 통과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세임에서 제출된 법안들이 일괄적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한 번 자유 거부권이 발동되면 그동안 심의를 마친 모든 법안까지 함께 무효화되었다.

1652년 트라카이 의원 브와디스와프 시친스키가 처음으로 자유 거부권을 발동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오해이다. 그는 단지 법정 기한을 넘긴 심의 연장에 반대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이후 몇 차례의 세임에서는 자유 거부권 발동이 무시되기도 했지만, 점차 받아들여졌다. 1669년 크라쿠프에서 열린 세임에서는 키예프 출신 의원 아담 올리자가 심의 종료 전에 자유 거부권을 발동하여 심의가 중단되었다. 1688년에는 심의 시작이나 의장 선출 이전에 자유 거부권으로 세임이 해산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2. 1. 브와디스와프 시친스키의 사례 (1652)

일반적으로 1652년 트라카이 의원 브와디스와프 시친스키가 처음으로 자유 거부권을 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단지 법정 기간을 넘어서 세임의 심의를 계속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이후 몇 번의 세임에서 자유 거부권 발동은 무시되기도 했지만, 점차 받아들여졌다.

3. 정점

얀 3세 시대(1674-1696)에는 열린 세임의 절반가량이 자유거부권으로 무산되었다. 이 관행은 전국 의회인 세임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세이믹에도 확산되었다.

1573년부터 1763년까지 150회의 세임이 개최되었지만, 그 중 53회는 어떤 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야체크 옌드루흐에 따르면 이 중 32번은 자유 거부권 행사로 인한 것이었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와 붕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3. 1. 외세의 개입

18세기 전반, 러시아 제국프로이센 왕국 등 폴란드의 이웃 강대국들은 자유 거부권을 이용하여 폴란드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법안이 제출되면 의원들을 매수하여 자유 거부권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법안을 무산시켰다. 이러한 내정 간섭으로 폴란드는 반(半)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작센 왕조 시대(1696년-1763년)에는 세임이 거의 성립되지 않았다. 아우구스트 2세 재위 기간(1697년-1733년)에 성립된 세임은 18회 중 8회였고, 아우구스트 3세 재위 기간(1734-1763)에는 1736년 단 한 번뿐이었다. 정부가 사실상 붕괴된 모습은 '폴란드 무정부 상태'로 불리며 각지의 의회와 마그나트가 각각 자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4. 쇠퇴와 폐지

얀 3세 재위 기간(1674년~1696년) 동안 열린 세임(폴란드 의회)의 절반가량이 자유거부권으로 무산되었다. 이 관행은 전국 세임에서 지역 세이미크(지방 의회)로 확산되었다. 18세기 전반, 러시아 제국프로이센 왕국 등 이웃 국가들은 자유거부권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혁을 방해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들은 대표들을 매수하여 자유거부권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연방에 불리한 법안을 무산시켰다. 그 결과 연방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작센 왕가의 폴란드 통치 기간(1696년~1763년) 동안 소집된 세임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트 2세 재위 기간(1697년~1733년)에는 18번의 세임 중 8번, 아우구스트 3세 재위 기간(1734년~1763년)에는 단 한 번(1736년)만 법안이 통과되었다. 정부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폴란드 무정부 상태'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국가는 지방 의회와 귀족(마그나트)에 의해 관리되었다.

1573년부터 1763년까지 약 150회의 세임이 개최되었지만, 그중 53회는 자유거부권 등으로 인해 어떠한 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역사학자 야체크 옝드루흐는 이 중 32번이 자유거부권 행사로 중단되었다고 지적한다.

4. 1. 연맹 세임 (Confederation Sejm)

18세기에 이르러 자유 거부권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연맹 세임이라는 제도가 등장했다. 이것은 일부 슐라흐타 등이 결성한 연맹의 관리하에 세임을 여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전국 의회로서의 세임과 달리 자유 거부권 행사가 인정되지 않고 원활한 의사 진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때로는 공식적인 세임 의원 전원이 참여한 연맹 세임이 열려 실질적인 국가 입법 기관이 되기도 하였다.

4. 2. 5월 3일 헌법 (1791)

1791년 4년 세임에서 5월 3일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 헌법은 자유 거부권을 폐지하고 다수결 원칙을 도입했으며, 폴란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 시도였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의 압력으로 1793년 흐로드나 세임에서 폐지되었다. 같은 해 제2차 폴란드 분할이 승인되었고, 2년 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멸망하였다.

4. 3. 폴란드 분할

1791년 5월 3일 헌법러시아프로이센의 압력으로 1793년 흐로드나 세임에서 폐지되었다. 이 세임에서 폴란드 제2차 분할이 승인되었고, 2년 후 폴란드 제3차 분할이 실시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멸망하였다.

5. 역사적 의미와 평가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학자 그제고시 에키에르트는 자유거부권이 폴란드 정치 시스템에 봉건적 특징을 가져왔고, 군주의 역할을 약화시켰으며,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여 폴란드의 경제적·정치적 쇠퇴와 외세 침략에 대한 취약성을 낳았고, 궁극적으로 국가 붕괴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1]

5. 1. 부정적 평가

많은 역사학자들은 자유 거부권을 폴란드 정치 부패와 국가 쇠락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세임 의원들은 마그나트(대귀족)나 외국의 매수에 취약했고, '황금의 자유' 시대의 특권을 지키려는 생각으로 자유 거부권을 행사하여 개혁을 거부하고 국정을 마비시켰다. 피오트르 스테판 반디치는 '자유 거부권은 옛 폴란드의 무질서의 불길한 상징이었다'고 평가했다. W. J. 바그너는 '확실히 옛 폴란드에서 이보다 더 후세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은 제도는 없다'고 말했다.[2]

5. 2. 긍정적 평가 (소수 의견)

정치학자 달리보 로하츠는 자유거부권의 원리가 폴란드의 특수한 입헌주의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입법, 종교적 관용, 제한된 정부의 권력…… 다른 나라들이 종교 갈등과 전제정치로 황폐화되는 가운데 존재했던 당시의 폴란드 규범"이 국왕의 힘을 눈에 띄게 제한했다고 말한다. 자유거부권은 황금의 자유로 불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체제와 문화의 핵심이었다.

6. 현대적 사례

IBM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논 컨커(non-concur)'라는 의사 결정 시스템이 있었다. 각 부서장은 회사 전체 전략에 대해 자신의 부서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IBM은 각 부서가 반(半)독립 상태에 있는 '봉건적'인 모습이 되었지만, 1993년 CEO에 취임한 루 거스너가 IBM 재건을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논 컨커를 폐지했다.[4][5][6]

국가 간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유럽 연합법의 규정은 ''liberum vetola캐나다와의 포괄적 경제 무역 협정 (CETA) 서명에 대한 벨기에의 서명을 거부한 사건이 그 예시이다.[10]

국제 연합의 결정은 상임이사국 중 한 곳이라도 의제 항목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면 무효가 될 수 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거부권은 소련/러시아 연방미국 모두 지정학적 이득을 위해 자주 사용해 왔다.[11]

7. 대중문화

2004년 폴란드에서 자유 선거를 소재로 한 'Veto'라는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 발매되었다. 이 게임은 왕 선거 시기 선거 세임을 배경으로 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1670''에서 얀 파베우는 의회를 "이기는" 데 ''자유거부권''을 사용한다.[3]

참조

[1] 서적 Veto, Liberum 1998
[2] 논문 May 3, 1791, and the Polish constitutional tradition 1992
[3] 웹사이트 "1670" to nowy "Miś". Serial Netflixa nie uznaje tabu https://www.rp.pl/pl[...] 2023-12-13
[4] 웹사이트 Is he too cautious to save IBM? Lou Gerstner has stopped IBM's free fall. But Big Blue isn't competitive, and the CEO's deliberate style won't transform it into a winner for years. He may not have that long. https://money.cnn.co[...] 1994-10-03
[5] 뉴스 Notebooks May Hold Key to I.B.M.'s Revival https://www.nytimes.[...] 1993-06-23
[6] 웹사이트 Eradicate a culture of indecision https://www.techrepu[...] 2013-09-12
[7] 웹사이트 Professor Richard Butterwick-Pawlikowski debates the "liberum veto" on Polish television https://www.coleurop[...]
[8] 웹사이트 Could a 'Multi-Tier' Europe Be a Stronger Europe? https://www.brinknew[...]
[9] 서적 The Lisbon Treaty 10 years on: Success or Failure? http://www.sieps.se/[...] Swedish Institute for European Policy Studies 2019-12
[10] 웹사이트 Eurosphere: Polish Parliament in Brussels https://thepolitic.o[...] 2016-10-31
[11] 웹사이트 UN Security Council Meetings & Outcomes Tables https://research.un.[...] 2024-02-27
[12] 서적 Veto, Liberum 1998
[13] 논문 May 3, 1791, and the Polish constitutional tradition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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