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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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바티스트 세실은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코르벳함 에로인호의 지휘관으로 세계 일주를 했으며, 1841년부터 1847년까지 동아시아에서 활동했다. 그는 조선,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시도했으나, 다낭 폭격과 같은 군사적 충돌도 있었다. 프랑스 귀국 후 정치에 참여하여 센마리팀 주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상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의 이름을 딴 지명과 프랑스 순양함이 존재한다.

장바티스트 세실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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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세실 (1787–1873)
이름장바티스트 세실
원어 이름Jean-Baptiste Thomas Médée Cécille
로마자 표기Jangsabatiseu Tomaseu Mede Sesil
출생1787년
출생지루앙
사망1873년
사망지생말로
국적프랑스
거주지프랑스
군사 경력
소속프랑스 해군
복무 기간알 수 없음
최종 계급해군 제독
주요 참전다낭 포격
훈장
훈장 내역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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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사 경력

장바티스트 세실은 해군 장교로서 다양한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코르벳함 'Héroïne프랑스어'을 지휘하며 세계 일주 항해를 통해 프랑스 포경선을 보호하고 뉴질랜드 해역 측량에 기여했다.

이후 그의 활동은 주로 동아시아에 집중되었다. 1843년,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의 지시에 따라 함대를 이끌고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는 영국중국 진출에 대응하여 프랑스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내 영국군 지원과 베트남 내 프랑스 선교사 박해에 대한 대응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홍콩과 같은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바실란섬 점령을 시도하다 스페인의 반대로 실패하기도 했다.

세실은 베트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1845년에는 투옥된 가톨릭 선교사 도미니크 르페브르 주교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1847년에는 르페브르 주교가 재차 투옥되자 다시 함대를 보내 석방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협상이 결렬되자 1847년 4월, 다낭(당시 투란)에서 베트남 함선들을 공격하여 격침시키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또한 세실은 일본조선과의 관계 수립도 시도했다. 1846년 오키나와나가사키를 방문하여 일본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으며, 같은 해 조선으로 항해하여 병오박해로 투옥된 김대건 신부의 석방을 도모했으나, 김 신부가 이미 처형된 후였다.

1847년 베트남에서의 군사 행동 이후, 다시 선교사 잠입을 위해 조선으로 향하던 중 배가 좌초되어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동아시아 활동은 이후 프랑스의 본격적인 인도차이나 식민지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2.1. 세계 일주와 초기 탐험 (1837-1839)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세실은 코르벳 "에로인"호(Héroïne프랑스어)의 지휘관으로서 세계를 일주하였다. 그는 프랑스 포경선의 보호를 목적으로 1837년 7월 1일 브레스트를 출항하였다. 1838년에는 해군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뉴질랜드 측량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2.2. 동아시아에서의 활동 (1841-1847)

1841년 4월 27일, 세실은 프리게이트 l'Érigone프랑스어호를 타고 브레스트를 출발하여 동아시아로 향했다. 당시 배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동승했으며, 그해 12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이때는 청나라와 대영제국 간의 제1차 아편 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프랑스 정부는 세실에게 양쯔강 유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시기 세실은 동아시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조선, 일본 등과의 독자적인 접촉을 시도했으며, 특히 조선과는 통역관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기울였다. 1846년에는 조선에서 투옥된 김대건 신부의 석방을 위해 함대를 이끌고 접근하기도 했다.

또한 세실은 베트남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1843년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의 지시에 따라 베트남에 파견되어 프랑스의 베트남 개입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는 중국에서의 영국 영향력 확대에 대응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는 베트남 내 프랑스 선교사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여러 차례 베트남 해역에서 활동했으며, 1847년에는 다낭에서 베트남 함선과 교전을 벌여 격침시키는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홍콩과 유사한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바실란섬 점령을 시도했으나 스페인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세실은 이러한 동아시아에서의 활동 중이던 1844년 해군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1846년 오키나와현나가사키시를 방문하여 일본과의 관계 수립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847년에는 선교사 잠입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항해를 시도하던 중 배가 좌초되어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기도 했다.

2.2.1. 조선과의 외교적 접촉 시도 (1841-1846)

1841년 4월 27일, 세실은 프리게이트 함 l'Érigone프랑스어를 이끌고 브레스트를 출발했다. 이때 배에는 선교사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신부, 프랑수아 에스테브 신부, 뱅자맹 브뤼에르(Benjamin Brueyre) 신부가 동승했다. 에리곤호는 12월 8일 마카오에 기착했는데, 당시 청나라와 대영제국 사이에는 제1차 아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실은 '조선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헌종에게 중국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지원하는 대가로 프랑스와의 독점적인 교역 관계를 맺도록 제안하고, 나아가 일본의 섬 하나를 점령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을 위해 1842년 2월, 세실은 마카오에 주재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재무 담당 나폴레옹 리부아(Napoléon Libois) 신부에게 조선인 학생을 통역관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리부아 신부는 이를 조선 교회와의 연락 재개 및 포교 활성화 기회로 보고 제안을 수락했으며, 조선 포교를 담당할 인물로 조제프 앙브르와즈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신부를 지목하고, 메스트르 신부의 동반자로 김대건을 선정했다.

1846년 9월, 세실 제독은 병오박해로 조선에서 투옥된 김대건 신부를 구출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조선 해역으로 항해해 왔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세실 함대가 도착하기 직전인 1846년 9월 16일에 이미 순교(처형)한 뒤였다.

2.2.2. 베트남 파병과 군사 작전 (1843-1847)

1842년 영국중국에서의 군사적 개입에 성공하자, 프랑스는 남쪽에서 중국으로 접근하여 영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에 1843년,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Léonard Charner프랑스어) 대령이 지휘하는 함대를 베트남에 파견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시작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표면적으로 중국 내 영국의 활동을 지원하고 베트남 내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에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 목적은 중국에서 영국의 영향력 확장에 맞서고 베트남에서의 자국 이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 함대에는 외교관 테오도르 드 라그르네(Théodore de Lagrené프랑스어)도 동승했으며, 홍콩과 유사한 해군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바실란섬 점령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해당 섬이 필리핀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하자 점령 계획은 무산되었다.

1845년, 기조 외무장관은 다시 세실 제독을 베트남으로 보내 투옥된 가톨릭 선교사 도미니크 레페브르(Dominique Lefèbvre프랑스어)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도록 했다.

2년 뒤인 1847년, 레페브르 주교가 베트남에 몰래 다시 입국했다가 두 번째로 투옥되고 뒤클로(Duclos프랑스어) 선교사도 함께 억류되자, 세실 제독은 이들을 구출하고 베트남 내에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오귀스탱 드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프랑스어) 대령에게 군함 두 척(Gloire프랑스어, Victorieuse프랑스어)을 주어 다낭(당시 투란)으로 보냈다. 당시 레페브르 주교는 이미 석방되어 싱가포르로 가던 중이었는데, 라피에르 대령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함대는 베트남 측과의 협상이 성과 없이 끝나자 무력 사용을 결정했다.

1847년 4월 14일, 프랑스 함대는 다낭 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함선들의 돛대를 해체하며 공격을 시작했고, 다음 날인 4월 15일에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 다낭 폭격으로 베트남 함선 다섯 척 중 세 척이 격침되었고, 프랑스 함대는 현장을 떠났다.

2.2.3. 일본과의 관계 구축 시도 (1846)

1846년 6월, 세실 제독은 오키나와현으로 항해하여 당시 쇄국 정책을 유지하던 에도 시대 일본과의 관계 수립을 시도했다. 이후 나가사키시로 이동했지만, 상륙이 거부되었다.

2.3. 좌초와 구조 (1847)

1847년 베트남 투란(다낭)에서의 포격 사건 이후, 세실은 선교사를 잠입시키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항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배가 조선 근해에서 좌초되었고, 결국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3. 정치 경력

프랑스로 돌아온 뒤, 세실은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848년 제헌 의회에서 센인페리외르 주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나폴레옹 3세를 지지했으며, 1849년에는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852년에는 상원 의원이 되었다.

4. 유산

1846년 세실이 탐험한 일본 남부의 오스미 제도는 옛 프랑스 지도에서 그의 이름을 따 “세실 군도”(Archipel Cécille프랑스어)라 표기되었었다.
크로제 제도(Îles Crozet프랑스어)의 포세시옹 섬(Île de la Possession프랑스어)에는 1960년대에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몽 세실”(Mont Cécille프랑스어, 46°23'00" S, 51°41'00" E)이라는 산이 있다.
프랑스 순양함 아미랄 세실(1888년 건조 - 1919년 해체)은 그의 명예를 기려 명명되었다.

1888년 프랑스 순양함 아미랄 세실
1888년 프랑스 순양함 아미랄 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