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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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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안국은 938년 발해 유민 출신 열만화가 건국한 국가이다. 926년 발해가 멸망한 후 요나라의 지배에 대항하여 건국되었으며, 970년에는 송나라에 조공하며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제안하기도 했다. 976년 오현명이 왕위를 계승하고 독자적인 연호 원흥을 사용했으나, 986년 요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후에도 발해 유민들의 저항은 지속되었으며, 989년에는 후발해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기도 했으나 1003년 완전히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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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토착어 명칭
일반적인 긴 이름Jeongan
통칭Jeongan
역사
존속 기간 시작938년
존속 기간 종료986년
사건 시작건국
사건 종료멸망
이전 국가발해
이후 국가고려
요나라
지도
정안국
정안국 지도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서경압록부
지도자 칭호국왕
초대 지도자열만화
초대 지도자 재임 기간938년–976년
마지막 지도자오현명
마지막 지도자 재임 기간976년–986년
언어 및 문화
공용어알려지지 않음
종교알려지지 않음
기타 정보
통화알 수 없음
현재 국가중국
북한

2. 건국 배경 및 초기 역사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동란국(926년~936년)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고, 태자인 야율배를 왕으로 삼아 발해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10]

928년 동란국이 거란의 내부 사정으로 랴오양(遼陽)으로 옮겨가자, 발해의 옛 지역은 발해의 태자인 대광현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10]

이 때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출신의 발해 귀족 열만화대광현의 숙부이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동생(성명 미상)을 도와 발해 태자 대광현을 밀어내고 후발해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11]

이 시기에 발해 귀족 등 유민들이 고려로 많이 귀순한 점으로 보아 이 때 후발해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은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왕건은 발해의 태자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하사하고 왕실 호적에 올려주었으며, 함께 온 발해 관리들에게는 작위를, 병사들에게는 집과 밭을 하사하였다. 938년에는 발해인 박승(朴昇)이 3,000여 호를 이끌고 고려로 넘어왔다.[12]

936년 열만화남경 남해부에서 서경 압록부(西京鴨緑府)로 이동하고, 938년 경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다.[13] 요나라가 926년 발해를 정복한 후, 이전 발해 영토에서 많은 반란군이 일어났지만, 대부분은 요나라 군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1] 열만화 장군은 930년대 중반, 요나라의 괴뢰 국가인 동단국이 폐지되고 요나라의 주력군이 이 지역을 떠났을 때 정안국을 건국했다.[1]

열만화를 도와 정안국을 건국한 오제현(烏齊顯)의 후손으로 제2대 왕인 오현명(烏玄明)은 원흥(元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970년, 국왕은 인접한 여진족과 함께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1] 오현명 왕 때에 이르러 정안국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공격을 받아 986년 멸망하였다.[14][15] 이후 발해 유민들의 저항과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지속되었다. 공식적인 중국 역사 기록인 ''송사''는 정안국 사람들의 기원이 마한 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 멀리 떨어진 마한 연맹은 10세기 무렵 이미 천 년 가까이 사라졌고, 많은 학자들은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이 기록을 오류로 간주한다.[1] 한편, 오현명 자신은 그의 백성이 옛 고구려 땅에 살았던 발해의 잔여 세력이라고 말했다. 정안국의 조공 임무는 송나라와 정안국이 동맹을 맺고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시작하자는 제안이었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의 군사적 강성함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2][3][4]

975년, 요나라는 다시 한번 정안국을 침공했지만 실패했다.[5] 976년, 열씨는 오씨로 교체되었고, 정안국은 오현명의 통치를 받다가 서기 986년 요나라에 의해 최종 멸망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오씨가 열씨를 교체한 것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안국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979년 수만 명의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피난했고, 이는 발해 태자 대광현이 936년 수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이주한 이후 가장 큰 발해 유민 이동으로 기록되었다.[6]

정안국은 986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국가가 멸망한 후에도 요나라에 대한 발해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요나라는 991년에 정안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을 때 압록강 하류에 세 개의 군사 기지를 설치해야 했다.[7] 옛 정안국에서 일어난 발해 저항의 마지막 잔재는 999년에 소멸되었다.[8][9]

2. 1. 발해 멸망과 동란국

요나라가 926년 발해를 정복한 후, 이전 발해 영토에서 많은 반란군이 일어났지만, 대부분은 요나라 군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1] 열만화 장군은 930년대 중반, 요나라의 괴뢰 국가인 동단국이 폐지되고 요나라의 주력군이 이 지역을 떠났을 때 정안국을 건국했다.[1] 정안국은 요나라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70년, 국왕은 인접한 여진족과 함께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1] 공식적인 중국 역사 기록인 ''송사''는 정안국 사람들의 기원이 마한 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 멀리 떨어진 마한 연맹은 10세기 무렵 이미 천 년 가까이 사라졌고, 많은 학자들은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이 기록을 오류로 간주한다.[1] 한편, 오현명 자신은 그의 백성이 옛 고구려 땅에 살았던 발해의 잔여 세력이라고 말했다. 정안국의 조공 임무는 송나라와 정안국이 동맹을 맺고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시작하자는 제안이었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의 군사적 강성함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2][3][4]

975년, 요나라는 다시 한번 정안국을 침공했지만 실패했다.[5] 976년, 열씨는 오씨로 교체되었고, 정안국은 오현명의 통치를 받다가 서기 986년 요나라에 의해 최종 멸망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오씨가 열씨를 교체한 것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안국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979년 수만 명의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피난했고, 이는 발해 태자 대광현이 936년 수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이주한 이후 가장 큰 발해 유민 이동으로 기록되었다.[6]

정안국은 986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국가가 멸망한 후에도 요나라에 대한 발해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요나라는 991년에 정안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을 때 압록강 하류에 세 개의 군사 기지를 설치해야 했다.[7] 옛 정안국에서 일어난 발해 저항의 마지막 잔재는 999년에 소멸되었다.[8][9]

2. 2. 열만화의 등장과 후발해 건국

926년 요나라발해를 정복한 후, 이전 발해 영토에서는 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요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1] 930년대 중반, 열만화 장군은 요나라의 괴뢰 국가인 동단국이 폐지되고 요나라 주력군이 이 지역을 떠났을 때 정안국을 건국했다.[1] 938년에는 발해인 박승 및 삼천 호가 고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열만화는 요나라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결국 실패했다.[1]

970년, 정안국왕 열만화는 건국 직후 북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1] ''송사''는 정안국 사람들의 기원이 마한 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지만, 마한은 10세기 무렵 이미 천 년 가까이 사라졌기에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을 오류로 간주한다.[1] 한편, 오현명은 자신의 백성이 옛 고구려 땅에 살았던 발해의 잔여 세력이라고 말했다.[2] 정안국의 조공은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제안한 것이었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의 군사적 강성함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3][4]

976년~979년경, 정안국 제2대 왕 오현명이 즉위하면서 열씨에서 오씨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정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오현명은 독자적인 연호인 원흥을 사용했다. 979년 고려사에는 "이 해에 발해인 수만 명이 와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열씨에서 오씨로의 정권 교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6]

976년~984년경, 북송은 정안국에 조서를 내려 거란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981년, 오현명은 여진 사신을 통해 다시 북송에 상표하여 고려의 옛 땅과 발해 유민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말하며, 부여부가 거란에 등을 돌리고 귀순하여 거란의 위협이 있으니 송에 구원을 요청하고 싶다고 하였다. 송도 조서를 내려 송·고려·정안 3국에 의한 거란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983년 이후 거란이 정안국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985년에는 고려와 정안국에 의한 거란 포위망이 형성되자 거란은 정안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986년, 정안국은 거란(요)의 공격으로 일시 멸망했다. 거란은 압록강·혼강에 도달했고, 고려도 일시 압록강에 도달하여 거란과 고려 사이에 평화가 체결되었다.

989년경, 정안국 제3대 국왕으로 대원(재위 979년~989년경 −1018년경)이 즉위하여 정안국을 "후발해국"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1003년, 거란(요)의 공격으로 정안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2. 3. 고려로의 발해 유민 귀순

2. 4. 정안국 건국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동란국(926년~936년)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10] 928년 동란국이 랴오양(遼陽)으로 옮겨가자, 발해의 옛 지역은 발해 태자 대광현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10] 이 때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출신의 발해 귀족 열만화대광현의 숙부를 도와 발해 태자 대광현을 밀어내고 후발해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11]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은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순하였다.[12] 936년 열만화남경 남해부에서 서경 압록부(西京鴨緑府)로 이동하고, 938년 경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다.[13] 열만화를 도와 정안국을 건국한 오제현(烏齊顯)의 후손으로 제2대 왕인 오현명(烏玄明)은 원흥(元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14]

3. 정안국의 발전과 대외 관계

정안국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정안국을 건국한 열만화 왕은 송나라 태조 개보 3년(서기 970년)에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갑옷을 바쳤다.[18] 열만화의 뒤를 이어 정안국의 제2대 왕이 된 오현명송나라 태종 태평흥국 6년(서기 981년)에 다시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정안국과 송나라가 힘을 합쳐 거란을 토벌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간쑤성(甘肅省) 방면에서 일어난 서하(西夏)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요나라에 대한 협공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3. 1. 독자적 연호 사용

정안국은 독자적인 연호 원흥을 사용하였다.

3. 2. 송나라와의 연합 시도

정안국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정안국을 건국한 열만화 왕은 송나라 태조 개보 3년(서기 970년)에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갑옷을 바쳤다.[18] 열만화의 뒤를 이어 정안국의 제2대 왕이 된 오현명송나라 태종 태평흥국 6년(서기 981년)에 다시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정안국과 송나라가 힘을 합쳐 거란을 토벌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간쑤성(甘肅省) 방면에서 일어난 서하(西夏)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요나라에 대한 협공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3. 3. 오현명이 송 태종에게 보낸 표문

정안국왕 신 오현명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근년에 거란정안국의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고 하였다.[18] 오현명의 할아버지는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힘을 길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18]부여부가 근래에 거란에서 등을 돌려 정안국에 귀순하였으니, 송나라 조정으로부터 비밀 계획을 듣고 정예 군사를 거느려 거란 토벌을 돕고자 하며, 원수를 갚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18] 오현명은 원흥 6년(981년) 10월, 태종에게 이러한 내용의 표문을 올렸다.[18]

4. 정안국의 멸망과 발해 부흥 운동

926년 요나라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유민들은 옛 발해 영토에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대부분 요나라 군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1] 938년, 열만화정안국을 건국하였다.[1] 970년, 정안국은 여진족과 함께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1] ''송사''는 정안국 사람들의 기원이 마한 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이 기록을 오류로 간주한다.[1] 오현명은 자신의 백성이 옛 고구려 땅에 살았던 발해의 잔여 세력이라고 주장했다.[2] 정안국은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제안했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의 군사적 강성함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2][3][4]

976년~979년경, 오현명이 정안국 제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6] 한국 역사학자들은 오씨가 열씨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 정안국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6] 981년, 정안국왕 오현명은 여진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고려의 옛 땅과 발해의 유민으로 한 모퉁이를 지키고 있다"라며, 부여부거란에 등을 돌리고 귀순하여 거란의 위협이 있으니 송에 구원을 요청하고 싶다고 하였다.[19]

983년 이후 거란이 정안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19] 985년, 고려와 정안국은 거란 (요나라)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거란은 정안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20] 986년 요나라는 1차(983~984년), 2차(985~986년)에 걸쳐 정안국을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였으며, 정안국 땅에 4개 주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20] 이로써 2대 48년간 지속되던 정안국은 멸망하였다.[20]

정안국이 멸망한 후에도 발해 유민들의 요나라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고, 991년 요나라는 압록강 하류에 세 개의 군사 기지를 설치해야 했다.[7] 옛 정안국 지역에서 일어난 발해 저항의 마지막 잔재는 999년에 소멸되었다.[8][9]

4. 1. 요나라의 침공과 정안국 멸망

926년 요나라발해를 정복한 후, 이전 발해 영토에서는 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요나라 군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1] 938년에는 열만화가 정안국을 건국하였다.[1] 970년, 정안국은 여진족과 함께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1] ''송사''는 정안국 사람들의 기원이 마한 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이 기록을 오류로 간주한다.[1] 오현명은 그의 백성이 옛 고구려 땅에 살았던 발해의 잔여 세력이라고 말했다.[2] 정안국은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제안했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의 군사적 강성함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2][3][4]

976년~979년경, 오현명이 정안국 제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6] 한국 역사학자들은 오씨가 열씨를 교체한 것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안국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6] 981년, 정안국왕 오현명은 여진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고려의 옛 땅과 발해의 유민으로 한 모퉁이를 지키고 있다"라며, 부여부거란에 등을 돌리고 귀순하여 거란의 위협이 있으니 송에 구원을 요청하고 싶다고 하였다.[19]

983년 이후 거란이 정안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19] 985년, 고려와 정안국에 의한 거란 (요나라) 포위망이 형성되자, 거란은 정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986년 요나라는 1차(983~984년), 2차(985~986년)로 정안국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였으며, 그 땅에 4개 주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20] 이로써 2대 48년간 지속되던 정안국은 멸망하였다.[20]

정안국이 멸망한 후에도 요나라에 대한 발해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991년 요나라는 압록강 하류에 세 개의 군사 기지를 설치해야 했다.[7] 옛 정안국에서 일어난 발해 저항의 마지막 잔재는 999년에 소멸되었다.[8][9]

4. 2. 발해 부흥 운동의 지속

요나라가 926년 발해를 정복한 후, 이전 발해 영토에서 많은 반란군이 일어났지만, 대부분은 요나라 군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1] 열만화 장군은 930년대 중반, 요나라의 괴뢰 국가인 동단국이 폐지되고 요나라의 주력군이 이 지역을 떠났을 때 정안국을 건국했다.[1] 정안국은 요나라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70년, 국왕은 인접한 여진족과 함께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1] 공식적인 중국 역사 기록인 ''송사''는 정안국 사람들의 기원이 마한 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 멀리 떨어진 마한 연맹은 10세기 무렵 이미 천 년 가까이 사라졌고, 많은 학자들은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이 기록을 오류로 간주한다.[1] 한편, 오현명 자신은 그의 백성이 옛 고구려 땅에 살았던 발해의 잔여 세력이라고 말했다. 정안국의 조공 임무는 송나라와 정안국이 동맹을 맺고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시작하자는 제안이었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의 군사적 강성함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2][3][4]

975년, 요나라는 다시 한번 정안국을 침공했지만 실패했다.[5] 976년, 열씨는 오씨로 교체되었고, 정안국은 오현명의 통치를 받다가 서기 986년 요나라에 의해 최종 멸망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오씨가 열씨를 교체한 것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안국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979년 수만 명의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피난했고, 이는 발해 태자 대광현이 936년 수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이주한 이후 가장 큰 발해 유민 이동으로 기록되었다.[6]

정안국은 986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국가가 멸망한 후에도 요나라에 대한 발해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요나라는 991년에 정안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을 때 압록강 하류에 세 개의 군사 기지를 설치해야 했다.[7] 옛 정안국에서 일어난 발해 저항의 마지막 잔재는 999년에 소멸되었다.[8][9]

4. 3. 정안국과 올야의 관계

정안국은 올야국과 후발해를 제외하면 발해 유민들의 발해 부흥운동 중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이다. 송사(宋史)에는 정안국전(定安國傳)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송나라가 정안국을 국가로 승인했음을 의미하며, 정안국이란 올야인의 자칭이었다. 그러나 거란인이 쓴 역사 기록에는 정안국이 없고 올야라는 기록만 보이는데 이것은 거란인이 정안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올야라고만 기록했다는 해석이다.[21]

970년, 정안국 국왕은 인접한 여진족과 함께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1] ''송사''는 정안국 사람들의 기원이 마한 연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이 기록을 오류로 간주한다.[1] 한편, 오현명 자신은 그의 백성이 옛 고구려 땅에 살았던 발해의 잔여 세력이라고 말했다. 정안국의 조공 임무는 송나라와 정안국이 동맹을 맺고 요나라에 대한 공동 공격을 시작하자는 제안이었지만, 송나라는 요나라의 군사적 강성함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2][3][4]

975년, 요나라는 다시 한번 정안국을 침공했지만 실패했다.[5]

5. 정안국의 역대 국왕

정안국은 2대 48년간 지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16]

6. 정안국의 역사

926년 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발해 지역에 동란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웠다. 938년에는 발해 귀족 출신인 열만화정안국을 건국하였다.

970년, 정안국왕 열만화는 건국 직후 북송에 사신을 보냈다. 976년경에는 오현명이 왕위를 이었으며, 독자적인 연호인 원흥을 사용하였다. 열만화에서 오현명으로 왕위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정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981년, 정안국왕 오현명북송에 사신을 보내 거란을 함께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송나라도 이에 호응하여 송나라, 고려, 정안국 3국 간의 거란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983년에서 984년에 걸쳐 거란의 1차 침공이 있었고, 985년에서 986년 1월까지 이어진 2차 침공으로 정안국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계속되었다.

989년경, 정안국 제3대 국왕으로 대원이 즉위하여 국호를 "후발해국"으로 바꾸었다. 1003년, 거란의 공격으로 후발해국(정안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참조

[1] 논문 定安国考论 https://kns.cnki.net[...] 2011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The Liao (Chapter 1)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03
[3] 웹사이트 정안국 https://terms.naver.[...] 2019-05-20
[4] 문서 History of Song
[5] 서적 "The Liao",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 and Border States, 907–13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6] 웹사이트 고려사 (발해인 수만 명이 내투해오다) https://db.history.g[...] 2023-01-29
[7] 서적 "The Liao",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 and Border States, 907–13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8] 서적 "The Liao",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 and Border States, 907–13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9] 서적 Diplomacy and Trade in the Chinese World, 589-1276 Brill 2005
[10] 문서 대광현이 926년에 고려에 귀부했다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11] 문서 대광현이 926년에 고려에 귀부했다면 대광현축출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12] 문서 대광현 926년 고려귀부설과 대립된다.
[13] 문서 정안국의 건국 시점은 서기 938년 경으로 보고 있으나, 928년 또는 935년이라는 설도 있다. 정안국이 건국된 장소는 [[서경 압록부]]로 보고 있으나 [[상경 용천부]]라는 설도 있다.
[14] 문서 멸망 시점은 대체적으로 [[986년]]으로 보고 있다.
[15] 서적 발해의 역사와 문화 사계절 2007-03
[16] 문서 정확한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17] 문서 고려 경종 4년(서기 [[979년]])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이 [[고려]]로 넘어온 기록이 있는데, 이 사건은 정안국 내부의 왕권 교체에서 정변 등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열만화]]의 성씨는 원래 오(烏)씨(발해의 귀족으로 오소도(烏炤度), 오광찬(烏光贊) 등 오씨가 이미 존재했다.)로서 성명이 [[오열만화]](烏烈萬華)이므로, 자연스러운 왕권 승계라고 보는 설이 있다.
[18] 서적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
[19] 문서 멸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서기 [[986년]] 1월 경으로 보고 있다.
[20] 문서 정안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발해]] 유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995년]] 발해 귀족 출신 [[오소경]]은 [[올야국]](995년~1114년)을 건국했으나 1년만에 [[거란]]에 항복한다. [[1029년]] 발해의 왕족 출신 [[대연림]]이 [[흥료국]](1029년~1030년)을 건국했으나 역시 1년만에 [[거란]]에 의해 진압되었다. [[1116년]] 1월 발해 귀족 출신 [[고영창]]은 [[대발해]]([[대원국]])(1116년 1월~5월)를 건국했으나 역시 [[금나라]]에 의해 5개월만에 진압되었다. 이로써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21] 논문 올야(兀惹)·정안국(定安國)과 연파(燕頗)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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