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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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우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유비,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촉나라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는 하동군 해현 출신으로, 고대 역사서에 능통했으며 유비가 거병하자 장비와 함께 따랐다. 관우는 유비 휘하에서 용맹함을 떨쳐 '만인지적'으로 불렸으며, 조조 휘하에 잠시 몸담기도 했으나 유비에게 돌아갔다. 적벽대전 이후 형주를 지키며 손권 세력과 대립했으나, 결국 여몽의 계략에 빠져 사망했다. 관우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도교에서 신격화되었으며, 무묘에 모셔져 숭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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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평은 후한 말 인물로, 정사에는 관우와 함께 처형된 기록만 존재하나,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양자로 유봉과 함께 활약하며, 후대에는 관제묘에서 관우의 수신으로 숭배받고 대중문화 작품에도 등장한다.
관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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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관우 |
원어 이름 | '' |
로마자 표기 | Guān Yǔ |
자 | 운장 (雲長) |
출생지 | '후한 하동군 해현 (현재의 산시성 윈청시 )' |
사망일 | 220년 1월 또는 2월 |
사망지 | '후한 형주 양양군 임저현 (현재의 후베이성 샹양시 난장현)' |
직업 | 장군 |
배우자 | 영황후 |
자녀 | '관평' '관흥' '관은병' '관색' |
부친 | 관의 |
모친 | 성충왕부인 |
종교 | 유교 |
가문 | 관씨 |
별칭 | '미염공' |
기타 호칭 | 관이(關二爺, '관씨 둘째') 관이거(關二哥, '관씨 둘째 형') 미염공(美髯公,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남자') 장생(長生) 수창(壽長) |
관직 | |
봉직 시기 | 219년 |
직책 | 전장군 |
임명권자 | '유비 (한중왕)' '헌제' |
이전 직책 (유비 휘하) | '탕구장군' |
이전 직책 임명 시기 | 211년경 |
이전 직책 (유비 휘하) | '양양태수' |
이전 직책 임명 시기 | 211년경 |
이전 직책 | 편장군 |
이전 직책 임명 시기 | 200년경 |
봉작 | 한수정후 |
사후 정보 | |
시호 | 장목후 |
추가 시호 | 충의후 |
신격화 명칭 | 관제 (關帝, '관 황제') 관공 (關公, '관 공') 관성제군 (關聖帝君, '성스러운 지배자 관') 가람보살 (伽藍菩薩) |
기타 | |
묘호 | 없음 |
혼명 | 髯, 미염공 |
신호 | 협천대제관성제군 가람보살 문형성제 |
주요 인물 | 유비 |
특이 사항 | '삼국지 정사에 따르면 키는 9척' |
2. 생애
관우는 사례 하동군 해현(解縣) 출신으로, 본래 자(字)는 장생(長生)이었다.[4] 그는 고대 역사서인 《좌전》을 즐겨 읽어 내용을 유창하게 암송할 정도였다.[5][6]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1] 유주(幽州) 탁군(涿郡)으로 갔다.
180년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장비와 함께 유비가 조직한 의용군에 참여하여 조경(鄒靖)을 도와 반란을 진압하였다.[7][8] 유비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었을 때 관우와 장비는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유비 휘하의 부대를 지휘했다. 유비는 그들을 친형제처럼 아꼈고, 세 사람은 같은 방에서 자고, 같은 자리에서 먹으며 형제처럼 지냈다.[10]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원소에게 도망치자,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에 임명하며 후하게 대접했지만, 관우는 유비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112] 조조가 장료를 보내 관우의 마음을 떠보았을 때, 관우는 조조의 후의는 감사하나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세했기에 떠날 것이며, 반드시 공을 세워 은혜를 갚겠다고 답했다.[112]
저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소는 안량에게 곽도, 순우경과 함께 조조 휘하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게 했다.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보내 맞섰고, 관우는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었다.[112] 원소의 장수들 중 누구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112]
관우가 안량을 죽이고 백마를 포위에서 해방시킨 후, 조조는 그가 곧 떠날 것을 알고 더욱 큰 상을 내렸다. 관우는 조조에게서 받은 모든 선물을 봉하고 작별 편지를 쓴 후 유비를 찾아 원소의 영토로 향했다. 조조의 신하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했지만, 조조는 "그는 그저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뿐이다. 추격할 필요 없다."라며 막았다.[24]
200년 관도 대전에서 조조와 원소가 충돌했을 때, 원소는 유비를 여남군(汝南)에 있는 황건적 두목 유벽(劉辟)에게 보내 조조가 관도에 있는 동안 유벽을 돕고 황궁인 허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이 무렵 유비와 재회했다.
208년 유비가 손권과 동맹을 맺고 적벽 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찌르자, 유비는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蕩寇將軍)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했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떠나면서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를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30]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했다. 그러나 관우는 이들을 쫓아냈고, 이에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게 했다. 이로 인해 관우는 익양에서 여몽과 대치하게 되었다. 얼마 후 관우와 노숙의 담판이 이루어졌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하여 3군을 반환하였다.
서량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 관우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능력을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헤아려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지만, 미염공(美髯公)인 당신만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관우는 이 편지에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114] 그 사이 손권은 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냈고, 여몽은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결국 관우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이것은 손권으로 하여금 관우를 토벌할 이유를 제공했으며,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115]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 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 사마 조루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유비는 관우를 장목후(壯繆侯)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2. 1. 초기 생애
사례 하동군 해현(解縣) 사람이다. 解縣|해현중국어은 현재의 산시성 운성에 해당한다. 본래 자(字)는 장생(長生)이었다.[4] 그는 고대 역사서인 《좌전》에 관심이 많아 내용을 유창하게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학구적이었다.[5][6]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1] 유주(幽州) 탁군(涿郡)으로 갔다.180년대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장비와 함께 유비가 조직한 의용군에 참여하여, 조경(鄒靖)을 도와 반란을 진압하였다.[7][8] 관우와 장비는 용맹하고 강인한 인물로 알려져 뛰어난 무장으로 인정받았다.[9]
유비가 평원상(平原相)에 임명되었을 때, 관우와 장비는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유비 휘하의 부대를 지휘하였다. 유비는 그들을 친형제처럼 아꼈고, 세 사람은 같은 방에서 자고, 같은 자리에서 먹으며 형제처럼 가까웠다.[10] 장비와 관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유비를 보호했고, 회의 중에도 늘 곁에서 시중들었다. 그들은 유비를 따라 전장을 누비며 어떤 위험과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다.[11]
2. 2. 유비와의 만남과 초기 활동
유비가 황건적의 난 진압을 위해 탁군에서 의병을 모집할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유비의 호위를 맡았다. 간옹, 전예 등과 함께 유비를 따라 여러 지역을 전전했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지내며 형제처럼 지냈으나, 관우와 장비는 공식 석상에서는 항상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고 섬겼다.[10][11] 유비가 공손찬 휘하에서 평원상(平原相)이 되었을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어 군대를 지휘했다.[82]
관우는 병사들에게는 친절하고 유비에게는 가족과 같은 충성심을 보였지만, 관리들에게는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13][14][15]
삼국지 촉서에는 관우가 조조를 죽일 것을 유비에게 권했으나 유비가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송지는 이에 대해 주석을 달아, 유비가 조조를 죽일 기회를 기다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60][61]
2. 3. 조조와의 짧은 만남과 백마 전투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원소에게 도망치자,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에 임명하며 후하게 대접했지만, 관우는 유비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112]조조가 장료를 보내 관우의 마음을 떠보았을 때, 관우는 조조의 후의는 감사하나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세했기에 떠날 것이며, 반드시 공을 세워 은혜를 갚겠다고 답했다.[112]
저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소는 안량에게 곽도, 순우경과 함께 조조 휘하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게 했다.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보내 맞섰고, 관우는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었다.[112] 원소의 장수들 중 누구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112]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에게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났고,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거라”라고 하며 관우를 보내주었다.[112]
관우는 조조를 떠나면서, "조공의 후의는 감사하나 유비 장군을 배신할 수 없다"고 탄식했다.[112]
2. 4. 유비에게 돌아가다
조조는 관우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가 오랫동안 자신 밑에서 섬기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조조는 장료에게 관우의 뜻을 알아보라고 말했고, 장료가 묻자 관우는 조조의 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유비에 대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결국 떠날 것이라고 답했다. 장료는 조조에게 이를 전했고, 조조는 관우에게 더욱 감탄했다.[22] 부자는 장료가 조조에게 관우의 뜻을 전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알리기로 결정했고, 조조는 관우의 의로움을 칭찬하며 그가 언제 떠날지 물었다는 다른 기록을 남겼다.[23]관우가 연량을 죽이고 백마를 포위에서 해방시킨 후, 조조는 그가 곧 떠날 것을 알고 더욱 큰 상을 내렸다. 관우는 조조에게서 받은 모든 선물을 봉하고 작별 편지를 쓴 후 유비를 찾아 원소의 영토로 향했다. 조조의 신하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했지만, 조조는 "그는 그저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뿐이다. 추격할 필요 없다."라며 막았다.[24]
배송지는 이에 대해 조조가 관우의 인품을 존경하여 그가 유비에게 충의를 다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위대한 군웅다운 관용을 베푼 것이라고 평가했다.[25]
200년 관도 대전에서 조조와 원소가 충돌했을 때, 원소는 유비를 여남군(汝南)에 있는 황건적 두목 유벽(劉辟)에게 보내 조조가 관도에 있는 동안 유벽을 돕고 황궁인 허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이 무렵 유비와 재회했다. 유비와 유벽은 조조의 장군 조인에게 패배했고, 그 후 유비는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몰래 원소를 떠날 계획을 세웠고, 원소에게 형주 자사 유표와 동맹을 맺도록 설득하는 척했다.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있는 또 다른 반란군 지도자 공도(共都/龔都)에게 보냈고, 그곳에서 그들은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았다.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를 결정적으로 승리한 후 돌아와 여남을 공격했다.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쳐 유표의 보호를 받았고, 유표는 그를 형주 북쪽 국경의 신야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관우는 유비를 따라 신야로 갔다.[26][27]
2. 5. 적벽대전과 형주 수비
208년 유비가 손권과 동맹을 맺고 적벽 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찌르자, 유비는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蕩寇將軍)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했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떠나면서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를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30] 그러나 익주에서 유비의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유비가 궁지에 몰리자, 제갈량마저 익주로 구원을 가면서 관우는 홀로 형주에 남게 되었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어 3만의 군사로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34]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했다. 그러나 관우는 이들을 쫓아냈고, 이에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게 했다. 이로 인해 관우는 익양에서 여몽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감녕은 300여 명의 병력으로 관우와 대치하였는데, 노숙이 추가로 1천여 명의 병력을 지원해 주었다. 관우는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땔나무로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를 관우뢰(關羽瀨)라고 불렀다.[113]
얼마 후 관우와 노숙의 담판이 이루어졌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하여 3군을 반환하였다.
서량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 관우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능력을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헤아려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지만, 미염공(美髯公)인 당신만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관우는 이 편지에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관우는 왼쪽 팔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상처가 아문 후에도 비가 오면 뼈가 쑤시는 통증을 느꼈다. 의원이 진찰한 결과, 화살촉의 독이 뼈에 스며들어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관우는 절개 수술 중에도 연회를 열고 마량과 바둑을 두며 태연하게 담소를 나누었고, 쏟아지는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2. 6. 번성 전투와 최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114] 이 사건으로 우금이 조조에게 비난을 듣는다. ("그대는 누구시오? 40년 동안 날 따른 사람은 아니겠지? 난 방덕은 아오만 그대는 모른다네, 어찌 목숨이 아까워 주인을 버린단 말이냐?") 그 사이 손권은 형주를 손에 넣을 기회로 보고 조조에게 관우를 치겠다는 사자를 보냈고, 여몽은 병에 걸렸다며 형주로부터 소환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이때 관우는 우금을 생포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금과 그 부하들이 먹는 식량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우금의 부하들이 먹어치우는 군량 때문에 관우의 군량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관우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군을 번성으로 동원하고 손권의 영토인 상관(湘關)의 군량을 털었다. 이것은 손권으로 하여금 관우를 토벌할 이유를 제공했으며, 마침내 손권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관우의 배후를 쳤다.[115]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 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 사마 조루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목후(壯繆侯)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 관이 등 관흥의 후손들은 방덕의 아들이자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모두 잡혀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 지역에서 계속 살았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었던 것이다.[116]
3.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고 설정되어 있으며,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반동탁 연합군이 낙양에서 동탁과 전투를 벌일 때 유비의 휘하에 있던 관우는 조조의 허락을 받아 사수관에서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죽였다.[117] 이후 호뢰관에서 유비, 장비와 함께 여포를 상대하여 활약을 이어간다. 관우는 관해의 침략을 받은 공융을 구해달라는 태사자의 요청에 유비와 함께 참전, 관해를 죽이고 북해를 구한다.
조조와 유비가 허도에서 사냥을 나갔을 때 헌제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자 관우는 분노하여 조조를 죽이고자 했으나 유비가 만류하여 실행하지 못한다.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를 맡아 지킨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을 지키기 위해 조조에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건 후 항복한다.
이후 조조를 위해 원소군의 안량과 문추를 죽이는 공을 세운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조조군의 5개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하는데 이 장면은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 불린다.
유비와 손권이 조조에 맞서 연합군을 형성했을 때 관우는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유비가 형주를 평정할 때 관우는 장사를 공격하여 태수 한현 수하에 있던 황충과 맞서 싸운다. 이후 위연의 도움으로 장사를 점령하게 된다. 관우는 유비가 촉을 공격하는 동안 형주를 맡아 지키게 된다. 유비가 한중을 취하자 군사를 일으켜 번성의 조인을 공격하였고, 조인을 구원하러 온 우금과 방덕을 장맛비를 이용한 수공으로 생포한다. 그리고 방덕은 참수된다.
방덕과의 대결에서 방덕이 쏜 활에 맞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명의 화타의 도움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둔다. 이후, 손권군의 여몽의 급습에 의해 본거지인 형주를 빼앗기고 심리전에 의해 군사가 와해되어 맥성(麥城)으로 후퇴한 관우는 요화를 상용(止庸)의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이후 동오의 제갈근이 찾아온다. 제갈근은 손권에게 항복하여 함께 일하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이를 뿌리친다. 이후 관우는 조루의 건의에 따라 북문의 포위를 뚫고 익주(益州)로 가기로 한다. 그날 밤, 관우는 양자 관평, 조루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곳곳에 매복된 오군의 공격을 받아 조루는 난전 중에 죽는다. 그 후, 관우는 미리 매복하고 있던 반장의 부하 마충에게 사로잡히고 뒤따르던 관평 또한 반장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관우는 손권에게 끌려가 항복을 권유받으나 "옥은 깰 수 있으나 그 흰빛을 바꿀 수 없고, 대나무는 태울 수 있으나 그 곧음을 꺾을 수 없소이다"라고 하며 죽기를 원하였고 결국 관우와 관평은 참수된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는다. 손권은 관우를 벤 것에 대한 유비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키가 9척(약 2m7cm[117]), 수염 길이가 2자[118](약 46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286k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며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정사 삼국지와 중국 남북조 양나라 때 쓰여진 고금도검록이라는 서적 등을 참고하자면 관우의 무기는 언월도가 아닌 그냥 일반 칼, 대도, 삭, 모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연의에는 조조가 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적토마의 행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했을 때 오래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역사 기록에는 관우의 외모에 대한 명확한 묘사가 없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관우를 두고 "비할 데 없는 수염"을 가졌다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
전통적으로 관우는 붉은 얼굴에 길고 무성한 수염을 가진 장수로 묘사된다. 붉은 얼굴이라는 이미지는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1장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2]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는 관우를 의로운 충신 장수로 묘사하며 그를 미화한다. 관우는 소설에서 가장 많이 각색되고 과장된 인물 중 하나이며, 이는 중국 사회에서 그가 가지는 인기 있는 이미지의 이유가 된다.
다음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우와 관련된 허구적인 이야기들이다.
- 도원결의
- 낙양 관문 전투
-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 목록#관우의 세 가지 조건
-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 목록#관우가 연량과 문추를 죽임
-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 목록#관우의 오관참육장
-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 목록#관우가 구성에서 채양을 죽임
-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 목록#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줌
- 손유의 영토 분쟁#삼국지연의에서
-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 목록#화타가 관우의 팔을 치료함
- 여몽#삼국지연의에서
- 삼국지연의의 허구적 이야기 목록#관우 사후의 사건
4. 평가
삼국지 정사 저자 진수와 조조군의 참모였던 곽가, 정욱 등은 관우를 장비와 더불어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라 평하였고, 주유나 유엽 같은 당대 명사들 역시 그의 남다른 용맹을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 정사에서는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장수들 간의 일대일 대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관우가 안량을 무찌른 싸움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69]
역사 기록에는 관우의 외모에 대한 명확한 묘사가 없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관우를 두고 "비할 데 없는 수염"을 가졌다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 전통적으로 관우는 붉은 얼굴에 길고 무성한 수염을 가진 장수로 묘사된다. 붉은 얼굴이라는 이미지는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1장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2]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붉은 얼굴이 충절과 정의를 상징하는 경극의 표현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삼국지연의》 삽화에서 관우는 전통적으로 갑옷 위에 녹색 도포를 입고 묘사된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의 무기는 청룡언월도라는 관도였는데, 극장병기와 비슷했고 무게가 82근(약 49kg)이라고 전해진다.[3]
진수(陳壽)의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따르면, 관우는 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성격적 단점은 결국 그의 패망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된다.[41]
관우가 죽은 후 당나라 이전 약 400년 동안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인기가 높지 않았다. 육조 시대의 여러 소설에서 삼국 시대 인물들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관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당나라 때 시문에 등장하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찬미에 그쳤다. 경주 지역에서는 원한을 품은 귀신 전설의 일종으로 “관삼랑” 혹은 “관요”라는 이름으로 기록 소설에 등장하기도 했다.[103] 하지만 송나라가 되면서 정치적 이유와 서민 문화의 번성에 따라 인기가 점차 상승했고, 원나라에서는 수많은 잡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명청나라 시대에는 더욱 미화되고 신격화되었으며, 청나라에서는 “관성대제”로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도교에서는 육조 시대의 신격화된 인간 목록에 조조와 유비는 있지만, 관우는 없다. 북송 시대 기록에는 장천사가 관우를 부르는 이야기가 있으며, 명나라 초기에는 “관원수”라고 기록되어 상당한 지위 향상이 있었다. 그 후 “협천대제관성제군”으로 신격화되었다. 불교에서는 당나라 시대 기록에 지의 선사의 원에 관우가 나타나 승방을 제공하고 수호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남송 시대에는 관우의 영이 불법에 귀의하여 “가람신(가람보살)”에 봉해졌다고 한다. 현재는 “관제보살”이라고도 불린다. 유교에서는 오문창 중 한 명인 “문형성제”로 여겨지며, “산서부자”라고 불린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특정 개인에게 충성을 다한 관우는 통치자 입장에서 칭찬할 만한 인물이었다. 북송 휘종 황제는 관우에게 “무안왕” 등의 작호를 내렸고, 이후 여러 왕조에서 잇달아 추증했다. 청나라는 관우 신앙을 만주와 몽골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현에 반드시 공자를 모시는 문묘와 관우를 모시는 무묘를 세웠다.
민중의 인기도 높아 각지의 차이나타운에는 관제묘가 세워져 있으며, 일본에서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과 고베 난킨마치의 관제묘가 유명하다. 민간 전승에서는 옥황상제에 비견되는 “좌옥황”으로 여겨지며, “관은주”라고도 존칭된다.
경극에서 관우 역은 “홍생”이라 불리며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데, 충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얼굴을 칠한다. 다만, 신으로 숭배받는 관우를 모방하는 것이기에, 완벽한 분장을 피하는 전통이 있다.
에도 시대 초기 한시에서는 제갈량과 함께 “지극한 충성심을 지닌 열신”으로 칭송받았다. 가부키에는 “관우”라는 연목이 있다.
4. 1. 긍정적 평가
- 정욱은 "관우와 장비는 모두 1만 명을 상대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69]
- 곽가는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 만 명에 필적할 만한 인물)으로 유비를 위하여 사력을 다한다"라고 평했다.
- 주유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라 평하며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유엽은 "관우와 장비는 삼군(三軍)을 뒤덮을 만한 용맹"을 지녔다고 평했으며, 관우가 죽은 이후에는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명장(名將)으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비와 관우의 관계에 대해서는 "도의상으로는 군신(君臣) 관계지만, 은혜는 마치 부자(父子)의 관계"라고 말했다.
- 마초가 유비의 휘하에 처음 들어왔을 때, 관우는 제갈량에게 마초에 대해 물었다. 이에 제갈량은 마초에 대해 "문무를 겸비한 천하의 재원이지만 관공보다는 못한 장수"라고 답장을 보냈고, 관우는 제갈량의 답장을 빈객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 여몽은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 온회는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 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배잠은 "관우는 효예(驍銳)하여 유리한 형세로 진군하면 장래의 위험이 된다"고 평하였다.
삼국지 정사 저자 진수와 조조군의 참모였던 곽가, 정욱 등은 관우를 장비와 더불어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라 평하였고, 주유나 유엽 같은 당대 명사들 역시 그의 남다른 용맹을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 정사에서는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장수들 간의 일대일 대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관우가 안량을 무찌른 싸움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관우의 일대기를 ''삼국지''에 기록한 진수(陳壽)는 "관우와 장비는 만인의 적(萬人敵)이라 칭송받는 용맹한 무장이었다. 그들은 유비의 신하들 중 호랑이와 같았다. 관우와 장비는 모두 국사(國士)의 풍모를 지녔다. 관우는 조조의 은혜에 보답하였고 장비는 의로움으로 연연(연씨)(三國)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관우는 엄격하고 자만심이 강했으며 장비는 잔인하고 무정하였다. 이러한 단점들이 그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라고 평했다.[69]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黄趙傳)의 마지막에 관우와 장비 두 사람에 대한 평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정욱은 “관우와 장비의 무용은 만 명의 군사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삼국지』위지 “정욱전”).
곽가 역시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 명의 군사에 필적한다고 하며, 유비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일한다고 평했다(『부자』).
동조는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날개와 같으며 두려워해야 한다고 평가했다(『삼국지』위지 “동조전”).
장무 원년(221년), 유비가 오나라에 보복할 것인가를 조비(문제)가 신하들에게 물었을 때, 신하들은 “촉은 작은 나라이고, 명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관우 한 사람뿐이었습니다(그 관우마저 경주를 잃었으니, 촉에는 싸울 힘이 없으므로 보복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삼국지』위지 “유엽전”). 또한 같은 유엽전에는 “용맹함으로 삼군을 능가하는 장수이다”라고도 적혀 있다.
『부자』에는 장비와 함께 그 무용과 의는 천하에 알려져 있으며, 제갈량과 함께 인재로서 이 세 사람이 유비를 돕고 있으니 촉을 평정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적혀 있다.
주유는 관우와 장비를 함께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라고 하며, 유비로부터 떼어내 자신이 사용한다면 큰 일을 이룰 수도 있다고 했다(『삼국지』오지 “주유전”).
여몽은 관우는 용맹하여 적대하기 어렵고, 경주를 다스리며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육손에게 말했다(『삼국지』오지 “육손전”).
원준은 장비와 함께 유비를 보필하는 심복 무장이라고 했다(『원자』).
반면, 요립은 “(경주를 공격함에 있어) 자신의 용맹을 믿고 돌격하여, 앞뒤 전투(번성·이릉)에서 여러 번 군사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4. 2. 부정적 평가
진수(陳壽)의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 따르면, 관우는 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성격적 단점은 결국 그의 패망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된다.[69][102]《삼국지》 〈오서 여몽전〉에서는 관우가 성정이 포악하고 호승심이 매우 강하여 동맹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빨리 죽여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41] 요립은 관우가 자신의 용맹만을 믿고 돌격하여 번성, 이릉 전투에서 여러 번 군사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관우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군사적 판단과 대인 관계에서의 약점을 지적한다.
4. 3. 진보적 관점에서의 재평가
관우는 촉한의 장수로, 정사 『삼국지』에서는 장비와 함께 "만인지적(萬人之敵, 만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으며, "세상의 호랑이 같은 신하(虎臣)"였다고 평가받는다.[102] 관우는 안량을 죽여 조조에게 보답하고, 장비는 엄안을 의롭게 풀어주는 등, "나라의 어진 인재(國士)의 기풍"을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관우는 강직하고 자부심이 강했으며,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를 베풀 줄 몰랐기에, 결국 자신의 단점으로 인해 몰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02]정욱은 "관우와 장비의 무용은 만 명의 군사에 해당한다"고 평가했고, 곽가 역시 장비와 관우를 "만인지적"이라 칭하며, 유비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일한다고 평가했다. 동조는 관우와 장비를 유비의 날개와 같다고 평가하며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다.
유엽은 관우 사후 조비에게 올린 상소에서 "촉은 작은 나라이고, 명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관우 한 사람뿐"이었다고 평가하며, 관우를 "용맹함으로 삼군을 능가하는 장수"라고 칭송했다. 주유는 관우와 장비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라고 평가하며, 유비로부터 떼어내 자신이 부릴 수 있다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몽은 관우를 용맹하여 적대하기 어렵고, 형주를 다스리며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요립은 관우가 자신의 용맹을 믿고 돌격하여 판창 전투와 이릉 전투에서 여러 번 군사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우는 도교, 불교, 유교에서 모두 신격화되어 숭배받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민간에서는 옥황상제에 비견되는 "좌옥황"으로 여겨지며, "관은주"라고도 존칭된다.
관우가 죽은 후 당나라 이전 약 400년 동안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인기가 높지 않았으나, 송나라 시대부터 정치적 이유와 서민 문화의 번성에 따라 인기가 점차 상승했다. 원나라에서는 관우가 수많은 잡극의 주인공이 되었고, 명청나라 시대에는 더욱 미화되고 신격화되어, 청나라에서는 "관성대제"로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특정 개인에게 충성을 다한 관우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칭찬할 만한 인물이었다. 북송 휘종 황제는 관우에게 "무안왕" 등의 작호를 내렸고, 이후 여러 왕조에서 잇달아 추증했다. 청나라는 관우 신앙을 만주와 몽골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경극에서 관우 역은 "홍생"이라 불리며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데, 충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얼굴을 칠한다. 다만, 신으로 숭배받는 관우를 모방하는 것이기에, 완벽한 분장을 피하는 전통이 있다.
에도 시대 초기 한시에서는 제갈량과 함께 "지극한 충성심을 지닌 열신"으로 칭송받았다. 가부키에는 "관우"라는 연목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활약상이 실제 역사보다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강담이나 경극 등에서의 창작이 반영되어 있다. 오호대장군의 수장으로 여겨지며,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5. 신격화와 숭배
겸산동하북사문관초토사, 겸제조제궁신, 무분지처검교관(兼山東河北四門關招討使 兼提調諸宮神 無分之處檢校官),
중서문하평장정사, 개부의동삼사, 가전도통군(中書門下平章政事 開府儀同三司 駕前都統軍)
무녕후, 장목의용무안영제왕, 호국숭녕진군(無佞侯 壯穆義勇武安英濟王 護國崇寧眞君)
부친은 성충공(成忠公)으로 추존.
공자의 제사와 같이 봄, 가을에 성대히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행함.
관우를 주신으로 국가적인 제사가 행해지기 시작.
부친은 성충왕(成忠王)으로 다시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