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현
1. 개요
정광현은 190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도쿄제국대학 영법학과를 졸업했다. 숭실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 활동을 펼쳤고, 일제강점기에는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시련을 겪었다. 해방 후 미군정청 법무관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로 임용되어 친족법과 상속법 연구에 매진했으며, 한국 법학 발전에 기여했다. 1966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1967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으며, 1980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는 엄격한 교육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 도서를 기증하여 '설송 문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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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법학자 -
윤치영
윤치영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며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제헌 국회의원, 초대 내무부 장관, 주프랑스 공사, 서울특별시장, 국회의장 등을 지냈으나, 친일 의혹과 독재 정권 옹호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일제강점기의 법학자 -
유진오
유진오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대한민국 헌법 제정, 교육 및 정치 활동을 거쳤으며, 고려대학교 총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고 저서 《헌법해의》를 남겼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도쿄 대학 동문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도쿄 대학 동문 -
김상협
김상협은 삼양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의 조카로, 도쿄대 졸업 후 고려대 교수와 총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이며,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
1980년 사망 -
오히라 마사요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6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외무대신 시절 한일 및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총리 재임 중 환태평양 연대 구상을 제시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총선 직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1980년 사망 -
송요찬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 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4·3 사건 진압을 지휘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구속된 인물이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2.1.1. 출생과 성장
정광현은 190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정재명(鄭在命)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있는 선각자로 자비를 털어 학교를 설립하였다. 정광현은 아버지가 세운 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그 후 평양고보에 입학하였다.
3.1 운동에 관여한 정광현은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일본으로 유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1.2. 일본 유학
일본에서 학교 생활을 하게 된 정광현은 1921년 3월 일본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거쳐 정칙영어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중학교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 후 고등학교과정에 진학하게 된 정광현은 본디 이공계를 진학하려 하였지만 색맹때문에 진로를 변경하였다.
정광현은 오카야마에 소재한 제6고등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1925년 3월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 영법학과에 입학하였다.
2.2. 교육 및 연구 활동
2.2.1. 대학교수 시절
1928년 3월 도쿄제국대학 영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법학사를 취득한 정광현은 경제학부에 편입하여 1년 이상 공부하다가,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의 법제, 경제 담당교수로 채용되어 귀국하게 된다.
정광현은 윤치호의 여식인 윤문희와 결혼을 하였다. 이들의 결혼식은 신식으로 거행되었다. 정광현은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강사로 출강하다가 1928년 9월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수, 1930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0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그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태영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2.2.2. 일제강점기 후반의 시련
순탄하게 교수 생활을 이어가던 정광현에게 시련이 닥쳤다. 정광현은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단체는 조선 민족의 실력양성을 꾀하였다. 이를 눈엣가시로 보던 조선 총독부는 수양 동우회 사건이라는 의옥 사건을 일으켜 정광현을 비롯한 수많은 실력양성론자를 체포하였다. (1938년 5월) 정광현은 형사처벌을 겨우 면하였는데 이는 장인인 윤치호의 노력때문에 그러하였다. 그럼에도 정광현은 대화숙에 입소하여 사상 개조교육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된다.
2.2.3. 해방과 건국
태평양 전쟁 직후 조선총독부의 협조 요청을 회피하다가 1944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구관습제도조사과 연구원으로 특별 초빙되어 친족상속에 관한 관습조사를 하였다. 친족상속과 관습에 대한 연구 작업은 광복 후 미군정청 법무부와 대한민국 건국 후 법무부에 이관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해방 직후 친족상속법에 관련된 연구에만 전념하다가 1946년 4월 미군정청 법무부 법무관에 임명되어 1948년 8월까지 근무하였다.
2.3. 생애 후반
2.3.1. 대한민국 법학 발전 기여
1950년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법학의 미개척분야인 친족법과 상속법 연구에 매진하였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961년 정광현은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교수로 재직 중 한국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1년 피난지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1951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1952년 서울지방법원 인사조정 위원에 위촉되고 1952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서울대학교 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1956년 사단법인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담위원에 위촉되었다.
2.3.2. 법률 자문 및 사회 활동
1960년 4.19 혁명 직후 문교부 저작권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962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제사법위원회 호적제도 연구위원에 선임되었다. 1962년 8월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황조소성훈장을 받았다.
1963년 대법원 가사심판법률 제정 기초위원, 1963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가족법연구에 이바지하였고, 현행 <민법> 제정 당시에는 남녀평등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으며, 현행 가족법이론과 해석론 정립에 공헌하였다. 1964년 가족법연구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2.4. 정년퇴임과 최후
1966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해 제11회 학술원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고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71년 맏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0년 5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미국 메릴렌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3. 학문적 업적 및 평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광현은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시간 관념과 학점 배분이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특히 대학원생을 대함에 있어서 스파르타식 도제훈련으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정광현의 엄격한 대학원생 교육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파르타 식 교육을 도저히 못견딘 김용욱 교수(부산대 총장을 역임)가 정광현 교수를 붙들고 "교수님 저좀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정광현 교수가 "내가 너를 왜 죽여? 너가 나가 죽어 이놈아!!" 일갈을 내질렀다고 한다. 은사가 무엇을 원했는지 뒤늦게서 깨달게 된 김용욱 교수는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런 정광현 교수의 엄격한 교육을 거친 후학들로 김주수, 박병호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정광현 교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수많은 소장도서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서울대학교는 그의 기증 서적을 한 데 모아 설송 문고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3.1. 친족상속법 연구의 선구자
정광현은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시간 관념과 학점 배분이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하며, 대학원생을 대함에 있어서 스파르타식 도제훈련으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정광현의 엄격한 대학원생 교육에 대해 다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온다. 스파르타 식 교육을 도저히 못견딘 김용욱 교수(부산대 총장을 역임)가 정광현 교수를 붙들고 "교수님 저좀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정광현 교수가 "내가 너를 왜 죽여? 너가 나가 죽어 이놈아!!" 일갈을 내질렀다. 은사가 무엇을 원했는지 뒤늦게서 깨달게 된 김용욱 교수는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런 정광현 교수의 엄격한 교육을 거친 후학들로 김주수, 박병호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정광현 교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수많은 소장도서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서울대학교는 그의 기증 서적을 한 데 모아 설송 문고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3.2. 엄격한 교육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광현은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시간 관념과 학점 배분이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특히 대학원생을 대함에 있어서 스파르타식 도제훈련으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정광현의 엄격한 대학원생 교육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파르타 식 교육을 도저히 못견딘 김용욱 교수(부산대 총장을 역임)가 정광현 교수를 붙들고 "교수님 저좀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정광현 교수가 "내가 너를 왜 죽여? 너가 나가 죽어 이놈아!!" 일갈을 내질렀다고 한다. 은사가 무엇을 원했는지 뒤늦게서 깨달게 된 김용욱 교수는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런 정광현 교수의 엄격한 교육을 거친 후학들로 김주수, 박병호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정광현 교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수많은 소장도서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서울대학교는 그의 기증 서적을 한 데 모아 설송 문고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4.
5. 윤치호와의 관계
1929년 3월 12일 윤치호는 셋째 딸의 결혼식을 치렀는데, 사위는 평양 출신의 정광현이었다. 윤치호는 이광수와 교분을 맺고 있었지만, 당시 지역감정으로 인해 기호 집안 해평 윤씨였던 자신이 서북 출신 사위를 맞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비난을 걱정했다. 그러나 결혼식은 무난히 진행되었고, 윤치호는 자신의 사위가 성공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