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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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의 395고지(백마고지)를 두고 대한민국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국 인민지원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철원 평야와 서울로 통하는 주요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395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10일 동안 12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3,500명, 중공군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미군의 화력 지원과 국군의 방어 준비, 훈련 등이 승리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투 결과 국군의 전투 능력을 입증하여 한국군 증강에 기여했으며, 백마고지는 전투의 격전으로 인해 산의 모습이 백마와 같아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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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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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전투명 | 백마고지 전투 |
다른 이름 | |
날짜 |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 |
장소 |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 |
결과 | UN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민국 미국 |
교전국 2 | 중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김종오 |
지휘관 2 | 강옹후이 |
부대 | |
부대 1 | 제9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5공군 |
부대 2 | 제38군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한국 측 자료: 3,500명 중국 측 추정: 9,300명 |
사상자 2 | 중국 측 자료: 사망: 1,768명 부상: 3,062명 실종: 562명 한국 측 추정: 10,000명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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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52년 한국 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의 395고지(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친 김종오 소장의 지휘 아래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제9보병사단 정면에는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제112보병사단이 후방 예비 부대로 대기 중이었다. 김종오 소장은 이를 간파하고 1952년 9월 22일, 395고지에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 제29보병연대를 배치하고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운용했다. 또한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했다.
1952년 10월 3일, 중공군 340연대 소속 중위 한 명이 귀순하여 백마고지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렸다.[5] 제9군단은 9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전차, 포병, 로켓포, 대공 무기 등을 투입했다.
김종오 소장은 장병들에게 중공군 전술을 교육하고 야간 사격 및 백병전 훈련을 실시했다. 참호는 모두 유개호로 만들었으며, 포병 지원을 확보하여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10월 4일 밤, 예상되었던 중공군의 공격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김종오 소장은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 예하 부대에 3일 더 현재 위치를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제5공군은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중공군 후방에 폭격을 실시했고, 중공군도 10월 3일부터 포격을 강화했다.
2. 1. 전략적 중요성
395고지는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고지로,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였다.[17] 이곳을 중공군에게 점령당하면 철원 평야를 감제(瞰制)당할 뿐만 아니라, 유엔군의 병참선인 국도 제3호선을 비롯한 많은 보급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반대로 395고지가 유엔군의 수중에 있다면 군사 분계선은 그 북쪽을 지나기 때문에 중공군은 거기에서 2킬로미터 물러서야 하고 효성산의 능선을 진지선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지만, 중공군이 수중에 넣는다면 군사 분계선은 역곡천 하천을 지나기 때문에 중공군의 진지는 매우 견고해진다.[18]
따라서 미 제9군단장 젠킨스 중장은 전술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단순한 전초 진지로 취급하지 않고 견고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395고지 서쪽의 281고지(화살머리고지)에도 갱도와 철근 콘크리트 벙커군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 두 고지는 유엔군에게는 진격을 돕는 곳이 되었고, 중공군에게는 큰 장애였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중공군이 395고지를 탈취해 철원 평야를 제압하고 대공세의 기반을 구축해 중부 전선에서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려 한다고 판단,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2. 2. 국군과 중공군의 배치
1952년 9월 중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치고 철의 삼각 지대인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었다. 9사단은 395고지(백마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5]9사단 정면에는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이 포진하고 있었고, 제112보병사단이 후방 예비 부대로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배치했다.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는 예비 부대로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또한,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의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했다.
1952년 10월 3일, 중공군 340연대, 114사단 소속 한 명이 귀순하여 백마고지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제9군단은 9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제53전차대대 소속 전차 22대와 미 제73전차대대 C 중대, 포병, 로켓포, 대공 무기를 투입했다.[5]
당시 기상은 맑음이 계속되어, 야간에도 달빛으로 인해 비교적 관측이 양호했기 때문에, 유엔군의 항공 지원에 유리했다.
10월 3일, 395고지 동쪽의 284고지에서 제38군 제340연대 제7연대 문화교원 곡중교가 투항했다. 투항자의 진술로부터 다음의 사실이 밝혀졌다.
- 공격 개시: 10월 4일 24시~6일 1시 사이에 별도로 선택하는 시각.
- 주공 부대: 제114사단 제340연대.
- 증원 부대: 제112사단의 1개 연대.
- 준비 기간: 6월 이후의 3개월.
- 특수 훈련: 평강 서북쪽의 상갑리 및 하갑리에 395고지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 지형에 익숙해지는 예행 연습을 반복.
- 포탄 준비: 지원 포격에 충분한 각종 포탄을 비축.
- 특수 장비: 각 중대마다 철조망 파괴 통과 지뢰 통을 60개씩 확보.
- 개인 장비: 개인에게 8개의 수류탄과 160발의 소총 실탄을 지급.
- 방한복 지급: 395고지를 점령한다면, 장기간 확보하기 위해 월동용 방한복을 지급할 예정.
- 비상 수단: 395고지를 고립시키기 위해 역곡천을 범람시킬 목적으로 봉래호 수문을 일시 개방.
김종오 소장은 10월 4일까지 제28연대 제3대대를 고지 부근의 지원 위치에, 주 저항선에서 떨어져 있던 다른 연대도 예비의 반격 부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제9사단은 395고지의 방어 병력을 2개 대대로 증강함과 동시에, 사단 예비로 즉시 반격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정찰을 강화했다. 역곡천 범람에 대비하여 1주일 분의 식량, 음료수, 탄약 등을 비축하도록 명령했다. 전차와 대공포는 고지 측면에 계곡으로부터의 접근을 막도록 배치되었다.
10월 4일 밤, 예상되었던 중공군의 공격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김종오 소장은 공격이 임박했다고 느껴 예하 부대에 3일 더 현재 위치를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제5공군은 중공군의 공격 기세를 꺾기 위해 10월 3일부터 6일까지 19차례에 걸쳐 중공군 후방 일대에 폭격을 실시했다. 또한 중공군도 10월 3일부터 포격을 강화하여 10월 5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6일 오후 5시까지 2,000발의 포탄을 집중했다.
제38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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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사 | |
제113사 | |
제114사 |
2. 3. 국군의 방어 준비
1952년 9월 중순,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격파한 후, 철의 삼각 지대인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고지(백마고지)를 중심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달하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5]김종오 소장은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과 예비 부대인 제112보병사단이 제9보병사단 정면에 배치된 것을 파악했다. 이에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배치하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또한,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의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했다.[5]
1952년 10월 3일, 중국 인민지원군 340연대, 114사단 소속 중위 한 명이 귀순하여 심문 과정에서 백마고지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렸다.[5]
이 정보는 다른 정보들과 일치했고, 이에 따라 제9군단은 9사단 증원을 위해 제53전차대대 소속 전차 22대와 미 제73전차대대 C 중대, 포병, 로켓포, 대공 무기를 투입하여 지상전을 준비했다. 제9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제30연대를 좌익에, 29연대를 우익에 배치하고, 28연대를 예비대로 남겨두었다. 백마고지 측면에는 계곡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전차와 대공포를 배치했다. 야간 조명을 위해 탐조등과 조명탄을 배치하고, 조명탄 투하 항공기를 대기시켰다. 제5공군에서는 백마고지 인근 적 포병 진지에 대한 추가 공습을 지원했다.[5]
기상은 맑음이 계속되어 야간에도 달빛으로 인해 관측이 양호하여, 유엔군의 항공 지원에 유리했다.
김종오 소장은 장병들에게 중공군의 전술을 철저히 교육시키고, 야간 사격과 백병전 훈련을 반복했다. 참호는 모두 유개호로 만들고 부상병이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을 구축했다. 또한, 포병을 적시에 동원하여 자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에게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도록 제9군단장 젠킨스 중장과 상의하여 포병 지원을 확보했다.
10월 4일 밤, 예상되었던 중공군의 공격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김종오 소장은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하여 예하 부대에 3일 더 현재 위치를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제5공군은 중공군의 공격 기세를 꺾기 위해 10월 3일부터 6일까지 19차례에 걸쳐 중공군 후방 일대에 폭격을 실시했다. 중공군도 10월 3일부터 포격을 강화하여 10월 5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6일 오후 5시까지 2,000발의 포탄을 집중했다.
제9사단 및 배속, 지원 부대
구분 | 부대명 | 지휘관 | 비고 |
---|---|---|---|
제9사단 | 제28연대 | 이주일 대령 | |
제1대대 | 김삼증 대위 | 제28연대 | |
제2대대 | 윤영모 소령 | 제28연대 | |
제3대대 | 최창룡 중령 | 제28연대 | |
제29연대 | 김봉철 대령 | ||
제30연대 | 임익순 대령 | ||
제30포병대대 | 권오명 대위 | ||
제9중박격포 중대 | 문일수 대위 | ||
105mm 곡사포 3개 대대, 4.2인치 박격포 1개 중대, 전차 1개 중대 | |||
배속 부대 | 제51연대 | 전부일 대령 | |
제1대대 | 이기완 소령 | 제51연대 | |
제2대대 | 박철원 소령 | 제51연대 | |
제3대대 | 김백영 소령 | 제51연대 | |
지원 부대 | 제1포병단 | 박병주 중령 | |
제51포병대대 | 손선양 소령 | 제1포병단 | |
제52포병대대 | 하영섭 소령 | 제1포병단 | |
제50포병대대 | 10월 7일 오전 12시부터 제1포병단의 작전 통제 | ||
미 제2로켓포대 | M16 4.5인치 로켓포, 제1포병단의 작전 통제 | ||
미 제2화학박격포대대 A중대 | 4.2인치 박격포, 제1포병단의 작전 통제 | ||
미 제213포병대대 | 레온 험프리 중령 | 155mm 곡사포, 미 제17포병대대 B중대를 작전 통제, 제1포병단의 일반 지원 및 화력 증원 | |
미 제937포병대대 | 155mm 평사포, 미 제424포병대대 A중대를 작전 통제, 제9군단의 일반 지원 | ||
미 제955포병대대 | 155mm 곡사포, 10월 13일까지 제1포병단의 일반 지원 및 화력 증원 | ||
미 제49포병대대 | 8인치 곡사포, 10월 7일 12시부터 제1포병단의 화력 증원, 10월 9일 8시부로 제51연대의 직접 지원으로 변경 | ||
미 제5공군 |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백마고지에서는 한국 전쟁 중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3. 전투 과정
10월 9일, 중공군은 봉래호 저수지의 수문을 열어 역곡천의 수위를 높여 한국군 제9사단과 미군 제2보병사단 사이의 증원을 막으려 했다. 동시에 애로우헤드 언덕(281고지)에 대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프랑스 대대를 묶어두려 했으나, 프랑스군은 굳건히 버티며 큰 피해를 입혔다.[6]
같은 날 19시 15분, 중공군 제340연대가 백마고지 북서쪽 끝으로 4개 중대를 보내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 날 새벽 2시, B-29 전략 폭격기 4대가 하진명동에 1,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고 81문의 포병이 집중 사격을 가했으나, 중공군의 돌파는 확대되어 첫날 약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막대한 손실에도 중공군은 계속 병력을 보강했고, 한국군 제10중대는 능선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한국군 제28연대 제2, 3대대가 야간 공격을 감행하여 중공군을 몰아냈다. 중공군의 피해는 컸으며, 포로가 된 한 병사는 이틀간의 전투 후 많은 중대가 190~200명에서 20명 미만으로 줄었다고 증언했다.[6]
이러한 손실로 중공군은 공격 부대를 제334연대로 전환하고, 제342연대는 10월 9일 공격을 위해 남겨두었다. 342연대 병력은 10월 9일 오후 능선까지 진격했지만, 그날 밤 한국군 제28연대의 반격으로 저지되었다. 10월 10일, 제29연대가 반격하여 백마고지를 점령했고, 제28연대는 우익 방어를 맡았다. 같은 날 새벽 4시 30분, 중공군 제342연대가 주 봉우리를 방어하던 한국군 제29연대를 공격하여 언덕을 탈환했지만, 2시간 만에 반격으로 다시 빼앗겼고, 오전 8시 15분에 또다시 빼앗겼다. 유엔군은 포병 지원과 근거리 항공 지원의 압도적인 이점을 활용했다. 중공군 포로는 제5공군기가 제335연대, 제112사단 병력을 395고지 북쪽 집결지에서 발견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공격 투입을 지연시켰다고 말했다.[6]
중공군은 막대한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보병을 계속 투입했다.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은 제8군 포병, 전차, 공군의 큰 피해를 입는 북쪽 공격 접근로에 전투 부대를 계속 투입했다. 중공군의 결의는 제9군단 방어군이 모든 구경의 대규모 화력으로 총공격을 포화시키면서 보병을 표적으로 삼게 만들었다.[6]
10월 12일, 제30연대 제1대대가 공격선에서 벗어났다. 제29연대는 중공군 진지에서 불과 40미터 떨어진 곳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2시간 동안 진전이 없자, 제2대대가 오른쪽 측면으로 투입되어 포위 공격을 시도했다. 제1대대의 제3중대가 저항으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자, 제1중대 지휘관은 강력한 공격 명령을 받았고, 공격선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백마고지는 5시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13시 20분에 재탈환되었다.[6]
10월 13일, 141대의 군용기 근거리 항공 엄호 아래 제28연대가 낙타능선에 투입되었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6시간 만에 백마고지로 철수해야 했다. 10월 14일, 제29연대가 다시 공격하여 오전 10시 40분에 제22대대가 낙타능선에서 중공군을 격퇴, 백마고지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중공군 측은 제38군이 삼각고지 전투 시작으로 14일 밤 작전 포기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중공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로 결심했다.[6]
3. 1. 초기 공방전 (10월 6일 ~ 10월 8일)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은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키고,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1] 이로 인해 국군 제3대대의 증원 병력 투입이 지연되었고, 중공군은 395고지로 돌격했다. 제30보병연대 1대대는 3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1]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4차 공세를 가해 2개 대대로 1개 전초 기지를 포위, 395고지를 함락시켰다.[1]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의 전투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1]
10월 8일, 중공군은 예비 연대를 투입해 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고지 정상을 점령했다.[1] 그러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1]
3일 동안 5차례의 공방전으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제28보병연대와 제30보병연대는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하게 되었다.[1]
3. 2.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국군의 반격 (10월 9일 ~ 10월 11일)
10월 9일, 중국인민지원군은 제6차 공세를 펼쳤다. 김봉철 대령이 이끄는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통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으나,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소진되어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선을 내주고 후퇴했다.[6]
10월 10일,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인해전술을 펼쳤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 끝에 중공군이 고지를 장악했다.[6]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했다. 김경진 소령은 전투 중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했다.[6]
3. 3. 전투의 종결 (10월 12일 ~ 10월 15일)
10월 15일 새벽, 한국군 제28보병연대는 기습 공격으로 395고지를 완전히 장악했다.[6] 같은 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하여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6]
4. 결과 및 영향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군 북서쪽의 백마고지(395고지)에서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제38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중공군에 맞서 고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국군이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자원 및 기술:
- 공격 징후와 투항한 중공군 장교의 정보를 바탕으로, 국군은 주 저항선을 강화하고 지뢰와 장애물을 추가 설치하여 방어 능력을 높였다.
- 미군 포병의 지원을 효과적으로 조정하여 중공군 포병의 위력을 감소시키고, 고립된 중공군 보병의 수적 우위를 무력화했다.
- 공병, 대공 부대, 탐조등, 전차 등 군단 자원을 통합하여 전투력을 극대화했다. 특히, 전차 부대는 395고지 측면 접근로를 차단하여 중공군에게 정면 공격을 강요했다.
- 미 공군은 주간 669회, 야간 76회 출격하여 제9사단의 고지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22] 공군 지원은 포병 계획과 긴밀하게 조정되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 지휘 통제:
- 제9사단은 사단급 화력 지원 조정소(Fire Support Coordination Center|화력 지원 조정소영어) 운용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포병단과 제30포병대대의 역할을 분담하여 효과적인 화력 지원 체계를 구축했다.
- 한국군 전투력 향상:
- 1951년 가을부터 시작된 밴 플리트 장군의 훈련 계획으로 한국군의 능력이 향상되었다.
- 제9사단은 잦은 교전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부대 교대와 전투 운용, 개선된 작전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다.
- 김종오 소장은 전투 중 부대의 활기를 유지하고, 정기적인 부대 교대를 통해 전투력을 보존했다.
- 장교들은 병사들이 후퇴하지 않고 적에게 집중하도록 독려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군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4. 1. 막대한 피해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1] 제38집단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제9보병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다.[1]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1]이 전투에서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1929년 1월~1952년 10월) 소위, 김광수 대위 등 많은 인물들이 전사하였다.[2]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은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다.[3] 백마고지 전투에서 제5공군은 745회 출격하여 네이팜탄 358발을 포함해 폭탄 2700발을 투하했다.[3] 중공군 제38군은 3개 보병사단 9개 연대 중 7개 연대에 걸쳐 1만 명을 잃었는데, 특히 이번 전투에서 잃은 군대가 정예병이라 차후 신병이 보충되더라도 숙련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3]
제38집단군은 제334, 339, 340, 342 연대 등 4개 연대를 투입했다.[4] 중공군은 총 6,7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4] 대한민국 측 자료에 따르면 제38집단군은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여 총 14,332명의 사상자(확인된 사망 8,234명, 추정 사망 5,097명, 부상 1,001명, 포로 57명)를 기록했다.[4] 대한민국 육군 제9보병사단은 제28, 29, 30 연대 등 3개 연대를 투입하여 총 3,422명의 사상자(전사 505명, 부상 2,562명, 실종 391명)와 제30연대 제1대대에서 400명 이상의 추가 사상자를 냈다.[4] 중공군은 제9보병사단이 4개 연대를 투입했으며, 총 9,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중 약 7,0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4] 제38집단군과 제9보병사단은 심각한 사상자를 입은 후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다.[4] 전투 후 제9보병사단은 백마부대라는 별칭을 얻었다.[4]
미국 제5공군은 총 745회 출격하여 다양한 종류의 폭탄 2,700발 이상과 네이팜탄 358발 이상을 투하했다.[5] 중공군은 9일간의 전투 기간 동안 55,000발 이상의 포탄을 쏟아 부었고, 대한민국군은 185,000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했다.[5]
구분 | 중공군 | 구분 | 한국군 | ||||||
---|---|---|---|---|---|---|---|---|---|
제9사단 전투상보 | 제9군단 보고서 | ||||||||
제9사단 전투상보 | 제9군단 보고서 | 중공군 공간사 | 장교 | 사병 | 계 | ||||
전사 | 확정 | 8,234 | 2,695 | 1,748 | 전사 | 22 | 483 | 505 | 421 |
추정 | 6,098 | 1,873 | |||||||
항공 | 707 | ||||||||
부상(추정) | 1,001 | 4,241 | 3,062 | 부상 | 93 | 2,423 | 2,516 | 2,391 | |
포로 | 57 | 51 | 562(실종) | 실종 | 2 | 389 | 391 | 507 | |
계 | 15,390 | 9,567 | 5,372 | 계 | 117 | 3,295 | 3,412 | 3,319 | |
제9사단의 총 사상자 수는 약 3,000명이었다. 이 중 전사자는 전체의 1/6 정도였으며, 행방불명자도 10% 이상이어서 전체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백마고지 전투의 사상자 규모는 1951년 2월 11~13일 횡성 전투에서 한국군 제8사단이 낸 7,464명(대부분 포로 또는 행방불명)의 사상자보다는 적지만, 지평리 전투에서 미 제23연대 전투단이 중공군 수개 사단과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총 342명: 사망 51명, 부상 250명, 행방불명 42명)보다는 많다. 한국 전쟁에서 미군이 참가한 대표적인 고지전인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발생한 미 제2사단과 프랑스 대대의 사상자는 3,762명(전사 597명, 부상 3,055명, 행방불명 84명)으로, 제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 피해 규모와 비슷하다. 1953년 7월 돼지 고지 전투에서 발생한 미 제3사단의 사상자는 1,118명(사망 52명, 부상 894명, 행방불명 172명)으로, 제9사단 사상자의 약 1/3 수준이었다. 이처럼 한국 전쟁 중 다른 전투와 비교하면 백마고지 전투에서 제9사단의 사상자 규모는 비교적 커서, 그만큼 전투가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제38군의 피해 기록은 자료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특히 전사자와 부상자 수에서 큰 격차를 보인다. 파로호 전투를 제외하고 중공군이 한국군 사단과의 전투에서 이처럼 많은 사상자와 장비 손실을 겪은 적은 없었다. 일부 포로들은 공격 연대의 중대가 평균 15~20명으로 감소했으며, 사망자 수가 부상자 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진술했다. 이는 중공군의 대피 시설 부족과 차량 수송을 방해한 공군 및 포병의 공격 때문이었다.
4. 2. 국군 전투력의 증명과 한국군 증강의 계기
10월 8일, 짙은 안개 속에서 중공군이 395고지를 공격하자, 국군 제28연대 제2대대는 공군기의 오폭[1] 등으로 주봉을 빼앗겼다.[2][1] 국군 제9사단은 예비대인 제28연대 제3대대를 투입, 유엔군 포병과 공군의 지원 아래 오후 11시경 395고지를 탈환했다.[3] 그러나 제28연대와 제30연대는 큰 피해를 보아 재편성이 필요했다.[2] 국군 제9사단은 제51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제29연대를 예비로 전환했다.[2]10월 10일, 중공군이 다시 반격했지만, 국군 제29연대는 진지를 굳게 지키며 중공군을 격퇴했다.[4] 국군 제1대대는 백병전 끝에 고지 정상을 탈환했고,[4] 날이 밝자 중공군은 철수했다.[4] 김종오 소장은 제30연대 제3대대를 원대 복귀시켰고,[4] 보충 병력이 도착해 손실을 충당했다.[4]
4. 3. 전사자 및 참전 인물
이 전투에서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1929년 1월~1952년 10월) 소위, 김광수 대위 등 많은 인물들이 전사하였다.백마고지 전투의 주요 참전 인물은 다음과 같다.
소속 | 직책 | 성명 | 비고 |
---|---|---|---|
제9보병사단 | 사단장 | 김종오 소장 | |
제28연대 연대장 | 이주일 대령 | ||
제28연대 제1대대 대대장 | 김삼증 대위 | ||
제28연대 제2대대 대대장 | 윤영모 소령 | ||
제28연대 제3대대 대대장 | 최창룡 중령 | ||
제29연대 연대장 | 김봉철 대령 | ||
제29연대 제1대대 대대장 | 이대철 소령 | ||
제29연대 제2대대 대대장 | 김경진 소령 | 10월 11일 전사 | |
제29연대 제2대대 대대장 | 박응격 대위 | 10월 13일부터 | |
제29연대 제3대대 대대장 | 박찬강 중령 | ||
제30연대 연대장 | 임익순 대령 | ||
제30연대 제1대대 대대장 | 김영선 소령 | ||
제30연대 제2대대 대대장 | 김상옥 소령 | ||
제30연대 제3대대 대대장 | 조남국 소령 | ||
제30포병대대 대대장 | 권오명 대위 | ||
제9중박격포 중대 중대장 | 문일수 대위 | ||
제51연대 연대장 | 전부일 대령 | 배속 부대 | |
제51연대 제1대대 대대장 | 이기완 소령 | 배속 부대 | |
제51연대 제2대대 대대장 | 박철원 소령 | 배속 부대 | |
제51연대 제3대대 대대장 | 김백영 소령 | 배속 부대 | |
제53전차 중대 중대장 | 조칠성 대위 | 배속 부대 | |
제1포병단 단장 | 박병주 중령 | 지원 부대 | |
제51포병대대 대대장 | 손선양 소령 | 지원 부대 | |
제52포병대대 대대장 | 하영섭 소령 | 지원 부대 | |
미 제9군단 | 군단장 | Reuben Ellis Jenkins영어 중장 | |
미 제213포병대대 | 대대장 | 레온 험프리 중령 | 지원 부대, M114 155mm 곡사포 |
미 제5공군 |
5. 명칭 유래
백마고지는 원래 이름 없는 395 고지였으며, 현재의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정된 바는 없지만 유력한 두 가지 설이 있다.
- 첫째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한 엄청난 포격으로 나무가 모두 쓰러지고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설이다.[27][28][13]
- 둘째는 백마고지의 야간 전투 시 백마고지를 뒤덮은 수많은 낙하산 조명탄들이 터져서 내려오는 하얀 섬광을 영국 외신기자가 영국 옥스퍼드셔주의 벅셔 다운즈에 있는 Whitehorse Hill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사용했고, AP통신사, INS통신사 등을 통해 'White Horse Hill'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사가 전세계로 타전되었다는 설이다. 그리하여 'Los Angeles Times', 'Monroe Morning World' 등 미국 신문사들이 10월 7일자 기사부터 'White Horse Hill'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기사들을 재배포하면서 공식적인 명칭에 이르렀다.[29][30][14][15]
한편 국내 언론에서는 1952년 10월 8일 이전에는 '백마고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395고지 수색전', '395고지 전초전' 등으로 표기되었고, 10월 8일부터 백마고지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이 기사 역시도 AP통신사발 기사이다.[31] 1952년 10월 8일부터 대한민국 언론은 전투에 관한 기사에서 395고지 대신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2]
6. 평가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작전 지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 10월 11일, 제28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395고지 정상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단장은 작전지시를 통해 제28연대의 전투 정면을 축소하고 제51연대에게 일부 지역을 인계했다.[1] 이는 초기 대응 실패와 부대 간 책임 전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 10월 12일, 제30연대가 공격을 개시했지만, 초기에는 8부 능선에서 중공군에게 막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2] 이는 공격 부대 선정 및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 10월 13일, 사단장은 제30연대의 방어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제28연대에게 낙타 능선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같은 시기에 제30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95고지 주봉에서 물러났다.[3] 이는 상황 판단 오류와 성급한 명령 하달로 인한 혼란을 보여준다.
6. 1. 긍정적 평가
백마고지 전투에서 한국군이 방어에 성공한 요인은 크게 자원과 기술,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먼저 자원 측면에서, 공격 징후와 투항한 중공군 장교의 정보를 바탕으로 사단장은 주 저항선을 강화하고 추가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여 한국군의 방어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급조되었지만 강화된 진지는 중공군의 첫 포격에서 많은 병사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395고지 방어 병력을 2개 대대로 편성하여 중공군의 1개 대대 방어 병력에 기반한 공격 계획을 좌절시켰다.
포로의 진술을 통해 젠킨스 중장은 미군 포병의 지원을 조정할 수 있었다. 제9군단 포병은 지원 부대의 긴밀한 협력과 일원적인 지휘를 확보했다. 제9군단 사령부와 제213포병대대에서 완전한 대(對)포병 준비 계획이 수립되어 10월 5일까지 모든 대대에 배포되었다. 이 계획은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실행되었으며 전투 과정에서 수정되었다. 제9사단에 배속된 미군 고문관은 "몇몇 대대의 동시 탄착 사격은 전투의 중요한 시점에 적을 여러 번 공격하여 획득한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증원 병력이 분산된 것은 그들의 헌신이 전투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 때였다"라고 증언했다. 중공군 포병의 효력은 감소했고, 전장에서 고립된 보병은 수적 우위를 발휘할 수 없게 되어 제38군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제1포병연대 포병들은 훈련을 막 마쳤지만,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수천 발의 포탄을 쏘았다.
젠킨스 중장은 공병, 대공 부대, 탐조등, 전차 등 군단 자원을 통합했다. "전차 강국"이 아닌 지형을 넘어 미·한 전차대는 인상적인 공적을 세웠다. 전차 부대는 395고지 방어 부대의 측면에 대한 접근로를 차단하여 중공군에게 정면 공격을 강요했다. 한국군 제53전차중대도 395고지 동쪽 측면을 담당하여 중공군의 증원을 감시 및 차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공군은 주간에 669회, 야간에 76회 출격하여 제9사단의 395고지 확보에 기여했다.[22] 항공 지원 계획은 포병 계획과 조정되었으며, 한국군의 근접 항공 지원을 위해 마찰 없이 진행되었다. 날씨 또한 양호하여 관측이나 공습을 방해하는 요소는 없었다. 공군은 25개의 포병 진지, 61개의 엄폐호, 870미터의 참호선, 4대의 전차, 4대의 차량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투에서 화력 운용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제9사단은 제30포병대대만으로 작전을 수행해 왔지만, 군단의 각종 화력 자원이 더해지고, 공군은 해군기까지 지원하면서 지휘 통제가 복잡해졌다. 또한 사단을 직접 지원하는 제1포병단은 1952년 1월 21일에 창설된 신편 부대였으며, 한국군은 사단급 화력 지원 조정소(Fire Support Coordination Center|화력 지원 조정소영어)를 운용한 경험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제9사단은 효과적인 화력 지원을 위해 융통성을 가미한 지휘 체계를 구성했다. 제1포병단은 화력 관련 최상위 부대로서 사단 전체의 화력을 통제하고, 사단의 화력 지원 조정소를 형성했다. 그러나 제9사단과의 협동 작전 경험 부족 및 인력과 능력의 제한으로, 보병과 연계된 근접 지역은 사단 포병인 제30포병대대가 담당했다. 제1포병단은 전체적인 자원 배분과 군단의 지원 부대를 활용한 후방 지역과 공군 및 해군의 항공 지원을 맡았다. 이러한 이중 지휘 구조는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전투 기간 동안 원활하게 작동했다.
두 번째 요인은 1951년 가을부터 시작된 밴 플리트 장군 주도의 장병 훈련 계획으로 한국군의 능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정상 탈환을 둘러싼 공격, 탈환, 반격이 반복된 교전은 다른 전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게 진행되었다. 특히 제4차, 제5차, 제6차, 제9차, 제10차 공방전은 최단 12시간, 최장 24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1951년 사창리 전투, 횡성 전투, 현리 전투 등에서 한국군이 적과 제대로 교전조차 하지 못하고 붕괴된 것과는 달리, 제9사단 예하 부대는 장시간 중공군과 접전을 지속했다. 각 공방전 간 간격은 제1차부터 제3차까지 거의 연속적이었고, 제4차부터 제11차 공방전이 전개된 8일 동안 교전이 멈춰 있었던 시간은 8시간 30분 정도에 불과했다. 10월 7일 오후부터 15일 정오까지 총성과 포격이 멈춰 있던 시간은 길어야 2시간 이내였다. 여러 차례의 교전이 거의 쉬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이를 통해 제9사단 사단장과 연대장의 효율적인 부대 교대와 전투 운용, 개선된 작전 지휘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김종오 소장은 전투 중 부대의 활기를 유지하고, 패배로 인해 부대의 결속력과 효력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인 부대 교대를 실시했다. 장교 또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들의 존재가 병사들을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것을 확실히 했다. 병사들을 참호에 머무르게 하거나, 중화기나 수류탄에 직면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번 경사면을 오르게 하는 것은 지도력, 인내력, 애국적인 동기에 기인한 믿을 수 없는 공적이었다. 대대의 공격성은 방어, 철수, 반격을 반복하며 주도권이 완전히 중공군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6. 2. 부정적 평가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작전 지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0월 11일, 제28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395고지 정상에서 물러났고, 이후 사단장은 작전지시를 통해 제28연대의 전투 정면을 축소하고 제51연대에게 일부 지역을 인계했다.[1] 이는 초기 대응 실패와 부대 간 책임 전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 10월 12일, 제30연대가 공격을 개시했지만, 초기에는 8부 능선에서 중공군에게 막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2] 이는 공격 부대 선정 및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 10월 13일, 사단장은 제30연대의 방어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제28연대에게 낙타 능선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같은 시기에 제30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95고지 주봉에서 물러났다.[3] 이는 상황 판단 오류와 성급한 명령 하달로 인한 혼란을 보여준다.
7. 기념 및 추모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며,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9사단이 보여준 용맹함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기념 및 추모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9사단이 보여준 통솔력, 기술, 경험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으로부터 "철원 지역에서의 제9사단의 훌륭한 활약에 매우 자부심을 느낀다"라는 칭찬을 받았다.[27] 또한, 제9사단의 승리는 미군 주도의 한국군 증강 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군의 전략적 가치 재평가에도 기여했다.[28]
중공군 제38군은 큰 손실로 인해 제23군과 교대하여 후방 임무를 맡았으며,[22] 395고지와 281고지 확보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조급한 계획 입안, 부적절한 목표 선정, 정보 누설을 꼽았다.[3][29] 이후 중공군은 삼각고지 전투와 저격능선 전투에서 이 교훈을 적용했다.[3]
김종오 소장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고, 후임 김점곤 준장은 저격능선 전투를 지휘하게 되었다.[30] 395고지는 치열한 포격으로 1미터 정도 낮아지고 민둥산이 되었으며, 그 모습이 백마가 엎드린 모습과 같아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21][31] 제9사단은 이 전투 이후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21]
김종오 소장, 김경진 중령에게 태극무공훈장이, 김종오 소장, 정낙구 소위(전사), 김만수 이등중사(전사)에게 수훈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23] 이주일, 김봉철, 임익순에게 레지온 오브 메리트가,[24] 이대철, 박찬강, 김경진 (전사)에게 은성 훈장이 수여되었다.[25]
한국 전쟁 휴전 후, 대한민국 육군 제5사단과 철원군 대마리(대마리한국어) 주민들은 기념관과 전적비, 위령비를 세웠다.[26]
7. 1. 백마고지 전적지
白馬高地戰蹟地|백마고지 전적지중국어는 1951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벌어진 횡성 전투에서 한국군 제8사단이 입은 7,464명(대부분 포로 또는 행방불명)의 사상자보다는 적지만,[1] 지평리 전투에서 미 제23연대 전투단이 중공군 수개 사단과 전투를 벌여 발생한 사상자 342명(사망 51명, 부상 250명, 행방불명 42명)보다는 많다.[2]한국 전쟁에서 미군이 참가한 대표적인 고지전으로 알려진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미 제2사단과 프랑스 대대의 사상자는 3,762명(전사 597명, 부상 3,055명, 행방불명 84명)으로, 이는 제9사단이 백마고지 전투에서 입은 인명 피해 규모와 비슷하다.[2] 1953년 7월 돼지 고지 전투에서 발생한 미 제3사단의 사상자는 1,118명(사망 52명, 부상 894명, 행방불명 172명)이었으나, 이는 제9사단의 사상자의 약 3분의 1 정도였다.[2]
한국 전쟁 중 다른 전투와 비교하면 백마고지 전투에서 발생한 제9사단의 사상자 규모는 비교적 커서, 그만큼 전투가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2] 제9사단의 총사상자 수는 약 3,000명이었다.[1] 이 중 전사자는 전체의 6분의 1 정도였으며, 행방불명자도 10% 이상이어서 전체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1]
제38군의 피해 기록은 자료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특히 전사자와 부상자의 수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1] 파로호 전투를 제외하고 중공군이 한국군 사단과 전투에서 이처럼 큰 사상자와 장비 손실을 겪은 적은 없었다.[3] 몇몇 포로들은 공격 연대의 중대가 평균 15~20명으로 감소했으며, 사망자 수가 부상자 수를 훨씬 초과했다고 진술했다.[3] 이는 중공군의 대피 시설 부족과 차량 수송을 방해한 공군과 포병의 공격 때문이었다.[3]
7. 2. 백마고지역
2012년 11월 20일 철원군에 경원선 백마고지역이 개통되었는데, 이 역의 이름은 이 전투를 기념하여 지어졌다.[26]참조
[1]
서적
200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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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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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ngma-goji 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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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age] Joint mine removal operation begins in DM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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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finds likely war remains during border dem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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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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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unearths nine sets of war dead remains during DMZ mine-clearing 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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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s Start Clearing Land Mines at DMZ in Effort to Ease Tensions
https://www.ny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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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年來最大攻勢(일년래최대공세) 一五五(일오오)마일全戰線確保(전전선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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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of White Horse Hill (from 03:13~04:26) - South Korean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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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for White Horse Hill, In 6th Day, ROK's Still Hold
https://www.newspape[...]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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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に向けて未来を開こう]4. 朝鮮戦争の激戦地
http://www.kado.net/[...]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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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の決定的戦闘―⑨白馬高地戦闘
http://www.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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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현의 Behind War:김종오 장군(9)-①―백마고지에서 원수 같은 중공군 38군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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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피 어린 산과 언덕(10)
https://news.joins.c[...]
2020-09-21
[21]
뉴스
남도현의 Behind War:김종오 장군(10)-①―중공군 38군의 절반을 죽인 백마고지의 빛나는 승리
http://premium.chosu[...]
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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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朝鮮戦争60年]大邱で抱いた強軍の夢(205)白馬高地の血戦
http://nk.joins.com/[...]
2015-10-31
[23]
웹사이트
http://valor.militar[...]
Military Times
2015-10-26
[24]
웹사이트
http://valor.militar[...]
Military Times
2015-11-10
[25]
웹사이트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018-11-24
[26]
뉴스
[激戦の現場に行く]6. 鉄原白馬高地戦闘
http://www.kado.net/[...]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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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화살머리고지에 서다…철원 DMZ 평화의길 가보니
https://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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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Central Area, DMZ
http://www.lifein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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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쓰리고 논란의 영화, 고지전★순삭밀톡 6·25 70주년 스페셜Ⅲ (03:13~04:26) - 국방TV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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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Battle for White Horse Hill, In 6th Day, ROK's Still Hold
https://www.newspape[...]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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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一年來最大攻勢(일년래최대공세) 一五五(일오오)마일全戰線確保(전전선확보) - 1952년 19월 8일발 기사
https://news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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