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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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한은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까지 한반도 서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 집단으로, 초기에는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소국 연맹의 형태를 이루었다. 마한은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남하하여 세력을 구축한 세력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사군 설치 이후에도 이주가 이어졌다. 3세기 전반에는 목지국이 맹주 역할을 했으나, 백제의 성장과 함께 세력이 약화되어 5세기 경 백제에 병합되었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으며, 농업과 제천 의례 등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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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으로, 고구려에서 온 온조왕이 건국하여 한성, 웅진, 사비로 수도를 옮기며 발전했고, 중국 남조 및 왜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를 융성시켰으나 660년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 마한 - 백제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으로, 고구려에서 온 온조왕이 건국하여 한성, 웅진, 사비로 수도를 옮기며 발전했고, 중국 남조 및 왜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를 융성시켰으나 660년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 마한 - 목지국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은 진왕의 지위를 가지며 삼한의 외교를 담당했으나 백제에 밀려 쇠퇴했고, 그 실체와 중심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미미하다.
마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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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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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이름 | 마한 |
한자 표기 | 馬韓 |
로마자 표기 | Mahan |
시대 | 고대 |
정치 체제 | 국가 연합 |
건국 | 기원전 194년 |
멸망 | 6세기 (백제에 복속) |
수도 | 목지 |
사용 언어 | 한 (마한어) |
종교 | 무속신앙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
역사 | |
선대 국가 | 진 |
후대 국가 | 백제 |
지도 |
2. 역사
마한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 기존의 청동기 사회에서 발전하여, 이후 수 세기 동안 북쪽으로부터 이주민들을 계속 수용하면서 성장했다. 기원전 194년에서 180년 사이 고조선의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이 한국 북부의 기자조선에서 한국 남부의 진한으로 도망쳐왔다.[13][14]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진한 영토 내에 기반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마한이 이 세력을 정복했는지, 또는 이 세력에서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한은 분명히 이러한 북방 문화 유입의 영향을 받았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후에도 이주는 계속되었다.[2][3][4][5][6] 이는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와 훨씬 후대의 한국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1세기 마한 연맹을 이끌었던 월지국(목지국)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현재의 한강 유역 전체를 잃었다. 그러나 삼국지는 246년 한나라가 낙랑군과 대방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7][8] 백제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마한 연맹의 20개 소국만이 3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았다.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와 연합해 한반도 서남부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24]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땅을 파서 돌방을 만드는 백제의 무덤과 달리 흙을 쌓아서 그 위에 돌방을 만들고 옹관묘를 안치하는 마한식 무덤이 출토되고 있는 점, 백제의 행정구역이 6세기 중엽에 이르러 22담로에서 37군으로 바뀌는 점, 6세기 즈음 백제의 양식과 다른 금동관이 발견된 점을 들어 마한의 잔여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서 독립적 혹은 자치적으로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결국 백제는 5세기까지 마한 전체를 흡수하거나 정복했고[9], 신라와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의 하나로 성장했다.
2023년 11월 7일,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서 ‘고창 봉덕리 봉덕고분’ 발굴과 관련해 유물을 공개했다.[25]
2. 1. 건국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었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특별자치도 서부[19]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 중심이었다.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는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한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20]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21]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22]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 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23]에 세운 나라라는 견해가 있다.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에,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처럼 북방계 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3세기 전반 마한소국연맹체의 맹주는 목지국(《삼국지》에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음)의 진왕(辰王)이었다. 마한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고예맥족(古濊貊族 : 개마족)이 남하한 선주(先住) 토착 집단이라는 견해도 있고, 북마한(北馬韓)이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목지국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시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와 연합해 한반도 서남부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 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24]
하지만 최근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땅을 파서 돌방을 만드는 백제의 무덤과 달리 흙을 쌓아서 그 위에 돌방을 만들고 옹관묘를 안치하는 마한식 무덤이 출토되고 있는 점, 백제의 행정구역이 6세기 중엽에 이르러 22담로에서 37군으로 바뀌는 점, 6세기 즈음 백제의 양식과 다른 금동관이 발견된 점을 들어 마한의 잔여세력이 영산강 유역에서 독립적 혹은 자치적으로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2023년 11월 7일,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서 ‘고창 봉덕리 봉덕고분’ 발굴과 관련해 유물을 공개했다.[25]
마한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 기존의 청동기 사회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수세기 동안 북쪽으로부터 이주민들을 계속 수용하면서 성장했다. 기원전 194년에서 180년 사이 고조선의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은 한국 북부의 기자조선에서 한국 남부의 진한으로 도망쳤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진한 영토 내에 기반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마한이 이 세력을 정복했는지, 또는 이 세력에서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한은 분명히 이러한 북방 문화 유입의 영향을 받았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사군이 한반도[2][3][4][5][6]에 설치된 후에도 이주는 계속되었다. 이는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와 훨씬 후대의 한국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1세기, 마한 연맹을 형성하고 이끌었던 월지/목지는 마한의 다른 구성원국인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현재의 한강 유역 전체를 잃었다. 그러나 삼국지는 246년 한나라가 낙랑군과 대방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7][8] 백제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마한 연맹의 20개 소국만이 3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았다. 백제는 결국 5세기까지 마한 전체를 흡수하거나 정복했다.[9]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의 하나로 성장했다.
《삼국유사》[13]에 따르면, “『위지』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니, 조선왕 준은 궁인과 좌우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 하였다.’”
《위서》[14]에 따르면, “후준이 이미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난을 일으키자, 연나라 망명자 위만에게 공격받아 빼앗기고, 그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 땅에 머물러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후한서》에는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니, 이에 그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한왕이 되어 자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만이 기자조선을 멸망시켰을 때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도망쳐 마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한왕이 되어 마한을 지배하였다.
2. 2. 발전과 쇠퇴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었다. 한강 이남 서울 남동부를 중심으로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특별자치도 서부[19]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 중심이었다. 마한 지역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한다. 철기가 유입되기 전까지 이들은 청동기 제작과 교역을 통해 중남부 각지의 세력 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 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20]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였다고 한다.[21]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22]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 대접을 받았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 계통인 온조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에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해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23]에 세운 나라라는 견해가 있었다.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에,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3세기 전반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는 목지국(《삼국지》에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음)의 진왕(辰王)이었다.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 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와 연합해 한반도 서남부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24]
하지만 최근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땅을 파서 돌방을 만드는 백제의 무덤과 달리 흙을 쌓아서 그 위에 돌방을 만들고 옹관묘를 안치하는 마한식 무덤이 출토되고 있는 점, 백제의 행정구역이 6세기 중엽에 이르러 22담로에서 37군으로 바뀌는 점, 6세기 즈음 백제의 양식과 다른 금동관이 발견된 점을 들어 마한의 잔여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서 독립적 혹은 자치적으로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2023년 11월 7일,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서 ‘고창 봉덕리 봉덕고분’ 발굴과 관련해 유물을 공개했다.[25] 마한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 기존의 청동기 사회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수세기 동안 북쪽으로부터 이주민들을 계속 수용하면서 성장했다.
3. 정치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였으며,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나라는 ‘읍차(邑借)’라고 하였다.[22]
마한의 전체 호수는 10여만 호였으며, 이 중 천안에 있던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을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로 대접받았다.[10] 마한의 왕들은 때때로 자신들을 "진(晉)의 왕"이라고 부르며 삼한 전체에 대한 명목상의 주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 계통인 온조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에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4. 문화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농업 중심의 정주민 사회였다.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어, 철기가 유입되기 전까지 청동기 제작과 교역을 통해 중남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었다.[19]
마한 사회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정치 지도자인 군장 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천군(天君)이 따로 존재했다. 소도(蘇塗)라는 특별 구역이 존재했는데, 이곳은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매고 귀신을 제사하던 곳으로, 죄인도 함부로 잡지 못할 만큼 신성시되었다. 이는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며, 단군 설화에 나오는 신단수의 유풍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마한에서는 5월에 씨뿌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여럿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수십 명이 손발의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이는 전라도 지방의 ‘강강술래’와 같은 노래춤[26]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10월에도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풍년을 축하하는 의미였다.
장례는 후하게 지냈으며, 관(棺)은 사용했지만 곽(槨)[27]은 쓰지 않았다. 소와 말을 순장(殉葬)하는 풍습도 있었다.
마한의 문화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5. 마한 54개국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 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되어 있다.[20] 각 소국의 지배자는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 ‘읍차(邑借)’ 등으로 불렸다.[21][22]
마한의 54개국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위치 |
---|---|
감해국(感奚國) | 익산시 |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 홍성군 |
건마국(乾馬國) | 익산시 |
고랍국(古臘國) | 남원시 |
고리국(古離國) | 익산시 |
고비리국(古卑離國) | 양평군 또는 여주시 |
고원국(古爰國) | |
고탄자국(古誕者國) | |
고포국(古蒲國) | 부여군 |
구로국(狗盧國) | 청양군 |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 장성군 |
구소국(狗素國) | 정읍시 |
구해국(狗奚國) | 강진군 |
내비리국(內卑離國) | |
노람국(怒藍國) | |
대석삭국(大石索國) | 양주시 또는 강화군 |
막로국(莫盧國) | |
만로국(萬盧國) | 보령시 또는 군산시 |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 고창군 |
모수국(牟水國) | 수원시 |
목지국(目支國) | 천안시 |
백제국(伯濟國) | 서울특별시 |
벽비리국(辟卑離國) | 김제시 |
불미국(不彌國) | 나주시 |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 전주시 |
불운국(不雲國) | 공주시 또는 보성군 |
비리국(卑離國) | 군산시 |
비미국(卑彌國) | 서천군 |
사로국(駟盧國) | 홍성군[11] |
상외국(桑外國) | 화성시 |
소석삭국(小石索國) | 교동도 |
소위건국(素謂乾國) | 보령시 |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 김포시 |
신분활국(臣濆活國) | 안성시 또는 가평군 |
신소도국(臣蘇塗國) | 태안군 |
신운신국(臣雲新國) | 천안시 |
신흔국(臣釁國) | 대전광역시 또는 아산시 |
아림국(兒林國) | 서천군 또는 예산군 |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 익산시 |
염로국(冉路國) | 아산시 |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 부천시 |
원양국(爰襄國) | 화성시 또는 파주시 |
원지국(爰池國) | 여수시 |
일난국(一難國) | |
일리국(一離國) | |
일화국(日華國) | |
임소반국(臨素半國) | 군산시 |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 이천시 |
지반국(支半國) | 부안군 |
지침국(支侵國) | 음성군 |
첩로국(捷盧國) | 정읍시 |
초리국(楚離國) | 고흥군 |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 진도군 |
치리국국(致利鞠國) | 서천군 |
6. 역대 국왕
청주 한씨 족보에 따르면, 마한 역대 왕의 명칭과 재위 기간이 기록되어 있다. 족보에는 "(마한 건국~멸망까지 9대) 후조선 마지막 애왕(哀王)의 망명 후 마한 건국에서 멸망까지 9대 왕위 세습"이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족보 속 왕계보는 조상 숭배 사업의 일환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아 일부 사학계에서는 실제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28] 계왕 축출 이후에도 마한은 2백 년 정도 더 존속했으나, 이후 군주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사라져 알 수 없다.
대수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무강왕(武康王), 애왕(哀王) | 한준(韓準) | 기원전 ?년~기원전 193년 | 기자조선 마지막 왕, 목지국 초대 국왕 |
2 | 강왕(康王) | 한탁(韓卓) | 기원전 193년~기원전 189년 | |
3 | 안왕(安王) | 한감(韓龕) | 기원전 189년~기원전 157년 | |
4 | 혜왕(惠王) | 한식(韓寔) | 기원전 157년~기원전 144년 | |
5 | 명왕(明王) | 한무(韓武) | 기원전 144년~기원전 113년 | |
6 | 효왕(孝王) | 한형(韓亨) | 기원전 113년~기원전 73년 | |
7 | 양왕(襄王) | 한섭(韓燮) | 기원전 73년~기원전 58년 | |
8 | 원왕(元王) | 한훈(韓勳) | 기원전 58년~기원전 33년 | |
9 | 계왕(稽王) | 한정(韓貞) | 기원전 33년~기원전 17년 | 마한 마지막 왕. 온조왕에게 나라를 빼앗김. |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한 역대 국왕은 다음과 같다.
대수 | 왕명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준왕(準王) | 준(準) | 기원전 194년? ~ ? | 단군조선 마지막 왕, 목지국 초대 국왕 |
? | ? | ? | ? ~ 기원전 19년 | 박혁거세 대에 등장. |
? (마지막 대) | ? | ? | ? ~ 8년 | 온조왕 대에 등장. 마지막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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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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