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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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미칠적은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 내각의 대신 7명을 지칭한다. 이들은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이며, 한일 강제 병합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혐의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조약 체결 이후 작위를 받거나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하는 등 친일 행위를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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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칠적 | |
---|---|
칠적 정보 | |
구분 | 을사오적에 추가로 나라를 팔아먹은 7명의 매국노 |
별칭 | 정미7흉(丁未七凶) |
매국 행위 | |
배경 | 한성부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은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제국의 강압적인 내정 간섭에 놓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의 지배를 받게 됨. |
내용 |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킴.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내정 간섭을 더욱 심화시킴. 군대 해산, 언론 탄압, 집회 금지 등 강압적인 통치를 자행함. |
칠적 명단 | |
이완용 | 내부대신 |
박제순 | 외부대신 |
이지용 | 군부대신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조중응 | 법부대신 |
송병준 | 농상공부대신 |
임선준 | 학부대신 |
평가 및 영향 | |
비판 | 칠적은 민족 반역자로 규정되어 역사적으로 강한 비판을 받음. 이들의 행위는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을 가속화하고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함. |
관련 사건 | 칠적은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처벌 대상이 되었으나, 제대로 처벌받지 않음. 이들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사회적으로 비판받고 있으며, 재산 환수 등의 논란이 지속되고 있음. |
2. 정미칠적 명단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 내각의 각 대신들이다.
성명 | 생존 연대 (당시 나이) | 당시 직위 | 이후 경력 |
---|---|---|---|
이완용 | 1858년~1926년 (49세) | 내각총리대신 |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송병준 | 1857년~1925년 (50세) | 농상공부대신 |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 | 1864년~1926년 (43세) | 군부대신 | 자작 |
고영희 | 1849년~1916년 (58세) | 탁지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 | 1860년~1919년 (47세) | 법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재곤 | 1859년~1943년 (48세) | 학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임선준 | 1860년~1919년 (47세) | 내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2. 1. 정미칠적 구성원
성명 | 생존 연대 (당시 나이) | 당시 직위 | 이후 경력 |
---|---|---|---|
이완용 | 1858년~1926년 (49세) | 내각총리대신 |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송병준 | 1857년~1925년 (50세) | 농상공부대신 |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 | 1864년~1926년 (43세) | 군부대신 | 자작 |
고영희 | 1849년~1916년 (58세) | 탁지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 | 1860년~1919년 (47세) | 법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재곤 | 1859년~1943년 (48세) | 학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임선준 | 1860년~1919년 (47세) | 내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2. 1. 1. 이완용

1858년~1926년 (49세).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역임했다. 을사오적에도 포함되는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2. 1. 2. 송병준

1857년~1925년(50세). 일진회 출신으로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친일 행적이 뚜렷하며, 이후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2. 1. 3. 이병무

1864년~1926년 (43세). 당시 군부대신이었으며,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앞장섰다.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1]
2. 1. 4. 고영희

고영희는 1849년에 태어나 1916년에 사망했다(향년 58세). 정미칠적 당시 탁지부대신이었다. 이후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하였다.
2. 1. 5. 조중응
1860년~1919년 (47세). 정미칠적 당시 법부대신이었으며, 이후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1]
2. 1. 6. 이재곤

1859년~1943년 (48세). 정미칠적 중 한 명으로, 당시 학부대신이었으며, 이후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1]
2. 1. 7. 임선준

1860년~1919년 (47세). 대한제국의 내부대신을 역임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3. 정미칠적의 친일 행적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이후, 정미칠적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이어갔다. 이들의 행적은 일제강점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명 | 당시 직위 | 이후 경력 |
---|---|---|
이완용 | 내각총리대신 |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송병준 | 농상공부대신 |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 | 군부대신 | 자작 |
고영희 | 탁지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 | 법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재곤 | 학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임선준 | 내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4. 역사적 평가 및 비판
정미칠적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선 내각 대신들이다. 이들은 매국 행위를 통해 개인적인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4. 1.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대한민국 정부는 정미칠적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한 내각 대신들이다.성명 | 생존 연대 (당시 나이) | 당시 직위 | 이후 경력 |
---|---|---|---|
이완용 | 1858년~1926년 (49세) | 내각총리대신 |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
송병준 | 1857년~1925년 (50세) | 농상공부대신 |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병무 | 1864년~1926년 (43세) | 군부대신 | 자작 |
고영희 | 1849년~1916년 (58세) | 탁지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중응 | 1860년~1919년 (47세) | 법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이재곤 | 1859년~1943년 (48세) | 학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임선준 | 1860년~1919년 (47세) | 내부대신 |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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