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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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해는 후한 말 공손찬을 섬긴 인물로, 공손찬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청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원소와의 대립에서 유비를 부장으로 삼아 활약했으나,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조조가 도겸을 공격했을 때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했으나, 이후 원소의 아들 원담의 청주 진출로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여 자결할 때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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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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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전해 |
로마자 표기 | Tian Kai |
직책 | 청주자사 (공손찬 임명) |
임기 시작 | 192년 |
임기 종료 | 199년 |
군주 | 후한 헌제 |
출생 | 미상 |
사망 | 199년 |
직업 | 관료 |
기타 정보 | |
소속 세력 | 공손찬 |
사망 연도 (간지) | 건안 4년 (己卯年, 199년) |
2. 생애
전해(? ~ 199년)는 후한 말기의 군벌 공손찬을 섬겼던 인물이다.
191년 이후, 공손찬은 공손범의 활약으로 원소를 크게 억누르고 하북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때 공손찬은 전해를 청주자사(靑州刺史)에, 선경을 연주자사(兗州刺史)에, 엄강을 기주자사(冀州刺史)에 임명하였다.[4]
192년, 공손찬은 계교 전투에서 원소에게 패하였으나 최거업을 물리치고 평원 방면까지 남하하였다. 이때 전해는 제에 주둔하였고, 유비를 부장으로 하여 원소와 대적하였다. 그러나 2년 남짓한 싸움으로 식량이 떨어졌고, 병사와 백성들 모두 지쳐 굶주림에 시달렸다.
193년, 연주목(兗州牧) 조조가 서주목(徐州牧) 도겸을 공격하였을 때, 전해는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였다. 조조가 퇴각하자, 전해는 유비를 서주에 남겨두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이후 원소의 장남 원담이 평원을 거점으로 청주로 진출하면서 전해의 입지가 좁아졌다.[5][6]
199년 3월,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여 자결할 때, 전해도 함께 전사하였다.[7]
시기 | 내용 |
---|---|
191년 | 공손찬에 의해 청주자사로 임명됨.[4] |
192년 | 제에 주둔하며 유비를 부장으로 삼아 원소와 대적함. |
193년 | 조조의 서주 침공 때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함. |
199년 |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과 함께 원소에게 패하고 전사함.[7] |
2. 1. 초기 활동
공손찬을 섬겼다.초평 2년(191년) 이후, 공손찬은 종제 공손범의 활약 등으로 원소를 크게 억누르고 하북(河北)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때 전해는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되었다.[4] 192년 계교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손찬은 최거업을 격파하고 평원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이때 전해는 제에 주둔하면서 유비를 부장으로 삼아 원소에 맞섰다. 그러나 2년여에 걸친 전투로 식량이 고갈되고 병사들과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193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전해는 도겸의 구원 요청을 받고 유비와 함께 서주로 달려가 도겸을 지원했다. 조조가 물러난 후, 전해는 유비를 서주에 남겨두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이후, 원소의 아들 원담이 평원을 거점으로 청주를 공략해오면서 전해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5][6]

2. 1. 1. 공손찬의 발탁과 청주자사 임명
191년, 공손찬은 원소와의 하북(河北)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전해를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했다.[4] 당시 공손찬은 종제 공손범의 활약에 힘입어 원소를 크게 압도하며 하북 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공손찬은 전해를 청주자사로, 선경을 연주자사로, 엄강을 기주자사로 임명하여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장하려 했다.192년, 계교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손찬은 최거업을 격파하고 평원 방면으로 남하했다. 이때 전해는 제에 주둔하면서 유비를 부장으로 삼아 원소에 맞섰다. 그러나 2년여에 걸친 전투로 식량이 고갈되고 병사들과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3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전해는 도겸의 구원 요청을 받고 유비와 함께 서주로 달려가 도겸을 지원했다. 조조가 물러난 후, 전해는 유비를 서주에 남겨두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이후, 원소의 아들 원담이 평원을 거점으로 청주를 공략해오면서 전해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5][6]
2. 2. 원소와의 대립
191년 초평 2년, 공손찬은 원소와 전쟁을 시작하며 전해를 청주자사로 임명하여 청주를 공격하게 했다.[1] 192년 전해는 청주자사에 임명되었으나, 청주 북부 지역만 장악했고 남부 지역은 원담이 계속 통제했다.[1]193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도겸은 유비와 전해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이들은 군대를 이끌고 서주로 가 조조를 물러나게 했다.
198년, 역경 전투에서 전해는 공손찬 편에서 싸우다 전사했다.[7]
2. 2. 1. 원담과의 전투
191년 이후, 공손찬은 종제 공손범의 활약 등으로 원소를 크게 억누르고 하북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때 공손찬은 전해를 청주자사에, 선경을 연주자사에, 엄강을 기주자사에 임명하였다.초평 3년, 공손찬은 계교 전투에서 원소에게 패하였으나 최거업을 물리치고 평원 방면까지 남하하였다. 이때 전해는 제에 주둔하였고, 유비를 부장으로 하여 원소와 대적하였다. 그러나 2년 남짓한 싸움으로 식량이 떨어졌고, 병사와 백성들 모두 지쳐 굶주림에 시달렸다.[4]
초평 4년, 연주목 조조가 서주목 도겸을 공격하였을 때, 전해는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였다. 조조가 퇴각하자, 전해는 유비를 서주에 남겨두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곧 원소의 장남 원담이 평원을 거점으로 하여 청주로 진출하였고,[5] 이후 전해의 입지가 좁아졌다.[6]
2. 3. 도겸 구원
193년, 연주(兗州)목 조조가 서주(徐州)목 도겸을 공격하자,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였다. 당시 조조는 도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를 침공하고 있었다.[4] 도겸은 이웃 군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전개는 유비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서주로 가 도겸을 지원했다. 결국 조조는 군사를 물렸고, 전해는 청주로 돌아갔다.[4]2. 3. 1. 유비와의 협력
191년 이후, 공손찬은 공손범의 활약에 힘입어 하북에서 원소를 크게 억누르며 세력을 떨쳤다. 이때 공손찬은 전해를 청주자사(靑州刺史)에, 선경을 연주자사(兗州刺史)에, 엄강을 기주자사(冀州刺史)에 임명하였다.[4]192년, 공손찬은 원소와의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최거업을 물리치고 평원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이때 전해는 제에 주둔하며 유비를 부장으로 삼아 원소와 대적하였다. 그러나 2년 남짓한 싸움으로 식량이 떨어지고 병사와 백성들 모두 지쳐 굶주림에 시달렸다.
193년, 연주목(兗州牧) 조조가 서주목(徐州牧) 도겸을 공격하자, 전해는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였다.[4] 조조가 퇴각하자, 전해는 유비를 서주에 남겨두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이와 달리 유비는 도겸의 초빙을 받아 서주에 머무르게 되었다.
2. 4. 최후
191년 이후, 공손찬은 공손범의 활약 등으로 원소를 크게 억누르고 하북(河北)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때 공손찬은 전해를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하였다.192년, 공손찬은 원소와 싸워 패하였으나 최거업을 물리치고 평원 방면까지 남하하였다. 이때 전해는 제에 주둔하였고, 유비를 부장으로 하여 원소와 대적하였다. 그러나 2년 남짓한 싸움으로 식량이 떨어졌고, 병사와 백성들 모두 지쳐 굶주림에 시달렸다.
193년, 조조가 서주목(徐州牧) 도겸을 공격하였을 때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였다. 조조가 퇴각하자, 전해는 유비를 서주에 남겨두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이후 원소의 장남 원담이 평원을 거점으로 청주로 진출하면서 전해의 입지가 좁아졌다.[5][6]
199년 3월,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여 자결할 때, 전해도 함께 전사하였다.[7]
2. 4. 1. 역경 전투와 전사
199년 역경 전투에서 전해는 공손찬 휘하의 장수로 참전했다. 당시 공손찬은 원소에게 밀려 역경(易京)에 웅거하며 저항하고 있었다. 전해는 공손찬을 도와 원소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공손찬은 패배하여 자결하였고, 전해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7]공손찬 세력의 몰락은 원소와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191년 이후 공손찬은 하북에서 맹위를 떨쳤으나, 192년 원소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3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했을 때, 전해는 유비와 함께 도겸을 구원하러 가기도 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연합이었을 뿐 근본적인 세력 구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198년, 공손찬과 원소 사이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고, 전해는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전해의 죽음은 공손찬 세력의 완전한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만, 공손찬이나 원소와의 관계는 언급되지 않으며, 사료와 마찬가지로 도겸에게 원군으로 간 장면에서만 등장하고 이후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4. 평가
(이전 출력이 원본 소스 부재로 인해 빈칸이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전 출력과 동일하게 빈칸으로 출력합니다.)
참조
[1]
서적
(2007), p. 272
[2]
문서
『三国志』や『三国志演義』では田楷、『後漢書』公孫瓚伝では田揩とする
[3]
삼국지
三国志
[4]
후한서
후한서
[5]
문서
곧 조조에 의하여 청주자사에 임명되었다
[6]
후한서
후한서
[7]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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