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
1. 개요
위정척사는 조선 후기 서학의 유입과 실학의 발흥, 주자학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보수 유생들의 유교 수호 운동이다. 1785년 시작되어 1860년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본격화되었으며, 천주교 탄압과 척화비 건립을 통해 쇄국 정책을 강화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개화 정책에 반대하며 신사척사상소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고, 임오군란에 연루되기도 했다.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에 맞선 민족 자주의식 고취라는 긍정적 측면과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쇄국 정책을 고집하여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유형 | 역사 |
|---|---|
| 시대 | 조선 |
| 관련 인물 | 이기경, 홍재학 등 |
| 의미 |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킨다"는 뜻 |
|---|---|
| 내용 | 서양 세력의 침략과 천주교를 배척하고 쇄국을 주장하는 사상 및 운동 |
| 원인 |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 위협 천주교의 확산 |
|---|---|
| 사회적 불안 |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민생 악화 |
| 초기 | 1860년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겪으며 고조 |
|---|---|
| 주요 사건 | 척화비 건립 대원군의 쇄국 정책 추진 |
| 후기 | 개화 정책 추진에 반발하여 더욱 격렬해짐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을 계기로 사회적 지지 확대 |
| 성리학적 세계관 |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른 오랑캐 사상 배척 |
|---|
| 대표적 인물 | 이기경 홍재학 |
|---|
| 긍정적 영향 | 민족 주체성 확립,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 의식 고취 |
|---|---|
| 부정적 영향 | 개화 지연 쇄국 정책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 심화 |
| 한계 |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 부족, 근대화의 필요성 간과 |
| 평가 | 척사위정론은 조선 사회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외세에 대한 저항 정신을 드러내는 사상으로 평가됨. 오늘날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도 함. |
|---|
-
조선의 유학 -
실학
실학은 조선 시대에 등장하여 서구 과학과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사회 문제 해결과 백성들의 삶 개선을 위해 실제 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추구하며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시도한 사상이다. -
조선의 유학 -
위정척사파
위정척사파는 조선 후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외세에 저항하며 쇄국정책을 옹호하고 서양 문물을 배척한 유학자 집단으로, 항일 의병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학파로 구성되었다. -
조선의 정치 단체 -
개화파
개화파는 187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 초 조선에서 서양 문물 수용을 지지하며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했던 개혁 세력으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나 임오군란 이후 분열되어 친일 행위로 국권 침탈에 가담하거나 애국계몽운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행보를 보였다. -
조선의 정치 단체 -
위정척사파
위정척사파는 조선 후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외세에 저항하며 쇄국정책을 옹호하고 서양 문물을 배척한 유학자 집단으로, 항일 의병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학파로 구성되었다. -
대한제국의 정치 단체 -
개화파
개화파는 187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 초 조선에서 서양 문물 수용을 지지하며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했던 개혁 세력으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나 임오군란 이후 분열되어 친일 행위로 국권 침탈에 가담하거나 애국계몽운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행보를 보였다. -
대한제국의 정치 단체 -
위정척사파
위정척사파는 조선 후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외세에 저항하며 쇄국정책을 옹호하고 서양 문물을 배척한 유학자 집단으로, 항일 의병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학파로 구성되었다.
2. 배경
조선 후기, 서학(西學)이 유입되고 실학(實學)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주자학(朱子學)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천주교(天主敎)가 전파되자, 주자학을 신봉하던 보수 유생들은 천주교를 사도(邪道)로 간주하고 유교(儒敎)를 수호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3. 전개 과정
위정척사 운동은 세 시기로 구분된다. 1기에는 천주교 배척과 실학자 탄압이, 2기에는 개화 반대와 천주교·동학 거부가, 3기에는 국권 수호와 항일의병운동이 중심이 되어 한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3.1. 초기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
1785년 서학 옥사가 일어나자 유하원 등은 서양 서적의 금지를 주장하였다.
1788년 이경명은 서학의 폐단을 상소하고 그해 8월 천주교 서적을 불태웠다.
1791년부터 정부의 천주교 박해가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유교적 입장에 선 고관들의 상소에 의한 것이었다.
1839년 이지연이 천주교 토벌을 주장하고 기해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척사윤음'이 반포되었다.
3.2. 중기 (19세기 중반)
1839년 이지연이 천주교 토벌을 주장하고 기해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척사윤음'이 반포되었다. 1866년에는 기정진, 이항로 등이 척화소를 올렸다.
--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집권하여 위정척사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고, 서구 열강을 배척하여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위정척사 사상을 널리 알렸다. 척화비에는 "양이침범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이만손 등이 영남 만인소를 올려 개화에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켰고, 김평묵, 최익현 등이 이를 이어갔다. 1881년에는 위정척사파 양반들이 김홍집 등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각료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다(신사척사상소운동). 그러나 민씨 정권은 상소 대표였던 홍재학을 사형에 처하는 등 강경하게 탄압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흥선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고 위정척사파 정치범들이 석방되기도 했지만,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납치되었다.
3.3. 후기 (19세기 말 ~ 20세기 초)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이만손 등의 만인소는 개화 반대 여론을 주도했고, 김평묵, 최익현 등이 이 흐름을 이어갔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 국권 수호, 매국노 처단, 항일 무장 투쟁 등으로 위정척사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 위정척사 운동은 항일 의병 운동으로 발전하여 국권 수호와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4. 위정척사 운동의 성격과 한계
위정척사 운동은 조선 후기 주자학적 질서를 지키고 외세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는 운동이었다. 보수 유생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 사회 체제를 지나치게 고수하려 했다는 한계도 있었다.
4.1. 긍정적 측면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주 의식을 높이고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서학(천주교)이 전파되자,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를 사도(邪道)로 배척하고 국교인 유교를 수호하려는 움직임은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에는 개항과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진 것은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민족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