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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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병준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활동한 인물이다. 함경도 장진군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김옥균의 동지가 되었으며, 이후 친일 행위를 시작하여 일진회를 조직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 당시 고종의 양위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하며 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제출했다. 한일 합방 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에 따라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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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백작 - 고희경 (조선귀족)
고희경은 외국어 능력으로 외교 및 황실 업무를 수행하고 이왕직 사무관과 중추원 고문을 지낸 조선 귀족이나, 친일 행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어 재산 일부가 환수되었다. - 조선백작 -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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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는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친일 활동을 하다가 시천교를 창설하고 한일 합방을 주도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 일진회 회원 - 윤필오
윤필오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교육계 기여와 국채보상운동 참여 후 일진회 가입, 조선총독부 군수, 한국병합기념장 수여 등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자제단 조직과 국민협회 활동을 통해 '신일본주의'를 주창하여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송병준 | |
---|---|
기본 정보 | |
![]() | |
다른 이름 | 노다 헤이지로 제암 |
직업 | 정치인 |
출생일 | 1857년 8월 20일 |
사망일 | 1925년 2월 1일 |
출생지 | 장진군, 함경도, 조선 |
사망지 | 경성, 대한제국 |
한자 표기 | |
한글 | 송병준 |
한자 | 宋秉畯 |
호 | 제암 |
이력 | |
본관 | 은진 송씨 |
아버지 | 송문수 |
어머니 | 홍씨 |
자녀 | 송종헌 |
관직 | |
관직 | 사헌부 감찰 |
재임 기간 | 1873년 6월 8일 ~ 1876년 2월 29일 |
군주 | 대한제국 고종 |
작위 |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재위 기간 | 1910년 ~ 1920년 |
작위 | 조선귀족 백작 |
재위 기간 | 1920년 ~ 1925년 |
기타 | |
거주지 | 한성부, 조선 상하이, 청나라 야마구치현, 일본 제국 한성부, 대한제국 경성부, 일제 강점기 |
사망 원인 | 뇌일혈 |
별명 | 노다 대감 |
일본어 이름 | 야다 헤이준(野田 秉畯) 노다 헤이지로(野田 平次郎) |
2. 생애
송병준은 함경도 장진군 출신으로, 저명한 성리학자 송시열의 8대손이었으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에 서출이었다.[1] 1871년 과거에 합격하여 1873년 사헌부에 부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암살을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오히려 김옥균의 인품에 감화되어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그의 동지가 되었다.[15]
귀국 후 갑신정변 세력과의 연루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이 계속되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노다 헤이지로(野田 平次郞)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통역관으로 귀국한 송병준은 일진회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귀국 후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고, 윤시병과 함께 유신회를 조직하는 데에도 가담했다. 일본군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 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酒保: PX)를 경영하기도 했다.[1]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끝난 후, 고종 황제 양위 운동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이완용 내각의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1]
한국 병합 이후, 일본 귀족 작위인 자작(子爵, shishaku)을 받고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앙고문원에서 근무했으며, 백작(伯爵, hakushaku)으로 작위가 승격되었다.
1925년 2월 1일 친일 실업가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뒤 갑자기 사망하였다.[19] 일설에는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19]
2005년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3] 송병준을 포함하여 한국의 일본 강점기 친일파 9명의 후손들의 재산[3]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4]
2. 1. 생애 초반
은진 송씨 서얼 후손으로 송문수(宋文洙)의 서자(庶子)라고 알려졌으나, 이를 증명할 족보 등의 문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에는 성씨 도용이 흔했기 때문이다. 함경남도 장진군 출생으로, 어머니 홍씨는 민태호의 첩인 기생 홍씨로 알려져 있으며 서출이었다. 이후 민영환의 식객 생활을 하게 된다.어머니가 기생이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잠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8살 때 홀로 한양으로 상경하여 수표교 근처 기생집에서 조방꾸니 노릇을 했다.[19] 우연히 세도가 민태호의 눈에 띄어 달변과 민첩한 행동으로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민영환 집안의 식객 생활을 했다.
일설에는 자신의 생모와 같은 가문 사람인 민태호의 첩 홍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유명한 성리학 철학자 송시열의 8대손이었으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에 서출이었다.[1] 동치 10년(1871년) 무과(조선의 과거의 하나)에 합격하고, 동치 12년(1873년)부터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9]
2. 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송병준은 함경도 장진군에서 태어났으며, 저명한 성리학자 송시열의 8대손이었으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에 서출이었다.[1] 1871년 과거에 합격하여 1873년 사헌부에 부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암살을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오히려 김옥균의 인품에 감화되어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그의 동지가 되었다.[15]귀국 후, 갑신정변 세력과의 연루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이 계속되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노다 헤이지로(野田 平次郞) 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통역관으로 귀국한 송병준은 일진회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귀국 후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고, 윤시병과 함께 유신회를 조직하는 데에도 가담했다. 일본군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 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酒保: PX)를 경영하기도 했다.[1]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끝난 후, 고종 황제 양위 운동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이완용 내각의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1]
한국 병합 이후, 일본 귀족 작위인 자작(子爵, shishaku)을 받고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앙고문원에서 근무했으며, 백작(伯爵, hakushaku)으로 작위가 승격되었다.
2005년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3] 송병준을 포함하여 한국의 일본 강점기 친일파 9명의 후손들의 재산[3]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4]
2. 2. 1. 민씨 일족의 식객
함경남도 장진군 출생으로, 어머니 홍씨는 양자로 들어간 민태호의 첩인 기생 홍씨로 알려져 있으며 서출이었다. 이후 민영환의 식객 생활을 하게 된다.[19]어머니가 기생이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잠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8살 때 홀로 한양으로 상경하여 수표교 근처 기생집에서 조방꾸니 노릇을 했다.[19] 우연히 세도가 민태호의 눈에 띄었는데, 달변과 민첩한 행동으로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민영환 집안의 식객(食客)생활을 했다.[19]
일설에는 자신의 생모와 같은 가문 사람인 민태호의 첩 홍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2. 2. 2. 전향과 일본 망명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 정부는 수구파였던 송병준에게 밀명을 내려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그러나 송병준은 일본에서 김옥균의 인품에 감화되어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그의 동지가 되었다.[15]이후 조선에 귀국하였으나, 1877년 일본인과 상회를 차린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민태호의 양아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1886년에는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김옥균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흥해군수,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 1897년 정부의 체포령을 피해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옥균 암살 소식을 접한 송병준은 황제와 조정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임을 포기하고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로 개명, 야마구치현에서 잠업, 밭농사, 막노동 등을 하며 은신했다. 체력이 좋았던 그는 일반적인 사대부와 달리 거친 공사장 인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 2. 3. 을사 조약 전후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송병준은 일본군 통역관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친일파로 변신하여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윤시병과 함께 유신회를 조직하는 데에도 가담했다. 일본군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 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酒保: PX)를 경영하기도 했다.[1]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끝난 후, 송병준은 고종 황제 양위 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1907년 고종 퇴위 후 노상에서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1]
같은 해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1]
2. 3. 한일 강제병합의 배후
1910년 10월 한일 강제병합 이후 송병준은 한일 강제병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1920년 백작(伯爵) 지위에 승급했다.[21]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22][23] 그러나 한일 강제병합 조약의 원흉으로 몰려 여러 번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일진회 회원이었던 송병준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부터 고종 황제의 마지막 내각에서 농상공부 대신을 역임했다. 한국 병합 이후, 일본 귀족 작위인 자작(子爵)을 받고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앙고문원에서 근무했으며, 백작(伯爵)으로 작위가 승급되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난 1907년, 송병준은 고종의 양위 운동을 전개하여 고종을 퇴위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이완용 내각이 성립되자 농상공부대신·내상을 역임하면서 이용구 등 일진회 회원들과 연명으로 「한일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순종·소네 아라스케 한국통감·이완용 총리 3명에게 제출했다. 합방 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자작에 서임되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내다 후에 백작으로 승작했다.[10]
2. 4. 사망
1925년 2월 1일 친일 실업가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뒤 갑자기 사망하였다.[19] 일설에는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19]3.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25]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25]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25] 11월 22일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송병준의 재산도 국가귀속 대상으로 결정했다.[26]
2008년, 송병준의 증손자는 재산 국가귀속 결정에 반발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27]
2010년 8월, 송병준의 후손들은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는 옛 미쓰비시 공장 부지(부평 미군부대 부지, 부평공원 조성 예정)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부지는 3000억원대로 추산되며 부평구의 절반에 해당한다.[28]
4. 평가
송병준은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많은 부를 축적했으나, 그 과정은 '권력을 앞세운 재산 강탈'로 평가된다.[24] 한국 최초의 친일 합작업자 제1호,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 제1호 등의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붙었다.
그는 돈을 밝혔지만 의리와 은혜를 몰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영환이 순절하자 그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부인을 협박했고, 이를 낭설이라 보도하면 사례하겠다고 국민신보에 제의했다가 국민신보마저 배신하여 국민신보의 이강호(李康鎬)에게 폭로당했다.[19] 친구인 김시현이 죽자 재산 관리를 맡았으나, 재산 횡령 혐의로 사후에 소송까지 당했다.[19]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통역관으로 활동했고, 친일 정치 단체 일진회를 통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이러한 행위로 일본 귀족 작위인 자작(子爵)을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백작(伯爵)으로 작위가 승격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 장남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송병준을 포함한 친일파 9명의 후손 재산을 몰수했다.[3][4] 2007년 5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 부자의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기로 결정했고,[11] 11월 22일에는 제3자에게 처분된 송병준의 재산도 국가 귀속 대상에 포함했다.
5. 가족 관계
6. 관련 작품
송병준을 소재로 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6. 1. 드라마
6. 2. 영화
- 도마 안중근 (2004년, 배우: 이정용)
7. 서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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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 -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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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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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환수되는 친일파 9인은 누구? - 권중현·이완용 등 을사오적 중 일부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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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이해승 등 친일파 재산 410억 국가귀속 - 이해승ㆍ이지용ㆍ유정수ㆍ고희경ㆍ민영휘ㆍ민병석ㆍ송병준ㆍ한창수 등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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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 증손자, ‘친일재산 특별법’ 헌법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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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송병준 후손 "반환받은 부평 캠프마켓은 내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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