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장드디외 술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 드 디외 술트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176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술트는 변호사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16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혁명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빠르게 진급했고, 나폴레옹 시대에는 원수로 임명되어 울름 전역,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반도 전쟁 중 스페인에서 지휘했으며, 이후 프랑스 남부 방어군 지휘관으로 웰링턴 공작에 맞섰다. 부르봉 왕정복고와 백일천하를 거치며 여러 정권에서 육군대신, 총리 등을 역임했고, 프랑스 원수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평가받았지만, 정치적으로는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타른주 출신 - 모리스 드 게랭
    모리스 드 게랭은 1810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39년 사망한 프랑스의 시인으로, 가톨릭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기독교 사회주의 단체에 참여했으나 결별 후 작품을 집필하다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작품이 출판되었다.
  • 타른주 출신 - 루 장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가수 루 장은 《더 보이스 키즈》 출연을 통해 이름을 알린 후 음악 활동과 더불어 텔레비전 영화 및 영화 더빙에 참여하며 연기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 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 - 니콜라 우디노
    니콜라 샤를 우디노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제국의 원수이자 정치인으로, 마세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척탄병 사단을 이끌었으며, 여러 훈장과 작위를 받았고 부르봉 왕정 하에서도 군복무를 이어가다 파리 앵발리드의 총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 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 - 칼 14세 요한
    칼 14세 요한은 프랑스 출신 군인으로 스웨덴 왕세자가 되어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동군 연합을 이루고 중립 외교와 근대화를 추진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 1769년 출생 -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프로이센 귀족 출신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남아메리카 탐험과 연구를 통해 근대 지리학 방법론을 확립하고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으며,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고 국제적인 과학 협력에 기여했다.
  • 1769년 출생 - 이반 크릴로프
    러시아의 라 퐁텐으로 불리는 이반 안드레예비치 크릴로프는 자기 계발로 다양한 지식을 쌓아 희곡 작가로 활동하다가 우화 작가로 전념하여 귀족 사회의 부패와 모순을 풍자, 러시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러시아 문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장드디외 술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르주 힐리의 초상화, 1840년
조르주 힐리가 그린 초상화, 1840년
존칭 접두사원수
이름장드디외 술트
출생일1769년 3월 29일
출생지생타망라바스티드, 프랑스
사망일1851년 11월 26일
사망지타른, 생타망라바스티드, 프랑스
배우자잔루이즈엘리자베트 베르크 (1796년 결혼, 1851년 사망)
자녀3명
직업군 장교
서명
소속
충성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부르봉 왕정복고
7월 왕정
프랑스 제2공화국
군종육군
부대왕립 보병 연대
삼브르에뫼즈군
헬베티아군
제110 보병 연대
복무 기간1785년–1815년
계급원수
주요 전투
프랑스 혁명 전쟁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카이저슬라우테른 전투
제2차 비셈부르크 전투
아를롱 전투 (1794)
플뢰뤼스 전투
알덴호벤 전투 (1794)
룩셈부르크 포위전 (1794–1795)
알텐키르헨 전투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슈토카흐 전투 (1799)
제1차 취리히 전투
린트 강 전투
글라루스 전투 (1799)
제노바 공방전
나폴레옹 전쟁제3차 대프랑스 동맹
울름 전역
멤밍겐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제4차 대프랑스 동맹
뤼베크 전투
알렌슈타인 전투
구트슈타트-데펜 전투
반도 전쟁
가모날 전투
만실라 전투
코루냐 전투
브라가 전투 (1809)
샤베스 포위전
제1차 포르투 전투
제2차 포르투 전투
아르소비스포 전투
오카냐 전투
카디스 포위전
올리벤사 포위전
게보라 전투
제1차 바다호스 공방전 (1811)
알부이라 전투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뤼첸 전투 (1813)
바우첸 전투 (1813)
피레네 산맥 전투
소라우렌 전투
산마르시알 전투
비다소아 전투
니벨 전투
니브 전투
오르테즈 전투
툴루즈 전투
제7차 대프랑스 동맹
백일천하
리니 전투
워털루 전투
정치 경력
직책프랑스 총리
군주루이 필리프 1세
재임 시작1840년 10월 29일
재임 종료1847년 9월 18일
이전 총리아돌프 티에르
다음 총리프랑수아 기조
재임 시작 21839년 5월 12일
재임 종료 21840년 3월 1일
이전 총리 2루이마티외 몰레
다음 총리 2아돌프 티에르
재임 시작 31832년 10월 11일
재임 종료 31834년 7월 18일
이전 총리 3카지미르 페리에
다음 총리 3에티엔모리스 제라르
직책 2국방부 장관
총리본인
재임 시작 41840년 10월 29일
재임 종료 41845년 11월 10일
이전 장관아메데 데팡퀴비에르
다음 장관알렉상드르 몰린 드 생툥
총리 2자크 라피트
카지미르 페리에
재임 시작 51830년 11월 17일
재임 종료 51834년 7월 18일
이전 장관 2에티엔모리스 제라르
다음 장관 2에티엔모리스 제라르
재임 시작 61814년 11월 26일
재임 종료 61815년 3월 11일
총리 3피에르루이장 카지미르 드 블라카스
이전 장관 3피에르 뒤퐁 드 레탕
다음 장관 3앙리 자크 기욤 클라르크
소속 정당저항당

2. 생애

술트는 1769년 3월 29일 프랑스 남부 타른 주 생타망라바스티드(현 생타망술트)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변호사가 되려고 했으나, 1785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왕실 보병 연대에 입대했다.[9] 1791년 하사관으로 진급한 후, 바랭 자원병 제1대대 교관을 거쳐 1792년 오트랭 자원병 제1대대 소위 부관으로 임명되었다.[9] 1794년 플뢰뤼스 전투에서 공을 세워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의 추천으로 준장으로 승진했다.[9] 1799년에는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스위스 원정에서 안드레 마세나 휘하에서 취리히 제1차 전투와 취리히 제2차 전투에서 활약했다.[9] 린트 강 전투(9월 25일~26일)에서 오노레 테오도르 막심 가잔 드 라 페이에르 사단과 가브리엘 장 조제프 몰리토르 사단의 작전을 조정하여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군의 진격을 1799년 네펠스 전투에서 저지했다.

1800년, 나폴레옹마세나에게 이탈리아 군대 재편성을 맡기면서 술트를 부관으로 임명하고 우익 사령관을 맡겼다. 술트는 제노바 방어전에서 활약했으나, 1800년 4월 13일 몬테크레토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마렝고 전투 승리 후 석방된 술트는 피에몬테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하고 나폴리 왕국 남부 사령관이 되었다.

아미앵 조약 직후 파리로 돌아온 술트는 1802년 집정관 근위대 사령관 4인 중 한 명이 되었고, 1803년에는 불로뉴 캠프 총사령관을 맡아 "철의 팔(Bras de F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04년 5월,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울름 진격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했다.

제국의 원수 술트. 1805년 장 브로크의 초상화 복제본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초대 달마티아 공작(프랑스어: ''Duc de Dalmatie'')으로 임명된 술트는 반도 전쟁에 참여하여 1809년 포르투를 점령했으나, 포르투 2차 전투에서 아서 웰즐리에게 쫓겨났다. 1809년 11월 19일 오카냐 전투에서 승리했고, 1810년 안달루시아를 점령했으나 카디스 포위전은 실패했다. 1811년 알부에라 전투에서 거의 승리할 뻔했으나, 1812년 살라망카 패배 후 안달루시아를 포기해야 했다. 1813년 3월, 대육군 제4군단 사령관을 맡아 뤼첸 전투바우첸 전투에서 중앙군을 지휘했으나, 곧 비토리아 전투 패배를 복구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로 파견되었다.

1814년 제1차 왕정복고 때 술트는 왕당파를 자처했고, 생 루이 훈장을 받았으며, 1814년 11월 26일부터 1815년 3월 11일까지 육군 장관으로 활동했다.[9] 그러나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오자 보나파르트파임을 선언하고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 군대의 참모총장이 되었다.[9] 워털루 전투 패배 이후, 1815년 제2차 부르봉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자 독일로 망명했다가 1819년 귀국하여 1820년 프랑스 원수 칭호를 회복했다.[9]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에서 오를레앙가를 지지하여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의 총애를 받은 술트는 1830년부터 1834년까지와 1840년부터 184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육군 장관을 역임했다.[9][10] 술트는 프랑스 군대의 재무장을 조직하고 감독했으며, 1831년에는 외인부대(French Foreign Legion) 창설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1831년 리옹의 카뉘 봉기를 진압했다.

1842년 술트 내각. 좌측 첫 번째는 프랑수아 기조, 좌석에 앉은 이는 루이 필리프 국왕, 가운데는 수상 술트. 클로드 자캉 작 (1844년)


술트는 루이 필리프 통치 시기 세 차례 내각을 이끌었다. (1832년 10월 ~ 1834년 7월, 1839년 5월 ~ 1840년 3월, 1840년 10월 ~ 1847년 9월).[9] 1838년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런던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5] 1840년대에는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48년 루이 필리프가 왕좌에서 쫓겨나자 자신은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했다. 1840년부터 1847년까지 거의 7년 동안 장관회의 의장을 역임한 그는 외교 장관인 프랑수아 기조에게 내각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겼다. 1847년 9월,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프랑스 원수 칭호를 받았다.

2. 1. 어린 시절

1769년 3월 29일 프랑스 남부 타른주 생타망라바스티드(현 생타망술트)에서 왕실 공증인 장 술트(1726-1779)와 그르니에 가문 출신[11]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처음에는 변호사가 되려고 했으나, 1785년 4월 16일 아버지의 사망으로 16세의 나이로 왕실 보병 연대에 병졸로 입대했다.[9] 그의 동생 피에르브누아 술트도 3년 후 형을 따라 입대하여 프랑스 장군이 되었다.

2. 2. 프랑스 혁명 전쟁

1791년 하사관으로 진급한 술트는 바랭 자원병 제1대대 교관이 되었다.[9] 1792년 오트랭 자원병 제1대대 소위 부관으로 임명되었다.[9] 1794년 플뢰뤼스 전투에서 침착함을 보여준 술트는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의 추천으로 준장으로 승진했다.[9] 이후 5년 동안 장바티스트 주르당,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장바티스트 클레베르,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등의 지휘 아래 독일에서 복무했다.[9]

1799년 사단장으로 승진한 술트는 스위스 원정에서 안드레 마세나 휘하에서 활약했다.[9] 특히 취리히 제1차 전투와 취리히 제2차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9] 린트 강 전투(9월 25일~26일)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고, 오노레 테오도르 막심 가잔 드 라 페이에르 사단과 가브리엘 장 조제프 몰리토르 사단의 작전을 조정하여 수보로프의 스위스 원정에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군의 진격을 1799년 네펠스 전투에서 저지하는 영예를 얻었다.

2. 3. 나폴레옹 시대

1800년, 초대 집정관 나폴레옹마세나에게 이탈리아 군대 재편성을 맡기면서, 술트를 부관으로 임명하고 우익 사령관을 맡겼다. 술트는 제노바 방어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4월 6일, 여러 대대를 이끌고 첫 돌격 작전을 펼쳐 오스트리아 군대를 돌파하고 가르단 장군을 구출했다. 적을 피오타 너머로 격퇴하고, 수보로프 장군을 알프스 산맥으로 추격하여 사셀로를 점령하고 수많은 포로, 대포, 깃발을 가지고 제노바로 돌아왔다. 또 다른 돌격 작전에서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맞서 몬테파치오에서 한 부대를 포위했다. 그러나 1800년 4월 13일 몬테크레토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강도를 당하고 포로로 잡혀 며칠 동안 병원에서 고통받았다. 이 경험은 술트에게 큰 충격을 주어 다시는 전투 최전선에 앞장서지 않게 되었다.

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 승리 후 석방된 술트는 피에몬테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반란이 한창이었지만, 소위 바르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난폭한 무리를 규율하고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기까지 했다. 이후 술트는 나폴리 왕국 남부 사령관이 되었다.

아미앵 조약 직전, 술트는 파리로 돌아와 초대 집정관의 환대를 받았다. 1802년 3월 5일, 집정관 근위대 사령관 4인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콜로넬 제너럴(colonel général)이 되었다. 그 후 새로운 정권에 충성을 맹세했다. 1803년 8월, 불로뉴 캠프 총사령관을 맡았다. 전직 훈련 교관이었던 술트는 엄격한 규율을 부과하여 미래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효율성을 보장했고, "철의 팔(Bras de F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폴레옹조차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자, 술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내가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보급소에 남겨질 것이다. 견딜 수 있는 자만이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1804년 5월, 술트는 최초의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울름 진격에서 군단을 지휘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연합군 중앙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을 이끌었다.

달마티아 공작 장 드 디외 술트의 문장


술트는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6년 예나 전투 등 프랑스 대혁명군의 여러 유명한 전투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프리틀란트 전투에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날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틸지트 조약 체결 후 프랑스로 돌아온 술트는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초대 달마티아 공작(프랑스어: ''Duc de Dalmatie'')으로 임명되었다. 이 영예는 그를 매우 불쾌하게 했는데, 그는 자신의 칭호가 아우스터리츠 공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칭호는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술트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하기 위해 의도한 제2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가모날 전투에서 승리한 후, 술트는 황제의 명을 받아 중장 존 무어 경의 영국군을 추격하도록 명령받았다. 코루냐 전투에서 무어가 전사했음에도 술트는 영국군이 바다로 탈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보옴(Beaume)이 그린 포르투 1차 전투의 술트


이후 4년 동안 술트는 스페인에 남아 반도 전쟁에 참여했다. 1809년 포르투갈을 침공하여 포르투를 점령했지만, 프란시스쿠 다 실베이라 장군의 지연 전술에 의해 고립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포르투갈 왕위 후보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정복 지역의 정치적 정착에 힘썼고, 이로 인해 군대 내 공화주의 장교들의 증오를 샀다.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결국 포르투 2차 전투에서 아서 웰즐리 중장에게 포르투갈에서 쫓겨나 윌리엄 베레스퍼드 장군과 실베이라 장군에게 추격을 받으며 산악 지대를 통해 고통스럽고 거의 재앙적인 후퇴를 했다. 탈라베라 전투 이후 술트는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권한이 확대되었고, 1809년 11월 19일 오카냐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810년 안달루시아를 침공하여 빠르게 점령했다. 그러나 세비야를 점령하기 위해 나섰기 때문에 카디스를 점령하지 못했고, "세비야를 내게 주면 카디스는 내가 책임지겠소"라고 말했다.[3] 이로 인해 프랑스에게 전략적 재앙이 된 장기간의 무의미한 카디스 포위전이 이어졌다. 1811년 술트는 북쪽으로 에스트레마두라로 진군하여 바다호스를 점령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이 도시를 포위하자, 그는 구원을 위해 진군하여 5월 16일 알부에라 전투를 벌여 거의 승리할 뻔했다.

1812년 웰링턴이 살라망카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술트는 안달루시아를 포기해야 했다. 그 후 부르고스 포위전에서 그는 웰링턴의 영국 연합군을 살라망카로 몰아냈다. 거기서 달마티아 공작(Soult의 당시 칭호)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웰링턴을 공격하지 못했고, 영국군은 포르투갈 국경으로 후퇴했다.[4] 얼마 후 그는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요청으로 스페인에서 소환되었다. 그는 다른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항상 의견이 맞지 않았다.

1813년 3월, 술트는 대육군 제4군단(IV Corps (Grande Armée)) 사령관을 맡아 뤼첸 전투바우첸 전투에서 중앙군을 지휘했으나, 곧 비토리아 전투에서 패배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무제한 권한을 가지고 프랑스 남부로 파견되었다. 술트가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군을 재편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공로이다.

스페인으로의 그의 마지막 공세는 웰링턴이 피레네 산맥 전투(소라우렌 전투)에서, 그리고 마누엘 프레이레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산 마르시알 전투에서 저지했다. 프랑스 영토로 추격당한 술트는 니벨 전투, 니브 전투, 오르테즈 전투에서 여러 차례 위치를 이동당했고, 툴루즈 전투에서 웰링턴에게 기술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웰링턴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2. 4. 부르봉 왕정복고와 백일천하

1814년 제1차 왕정복고 때 술트는 왕당파를 자처했고, 생 루이 훈장을 받았다. 1814년 11월 26일부터 1815년 3월 11일까지는 육군 장관으로 활동했다.[9] 그러나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오자, 술트는 즉시 보나파르트파임을 선언하고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 군대의 참모총장이 되었다.[9] 워털루 전역에서 참모총장 역할을 맡았으나, 이전의 군대 사령관으로서의 능력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워털루 전투 패배 이후, 1815년 제2차 부르봉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자 술트는 독일로 망명했다. 1819년 귀국하여 1820년에는 다시 프랑스 원수 칭호를 회복했다.[9]

2. 5. 7월 왕정

루이 필리프 통치 시기 술트는 세 차례 내각을 이끌었다. (1832년 10월 ~ 1834년 7월, 1839년 5월 ~ 1840년 3월, 1840년 10월 ~ 1847년 9월).[9] 1840년대에는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48년 루이 필리프가 왕좌에서 쫓겨나자 자신은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에서 오를레앙가를 지지하여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의 총애를 받았다.[9] 1830년부터 1834년까지와 1840년부터 184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육군 장관을 역임했다.[9][10]

전쟁장관(1830년~1834년)으로서 술트는 프랑스 군대의 재무장을 조직하고 감독했다. 복고 왕정 시대의 육군 병력은 2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술트는 1831년부터 1832년까지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여 그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자 했다. 이 중요한 군사 개혁의 첫 번째 법률은 1831년 3월 9일에 외인부대(French Foreign Legion)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루이 필립은 치안 유지를 위해 오직 국가방위군에만 의존하는 것에 대한 우려로 술트 원수에게 즉시 현역 육군을 재편성하도록 지시했다. 술트는 1831년 2월 20일 하원에 제출된 국왕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1818년 구비옹생시르 법에 대해 비판했다. 술트는 육군의 전력 증강, 과다 인원 감축, 무기와 탄약 공급 확보를 목표로 하는 군사 정책의 주요 방향을 제시했다.

1831년 그는 루이 필립에 의해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리옹으로 파견되어 카뉘 봉기, 즉 리옹의 비단 직공들의 첫 번째 폭동을 진압했다. 질서는 회복되었지만, 술트는 공화파 진영에서 매우 인기가 없어졌다.

1834년 4월 리옹에서 새로운 봉기가 발생했을 때, 술트 원수는 리옹 주둔군 사령관인 아이마르 중장으로부터 도시를 철수해야 한다는 절망적인 전보를 받았다. 달마티아 공작은 즉시 단호한 답변을 보내, 중장을 질책하고 모든 위치를 사수하고 성벽을 지키다 죽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전쟁장관 재직 중 1832년에서 1834년까지 처음으로 장관회의 의장(총리)직을 역임했다. 1838년 4월, 루이 필리프는 술트를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했다. 그는 런던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그의 옛 적수인 웰링턴 공작이 그의 팔을 잡고 "드디어 당신을 만났군요!"라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다시 한번 정부 수반(1839년-1840년)이 된 그는 동시에 외교 장관직을 맡았다. 그는 1840년 12월 나폴레옹의 유해를 반환하는 의식에 참석했다.

1840년부터 1847년까지 거의 7년 동안 장관회의 의장을 역임한 그는 외교 장관인 프랑수아 기조에게 내각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겼다. 1847년 9월,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프랑스 원수 칭호를 받았다.

3. 평가

술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일례로 탈라베라 전투 이후 웰링턴의 영국군을 포르투갈에서 고립시키려 한 시도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6] 반도 전쟁 말기에 웰링턴 휘하 연합군에게 반복적으로 패배했지만, 훈련받지 않은 징집병이 많았던 반면 연합군은 노련한 병사들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리한 방어를 펼쳤다.[7]

술트의 군대는 전투에 임하기 전에 대개 잘 준비되어 있었다. 비토리아 전투 이후 그는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지휘 아래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군을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강력한 군대로 재편성했다. 다만, 피레네 산맥 전투 공세를 시작할 때 병사들에게 겨우 나흘 치의 식량만 지급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전술적으로는 전투 계획을 잘 세웠지만, 종종 부하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겼다. 웰링턴은 "술트는 전투가 시작된 후 병사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9] 알부에라 전투에서 그는 탁월하게 베레스퍼드의 측면을 돌파했지만, 영국군과 스페인군의 예상치 못한 저항에 직면하자, 그의 장군들이 서투른 공격대형을 취하도록 허용하여 패배했다. 니브 전투에서는 웰링턴의 전략적 딜레마를 인식하고 영국-연합군 양쪽 측면을 기습 공격하여 이점을 취했지만, 프랑스군의 전술적 수행이 좋지 않아 영국 장군은 술트의 공격을 막아냈다.

20세기 초 영국은 그를 기념하여 영국 해군의 감시함 HMS 마셜 술트를 명명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군인으로서의 술트를 칭찬했지만, 정치가로서의 술트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를 내리며, "전장에서만 품위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4. 연보

술트는 1785년 프랑스 왕실 보병 연대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다음은 술트의 주요 경력, 작위 및 서훈을 정리한 연보다.

날짜계급/직책
1787년 6월 13일상병
1791년 3월 31일보급 상병(caporal fourrier)
1791년 7월 1일하사
1792년 7월 16일소위 부관(sous-lieutenant adjudant-major)
1793년 8월 20일대위
1794년 2월 7일임시 소령 (임시 대대장; chef de bataillon à titre provisoire)
1794년 4월 5일소령 (대대장; chef de bataillon)
1794년 5월 14일임시 준장 부관
1794년 10월 11일준장
1799년 4월 4일임시 소장
1799년 4월 21일소장
1804년 5월 19일제국 원수
1820년프랑스 원수
1847년 9월 26일프랑스 대원수


  • 작위

  • * 1808년 6월 29일, 1대 달마티아 공작 및 제국 공작(1er duc de Dalmatie et de l'Empire) 작위를 받았다.
  • * 1815년 6월 2일 백일천하 기간 동안 프랑스 귀족원 의원(Pair de France)이 되었다.
  • * 1827년 11월 5일 공작의원(Duc et pair)이 되었고, 1828년 10월 8일 공개장(公開狀)을 받았다.

  • 서훈


훈장수여 국가날짜
Légion d'honneur|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어
Légionnaire|레지오네르프랑스어1803년 12월 11일
Grand officier|그랑토피시에프랑스어1804년 6월 14일
* 이후 4대 레지옹 도뇌르 보병대장
Grand aigle|그랑테글프랑스어1805년 2월 2일
Ordre royal et militaire de Saint-Louis|생루이 기사 훈장프랑스어프랑스 왕국1814년 9월 24일
Ordre du Saint-Esprit|생테스프리 기사 훈장프랑스어프랑스 왕국1825년 5월 30일
Orden des Heiligen Hubertus|생위베르 훈장de
Ordre de Léopold|레오폴 훈장프랑스어 대(大)리본
Τάγμα του Σωτήρος|구조 훈장el
Orden del Toisón de Oro|황금양모 기사단es (958번째)1838년


4. 1. 군사 경력

술트는 1785년 프랑스 왕실 보병 연대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1791년에는 하사관으로 진급했고, 바랭 자원병 제1대대의 교관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동안 술트는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빠르게 승진했다.

날짜계급/직책
1787년 6월 13일상병
1791년 3월 31일보급 상병(caporal fourrier)
1791년 7월 1일하사
1792년 7월 16일소위 부관(sous-lieutenant adjudant-major)
1793년 8월 20일대위
1794년 2월 7일임시 소령 (임시 대대장; chef de bataillon à titre provisoire)
1794년 4월 5일소령 (대대장; chef de bataillon)
1794년 5월 14일임시 준장 부관
1794년 10월 11일준장
1799년 4월 4일임시 소장
1799년 4월 21일소장
1804년 5월 19일제국 원수
1820년프랑스 원수
1847년 9월 26일프랑스 대원수



1794년 플뢰루스 전투에서 보여준 침착함으로 술트는 준장으로 승진했다.[9] 이후 삼브르-뫼즈 군에 합류하여 장바티스트 주르당,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장바티스트 클레베르,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등 여러 장군들 아래서 독일에서 복무했다. 1799년에는 슈토카흐 전투에서 르페브르를 대신해 싸우기도 했다. 같은 해, 술트는 안드레 마세나 장군의 지휘 아래 헬베티아 군으로 이동하여 취리히 제1차 전투에서 군사적 명성을 쌓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주들을 진압하고, 레우스 강에서 적군을 몰아내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린트 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오노레 테오도르 막심 가잔 드 라 페이에르와 가브리엘 장 조제프 몰리토르 사단의 작전을 조정하여 수보로프의 스위스 원정에서 수보로프 군의 진격을 1799년 네펠스 전투에서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장 드 디외 술트


1800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술트를 이탈리아 군대의 우익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술트는 제노바 방어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오스트리아 군을 격퇴하고 알렉산더 수보로프를 알프스 산맥으로 추격하여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러나 1800년 4월 13일 몬테크레토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9] 마렝고 전투 승리 후 풀려난 술트는 피에몬테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하고, 나폴리 왕국 남부 사령관을 역임했다.

아미앵 조약 체결 직후 파리로 돌아온 술트는 집정관 근위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9] 1803년, 술트는 불로뉴 캠프 총사령관을 맡아 군의 규율을 확립하고 "철의 팔(Bras de F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04년 5월, 술트는 제국 원수로 임명되었다.[9]

1808년경의 술트


1805년 울름 전역에서 1개 군단을 지휘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연합군 중앙부에 대한 돌격을 감행하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9] 제4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에서는 프리드란트 전투를 제외한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9] 틸지트 조약 체결 후, 1808년 달마티아 공작에 임명되었고, 대륙군 제2군단을 이끌고 반도 전쟁에 참전했다.[9] 가모날 전투에서 승리하고 존 무어가 이끄는 영국군을 추격하여 아 코루냐 전투를 치렀으나, 영국군의 퇴각을 막지는 못했다.[9]

1809년, 술트는 포르투갈 왕국에 침공하여 제1차 포르투 전투에서 포르투를 점령했지만,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9] 1809년 타라베라 데 라 레이나 전투 이후 술트는 프랑스의 스페인 주둔군 참모장이 되었고, 오카냐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했다.[9] 1810년 안달루시아를 평정하고, 1811년 제1차 바다호스 포위전에서 바다호스를 함락시켰다.[9] 알부에라 전투를 치렀으나,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웰링턴에게 패배하면서 안달루시아에서 철수해야 했다.[9]

1813년, 술트는 대륙군 제4군단의 지휘를 맡아 뤼첸 전투바우첸 전투에서 프랑스군 중앙부를 지휘했다.[9] 그러나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자, 술트는 전권을 위임받고 남프랑스로 이동하여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에 맞서 싸웠다.[9]

4. 2. 작위


  • 1808년 6월 29일, 1대 달마시 공작 및 제국 공작(1er duc de Dalmatie et de l'Empire) 작위를 받았다.
  • 1815년 6월 2일 백일천하 기간 동안 프랑스 귀족원 의원(Pair de France)이 되었다.
  • 1827년 11월 5일 공작의원(Duc et pair)이 되었고, 1828년 10월 8일 공개장(公開狀)을 받았다.


4. 3. 서훈

훈장수여 국가날짜
Légion d'honneur|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어
Ordre royal et militaire de Saint-Louis|생루이 기사 훈장프랑스어프랑스 왕국1814년 9월 24일
Ordre du Saint-Esprit|생테스프리 기사 훈장프랑스어프랑스 왕국1825년 5월 30일
Orden des Heiligen Hubertus|생위베르 훈장de
Ordre de Léopold|레오폴 훈장프랑스어 대(大)리본
Τάγμα του Σωτήρος|구조 훈장el
Orden del Toisón de Oro|황금양모 기사단es (958번째)1838년


참조

[1] 서적 Soult, Maréchal d'Empire et homme d'État édition de la Manufacture 2011-12-29
[2] 서적 Soult — Napoleon's Maligned Marshal London
[3] 서적
[4] 서적
[5] 웹사이트 Napoleonic Marshals : Nicolas Soult https://www.napoleon[...]
[6] 간행물 The Quarterly Review
[7] 서적
[8] 서적 Napoleons Marschall Soult und Louise Berg Wallstein
[9] 백과사전 Soult, Nicolas Jean de Dieu
[10] 백과사전 Nicolas-Jean de Dieu Soult, duke de Dalmatie https://www.britanni[...] 2023-04-29
[11] 서적 Les verreries forestières de Moussans Imprimeur J. Bonnet
[12] 웹사이트 Les francs-maçons de la Grande Armée http://www.histoir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