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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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에서 태어나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로, 박해받던 조선 시대에 신앙을 지키다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는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함대의 통역으로 활동했으며, 1845년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펼쳤다. 1846년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았으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유네스코는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2021년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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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 |
---|---|
기본 정보 | |
존칭 | 성인 |
이름 | 김대건 안드레아 |
로마자 표기 | Gim Daegeon Andeurea |
한자 표기 | 金大建 안드레아 |
출생일 | 1821년 8월 21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 |
사망일 | 1846년 9월 16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새남터 |
기념일 | 9월 20일 |
교회 | 로마 가톨릭교회 |
숭경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
사제 서품 | 1845년 |
직업 | 사제, 순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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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미리내 성지 |
신분 | |
칭호 | 순교자 |
시복 및 시성 | |
시복일 | 1925년 9월 11일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기타 | |
수호 | 한국 성직자 |
관련 서적 | 김은신의 "이것이 한국 최초" (1995-11-01, 삼문, ISBN 978-89-85407-35-9, 247~249쪽) |
2. 생애
18세기 후반, 중국을 방문한 학자들이 가져온 서양 서적을 통해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되었다.[1] 1836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도착했는데, 이미 조선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다.[2]
김대건은 양반 출신으로, 그의 부모는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는 조선에서 금지된 기독교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15세에 세례를 받고 마카오와 필리핀 등지에서 유학하며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를 익혔다.
1845년 상하이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은 조선으로 돌아와 비밀리에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46년 체포되어 고문 끝에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 1. 출생과 가계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조 김희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했고, 9대조 김의직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가문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했다. 8대조 김수완 때부터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했다.1784년경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이존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증조부 김진후도 관직에서 물러나 입교하여 가문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 증조부 김진후는 10여 년간 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하였고, 작은 할아버지 김한현은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되었다.[1] 아버지 김제준은 기해박해(1839년) 때 아들 김대건을 서양에 유학 보낸 죄로 체포되어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당고모 김 데레사는 1840년 서울 포청에서 순교하는 등, 김대건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2000년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서 천주교 성인공파(天主敎 聖人公派)로 분파하였다. 천주교 순교자 김진후(金震厚, 보명: 운조(運祚))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김대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증조부 |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 1735년 | 1814년 | |
증조모 | 숙부인 기계 유씨(杞溪兪氏) | 1743년 | 1817년 | |
종조부 | 김종현(金淙鉉) | 1764년 | 1806년 | |
종조모 | 진주 강씨(晋州 姜氏) | 1761년 | 1814년 | 김대건의 큰할머니 |
당숙부 | 김제광(金濟廣) | 1780년 | 1803년 | |
당숙부 | 김제맹(金濟孟) | 1789년 | 1877년 | |
조부 | 김택현(金澤鉉) | 1766년 | 1830년 4월 9일 | |
조모 | 이 멜라니아(경주 이씨) | 1766년 | 1821년 9월 9일 | |
백부 | 김제봉(金濟鳳) | 1790년 | 1821년 9월 9일 | |
백모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1797년 | 1825년 | |
종제 | 김근식 베드로(金謹植) | 1827년 | 1869년 | |
아버지 | 성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 1795년 | 1839년 | |
어머니 | 고 우르술라(장흥 고씨) | 1798년 | 1864년 | |
동생 | 김난식 프란치스코(金亂植) | 1827년 | 1853년 | |
숙부 | 김제철(金濟哲) | 1803년 | 1855년 4월 14일 | |
숙모 | 숙부인 목천 마씨(木川 馬氏) | 1798년 | 1852년 12월 9일 | |
종제 | 김의식(金儀植) | 1823년 | 1874년 | |
종제 | 김진식 베드로(金眞植) | 1827년 | 1869년 | |
종제 | 김족식 프란치스코(金族植) | 1833년 | 1968년 | |
종조부 | 복자 김한현 안드레아(金漢鉉) | 1768년 | 1816년 | |
당숙부 | 김제덕(金濟德) | 1794년 | 1845년 | |
당고모 | 성 김제신 데레사(金濟信) | 1796년 | 1840년 | |
당고모부 | 손연욱 요셉(孫連旭) | 1793년 | 1817년 | |
종조부 | 김희현(金僖鉉) | 1785년 | 1827년 | |
종조모 | 능성 구씨(綾城具氏) | 1788년 | 1842년 | |
당숙부 | 김제항 루드비코(金濟恒) | 1814년 | 1866년 |
2. 2. 유년 시절과 신학생 시절
김대건은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가 순교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가세가 기울었고, 박해를 피해 7세 때 경기도 용인시 골배마실로 이사하여 성장하였다. 15세 때인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9]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18세기 후반, 중국을 방문한 학자들이 가져온 서양 서적을 통해 천주교가 한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1] 1836년에는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했는데,[2] 그들은 이미 한국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양반 출신인 김대건의 부모는 천주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는 유교 전통이 강한 조선에서 금지된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마카오와 필리핀 등지에서 유학하며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를 익혔고, 서양 학문에도 능통했다.
2. 2. 1. 마카오 유학 생활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에서 운영하는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신학, 철학, 지리, 역사를 공부하기 위한 라틴어[12], 프랑스어 등을 배웠다. 조선 신학생들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대견해했다.[13]가톨릭 잡지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의하면 김대건은 마카오 신학교 시절 그를 가르친 교수들이 만약 신학생이 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학문과 미술 모두 뛰어난 박식가였던 것이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서구시장에서 성장한 자본이 세력을 넓히도록 기독교, 군대, 상업이라는 삼각형으로써 식민지를 만들려는 서양 제국주의[20]와 민족주의로써 저항하는 동방 민중들 간의 대립과 투쟁이 있던 시대에 마카오에서 공부했다. 마카오에서의 민중운동 때문에, 필리핀 롤롬보이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공부하기도 했다.[21]
2. 2. 2. 어려움
아편 전쟁으로 인한 민중 항쟁, 김대건 신학생의 허약한 체질[14], 서양과 동양의 전통이 다른 문화충격[15], 최방제 신학생의 위열병으로 인한 병사(1837년[16] 11월 26일에서 27일)[17], 조차지인 마카오를 통치하던 포르투갈 정부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불이익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정치가 불안해지면 피신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 지침에 따라 1839년 4월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으며[18], 1839년 5월 필리핀 롤롬보이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공부할 때에 안정된 환경과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들과 수사들의 친절 덕분에 몸과 마음의 건강이 좋아졌다.[19]2. 2. 3. 프랑스 함대 통역
1842년 2월 프랑스의 프리깃함 에리곤 호 함장 장 밥티스트 세실이 조선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선교부 소속 [https://web.archive.org/web/20180623061658/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822&keyword=%EB%A6%AC%EB%B8%8C%EC%99%80&gubun=01 리브와 신부]에게 통역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수태 교수는 프랑스가 조선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경제적인 이익을 꾀하려고 세실 함장이 조선을 방문하려 한 것으로 보았다.[22]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 리브와 신부는 세실이 이끄는 프랑스 함선이 조선을 방문한다면, 선교사들이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해로 입국은 2대 천주교 조선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들은 해로를 개척하면, 천주교가 국가 폭력으로 탄압받는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목회하다가 순교하더라도 꾸준히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학생이 라틴어로 대답하면, 선교사가 프랑스어로 옮길 수 있도록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가 에리곤 호에 올랐다. 프랑스 함선을 타고 조선에 돌아가는 여행길에 오른 김대건은 난징 조약 체결 현장 참관(1842년 8월 29일) 등의 경험으로써 견문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페레올 주교) [https://web.archive.org/web/20180724062713/http://www.paxkorea.kr/bbs/zboard.php?id=300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7 김대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글]을 읽어보면 난징 조약 체결 현장을 자세히 썼다. 하지만 1842년 9월 세실 함장이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갈 항해를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의 여행을 하지 못했다.[22] 1842년 2월 16일 이후,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조선에 돌아가려고 했던 김대건 신부의 경로는 필리핀 마닐라(小西洋)→중국 주산이다.(파리 외방전교회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글)[23]2. 2. 4. 조선 입국로 개척
1844년 조선 입국을 위해 애쓰던 페레올 주교는 용기와 열정이 남달랐던 김대건에게 훈춘에서 두만강을 건너 경원으로 입국하는 동북방 입국로의 이용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김대건은 1844년 2월에 출발하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4월에 돌아왔다.[14]2. 3. 사제 서품과 조선 입국
1845년 4월 30일, 김대건은 부제 때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이름 지은 배를 타고 천주교 신자 12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라파엘호는 서해에서 가라앉을 뻔 했지만, 김대건은 성모 마리아의 상본을 보여주며 평신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25] 예수회 고틀랑 신부는 김대건의 부탁으로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밤늦도록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었고, 김대건은 한국말을 모르는 고틀랑 신부를 위해 통역을 했다.1845년 8월 17일, 김대건은 상하이 진쟈샹(金家港,금가항)성당에서 세 번째 천주교 조선교구장[26]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서품이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서 조선 처음의 천주교 사제가 서품받았다"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8월 24일 상하이 횡당성당(상하이 예수회 소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1845년 8월 31일,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위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났다. 출항 3일 만에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현재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했다. 10월 1일 용수리 포구를 떠난 김대건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도착하여 조선에 입국했다.[27]
2. 4. 사목 활동과 순교
1845년 10월, 김대건은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사목 활동을 펼쳤다.[27] 당시 조선 교회는 기해박해로 지도자들이 순교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김대건은 신자들을 위로하고 외국 선교사 영입을 위해 노력했다.[27]가장 시급한 과제는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연락에 필요한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38]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발견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선교사 입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 연평도 부근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었다.[39] 체포된 김대건은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김대건은 옥중에서도 학식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고, 영국의 세계 지도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헌종에게 바치기도 했다.[39] 일부 대신들은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겨 구명 운동을 벌였으나, 권돈인 등의 반대로 9월 15일 참수형을 선고받았다.[39]
결국 1846년 9월 16일, 김대건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39]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순교 직전, 김대건은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40] 또한,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남겼다.
김대건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가, 천주교 신자 이민식에 의해 수습되어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가 치러졌다.[39]
2. 5. 순교 이후
김대건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현재 서울 노량진)에서 12명의 사형집행인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목이 군문에 걸려 효수되었다. 본래 양심수의 시체는 3일 이내 가족이 찾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김대건의 시체는 가매장되었다. 비밀리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김대건의 시신을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옮겼다.[41]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 안의 성당에 이장되었다.[41]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부르키나파소 쿠펠라대교구의 '성요셉성당' 제대에 안치될 예정이다. 필리핀 교황대사관 1등 참사관 까보레 몬시뇰은 과거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한국교회의 순교 역사와 순교 성인 공경에 감명을 받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돌 희년’을 맞아 유해를 부르키나파소의 성당에 봉안하고 싶다고 염수정 추기경에게 요청했다.[41]
3. 시성과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방문 중 정하상을 포함한 102명의 다른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김대건을 시성하였다. 안드레아 김대건,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들의 축일은 9월 20일이다.[3]
2022년에는 김대건의 삶을 묘사한 역사 드라마 《탄생》이 개봉되었다.[4]
3. 1. 시성
1857년 교황 비오 9세는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김대건을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김대건을 성인으로 시성하였다.[3]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을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3. 2.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2019년 11월 14일, 유네스코 총회는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하였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부합한다고 평가했다.[6] 충청남도 당진시는 2019년 6월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확보한 뒤 유네스코에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고,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19년 10월 17일 제207차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를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할 것을 권고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2012년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과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선정된 바 있다.[7]4. 평가와 유산
김대건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부르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배반하면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김대건의 영성은 그의 삶과 열정의 근원이었다.[42]
몸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아낸 것은 그의 강한 열정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마카오 신학교 선생들은 김대건이 천주교 사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했고,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의 건강 회복을 기대하며 프랑스 해군 생활을 권유하기도 했다. 프랑스어 통역을 할 때 독감에 걸리기도 했지만, 김대건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직자로서의 소명을 다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는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쿠펠라대교구의 '성요셉성당' 제대에 안치될 예정이다. 필리핀 교황대사관 1등 참사관 까보레 몬시뇰은 과거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한국 교회의 순교 역사와 순교 성인 공경에 감명을 받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돌 희년’을 맞아 유해를 부르키나파소의 성당에 봉안하고 싶다고 요청했다.[41]
1972년 5월 12일 절두산 순교성지에 김대건 신부 동상이 건립되었는데, 신동아그룹 최성모 창업주가 자금 전액을 헌납했다.[43]
2023년 9월 16일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세워졌다.[44]
김대건의 삶을 다룬 영화 ''탄생|탄생 (2022년 영화)한국어''이 2022년에 개봉되었다.[4]
가톨릭 신자들이 김대건을 세례명으로 사용할 경우, '대건 안드레아'가 된다.
4. 1. 영성과 열정
김대건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든 임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그분을 배반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는 것이 김대건의 영성이었다.[42]김대건은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마카오 신학교에 다니던 때에 선생들이 "김대건 신학생이 천주교 사제가 될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고, 페레올 주교는 "건강이 나쁜 김대건 신학생이 프랑스 해군에서 생활하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프랑스어 통역을 할 때에는 독감에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성직자로 살아내었음은 김대건이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4. 2. 유산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는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쿠펠라대교구의 '성요셉성당' 제대에 안치될 예정이다. 필리핀 교황대사관 1등 참사관 까보레 몬시뇰은 과거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한국 교회의 순교 역사와 순교 성인 공경에 감명을 받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돌 희년’을 맞아 유해를 부르키나파소의 성당에 봉안하고 싶다고 요청했다.[41]1972년 5월 12일 절두산 순교성지에 김대건 신부 동상이 건립되었는데, 신동아그룹 최성모 창업주가 자금 전액을 헌납했다.[43]
2023년 9월 16일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세워졌다.[44]
김대건의 삶을 다룬 영화 ''탄생|탄생 (2022년 영화)한국어''이 2022년에 개봉되었다.[4]
가톨릭 신자들이 김대건을 세례명으로 사용할 경우, '대건 안드레아'가 된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
증조부 | 복자 김진후 비오 | 1735년 | 1814년 |
증조모 | 숙부인 기계 유씨 | 1743년 | 1817년 |
종조부 | 김종현 | 1764년 | 1806년 |
종조모 | 진주 강씨 (김대건의 큰할머니) | 1761년 | 1814년 |
당숙부 | 김제광 | 1780년 | 1803년 |
당숙부 | 김제맹 | 1789년 | 1877년 |
조부 | 김택현 | 1766년 | 1830년 4월 9일 |
조모 | 이 멜라니아 (경주 이씨) | 1766년 | 1821년 9월 9일 |
백부 | 김제봉 | 1790년 | 1821년 9월 9일 |
백모 | 청송 심씨 | 1797년 | 1825년 |
종제 | 김근식 베드로 | 1827년 | 1869년 |
아버지 | 김제준 이냐시오 | 1795년 | 1839년 |
어머니 | 고 우르술라 (장흥 고씨) | 1798년 | 1864년 |
동생 | 김난식 프란치스코 | 1827년 | 1853년 |
숙부 | 김제철 | 1803년 | 1855년 4월 14일 |
숙모 | 숙부인 목천 마씨 | 1798년 | 1852년 12월 9일 |
종제 | 김의식 | 1823년 | 1874년 |
종제 | 김진식 베드로 | 1827년 | 1869년 |
종제 | 김족식 프란치스코 | 1833년 | 1968년 |
종조부 | 복자 김한현 안드레아 | 1768년 | 1816년 |
당숙부 | 김제덕 | 1794년 | 1845년 |
당고모 | 김제신 데레사 | 1796년 | 1840년 |
당고모부 | 손연욱 요셉 | 1793년 | 1817년 |
종조부 | 김희현 | 1785년 | 1827년 |
종조모 | 능성 구씨 | 1788년 | 1842년 |
당숙부 | 김제항 루드비코 | 1814년 | 1866년 |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서 2000년에 천주교 성인공파(天主敎 聖人公派)로 분파하였다. 천주교 순교자 김진후(金震厚, 보명: 운조(運祚))를 중시조로 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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