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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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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흠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손책, 손권 대에 걸쳐 활약했다. 그는 손책이 원술에게 의탁했을 때부터 측근으로 활동하며 강동 지역 평정에 기여했다. 적벽 대전과 소요진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관우를 공격하여 형주를 공략한 후 사망했다. 장흠은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서성과의 일화에서 보여주듯 사사로운 감정보다 공적인 업무를 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손권은 그를 국사로 칭찬했다. 그의 아들 장일은 유비와의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후사가 없었고, 다른 아들 장휴는 죄를 지어 쫓겨났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태와 함께 해적으로 등장하며, 다양한 전투에서 활약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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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흠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장흠
본관양주 구강군 수춘현
공혁 (公奕)
직책우호군 (右護軍)
작위도정후 (都亭侯)
군사 경력탕구장군 (盪寇將軍), 유수독 (濡須督)
주군손책손권
사망 연도219년/220년 초
사망 원인병사
가족 관계
아들장혁
장수
생애
초기 생애손책을 따라 종군
손권 섬김손권에게 중용됨
유수 방어조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
관우 토벌전여몽의 형주 침공에 참여, 귀환 중 병사

2. 생애

흥평 원년, 손책원술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부터 주태와 함께 손책의 측근으로 활약했다.[3][19] 흥평 2년, 손책이 강동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주태와 함께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는 세 현의 장을 역임하며 도적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했다.

건안 13년, 회계와 동야[25]에서 여합과 진랑 등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여대와 협력하여 이들을 토벌하고 사로잡아 다섯 개의 현을 평정했다. 토월중랑장(討越中郞長)이 되었고, 경구(經句)와 소양(昭陽)을 식읍으로 받았다. 하제가 이(黟)[26]의 반란을 토벌할 때에는 1만 명을 이끌고 도와 함께 평정했다.[24]

건안 13년, 주유의 지휘 하에 적벽 대전남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건안 20년, 합비 전투에서 손권이 장료의 기습을 받아 위급에 처하자, 분전하여 손권을 지켜내고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고, 유수독(濡須督)을 겸했다.[20] 이후 서울로 소환되어 우호군(右護軍)이 되었고, 송사 업무를 맡았다.

장흠은 부유했지만 절약하는 생활을 하여, 집안의 어머니와 처첩들은 모두 싼 옷을 입었다. 손권이 이를 알고 장흠을 칭찬하며 화려한 옷과 장식품들을 하사하였다.[24]

선성에 주둔하며 예장의 반란을 토벌할 무렵, 무호[26] 령(蕪湖令) 서성이 장흠이 있는 곳의 관리를 사로잡아 처벌하려 했으나, 손권은 장흠을 생각해 허락하지 않았다. 서성은 이 일로 장흠에게 원한을 샀다고 여겼다. 건안 22년, 조조가 유수구를 공격하자 여몽과 함께 군을 지휘했다. 서성은 장흠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 두려워했으나, 장흠은 오히려 서성을 칭찬하여 서성은 진심으로 장흠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24] 손권이 그 이유를 묻자, 장흠은 개인적인 원한을 앞세워 인재 등용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답하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27]

여몽과 함께 손권에게 학문의 필요성을 듣고 학문에 힘썼다. 훗날 손권은 여몽과 장흠을 칭찬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읽기에 힘써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숭상하여, 마땅히 행할 바를 하니 국사(國士)가 되었다고 했다.[28]

건안 24년, 형주를 두고 유비와 항쟁하던 손권은 형주 탈환 계획을 세우고 여몽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장흠은 이 전투에 참전하여 여몽의 계획대로 수군을 이끌고 면수 유역을 진격하여 승리했다.[21] 그러나 귀환 도중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 손권은 장흠의 죽음을 슬퍼하고, 무호의 백성 2백 호와 논 200acre을 장흠의 처자에게 하사했다.[12][24]

2. 1. 손책 시대

흥평(興平)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의 측근이 되었다.[3][19] 손책이 양쯔강을 건너 강남 지역을 정벌하기 시작했을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손책을 따라 단양(丹陽), 오(吳), 회계(會稽), 예장군(豫章郡)을 정벌하는 데 기여했다.[2] 이후 갈양위(葛陽尉)로 전임되어 세 개의 현을 관할했다. 재임 기간 동안 도적과 반란군을 격퇴하여 손권에 의해 서부도위(西部都尉)로 승진했다.[4][5]

여합과 진랑회계군의 다섯 동쪽 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흠은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여 다섯 현을 진압하고 두 반란 지도자를 생포했다. 이 공로로 토월중랑장(討越中郎將)으로 승진하여 경구(涇拘)와 소양(昭陽) 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하제를 도와 민강과 신도에서 현지인(黝縣)을 상대로 손씨 세력의 영향력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6][2][7]

2. 2. 손권 시대

흥평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부터 손책의 측근으로,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을 섬겼다.[19] 흥평 2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주태와 함께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는 세 현의 장을 역임하며 도적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했다. 건안 13년, 회계와 동야[25]에서 여합과 진랑 등 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여대와 협력하여 이들을 토벌하고 사로잡아 다섯 개의 현을 평정했다. 토월중랑장(討越中郞長)이 되었고, 경구(經句)와 소양(昭陽)을 식읍으로 받았다. 하제가 이(黟)[26]의 반란을 토벌할 때에는 1만 명을 이끌고 도와 함께 평정했다.[24]

건안 13년, 주유(周瑜)의 지휘 하에 적벽 대전남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건안 20년, 손권이 합비(合肥)를 공격하였다가 진북(津北)에서 장료의 기습을 받아 위급에 처하자, 분전하여 손권을 지켜내었다.(합비 전투)[20]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고, 유수독(濡須督)을 겸했다. 이후 서울로 소환되어 우호군(右護軍)이 되었고, 송사 업무를 맡았다.

장흠은 비록 부귀했으나 절검하여, 집안의 어머니와 처첩들은 모두 싼 옷을 입었다. 손권이 장흠의 집을 찾아가 이를 알고는 장흠을 칭찬하며 화려한 옷과 장식품들을 하사하였다.[24]

당초 선성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예장의 반란을 토벌하고 있을 무렵, 무호[26] 령(蕪湖令) 서성이 장흠이 있는 곳의 관리를 사로잡아 표를 올려 그의 목을 베기를 청했으나, 손권은 장흠이 없으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서성은 이 일 때문에 장흠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여겼다. 건안 22년, 조조가 10만 명 이상의 군세로 유수구를 공격하자[20] 여몽과 함께 여러 군을 총지휘했다. 서성은 이전의 일 때문에 자신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했으나, 장흠은 오히려 항상 서성이 잘 했다고 칭찬하여 서성은 마음으로 장흠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이 일로 칭찬을 받았다.[24] 손권에게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개인적인 원한을 앞세워 천거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답하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27] 후에 유수를 지키는 공적을 세우고, 이 공으로 우호군에 임명되어 도읍으로 소환되어 소송 사무도 담당했다.

여몽과 함께 손권에게 학문의 필요성을 듣고 면학에 힘썼다. 훗날 손권은 여몽과 장흠을 칭찬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읽기에 힘써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숭상하여 마땅히 행할 바를 하니 국사(國士)가 되었다고 했다.[28] 214년에서 215년 사이에 소요진 전투에 참전하여, 손권과 함께 소요진에서 장료의 공격을 받았을 때 용감하게 싸웠고, 탕구장군(盪寇將軍중국어)으로 승진했다. 조조에 맞선 217년의 유수 전투에서 여몽과 함께 해군을 지휘하며 공동 지휘를 맡았지만, 폭풍으로 피해를 입어 동희를 잃었고, 조조는 물러났다.[9] 이후 오나라 수도로 소환되어 우호군(右護軍중국어)으로 임명되어 군대 규율을 책임지게 되었다.[10]

건안 24년, 형주를 두고 유비와 항쟁하고 있던 손권은 형주를 탈환할 계획을 세우고, 여몽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관우를 공격하여 형주(荊州)를 공략한 후, 귀환 도중 병사하였다. 장흠은 이 전투에 참전하여 여몽의 계획대로 수군을 이끌고 면수 유역을 진격하여 승리했다.[21] 그러나 귀환 도중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 손권은 장흠의 죽음을 슬퍼하고, 무호의 백성 2백 호와 논 200acre을 장흠의 처자에게 하사했다.[12][24] 손권은 장흠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직접 상복을 입었다. 라페 드 크레스피니(Rafe de Crespigny)는 장흠이 해군 전문가였으며 손권에게 상당한 손실이었다고 언급한다.[13]

3. 일화 및 평가

장흠은 공적을 쌓아 승진했음에도 오만해지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어머니와 아내에게도 소박한 의복과 장신구를 사용하게 했다. 손권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호화로운 장식이 된 의복과 장신구를 보내주었다.[22]

총명했지만 교양은 부족했기에, 여몽과 함께 손권으로부터 학문에 힘쓰도록 권유받았다. 이 때문에 필사적으로 서적을 읽고 공부하여, 여몽과 함께 손권에게 "그 행실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며, 국사이다"라는 칭찬을 받았다.[22]

손권이 장흠에게 서성을 추천한 이유를 묻자, 장흠은 "신은, 공의 천거에는 사사로운 원한을 섞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서성은 진심으로 직무에 힘쓰고, 담략으로 앞을 내다보며, 그릇도 갖추고 있어, 만 명의 병사를 지휘하기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지금 통일이라는 대사도 아직 미완성이니, 신에게는 국가를 위해 재능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찌 사사로운 원한에 이끌려 유능한 인재를 숨겨두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손권은 이 말을 기뻐했고, 서성은 장흠의 덕에 마음으로 복종했으며, 사람들의 풍평도 장흠을 칭찬했다.

3. 1. 검소한 생활

손권은 한때 장흠의 집을 방문했는데, 장흠의 어머니가 얇은 침대 커튼과 솜 이불만을 사용하고, 장흠의 아내와 첩들은 간단한 옷감으로 만든 옷만 입는 것을 보았다. 손권은 장흠의 검소함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장흠의 어머니를 위해 비단 이불을 만들고, 커튼을 더 좋은 것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장흠의 아내와 첩들 또한 비단과 자수 옷을 받았다.[14] 공적을 쌓아 승진했음에도 오만해지는 일이 없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어머니와 아내에게도 소박한 의복과 장신구를 사용하게 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손권은 즉시 명령하여 호화로운 장식이 된 의복과 장신구를 보내주었다.

3. 2. 서성과의 관계

장흠이 선성현에 주둔하며 예장군에서 반란군과 싸우고 있을 때, 당시 호호의 현령이었던 서성은 장흠의 부하 장교를 체포하고 손권에게 그 장교를 처형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장흠은 그 당시 부재 중이었고, 손권은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 후 서성은 장흠과 사이가 벌어졌다.[15]

이후, 217년 濡須 전투에서 장흠과 여몽은 군 기율을 담당하게 되었다. 서성은 장흠이 자신에게 트집을 잡을까 봐 끊임없이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장흠은 그를 칭찬했고, 서성은 장흠의 덕망있는 행동에 매우 감명받았다. 이 사건 이후 장흠의 평판은 더욱 높아졌다.[15]

손권은 나중에 장흠에게 "서성이 전에 그대를 불쾌하게 했는데, 지금은 그를 칭찬하는군요. 당신은 기해(祁奚)를 본받고 싶어하는 거요?"라고 물었다. 장흠은 "저는 사적인 원한이 공적인 업무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서성은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용기와 재능을 모두 갖추고 있고, 수천의 병력을 이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 큰 과업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사적인 문제로 제 판단을 흐리게 하는 대신 나라를 위해 봉사할 인재를 발굴하고 추천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손권은 매우 기뻐했다.[16]

3. 3. 학문에 대한 열정

장흠은 총명했지만 교양은 부족했기에, 여몽과 함께 손권으로부터 학문에 힘쓰도록 권유받았다. 이 때문에 필사적으로 서적을 읽고 공부하여, 여몽과 함께 손권에게 "그 행실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며, 국사이다"라는 칭찬을 받았다[22]

손권이 장흠에게 "서성은 일찍이 당신의 흠을 들추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신은 이제 서성을 추천하는군. 기해[23]의 고사에 따르려는 건가?"라고 묻자, 장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은, 공의 천거에는 사사로운 원한을 섞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서성은 진심으로 직무에 힘쓰고, 담략으로 앞을 내다보며, 그릇도 갖추고 있어, 만 명의 병사를 지휘하기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지금 통일이라는 대사도 아직 미완성이니, 신에게는 국가를 위해 재능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찌 사사로운 원한에 이끌려 유능한 인재를 숨겨두겠습니까?" 손권은 이 말을 기뻐했다. 서성은 장흠의 덕에 마음으로 복종했고, 사람들의 풍평도 장흠을 칭찬했다.

4. 가족 관계

蔣壹|장일중국어은 장흠의 아들로 선성후에 봉해졌고, 유비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남군에서 위나라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들이 없었다.[24]

蔣休|장휴중국어는 장흠의 아들로, 형 장일의 사후 형의 병사를 거느렸으나 죄를 지어 쫓겨났다.[24]

5. 《삼국지연의》에서의 장흠

주태와 함께 해적으로 등장하였다. 195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하였을 때 주태와 함께 장영을 물리치고 손책의 부하가 되었다.[4]

208년 주유의 지휘하에서 적벽 대전, 남군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219년에는 관우를 공격해 승리하였고 관우에게 항복을 권하기도 하였다.[4]

이릉 대전 직전에 죽었다고 언급되어 있다.[4] 손책이 유요와 싸울 때 처음 등장한다. 주태와 함께 손책이 재능 있는 인재를 중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300명의 지지자를 모아 장영의 진영에 불을 질러 유요를 후퇴시키고, 선봉 부대의 지휘관 역할을 맡는다.[5] 엄백호를 상대로, 엄유가 중요한 다리를 지키고 있을 때, 진무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강둑의 수비병에게 불을 질러 공격한 다음 칼을 들고 돌격하여 수비병을 물러서게 한다.[5] 적벽 전투에 참여하여 주유의 해군 부대 우익 부대를 지휘했다.[5] 강릉 전투에서 선봉 부대를 이끌겠다고 자원했지만, 조인우금이 함정에서 탈출하는 것을 막지 못해 처형당할 뻔했다.[5] 유비와 그의 새로운 아내 손부인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가공의 시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다른 손씨 장교들을 추격하도록 압박했지만, 제갈량이 때맞춰 나타나 그들을 저지했다.[5]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본래 주태와 함께 해적질을 하다가, 유요와 싸운 손견의 아들인 손책의 군에 참여하여, 유요가 손책에게 패배하고, 유요의 부하인 진횡은 장흠에게 활에 맞아 죽었다.[6] 강동 평정전에서 활약하게 된다.[6] 정사와는 달리, 적벽대전이나 그 후의 남군 전투에도 참가하지만, 남군에서는 조인우금에게 대패하여, 주유에게 참수당할 뻔한다(정사에서는 장흠은 적벽대전이나 남군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제와 함께 섭현(歙縣)과 의현(黟縣)의 토벌에 나서 대규모 반란을 평정했다).[6] 유비손부인과의 혼인을 위해 오(吳)를 방문했을 때, 장소의 추천으로 손부인과 도주한 유비를 추격하는 임무를 주태와 함께 맡아, 따르지 않으면 부부 모두 참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는다.[6] 관우 토벌전에 참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에서 모습을 감추고,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나 보고도 없다.[6]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Generals Of The South: The Foundation And Early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tate Of Wu
[6] 서적 Sanguozhi
[7] 서적 Generals Of The South: The Foundation And Early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tate Of Wu
[8] 서적 Sanguozhi
[9] 서적 Generals Of The South: The Foundation And Early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tate Of Wu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Generals Of The South: The Foundation And Early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tate Of Wu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Generals Of The South: The Foundation And Early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tate Of Wu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Jiang Biao Zhuan
[17] 서적 Sanguozhi
[18] 문서 蒋欽
[19] 서적 三国志
[20] 서적 강표전
[21] 서적 삼국지
[22] 서적 삼국지
[23] 서적 춘추좌씨전
[24] 서적 삼국지
[25] 문서 회계군
[26] 문서 단양군
[27] 서적 강표전
[28] 서적 강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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