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범
1. 개요
정환범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외교관, 체육인이다. 청원 출신으로, 1919년 일제의 학살 장면을 담은 필름을 상하이로 전달하는 활동을 했다. 런던, 제네바, 캠브리지 대학에서 유학 후 중국 상하이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샌프란시스코 회의 파견이 무산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신한공사 총재, 재일동포 자산반입 대책위원회 위원장, 대한육상연맹 회장,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했고, 주중화민국 특사 및 주일본 대표부 공사로 활동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재산을 육영사업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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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재 대한민국 공사 -
신성모
신성모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군인으로, 임시정부 군사위원,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등을 역임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후 독립운동, 중국 해군 복무, 광복군 활동, 해방 후 대한청년단, 내무부 및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
일본 주재 대한민국 공사 -
이동환 (1916년)
이동환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 외교관으로, 체신부 우정국장, 서울특별시 내무국장, 내무부 차관, 주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공사, 주오스트레일리아 대한민국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1991년에 사망했다.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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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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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출생 -
송영 (극작가)
송영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극작가로, 카프 계열 연극인으로 등단하여 노동 운동 풍자 작품을 발표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희곡으로 알려졌으나 한설야 숙청 시기에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보아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03년 출생 -
김기진
김기진은 팔봉이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으로, KAPF에서 활동하며 경향파 문학 이론을 이끌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2. 생애
정환범은 충청북도 청원 태생으로 공주의 영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부탁을 받고 일제의 한국인 학살 장면을 담은 필름을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이후 런던 대학, 제네바 대학, 캠브리지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1940년대 초에는 중국에서 대학교수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샌프란시스코 회의 파견이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신한공사 총재, 재일동포 자산반입 대책위원회 위원장, 대한육상연맹 회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중화민국 특사와 주일본 대표부 공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재산 60~70을 모두 한국의 육영사업에 기부하였다.
2.1. 독립운동과 해외 유학 (1919년 ~ 1940년대 초)
공주의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부탁으로 그가 이갑성 등과 함께 촬영한, 일제의 한국인 학살장면을 담은 필름을 갖고 고무신을 신고 걸어서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어서 런던 대학, 제네바 대학, 캠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40년대 초 중국 상하이로 건너와 호강대학, 성요한대학(聖約翰大學), 진단대학(震旦大学) 등에서 교편을 잡고 충칭에 있었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 정환범, 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2.2. 중국에서의 활동 (1940년대 초 ~ 1945년)
1919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부탁으로 그가 이갑성 등과 함께 촬영한, 일제의 한국인 학살 장면을 담은 필름을 갖고 고무신을 신고 걸어서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런던 대학교, 제네바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40년대 초 중국 상하이로 건너와 호강대학, 성요한대학(聖約翰大學), 진단대학(震旦大学) 등에서 교편을 잡고 충칭에 있었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 정환범, 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2.3.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활동 (1946년 ~ 1950년)
1946년 1월 상하이에서 한국으로 귀국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강의한 것을 바탕으로 조국의 경제 재건을 위해 일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946년 7월부터 신한공사 총재를 지냈고, 1946년 10월에는 재일동포 자산 반입 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7년 3월에는 대한육상연맹 회장에 임명되어 194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48년 2월부터 3월까지 대한체육회장을 맡았다. 1948년 11월 중화민국과의 통상 교섭과 중국 내 재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주중화민국 특사로 임명되어 난징에 주재하였으며(1949년 1월까지), 이때 외무부 장관 장택상은 그의 선임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1949년 1월, 주일본 대표부 공사에 임명되어 3월 1일에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 즉시 오사카, 나고야, 고베, 후쿠오카 등지에 사무소 설치를 시작하였다. 전임 대사의 경험으로 보아, 재일 한국인에 대한 한국 대표부의 직접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 1950년 1월에 공사직을 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