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학도의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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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일학도의용군은 6.25 전쟁 발발 후 조국을 돕기 위해 일본에서 참전한 재일 한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이다.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한국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인천 상륙 작전 직전 참전이 허가되었다. 약 642명이 참전하여 제7보병사단 등에 배속되어 인천 상륙 작전, 장진호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으며, 52명이 전사하고 83명이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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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학도의용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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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학도 의용군 | |
활동 기간 | 1950년 ~ 1953년 |
국가 | 대한민국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종류 | 자원병 학도병 |
규모 | 641명 |
참전 |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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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투사와의 관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재일 한국인들이 참전을 원했지만 처음에는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참전을 반대했다.[4] 그러나 미군들이 한국의 지리, 언어, 풍습에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자, 인천 상륙작전 직전 재일 한국인들의 참전을 허락하였다.[4]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 한국인 학생들은 조국 지원 방안을 모색했다. 도쿄 지역 유학생 중심의 한국학생동맹은 긴급회의를 통해 참전을 결의했고, 이는 민단의 참전 운동 결정과 맥을 같이 했다. 민단과 한국학생동맹은 7월 17일 재일한교자원병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일본 전역에서 참전 지원자를 모집했다. 도쿄에서 120명, 오사카에서 약 80명 등 일본 전역에서 약 1천여 명이 지원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다음과 같은 미군 부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재일학도의용군 1진이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하였다.[4] 이러한 배경 때문에 재일학도의용군을 카투사(KATUSA)의 모태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카투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간의 합의에 따라 1950년 8월 15일 공식화되었으며, 육군본부는 8월 16일부터 국군을 미 제7사단에 배속하였다. 또한 8월 20일에는 주한미군의 미 제2사단, 미 제24사단, 미 제25사단, 제1기병사단에도 국군이 배속되었다.[4]
이처럼 재일학도의용군과 카투사는 비슷한 성격을 가졌지만, 카투사가 조금 더 일찍 공식화되었고, 대한민국 육군 병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 재일학도의용군을 카투사의 모태로 보기는 어렵다.[4]
3. 참전 배경 및 과정
주일한국대표부는 초기에는 학생들의 본업은 공부라며 참전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학생들의 강한 의지에 따라 입장을 바꾸어 미 극동군총사령부와 교섭에 나섰다. 미 극동군총사령부는 초기에는 작전상 이유와 군사훈련 경험 부족을 이유로 참전을 거부했으나, 재일동포 학생들의 끈질긴 노력과 한국의 절박한 상황, 그리고 미군의 전략적 필요성이 맞물려 참전을 승낙했다. 미 극동군총사령부는 한국 지리와 언어, 풍습에 능숙한 재일학도의용군이 미군 부대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미극동군총사령부는 민단을 통해서 재일학도의용군 대상들에게 미군 부대로 입영하라고 통보하였다. 재일동포 청년 학생들은 미군의 사전 계획대로 각 지방별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적게는 45명에서부터 많게는 270명까지 몇 차례로 나누어 출발했다. 일본 전역에서 지원한 재일동포 청년 학생들 중에서 가장 먼저 소집 명령이 떨어진 곳은 바로 도쿄지역이었다. 도쿄 지역 재일학도의용군 제1진은 미 8군 보충훈련소(캠프 드레이크)에서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9월 8일 미군 캠프에 입영하여, 입대 수속, 신체검사, 영어 시험을 거쳐, 전투복 등 기본적인 물품을 지급받았다. 군사훈련은 미군식 호령, 상관에게 경례하는 법, 그리고 제식훈련이 전부였다.
이후 요코하마 항에서 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이동,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다. 9월 16일 인천 앞 바다에 도착,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자신들이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9월 18일 새벽, 상륙명령을 받고 조국 땅을 밟은 재일학도의용군 제1진은 인천 시내에 주둔하며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4. 편성
5. 참전자 통계
6.25 전쟁에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의 총인원은 642명이다. 이 중 52명이 전사하고, 83명이 실종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265명은 일본으로 귀환하였고, 242명은 한국에 잔류하였다.
한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는 후쿠시마현의 일본인 청년 대표가 혈서로 작성한 100여 명의 일본인 지원자 명부를 제출했지만, 그들의 참전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6. 주요 전투
재일학도의용군은 인천 상륙 작전, 원산 상륙 작전, 갑산 혜산진 탈환 작전, 장진호 전투, 백마고지 전투, 현리 전투, 금성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5]
7. 출신 유명 군인
참조
[1]
뉴스
休戦65年 終結この目で 朝鮮戦争元義勇兵 日韓に11人存命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
웹사이트
재일동포 청년들의 참전 의지
http://www.koreansvj[...]
[3]
웹인용
재일학도의용군 휘장(在日學徒義勇軍 徽章)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
http://211.57.113.10[...]
2013-06-08
[4]
웹인용
카투사 역사
국가기록원
2023-05-26
[5]
뉴스
인천서 재일 학도의용군 참전 62주년 기념식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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