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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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일 관계는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되어,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인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발전해 왔다. 고대에는 벼농사, 철기 기술, 불교 등 다양한 문물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왜구의 침략과 교린 정책이 반복되었으며, 임진왜란을 겪으며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으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 지배로 인해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단과 한국 전쟁을 거치며 냉전 시대를 겪었고,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경제,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지만, 역사 인식 문제와 영토 분쟁 등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현재는 경제, 문화 교류가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 문제와 역사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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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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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주제 | 일본과 한국의 관계 역사 |
관련 문서 | 대한민국-일본 관계 일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 |
대한민국과의 관계 | |
대사관 (일본) | 주한 일본 대사관 |
대사관 (대한민국) |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 |
관계 현황 | 수교 없음 |
2. 통사
## 통사
일본사, 한국사, 백제, 신라, 고구려를 참고하면 한일 관계는 기원전 3세기 이후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 연맹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규슈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적어도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대륙 아시아에 대한 지식은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위서에 따르면, 일본의 야마타이국과 한사군은 3세기경 외교적 교류를 가졌다. 정치적 영향력의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정황이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방향으로 흘렀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설명이 있다.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110]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흑요석이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도 발굴되고 있어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114][115] 일본의 국력이 증대되면서 일본의 문물이 조선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전라남도에서도 장구형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백제는 왜에 불교를 전파했다.[7][8][9][10][11][12][13][14]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는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왕자들을 야마토 조정에 보냈다.[15][16] 역사가들은 4세기와 5세기에 백제와 가야가 일본에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 지원을 정기적으로 보내고, 야마토 조정은 기술 발전과 문화 발전을 원했으며 백제와 가야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원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고 본다.[17]
백제의 일본 파견과 일본의 백제 파견에 대한 기록은 이러한 입장을 강화하는데, 백제의 일본 파견에는 승려, 학자, 불교 관련 물품, 다양한 서적 및 의약품과 같은 전문가 파견이 포함되었고, 일본은 수천 명의 병사, 수백 마리의 말, 수십 척의 배를 정기적으로 보냈다.[18] 이후 백제는 고구려 및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수나라의 중국 통일로 인해 일본의 가장 선호하는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의자는 백제의 마지막 왕(재위 641–660)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고 부여풍과 선광왕을 일본에 머물게 했다. 660년, 백제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백제의 멸망은 야마토 조정의 즉각적인 대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오랜 동맹 관계와 양국의 통치 계급과 군주 간의 혼인 관계를 공유했기 때문에 백제를 가까운 동맹국이자 관련 국가로 여겼기 때문이다.[19] 사이메이 천황은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장군들에게 백 개의 길로 동시에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20]
귀실복신을 포함한 백제의 전직 장군들은 일본에 부여풍의 귀환과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은 수만 명의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했고, 일부 추산에 따르면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천 척의 일본 배가 파견되었다고 한다.[21] 663년, 백제를 지원하던 일본은 백강 전투에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백제 부흥은 실패로 끝났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은 주로 기술자, 건축가, 학자였던 많은 백제 한국인 난민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그 시대 일본의 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일본과 신라 간의 적대감은 고조되었다. 지토 천황은 선광왕에게 구다라노 코니키시라는 세습 칭호를 수여하고 그의 왕족 혈통을 후대에 전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에 따르면, 다카노노 니이가사는 귀화 씨족인 출신으로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이었다. 그녀는 고닌 천황의 부인으로 선택되었고, 이후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되었다.[22][23]
일본은 7세기에서 8세기 이후 중국과 공식적인 접촉을 해왔다. 중국 문화는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지만, 견당사를 통해 중국 문화가 직접 전해지면서 한국의 가치는 하락했다. 간무 천황은 799년에 신라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24] 9세기 초부터 11세기까지 일본 해적들이 한반도 남부를 약탈하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되었다.[25][26]
가마쿠라 시대 중기 동안, 일본은 당시 대륙을 지배했던 몽골 제국 (원나라)과 그 동맹국인 고려의 침략을 받았다. 원사는 고려 충렬왕이 "일본을 원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동쪽으로의 원정을 지속적으로 추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7] 몽골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고려 왕에게 1,000척의 군함을 만들도록 명령했다.[28] 두 몽골-고려 함대는 폭풍으로 파괴되었고, 이는 일본을 보호한 신풍인 가미카제 신화를 낳았다. 또한, 일본 속담 "몽골("무쿠리")과 고구려("코쿠리") 귀신이 온다! (むくりこくり)"는 몽골의 일본 침략 시대에 기원한다. 코쿠리는 일본어로 고구려의 이름이며, 침략 당시 몽골을 동반한 고려 군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29][30][31][32]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동안, 규슈에서 출항한 해적들은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을 공격했으며, 일본 해적(일본어로 "와코")으로 두려움을 샀다. 15세기부터 쓰시마의 영주들은 일본 사절과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반도 남해안에 세 곳의 조약 항구를 세웠으며, 이곳은 일본 사관으로 알려졌다.
조선 태조는 즉위 직후 아시카가 막부에 왜구 단속을 요청하고, 이후 교린 관계를 수립했다. 이러한 교린정책은 중국에 대한 사대정책과 함께 조선 시대 외교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은 일본에 통상 편의를 제공하는 회유책을 썼으나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1419년(세종 1년)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대대적으로 정벌했다 (제3차 대마도 정벌). 왕래가 단절되자, 생계에 위협을 느낀 대마도주 소오 사다모리는 통교를 간청했고, 1426년 (세종 8년) 조선은 삼포를 개항하여 교역을 허가했다. 삼포 개항 이후 왜선의 왕래가 잦아지고 거주 일본인이 증가하자, 1443년 (세종 25년) 계해조약을 체결하여 대마도와 조선 간의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고, 조선에서 지급하는 곡물을 200석으로 제한하는 등 통상을 규제했다.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정상화되면서 왜구는 줄어들었으나, 1510년 (중종 5년)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삼포를 폐쇄하고 대마도와의 통교를 단절했다. 이후 대마도주가 아시카가 막부를 통해 교역 재개를 간청하자, 임신약조와 정미약조를 체결하여 이전보다 엄격한 제한 하에 통교를 허용했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조선은 비변사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했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일본인의 내왕을 금지하고, 두 나라 사이의 정식 교섭도 정지되었다. 한편 선조 초기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전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면서 왜구의 활동은 억제되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경략의 계획을 세우고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한국 전토를 유린하여 국민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국가의 재정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개전 초반에 한양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조선군과 의병의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했다. 일본은 한국의 도자기·활자·주자학 등을 가져감으로써 문화를 크게 향상시켰다. 이 난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도쿠가와는 조선과의 평화적인 국교를 바라고 수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선은 1607년(선조 40년)에야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국교가 다시 열렸다. 그 뒤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12회 다녀왔다. 일본은 통신사와 그 일행을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한국 통신사들은 대체로 그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동안, 규슈에서 출항한 해적들은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을 공격했으며, 일본 해적(와코)으로 두려움을 샀다. 15세기부터 쓰시마의 영주들은 일본 사절과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반도 남해안에 세 곳의 조약 항구를 세웠으며, 이곳은 일본 사관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제국의 중국 정복 계획이 도화선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이 일본군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자, 전국의 다이묘 (영주)들에게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조선의 선조는 일본의 위협에 대해 중국에 알렸다. 일본은 3개월 만에 한반도를 점령했다. 조선의 선조는 처음에는 평양으로, 그 다음에는 의주로 피난했다. 1593년, 명나라 황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평양을 탈환했다. 비록 전쟁 중 조선 육군은 대부분의 육상 전투에서 패했지만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조선 수군은 이순신 제독의 결정적인 승리로 거의 모든 해전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한반도에 침략군을 묶어두는 데 기여했다. 명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 간의 교착 상태 속에서, 히데요시는 1598년 9월에 사망했다. 오대로는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군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1609년 쓰시마 섬의 소 씨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조선과 다시 교역을 시작하면서 조선통신사가 상호 방문을 통해 거의 동등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쇼군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쇼군의 후계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조선 사절단은 도쿠가와 막부의 위신을 과시하는 데 사용되었고[35],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이후,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1차례에 걸쳐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 파견되었다.[36]
야마토 왕권은 고구려를 격파하고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신라 또한 왜에 조공을 바치는 등 외교 관계를 맺었다. 한반도의 삼국은 불교와 대륙 문화를 전파하며 왜와의 친교를 강화하려 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의 명나라 정복을 꾀하여, 쓰시마의 소 씨를 통해 조선에 복종과 명나라 정벌의 선봉이 될 것을 요구했다.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바꾸어, 조선에는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축하하는 조선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약 150년 만에 통신사가 파견되어 히데요시를 알현했지만, 히데요시는 쓰시마가 명령을 바꾼 것을 알지 못했기에, 이씨 조선이 항복하러 왔다고 착각했다.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에게 명나라 정복을 선도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한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정부는 비변사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했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일본인의 내왕을 금지하고, 두 나라 사이의 정식 교섭도 정지되었다. 한편 선조 초기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전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면서 왜구의 활동은 억제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동안, 규슈에서 출항한 해적들은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을 공격했으며, 일본 해적(왜구)으로 악명을 떨쳤다. 15세기부터 쓰시마의 영주들은 일본 사절과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반도 남해안에 세 곳의 조약 항구를 세웠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서구 열강들은 "보호령", "세력권", "조차" 등의 용어로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경제에 간섭하려 했다. 새롭게 근대화된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식민지화에 동참하고자 1873년 정한론을 주장했다.[37]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메이지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촉발되었다.[37]
당시 청나라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한국을 두고 사무라이 지도자들은 한국을 점령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38] 찬성론자들은 또한 사무라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한국을 일본 팽창의 교두보이자 자원 공급원으로 삼고자 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3년 10월 작성된 "7개 조항 문서"에서 이를 비판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후 일본 군사 관계자들은 일본군이 서구 열강과의 충돌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 한국 침략은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을 설득하여 재고하게 했고, "한국 위기" 논쟁을 종식시켰다.[39]
1840년대~1850년대에 청나라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한국은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복종을 거부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급속히 근대화되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정착지 확장을 결정하고, 시장을 추가했으며 부산에 거점을 확보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 사이의 궁정 내 갈등이 지속되었다. 1882년, 대원군은 청나라 군에 의해 체포되어 톈진시 (임오군란)에 감금되었다. 민씨 일가가 권력을 잡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민씨 일가는 친일 정책에서 친청 정책으로 전환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40] 일본은 러시아가 명성황후가 매각한 광업권, 임업권, 관세권 등 한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이를 다시 매입하여 복원했다.[41]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중국의 조공 체제에서 해방시켰지만,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등 한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42]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명성황후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고 불태워졌다.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복이었다.[43][44] 명성황후의 잔혹한 암살은 한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갑오개혁과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 내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다.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의병을 결성했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며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 관리들은 점차적으로 한국 정부를 통제했지만,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반일 활동은 계속되었다. 일본은 한국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고, 일본이 도입한 근대화 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감을 간과했다.[45]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제2차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열강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07년 7월, 일본은 한국 내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미 7조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통감으로서 한국을 장악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거에 의해 암살당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다.[46][47]
일제강점기 동안 1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일본 제국 육군에서 복무했다.[48][49] 많은 한국 여성들은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갔다.[50][51][52] "위안부" 문제는 198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 간 외교적 긴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
김일성은 조선 독립 운동을 이끌었으며,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했다.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에서 그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보천군을 습격하여 일본 수비대를 격파했다.[53] 일본 측 기록은 김일성이 직접 습격을 지휘했다는 주장에 반박하며 최현이 지휘했다고 주장한다.[54] 김일성은 북한을 건국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아직 일본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이끌었으며,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이동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로비를 벌였고,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해 남한 행정관으로 인정받았다.[55]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군에 대한 무장 저항을 조정했다. 여기에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그리고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일본군 장교 암살 사건이 포함된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도피하여 한국의 주권 회복 계획을 세웠다.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한국인들은 군사 전술과 전략을 훈련받았다.[56]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임시 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1945년 일본 항복까지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57] 1945년 9월 9일, 일본 조선총독이 서울에서 미국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전역을 통치하며, 초창기에는 군사력을 전면에 내세운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산업 구조의 변화와 노동자 수요의 급증 등 한일 양국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을 주창했고, 일본 유학생들은 이를 주목했다. 유학생들은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고, 이 선언서는 김마리아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으로 옮겨져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3·1 운동은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무단 통치는 문화 통치로 전환되었고,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병합의 결과, 만주의 조선인 주민에 대한 지배권 및 간도에서 조선과 만주의 국경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보통 선거법과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을 때, 조선에는 보통 선거법이 시행되지 않았다.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고 있었고, 선거에서 의원으로 당선되는 조선인도 있었다.
해방 후 한국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고, 양국의 대일 정책도 다소 달라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한국은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서 독립을 되찾았다. 얄타 회담의 합의에 따라,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여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미국군은 38선 이남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한반도의 분단으로 소련(북한)과 미국(남한)의 세력권으로 나뉘었다. 대한민국(남한)은 일본과의 외교 및 무역 관계를 거부하며, 일본과의 긴장 상태를 이용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켰다. 초기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과 북한에 대한 반대를 정당성으로 삼아, 남한을 북한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일본과 대한민국 간의 외교 관계는 1965년 한일 기본 관계 조약이 체결되면서 수립되었으며, 일본은 이후 대한민국 (남한의 공식 명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일본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냉전의 영향으로, 한반도는 남부가 미국, 북부가 소련의 각각 점령지가 되었다 (연합군 군정기).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대한 항복을 결정했다 (일본의 항복).
조선총독부는 다음 날인 8월 15일 옥음방송 전에 독립운동가 여운형 등과 협상하여, 행정 기구를 이관하고 혼란을 최소한으로 방지하려는 계획을 수립한다.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지만, 일본군을 대신하여 서울을 포함한 남부를 미국군이, 북부를 소련군이 군사 통치를 실시했다.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소련군 장교로서 조선 북부의 평양에 입성했고, 미국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이승만이나 김구 등의 독립운동가가 서울로 돌아왔다. 미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이승만이 권력 기반을 굳히는 한편,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나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된다. 여운형은 이승만 측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고, 해방 3년 후 이승만과 김일성에 의해 남북에 두 개의 국가가 건국되었다. 김구는 남북 통일 국가를 주장하며, 독립 후 암살되었다.
연합국에는, 항복 후의 일본에 대해서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분할 통치 계획이 존재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국 최고 사령부 (GHQ/SCAP, 실질적으로 미국군 중심) 아래에서,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 통치가 실시되었다.
1952년 이승만은 평화선을 설정하여 일본 어선의 불법 조업을 막았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65년 12월 18일 국교정상화로 정부 차원의 교류가 재개되었으며, 현재 도쿄와 서울에 대사관이, 여러 대도시에 총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한일 기본 조약과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어 한일 양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일본은 한국에 5억 달러를 지불했다. 일본 정부는 이 지불에 관해 배상이 아닌 경제 협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미국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개입으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고, 한일 양국 정부는 모두 미국에 협력했다. 한국은 약 5만 명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참전했고, 군수 물자 생산, 건설, 노동자 파견, 병사 처우 등을 미국으로부터 얻었다. 일본은 남베트남을 비롯해 한국, 타이완(중화민국), 홍콩, 태국, 필리핀 등 베트남 주변 지역에 수출을 했다. 이를 베트남 특수라고도 불렀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한국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엔 차관 등 경제 협력을 이용하여 지하철·고속도로 등 각종 교통 인프라를 정비하여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공업화·경제 발전을 실현했다. 일본 상사는 한국에 진출했고, 노동력이 저렴한 한국은 일본에 중요한 수출 기지가 되었다. 또한 안전 보장에서도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평화와 안전 유지가 일본에게도 중요하다는 한국 조항을 발표했다.
한일 관계 과제에는 북한에 대한 안전 보장 문제도 있다. 2006년10월 9일 북한의 핵 실험이 처음으로 행해져, 아베 신조 총리와 노무현 대통령의 한일 정상 회담에서는 한일 연대가 확인되었다. 한일 군사 정보 보호 협정 (GSOMIA)이 체결되었지만, 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은 한미, 미일에서는 체결되었지만, 2017년 1월 시점에서는 한일에서 체결되지 않았다.
2010년대 후반, 일본 아베 신조 정권과 한국 (박근혜 →) 문재인 정권 하에서 외교 정책상의 대립 및 상호 강경 노선의 영향으로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 파기, 징용공 소송 문제, 대한민국 해군 레이더 조사 문제 발생, 한일 무역 분쟁 발발, 한국 측에 의한 한일 군사 정보 보호 협정 (GSOMIA) 파기 등 양국 관계 악화가 심화되었다.
2023년 8월 18일, 일본은 대한민국 및 미국과 3자 안보 협약을 체결했다.[68]
1945년, 소련은 조선반도 북부를 장악하고, 기존의 일본에 의한 통치 시스템을 해체하고 공산주의에 의한 새로운 체제의 건설을 진행했다. 조선 북부는 구 만주국 (현재의 중국 동북부)에서 온 일본인 이주자 및 재류자들의 귀국 경유지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1948년 9월 9일에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이 수립되었다. 이후, 조선인민군이 북위 38도선 이남으로 침공하여 남쪽의 대한민국과의 사이에 한국 전쟁 (북한 측 호칭: 조국 해방 전쟁)이 발발하여, 수도 평양을 포함한 광범위한 국토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중인 1952년 4월 28일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독립을 회복했지만,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있는 반공주의 국가가 된 일본의 자유민주당 정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 승인하지 않고, 매스 미디어와 함께 "북선"이라고 불렀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북일정상회담을 개최하고, 17일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했다. 이 방문에서 김정일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일부 영웅주의자가 폭주한 것"으로 공식 인정하고, 5명의 납치 피해자가 귀국했다.
북한은 2002년에 핵 개발을 인정했고, 북핵 문제에 관해 6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2. 1. 고대 ~ 18세기의 관계
고대에는 벼농사, 철 및 종이 생산 기술, 불교, 한의학 등 선진 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 왜의 대 한국 외교정책은 백제와는 우호, 고구려·신라와는 적대 관계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5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일본이 신라를 33차례 침범했다.[109]한일 관계는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세기 이후 삼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 연맹 사람들이 규슈로 이주하기 시작했다.[6] 대륙 아시아 지식은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위서에 따르면 일본의 야마타이국과 한사군은 3세기경 외교적 교류를 가졌다. 정치적 영향력 교류가 있었지만, 그 방향에 대해서는 상반된 설명이 있다. 불교는 한국 왕국으로부터 일본에 전해졌다.[7][8][9][10][11][12][13][14]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는 군사 지원을 대가로 왕자들을 야마토 조정에 보냈다.[15][16] 4세기와 5세기에 백제와 가야는 일본에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 지원을 정기적으로 보냈고, 야마토 조정은 기술 발전과 문화 발전을 원했으며 백제와 가야는 신라, 고구려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원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고 역사가들은 분석한다.[17] 백제의 일본 파견에는 승려, 학자, 불교 관련 물품, 서적, 의약품 등이 포함되었고, 일본은 수천 명의 병사, 수백 마리의 말, 수십 척의 배를 정기적으로 보냈다.[18] 이후 백제는 고구려 및 신라에 비해 쇠퇴하고 수나라의 중국 통일로 일본의 선호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재위 641–660)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고 부여풍과 선광왕을 일본에 머물게 했다. 660년 백제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야마토 조정은 백제를 오랜 동맹국이자 관련 국가로 여겨 즉각 대응했다.[19] 사이메이 천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고대에는 군대를 요청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비상사태에 도움을 주고 중단된 것을 복구하는 것은 올바른 원칙의 표현입니다. 백제는 궁지에 몰려 우리에게 와서 우리 손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장군들에게 백 개의 길로 동시에 진격하라는 별도의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20]
귀실복신을 포함한 백제의 장군들은 부여풍의 귀환과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은 수만 명의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했고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천 척의 배가 파견되었다.[21] 663년 백제를 지원하던 일본은 백강 전투에서 신라-당 연합군에 패배했고 백제 부흥은 실패했다. 백제 멸망 후 일본은 기술자, 건축가, 학자 등 많은 백제 유민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일본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지토 천황은 선광왕에게 구다라노 코니키시라는 세습 칭호를 수여했다. 다카노노 니이가사는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으로 고닌 천황의 부인이자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되었다.[22][23]
일본은 7세기에서 8세기 이후 중국과 공식적인 접촉을 해왔다. 중국 문화는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전해졌지만, 견당사를 통해 중국 문화가 직접 전해지면서 한국의 가치는 하락했다. 간무 천황은 799년에 신라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24] 9세기 초부터 11세기까지 일본 해적들이 한반도 남부를 약탈하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되었다.[25][26]
가마쿠라 시대 중기 동안 일본은 몽골 제국(원나라)과 그 동맹국 고려의 침략을 받았다. 원사는 고려 충렬왕이 "일본을 원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동쪽으로의 원정을 지속적으로 추천했다"고 기록한다.[27] 몽골은 일본 침략을 위해 고려 왕에게 1,000척의 군함을 만들도록 명령했다.[28] 두 몽골-고려 함대는 폭풍으로 파괴되었고, 이는 일본을 보호한 가미카제 신화를 낳았다. 일본 속담 "몽골("무쿠리")과 고구려("코쿠리") 귀신이 온다! (むくりこくり)"는 몽골의 일본 침략 시대에 기원한다. 코쿠리는 일본어로 고구려의 이름이며, 침략 당시 몽골을 동반한 고려 군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29][30][31][32]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동안, 규슈에서 출항한 해적들은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을 공격했으며, 와코로 두려움을 샀다. 15세기부터 쓰시마의 영주들은 일본 사절과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반도 남해안에 세 곳의 조약 항구를 세웠으며, 이곳은 일본 사관으로 알려졌다.
일본 열도가 고분 시대였을 무렵 한반도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있었으며, 삼국 시대라고도 불린다. 삼국 외에도 남부에 소국 연합체인 가야, 서남부에 영산강 유역 문화가 있었다. 일본 열도는 야마토 왕권에 의한 통일 정권과 다이호 율령의 완성까지 왜국 또는 대왜국이라고 자칭했다. 일본 열도와 한반도 모두 통일 정권이 생기기 전까지 각국이 독자적으로 외교를 진행했고, 중국의 영향도 받아 정세가 복잡하게 변화했다. 왜국의 한반도에 대한 외교 정책은 백제, 가야, 영산강 문화와의 교류가 중심이었지만 신라나 고구려와도 교류했다. 당시 외교에서는 질(무카와리)이라는 제도를 사용했는데, 외교 상대국에 체류하며 교섭하는 인물을 파견하는 것으로 한반도 국가 간에 빈번하게 질의 왕래가 있었다. 왜국에는 백제에서 질이 온 것 외에 신라에서도 미사흔이라는 왕자가 질로 파견되었다. 통일 정권이 생기기 전의 왜 제국은 야마토 왕권의 외교에 협력하거나, 도래인과 같은 집단을 독자적으로 사용하여 외교를 했다. 북부 규슈나 세토 내해는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 사용했고, 하리마나 키비는 독자적인 외교가 많았다.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위지왜인전》이나 《한서》 외에도 《수서》, 《송서》, 《직공도》, 《삼국사기》 등에도 당시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왜・왜인 관련의 조선 문헌)、(왜・왜인 관련의 중국 문헌)
2. 1. 1. 3세기 이전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110]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교토 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적 측면에서 일본의 벼농사 문화가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았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고인돌이 기타큐슈의 조몬 시대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 전기에 만들어졌고, 한국의 고인돌에 있는 특유한 간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반도와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 유적에서는 조몬 시대 만기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고인돌 무리가 발견되었고,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되어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 수 있다.[111]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112]문자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사가현이 원산지인 흑요석이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도 발굴되고 있어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114][115] 일본의 국력이 증대되면서 일본의 문물이 조선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전라남도에서도 장구형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왜의 사람이 백제에 정착하여 살다가 죽을 때 백제의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왜 본래의 무덤 양식인 장구형 무덤을 택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기원전 20년에 신라에서 활동한 신하 중에는 왜 출신인 호공도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건국 초부터 왜의 침범에 시달렸는데 이들은 신라 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으로서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6] 서기 14년에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신라의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자, 신라는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158년 음력 3월에 왜인이 신라에 내빙하였으며, 173년 음력 5월, 왜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신라에 내빙하였다. 193년 음력 6월, 왜인이 크게 굶주려 신라에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232년 음력 4월에는 왜가 신라의 수도 금성을 포위하니, 조분 이사금이 친정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 음력 5월 왜가 다시 신라의 동쪽을 노략하니 음력 7월에 이찬 석우로가 사도에서 왜인과 싸우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내물 마립간 때에도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으며, 364년 음력 4월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 왔는데,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마주하게 하였다. 왜병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달려들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117]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는데 이사금이 거부,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118]
가락국은 왜에 철을 공급하였다.[119]
고구려, 신라, 백제가 분립하였던 삼국시대는 7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왜(고훈 시대, 250년 ~ 538년)는 백제와의 외교 관계를 6세기 무렵까지 계속하였다. 왜는 백제로부터 불교(6세기)와 한자(4세기) 등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며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고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 때(7세기) 왜로부터 군사 인력을 제공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120]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기차게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121]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366년에 이뤄졌다.[122],[123] 왜는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건너가 각종 기술을 전하는 등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124] 근초고왕 때 유교 경전에 밝은 아직기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당시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 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 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섬, 그리고 규슈의 마쓰우라 반도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섬에서 오키노시마,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126]
고구려 장수왕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127]되고, 왕자인 문주왕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128][129][130]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이 게이타이 천황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131]와 516년 고안무[132]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도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133] 성왕은 긴메이 천황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134]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 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와 나카토미노 가마소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135][136]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 약간, 경론 약간 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137]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139] 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위덕왕 때에도 교류가 이어졌다. 577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140]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141] 그 뒤, 금속 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142]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으며,[143]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가 건너갔다.[144][145]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146]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우마코도 부친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147] 588년에 백제는 불사리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로서 장덕 백매순, 와박사로서 마나문노, 양귀문, 석마제미 등 네 명, 화공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 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148][149][150]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이자 국신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인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151] 602년 관륵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 책력, 지리, 둔갑방술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152]
구석기 시대부터 조몬 시대에 걸쳐 흑요석이 통나무 배에 의해 운반되어 장거리 교역 품목이 되었다. 현재의 사가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산출된 흑요석이, 부산에 있는 동삼동 패총에서도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한반도 토기는 쓰시마섬이나 이키섬에서 발견되고 있다. 7000년 전 조몬 시대 전기에는 규슈 북부와 한반도 남부에 어로민이 이동 생활을 하면서 해협을 왕래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조몬 토기가 발견되었으며, 일본 열도에서는 쓰시마섬, 이키섬, 규슈 북부에서 한반도 유래의 빗살무늬 토기가 있으며, 낚시 바늘이나 중국제 귀걸이도 운반되었다. 석기 시대 이후에는, 한반도의 금속기를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7000년 전에는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논벼 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일본으로 건너온 경로에 대해서는, 한반도 루트, 대륙에서 직접 오는 루트, 남서 제도 루트로 나뉜다. 벼농사 도래 경로 연구로서, 벼 유전자 연구, 각종 유적에서 출토된 농기구나 의례 연구, 수경 논밭 유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및 한반도, 요동반도 등 극동 아시아에 존재하는 벼는 온대성 자포니카종과 열대성 자포니카종의 크게 2종류로 나뉜다. 아오모리현의 다카하 III 유적과 시가현의 시모노고 유적을 시작으로, 야요이 시대 유적에서 온대성과 열대성 벼가 모두 발견되었다. 벼의 재래 품종 DNA를 핵 SSR(단순 반복 서열)법으로 분석한 결과, 대륙으로부터의 도래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양쪽 모두에서 확인되었다.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후반, 장소는 북큐슈의 겐카이 해 연안에서 시작되었으며, 가라쓰의 나바타 유적과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유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규모 도래는 크게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기원전 7세기~8세기, 기원전 4세기~5세기, 기원전 2세기~3세기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이키섬을 경유한 품종과, 대륙에서 북부 큐슈로 직접 건너온 품종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야요이 시대 후반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해진다. 북부 규슈와 한반도 남부에서는 해인족이 연안과 섬들에서 활동했으며, 권력자는 해민을 통해 청동기나 철기를 입수했다. 야요이 시대에는 통나무배를 대신하여 준구조선의 선단으로 항해가 가능해졌고, 운반하는 물품도 늘어났다. 해촌의 네트워크에 의해 해로가 긴밀해지고, 여러 나라가 성립했다. 대륙에서의 진출도 있었는데, 전한의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건설하여, 한나라의 제도에 기초한 지역이 되었다. 낙랑군에서는 토기, 청동기, 철기가 생산되었고, 중국 각지에서 온 물산도 모였다. 고구려에 정복될 때까지, 낙랑군에서 중국제 기물이 한반도와 왜에 유통되어 기술도 전해졌다. 일본과 한반도를 잇는 루트는, 낙동강의 구야국과, 북부 규슈의 나국이나 이토국이 연결되었다. 구야국에서 쓰시마, 이키를 경유하여 북부 규슈에 도착하는 루트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쓰여 있다. 야마타이국의 시대에는 일대솔이라는 관직이 이토국에 파견되었다.
2. 1. 2. 백제와 왜의 교류 (4세기 ~ 6세기)
야요이 시대 후반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북부 규슈와 한반도 남부에서는 해인족이 연안과 섬들에서 활동하며, 권력자는 해민을 통해 청동기나 철기를 입수했다. 야요이 시대에는 통나무배를 대신하여 준구조선의 선단으로 항해가 가능해졌고, 운반하는 물품도 늘어났다. 해촌의 네트워크에 의해 해로가 긴밀해지고, 여러 나라가 성립했다. 대륙에서의 진출도 있었는데,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건설하여 한나라의 제도에 기초한 지역이 되었다. 낙랑군에서는 토기, 청동기, 철기가 생산되었고, 중국 각지에서 온 물산도 모였다. 고구려에 정복될 때까지 낙랑군에서 중국제 기물이 한반도와 왜에 유통되어 기술도 전해졌다. 일본과 한반도를 잇는 루트는, 낙동강의 구야국과, 북부 규슈의 나국이나 이토국이 연결되었다. 구야국에서 쓰시마, 이키를 경유하여 북부 규슈에 도착하는 루트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쓰여 있다. 야마타이국의 시대에는 일대솔이라는 관직이 이토국에 파견되었다.삼국 시대 전반에는 고구려가 만주까지 영토를 넓혀 최대 국가가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대립을 심화시켰고, 신라는 고구려에 종속되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에 복속을 강요받던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왜국과 교섭했다. 왜국과 백제의 통교에서는 금관가야에 속하는 탁순국이 중개 역할을 했다. 백제는 훗날 전지왕이 되는 왕자를 왜국에 인질로 보내 수호를 맺었고, 왜국은 한반도에 파병하여 왜-고구려 전쟁이 벌어졌다. 왜국은 신라를 공격했지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면서 저지되었다. 왜국은 대방군에도 침입했지만, 광개토대왕에 의해 격퇴되었다.
영산강 유역은 백제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왜국과 독자적으로 교류했다. 왜국은 한반도에서 물자와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는 한편, 반도로 건너가 생활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산강 유역의 해안가에는 왜계 고분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고분도 축조되었다. 왜계 고분은 바다를 바라보는 장소에 독립적으로 세워졌으며, 석관은 북부 규슈와 비슷하고, 부장품에는 왜계 무기와 갑옷, 그리고 백제의 장식품이 많다. 따라서 매장된 사람은 북부 규슈에서 온 왜계 도래인일 가능성도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과거에는 왜국 특유의 묘로 여겨졌던 전방후원분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축조되었다. 왜국의 분묘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석실이나 하니와형 부장품 등 공통점도 있어, 피장자의 출자에 대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고분은 신분이나 출신에 따른 사회 계층이나 외교 관계도 나타내므로, 전방후원분의 출현과 대형화에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정치가 관계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한일 양국의 기항지였던 오키노시마는 삼국 시대에 야마토 왕권의 제사장이 되었고, 해상 교통의 기원이 행해졌다.
왜는 삼국 중에서 백제와의 증여가 활발해졌으며, 백제로부터 증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칠지도는 이소노카미 신궁에 현존한다. 한반도에서는 공예품과 기술자, 왜에서는 병사, 무기, 곡물, 섬유품이 증여되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온 도래인 중에는 공인도 있었으며, 4세기에 띠금식 갑옷, 4세기 후반에 마구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농기구와 공구도 수입되었다.
2. 1. 3. 신라와 왜의 대립과 갈등 (7세기 초중반)
7세기 초, 신라는 왜와의 외교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왜는 신라의 당 풍화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이는 양국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의자왕(재위 641년~660년) 13년(653년) 백제는 왜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159], 656년과 657년에는 왜에 앵무새, 낙타, 당나귀 등의 진귀한 물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왜의 동맹국인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가 멸망했다. 이후 복신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며(661년)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부여풍은 631년부터 왜에 30년간 머물렀다.[162]
왜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와 물자를 지원했지만, 663년 백강 전투에서 당과 신라 연합군에 패배했다. 왜 수군은 전술적인 한계와 조수 간만의 차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큰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당시 왜의 선박 건조 기술과 수군 전략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뒤쳐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왜군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용맹하게 싸웠으나 전사했고, 규슈 호족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는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 8년간 억류되기도 했다.
백강 전투 이후, 왜는 백제 멸망으로 인해 대거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했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나당연합군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하여 쓰시마 섬(対馬), 이키 섬(壱岐), 규슈 지역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미즈키(水城)를 건설했다. 또한 백제 유민들을 시켜 오노 성(大野城, 665년)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과 같은 조선식 산성을 쌓고,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강화했다.[166]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왜는 신라, 당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하지만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신라-당 연합이 왜를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왜의 중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신라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펼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벌였다. 이는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교류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신라와의 교류를 증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효와 의상과 같은 신라 승려들이 신라 본국보다 왜에서 더 유명해진 배경에는 이러한 정치·외교적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167]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관계가 악화되자, 신라는 후방의 안정을 위해 왜와의 관계 회복에 더욱 힘썼다. 703년에는 204명에 달하는 왜 사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168]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부족하지만, 왜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약 1세기 동안 신라 사신이 왜에 39차례, 왜 사신이 신라에 25차례 파견되었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당에 견당사를 보낸 횟수(10차례)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169]
백제와 왜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왜의 귀족 사회에는 백제계 도래인들의 후손이 많았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부여풍의 동생 선광의 후손은 왜 왕실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백제왕)라는 성을 받으며 백제의 왕통을 이었다. 간무 천황(재위 781년~806년)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가사는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의 후손인 야마토 씨 출신이다. 백제인들은 현재의 오사카시 지역에 모여 살면서 '쿠다라스'(백제주, 百濟洲일본어)라는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다.[171] 오늘날까지 이 지역에는 백제인이 만든 관계용 저수지인 백제지, 백제씨 일족, 백제 마을 등이 남아있다.
6세기, 신라가 강성해지고 고구려의 영토가 줄어들자, 고구려는 백제, 왜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게이타이 천황은 오토모노 카네무라를 통해 임나 4현을 할양하는 등 백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오미노 케노에게 가야 방어를 위한 출병을 명령했지만, 규슈의 지쿠시노 쿠니노 미야츠코인 지쿠시노 이와이의 반란으로 인해 계획은 무산되었다. 당시 왜에서는 한반도와의 외교권 및 무역 이익을 둘러싸고 야마토 왕권과 호족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키비 씨의 난과 이와이의 난도 이러한 갈등의 일부였다. 이와이의 난은 모노노베노 아라카히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출병은 중단되었고, 신라는 가야 전역을 병합했다. 이와이의 난을 진압한 왜 조정은 외교 통일을 추진하며 나츠에 외교 시설을 건설했는데, 이는 훗날 홍로관의 기원이 되었다.
야마토 왕권은 고구려를 격파하고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신라 또한 왜에 조공을 바치는 등 외교 관계를 맺었다. 한반도의 삼국은 불교와 대륙 문화를 전파하며 왜와의 친교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스이코 조정 시기 신라가 임나를 공격하자, 왜는 임나 구원군을 파견하여 신라의 5성을 격파했다. 쿠메 황자를 장군으로 임명했지만, 규슈에서 병에 걸려 파견이 중단되었다. 이후 왜는 신라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백제, 고구려와의 관계를 중시했다. 코교쿠 조정 시기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야마토 왕권은 경계를 강화했다.
2. 1. 4. 백제의 멸망과 왜의 한반도 개입 (7세기 중후반)
7세기 중후반,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왜는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했다. 아즈미노 히라후, 박시진전래진, 아베노 히라후 등이 이끄는 왜군은 백제 유신 귀실복신의 요청에 따라 왜에 인질로 와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을 백제 왕으로 옹립했다. 왜는 백제군과 함께 백강 전투(현재의 대한민국 금강)에서 당-신라 연합군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결국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백제 멸망 후 왜는 백제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고구려 유민에게는 고려군을, 신라인에게는 신라군(후의 니이자군)을 하사했다. 고구려군 대령이 된 고마노 와카미에게는 왕(코키시)의 성이, 백제 망명자 풍장의 동생 선광에게는 백제왕(구다라노코니키시)의 성이 주어졌다. 간무 천황의 생모인 고야노 노리카사 또한 백제계 도래인 가문 출신이다.
한편, 나당 전쟁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왜는 견신라사를 파견하고, 신라는 신라사를 파견하며 관계 정상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왜는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간주하는 야량자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설을 조작하기도 했다.
신라는 왜의 이러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고, 720년경부터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172] 신라 사신이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왜 사신이 신라에서 추방당하는 등 외교적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172]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신라가 720년에 왜의 서쪽 변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722년에는 모화군(毛火郡)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왜의 침입에 대비했으며,[173][174][175] 731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왜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기도 했다.[176]
백강구 전투의 패배와 백제의 멸망으로 왜는 당과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덴지 천황은 사키모리를 배치하고 봉화를 준비하는 한편, 서일본에 산성을 건설했다. 다자이후 방어는 미즈키와 오노성이 담당했으며, 억례복류 등이 축성 작업을 지도했다. 왜는 또한 외교 및 무역 시설인 지쿠시관(쓰쿠시노무로쓰미)을 설치하여 당, 신라, 발해와의 교류에 활용했다.[176]
2. 1. 5. 외교 갈등의 악화 (8세기 초)
경덕왕(742년 ~ 765년) 시대와 일본 후지와라 나카마로 집권기에 양국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742년 10월 일본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177], 753년 8월에도 일본 사신이 오만하고 무례하여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178]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일본은 당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신라를 도모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는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진행되었다.[179] 신라 정벌을 위해 다자이후에서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이라는 계획안을 마련하고 실행에 착수했다. 756년에는 북 큐슈에 이토 성(怡土城)을 축조하고, 주선사(主船司)라는 관청과 용광로, 무기제조공장을 세워 대규모 병참기지로서 기능하게 했다.
759년에는 3년 후인 762년까지 500척의 전함 건조를 지시하고, 761년에는 미노국(美濃國)과 무사시국(武藏國)에서 소년 20명씩을 징발하여 신라어 교육을 실시하는 등 대규모적인 준비를 진행했다.[180] 신라도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모벌성(毛伐城)에 노당(弩幢)을 증원하는 등 방어 준비를 갖추었다. 경덕왕은 군을 중앙의 6기정과 지방의 9주정으로 재편하여 신속한 군대 동원을 위한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757년 일본은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쫓겨난 경험이 있던 오노 타모리(小野 田守)를 단장으로 처음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하기 시작해 759년과 760년에 연이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는 신라가 일본과 발해 양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과 전쟁 시 발해의 협공을 기대한 전략이었다. 오노 타모리는 귀국길에 발해장군 양승경(楊承慶)이 인솔하는 발해사절단을 동행했고, 일본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며 발해의 참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762년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고마노 오야마(高麗大山)를 단장으로 파견된 견발해사에 대해 발해는 문관인 왕신복(王新福)을 파견하는 것으로 사실상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에 동참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일본은 나카마로의 몰락 등으로 신라 침략 계획을 접게 되었다.
한편, 대보율령(大宝律令) 제정 이후 일본은 야마토 왕권(ヤマト王権)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화이 사상에 따라 외국을 규정하고 한반도에 조공을 요구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에 신라는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며 일본과 대립했고, 발해는 일본을 단순한 무역 상대로 간주했다.
신라와 일본의 긴장 관계는 견당사(遣唐使)의 한반도 연안 경유를 어렵게 만들었지만, 신라 왕자 김태렴(金泰廉) 등이 일본 천황을 알현하고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측 병선 300척이 신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했다는 보고가 있었고, 일본 조정은 동해 연안 방어를 강화하며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후 규슈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일본은 도고쿠에서의 사키모리 징병을 폐지하고 쓰쿠시 국 사람들로 대체했다. 신라에게 패배한 당은 신라 공격을 계획하고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덴지 천황 붕어 직후였던 일본은 출병을 면제받았다. 이후 당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일본과 신라는 평시 체제로 전환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통일 국가로 체제를 정비한 일본과 신라는 서로의 지위를 놓고 대립했으며, 견당사에서는 신라 사신과 외교 석차를 놓고 다투기도 했다. 후지와라노 기요카와를 대사로 하는 견당사 때, 당 현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일본이 신라보다 하위에 놓이자 부사 오토모노 고마로가 항의하여 일본이 첫 번째 자리로 변경되기도 했다. 이듬해 오노노 모리가 견신라사로 파견되었지만, 신라의 대응에 불복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귀국했다.
안사의 난 정보가 일본에 전해지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다자이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신라 사신 김정권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후지와라노 아사카리가 정권을 심문한 결과 국서를 지참하지 않고 하급 관리임이 밝혀지자 일본은 그를 돌려보내고 신라 원정의 기운이 높아졌다. 무사시국과 미노국 양국의 소년 20명에게 신라어를 습득하게 하는 동시에 도카이도, 난카이도, 사이카이도에 절도사를 설치했다. 신라 정벌 계획이 세워졌지만, 고켄 상황과 나카마로의 불화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기노미쓰를 마지막으로 견신라사를 중지하고 신라와의 국교를 단절했다. 국교 단절로 관리 무역은 중단되었지만, 사적 무역은 증가했다.
9세기 중반 신라는 내분으로 정정이 불안정해졌고, 신라인이 규슈와 쓰시마에서 해적 행위를 벌여 일본은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신라 상인의 입국과 무역을 인정하던 일본 조정은 무역을 빌미로 일본의 정정을 염탐하는 신라인의 존재를 파악하고 상인 이외의 신라인 입국을 금지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응천문의 변이 일어나 신라를 배척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신라의 약화로 한반도는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후삼국 시대 신라 멸망 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했지만, 거란과 금의 침입, 호족들의 내분이 이어졌다. 고려 사신이 일본에 입조하여 국교를 요청했지만, 일본 조정은 조공 외에는 인정하지 않고 거절했다. 이에 고려와 여진은 일본 연안을 습격하여 장덕의 입구와 도이의 입구가 일어났다. 고려는 양반 제도로 문인과 무인이 대립하는 가운데 무신정권이 성립되었고, 이는 몽골 제국의 침략까지 이어졌다.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고려는 불교를 국가 제도에 통합하여 승려와 사원에게 세금과 병역을 면제해주었다.
2. 1. 6.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 (8세기 중반)
제공된 자료는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8세기 중반)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통일신라와 일본의 무역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해당 주제에 대한 위키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 가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신라와 왜는 무역을 통해 긴밀하게 교류했다.[181] 통일신라와 일본의 무역은 일본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의 사무역으로 이루어졌다. 사절단의 공무역은 대당무역에 비해 빈번하지 않았으나, 사절단 일행은 최대 수백 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다수의 상인이 사무역을 주도했다. 공무역은 사절단이 예물을 바치면 후대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절단의 무례한 행위에 따라 접견을 거부하고 돌려보내기도 했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보물을 통해 신라와 나라 시대의 일본이 활발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쇼소인에는 신라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 문방사우 등이 보관되어 있다. 구체적인 물품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는 일본에 들어온 신라 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 관인과 귀족들이 물품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각종 금속공예, 기물, 모직 가죽 제품, 불교 관계 물건, 약물, 향료, 염료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182]
2. 1. 7. 무역의 지속 (8세기)
신라와 당이 대립하면서 양국은 일본에 국교를 요청, 일본은 견당사와 견신라사를 파견했다.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가 안전한 신라로 사절과 유학생이 더 많이 갔다.[183] 799년 일본은 신라사 파견을 중단했다. 당시 일본은 일본을 상국으로 받드는 발해와는 왕래했으나, 대등외교를 표방하는 신라와는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803년 7월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184] 804년 5월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했으며[185], 882년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186]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중지한 상황에서 황금을 보냈다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아전인수라는 비판이 있다.[187]
당과 교역하면서도 견제를 받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 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했고, 신라에 반감을 가진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이에 따라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가 형성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고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188]
2. 1. 8. 신라와 당 對 발해와 일본의 대립 (9세기)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한국의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에 대한 퇴치 문제는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큰 숙제의 하나였다.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고려와 조선은 중국과 조선을 침략하던 일본인 해적인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대마도 정벌). 조선 태조는 즉위하자 곧 아시카가 막부와 교섭하여 왜구를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정식으로 교린(交隣)관계가 성립되었다. 중국의 왕조에 대한 사대정책과 함께 조선 시대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 이러한 교린정책은 일본 이외에 여진에 대해서도 행하여졌다. 그 뒤에 일본에 대하여 여러 가지 회유책을 써서 통상의 편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역시 근절되지 않았으므로 1419년(세종 1년)에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대대적으로 정벌(제3차 대마도 정벌)한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왕래가 끊어졌는데,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된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오(宗貞盛)는 사신을 보내어 다시 통교(通交)할 것을 누차 청하여 1426년(세종 8년) 내이포, 부산포, 염포 이렇게 삼포(三浦)를 열어 교역을 허가하였다.(삼포 개항)이렇게 하여 내왕 교역하는 데 편리하게 되자 왜선은 더욱 자주 오고 내왕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지므로, 1443년(세종 25년)에는 대마도 도주와 대마도와 조선간의 세견선(歲遣船)에 관한 조약(계해조약)을 맺어 일본의 무역선은 50척으로, 조선에서 주는 곡물은 200석으로 제한하였고 부산포, 제포, 염포의 세곳을 개항하는 것으로 통상에 제한을 가하였다. 이 밖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데도 규정이 있어서, 일본의 국왕·거추(巨酋)·규슈 단다이(九州探題)·대마도 도주·제추(諸酋) 등이 보내는 사신에 대해서는 각각 차등을 두어 영송(迎送) · 체재비(滯在費) 지급 · 상경(上京) 인원수 · 연회(宴會) · 물품 사여 및 삼포에서 머무르는 기한 등을 정하였다.
왜사선(倭使船)이 삼포에 도착하면 도서(圖書)[189]나 문인(文引)[190]을 검사하고 서울에 보내어 진상물(進上物)을 바치게 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이에 대해서 회사품(回賜品)을 주었다. 일본 사신이 서울에 오면 동평관(東平館)을 유숙소로 쓰게 하였다. 이때 일본의 진상물은 은(銀)·동·연·유황·소목(蘇木)·단목(丹木)·백반(白礬)·감초·호초·수우각(水牛角)·상아 등이었으며, 회사품은 면포(綿布)와 쌀을 비롯하여 서적·저포(苧布)·마포(麻布)·인삼·표피(表皮) 등으로서 한국과 중국과의 경우처럼 일종의 관무역이었다.
이 밖에 역시 왜관을 중심으로 사무역이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과 일본 사이의 통교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자 왜구도 훨씬 줄어들었으나, 1510년(중종 5년)에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삼포를 폐쇄하고 대마도와 통교를 단절하였다. 그 뒤에 대마도주는 아시카가 막부를 통하여 다시 교역해 줄 것을 애원하므로 임신약조(壬申約條)·정미약조(丁未約條) 등을 맺어 전에 비해 훨씬 엄격한 제한 아래 통교할 것을 허락하였다.
2. 1. 9. 왜구 퇴치와 교린 정책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한반도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 퇴치는 한일 관계의 중요한 문제였다.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고려와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했다(대마도 정벌). 조선 태조는 즉위 직후 아시카가 막부에 왜구 단속을 요청하고, 이후 교린 관계를 수립했다. 이러한 교린정책은 중국에 대한 사대정책과 함께 조선 시대 외교정책의 근간이 되었으며, 여진에 대해서도 시행되었다.조선은 일본에 통상 편의를 제공하는 회유책을 썼으나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1419년(세종 1년)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대대적으로 정벌했다(제3차 대마도 정벌). 왕래가 단절되자, 생계에 위협을 느낀 대마도주 소오 사다모리는 통교를 간청했고, 1426년(세종 8년) 조선은 내이포, 부산포, 염포 등 삼포를 개항하여 교역을 허가했다(삼포 개항).
삼포 개항 이후 왜선의 왕래가 잦아지고 거주 일본인이 증가하자, 1443년(세종 25년) 계해조약을 체결하여 대마도와 조선 간의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고, 조선에서 지급하는 곡물을 200석으로 제한하는 등 통상을 규제했다. 또한 일본 사신의 등급을 나누어 영송, 체재비 지급, 상경 인원수, 연회, 물품 하사, 삼포 체류 기간 등을 차등 적용했다.
왜사선이 삼포에 도착하면 도서[189]와 문인[190]을 검사한 후 서울로 보내 진상물을 바치게 하고, 조선은 회사품을 지급했다. 일본 사신은 동평관을 숙소로 이용했다. 일본의 진상물은 은, 동, 연, 유황, 소목, 단목, 백반, 감초, 호초, 수우각, 상아 등이었고, 조선의 회사품은 면포, 쌀, 서적, 저포, 마포, 인삼, 표피 등이었다. 이는 일종의 관무역이었다.
왜관을 중심으로 사무역도 이루어졌다.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정상화되면서 왜구는 줄어들었으나, 1510년(중종 5년)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삼포를 폐쇄하고 대마도와의 통교를 단절했다. 이후 대마도주가 아시카가 막부를 통해 교역 재개를 간청하자, 임신약조와 정미약조를 체결하여 이전보다 엄격한 제한 하에 통교를 허용했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고려에서 조선 왕조에 걸쳐 왜구는 해상 세력으로 활동하며 중국 및 한반도 연안에서 해적 행위와 밀무역을 자행했다. 14세기부터 15세기의 왜구를 전기 왜구라고 부른다. 왜구 발생 원인으로는 각국의 치안 악화와 무역 정책이 꼽힌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남북조 분열과 응인의 난 등으로 정세가 불안정했고, 고려는 원나라 군대의 점령 영향으로 피폐해졌다. 중국에서는 명이 해금 정책을 실시하면서 연안 상인들이 밀무역과 해적 행위에 가담했다. 왜구는 일본인, 조선인, 16세기에는 중국인과 포르투갈인도 섞여 있었다.
"왜구"라는 용어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등장한다. 중세 시대 왜구와 유사한 용례는 원나라 시대부터 나타나며,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명월기』에서 마쓰라 당이 고려를 공격하여 고려의 원한을 살 것을 우려했다. 『고려사』에는 충정왕 시대에 왜구의 습격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에서는 간오의 교란이 일어났던 시기에 해당한다.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 합포 등을 침입하자 고려의 최선 등이 격퇴했으며, 이를 "왜구의 침"의 시작으로 본다. 전기 왜구의 거점은 쓰시마, 이키, 마쓰라, 제주도, 저우산 군도 등이었으며, 습격한 지역의 사람들을 납치하여 강제로 부하로 삼기도 했다. 14세기 왜구는 쌀 등 필수품을 약탈했으며, 점차 대규모화되어 고려 수도 개경 부근까지 진출했다. 후지노 쓰네미쓰의 유인 살해 미수 사건으로 왜구 활동이 활성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는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정부 창고를 내륙으로 옮기고, 전라도와 양광도 연안은 황폐화되었다. 연안 지역의 인구가 감소하자 왜구는 기마대를 이끌고 내륙으로 침공했으며, 고려에서 차별받던 수척이나 재인 중에도 왜구에 가담하는 자가 나타났다.
무로마치 막부는 고려와 왜구 대책에 협력했다. 고려 사절 김일과 김룡이 파견되어 무로마치 막부와 왜구 대책을 논의했다. 규슈 탐대로 파견된 이마가와 사다요는 고려의 정몽주 등과 협력하여 오우치 씨 등과 함께 왜구를 토벌했다.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포로 송환도 이루어졌고, 고려와 대마도 소 씨 간의 통교도 시작되었다. 고려와 무로마치 막부의 사신과 국서에 대한 답례는 훗날 조선 왕조에서 조선 통신사로 이어진다. 왜구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고려의 이성계는 훗날 조선 왕조를 건국한다.
조선은 왜구 대책으로 1396년 공격을 감행하여 이키 섬과 쓰시마 섬 토벌을 명령했다. 조선은 무로마치 막부에 왜구 금압을 요구했고, 명나라도 비슷한 요청을 했다.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왜구를 진압하고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관리 무역 형태의 일조 무역이 이루어졌다. 조선의 왜구 회유책은 해적 행위를 무역으로 전환시키거나 조선으로 건너오는 사람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조선의 재정 부담이 늘어남에 따라 도항자를 제한했다. 명나라에서도 왜구 대책을 요구하는 사신이 방문하자,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조선과 교린 관계를 맺고 명나라와 책봉 관계를 맺었다.
쓰시마 섬은 왜구의 거점이었지만, 소 씨는 왜구 대책에 조선에 협력했다. 조선은 소 씨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일본 밀항자 단속을 요구했다. 쓰시마 섬은 무역 이익과 자국 방어를 위해 왜구 정보를 조선에 제공했으며, 이키 섬, 하카타, 아카마세키, 히젠 등의 상인 네트워크를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2. 1. 10. 임진왜란과 통신사
1555년(명종 10년) 왜선 60여 척이 전라도 연안을 노략질하여 전라 병사 원적(元績)·장흥부사(長興附使)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는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비변사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했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일본인의 내왕을 금지하고, 두 나라 사이의 정식 교섭도 정지되었다. 한편 선조 초기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전국(戰國)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면서 왜구의 활동은 억제되었다.임진왜란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경략(大陸經略)의 계획을 세우고 대군(大軍)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한국 전토를 유린하여 국민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국가의 재정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개전 초반에 한양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조선군과 의병의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했다.
|thumb|350px|『몽고 습래 그림 말』에서 몽골·고려군에게 백병전을 거는 일본군. 좌측에서 목을 베고 있는 무사는 다케자키 스에나가]]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대체로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를 전기와 중기로 구분한다. 일본은 한국의 도자기·활자·주자학 등을 가져감으로써 문화를 크게 향상시켰다. 이 난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도쿠가와는 조선과의 평화적인 국교를 바라고 수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선은 1607년(선조 40년)에야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국교가 다시 열렸다. 그 뒤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12회 다녀왔다.
일본은 통신사와 그 일행을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한국 통신사들은 대체로 그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막말(幕末)의 소란기를 당하여서는 내외의 정세가 복잡하였으므로 국교는 서로 정지 상태에 빠졌다. 막부를 넘어뜨리고 메이지 유신 정부를 수립한 일본은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통고하고 국교를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쇄국 정책을 펼치면서 일본에서 보낸 국서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한때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동안, 규슈에서 출항한 해적들은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을 공격했으며, 일본 해적(와코)으로 두려움을 샀다. 15세기부터 쓰시마의 영주들은 일본 사절과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반도 남해안에 세 곳의 조약 항구를 세웠으며, 이곳은 일본 사관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제국의 중국 정복 계획이 도화선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이 일본군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자, 전국의 다이묘 (영주)들에게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조선의 선조는 일본의 위협에 대해 중국에 알렸다. 일본은 3개월 만에 한반도를 점령했다. 조선의 선조는 처음에는 평양으로, 그 다음에는 의주로 피난했다. 1593년, 명나라 황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평양을 탈환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중국에 성공적으로 반격하여 서울에 집결할 수 있었다. 비록 전쟁 중 조선 육군은 대부분의 육상 전투에서 패했지만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조선 수군은 이순신 제독의 결정적인 승리로 거의 모든 해전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한반도에 침략군을 묶어두는 데 기여했다. 명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 간의 교착 상태 속에서, 히데요시는 1598년 9월에 사망했다. 오대로는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군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thumb|right|이 그림은 1748년 에도 거리를 통과하는 조선 외교 사절단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하네가와 토에이가 그린 ''조선인 우키요에'' (1748년경)이다.
전쟁 후, 일본은 세계 정세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인 쇄국을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민의 해외 선박 이용을 금지했으며, 해외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이는 일본 해적 행위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일본의 침략 기간 동안, 조선의 많은 문화 유산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일본 군인들의 만행 중 하나는 죽은 적군의 코와 귀를 베어 가는 것이었는데, 이는 부대에 할당된 "살생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과 민간인의 코와 귀를 베어 가는 행위로 발전했다. 따라서 "귀신아, 코 베어 간다!"라는 한국 속담이 생겨났다.[33]
16세기 말,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많은 한국 전문가들은 임진왜란 (그리고 몽골의 침략)을 초기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으로 꼽는다.[34] 한국 역사가 김갑동은 민간 의용병인 의병의 광범위한 동원과 조선의 선비들의 초기 근대적 민족주의적 구호를 예로 들면서, 고려 시대에 형성된 집단 의식이 한국 사회의 모든 계층의 반일 감정으로 굳어지면서 완전히 굳어지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34]
도쿠가와 막부가 1609년 쓰시마 섬의 소 씨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조선과 다시 교역을 시작하면서 조선통신사가 상호 방문을 통해 거의 동등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쇼군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쇼군의 후계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조선 사절단은 도쿠가와 막부의 위신을 과시하는 데 사용되었고 [35],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이후,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1차례에 걸쳐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 파견되었다.[36]
13세기, 고려는 몽골 제국 (이후 원 )의 쿠빌라이에게 복속된 후, 일본에 몽골 제국에의 복속을 요구했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고려는 원에 일본 침략을 제안하고, 원군과 함께 일본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의 명나라 정복을 꾀하여, 쓰시마의 소 씨를 통해 조선에 복종과 명나라 정벌의 선봉이 될 것을 요구했다.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바꾸어, 조선에는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축하하는 조선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약 150년 만에 통신사가 파견되어 히데요시를 알현했지만, 히데요시는 쓰시마가 명령을 바꾼 것을 알지 못했기에, 이씨 조선이 항복하러 왔다고 착각했다.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에게 명나라 정복을 선도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한다.
이씨 조선에는 통신사 파견 전부터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에 대한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통신사의 목적은, 명목상으로는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면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신사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각각 서인과 동인이라는 서로 다른 당파에 속해 대립 관계에 있었다. 서인의 황윤길은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한편 동인의 김성일은 침공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이씨 조선에서는 동인이 힘을 가지고 있었고,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후에 일본군이 일시에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오정보도 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를 지낸 황신은 관백은 신하이기 때문에 예의 면에서는 대등하지 않지만, 천황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관찰했다。
히데요시는 명나라로 가기 위해 한반도를 통과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씨 조선으로부터 좋은 답변을 얻지 못하자, 한반도를 공격했다(임진왜란). 초전에서 일본군은 각지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평양이나 함경도까지 진격했지만, 길어진 전선에 대해 의병의 저항을 받고, 이씨 조선이 종속하고 있는 명나라 군도 참전한다. 전쟁의 장기화를 바라지 않은 고니시 유키나가 등 영주가 있어,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을 우선시하여, 전선을 후퇴시킨 채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하여 종전이 되었고, 일본과 중국·조선 군과의 사이에서 전개된 이 전쟁은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투라고도 한다。 교전과 치안 악화, 식량 재분배와 생산의 붕괴 및 민중 반란 등이 있어, 조선의 국토는 피폐해졌다. 또한, 이때의 소동으로 관청에 보관되어 있던 호적 등도 불태워져, 그 결과 한반도에서는 백정이 감소하고, 양반을 자칭하는 자가 증가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한반도의 모습은, 일본군에 종군한 승려 게이넨에 의한 『조선일일기』와, 흥복사의 승려에 의한 『다몬인 일기』에도 쓰여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무가 정권인 에도 막부가 성립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가라 입성'에 소극적이었으며, 한반도에 파병하지 않고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희망하여 소 씨를 통해 사절을 파견했다. 이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씨 조선 사이에서 국교 회복의 교섭이 진행되었다. 광해군은 포로 송환과 무역 교섭에 응했고, 기유약조가 체결되어 무역이 재개되었다. 이씨 조선은 일본과 정식 국교가 있는 통신국이 되었다.
양국의 교섭을 중재한 쓰시마 번은, 조속한 국교 회복을 위해 도쿠가와 막부의 국서와 그에 대한 이씨 조선의 회답서를 위조, 변조했다. 변조가 발각되어 관계자가 처벌받는 야나가와 사건이 일어나고, 야나가와 사건 이후 무역은 막부가 관할했다.
일본인이 국교가 없는 땅에서 구조된 경우에는 귀국이 보장되지 않았고, 체류가 장기간에 걸치거나 귀국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 류큐, 이씨 조선, 청에서는 표류민의 송환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조선에 표착한 일본인은 보호 아래 비교적 단기간에 귀국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 이후 단교 상태에서도 양국 간의 표착민 송환은 이루어졌으며, 에도 막부의 간에이 시대에는 양국에서 표류민을 송환하는 체제가 정비되었다. 1618년부터 1872년까지 조선에서 송환된 일본인은 1200명이 넘는다. 외국에 표착한 자는, 귀국 후에 타국으로의 왕래를 금지당하고 사망 시에는 막부에 신고해야 했지만, 조선으로부터의 귀국자는 완화가 진행되어, 표착 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와카사 국 이서에서는, 하타케야마 씨처럼 표류민의 송환과 함께 이씨 조선과의 무역을 하려는 다이묘나, 이씨 조선에 사자를 보낸 다이묘도 있었다.

정식 국교가 있는 통신국으로서 외교 사절인 조선통신사도 재개되었다。무로마치 막부에 대해서는 4번 방일한 조선통신사가, 에도 막부에서는 쇼군의 대가(代)가 바뀔 때마다 쇼군 가문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하여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유지되었다. 통신사는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부터 시작되어, 국교 회복까지의 회답 겸 쇄환사 3회와 통신사가 9회, 약 200년에 걸쳐 총 12번의 방문을 했다. 이조(李朝)에서는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경계를 했고, 한반도에서의 외교 교섭은 왜관에 체재하는 쓰시마 번의 사자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쇼군의 사자는 직접 조선 국왕에게 파견되지 않았고, 일본 사절은 한성이나 내륙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조는 에도 막부의 정치에 대해, 무로마치 막부와 마찬가지로 국정을 행하는 것은 천황이 아니라 쇼군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무로마치 시대와 마찬가지로 쇼군에 대해 통신사가 파견되었다。교섭의 실무 기록은 쓰시마 번의 기록이 소 가문 문서로 남아 있으며, 그 외 쓰시마 번 유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에 의한 『교린제경』이나 『교린시말물어』, 마쓰우라 카쇼의 『조선통교대기』, 구사바 하이센의 『쓰시마 일기』 등이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외교 문서 『선린국보록』에 이어, 에도 시대에는 『속선린국보록』도 쓰여졌다。쓰시마 번의 번 유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는, 제9차 통신사의 신유한과 친교를 맺고, 신유한은 체험기로 『해유록』을 썼다。더욱이 제9차 통신사는 에도 막부가 짠 여정에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의 배관과, 그곳에서의 향응의 예정이 짜여져 있었지만, 그것을 둘러싼 트러블이 발생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호코지는 히데요시가 조립한 절이라는 점, 문앞에 귀무덤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방문을 거절했다. 일본 측은 곤혹스러워했고, 일행에 수행하고 있던 아메노모리 호슈는, "현재의 호코지는 도쿠가와의 세상(에도 막부 성립 후)에 재건된 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무관계하다"라는 변명을 했지만, 궤변이라고 일축되어 버렸다[72]。다만 상기의 변명은 일본 측의 외교관으로서의 입장상 행한 것으로, 호슈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후에 호슈가 저술한 『교린제경』에서는, 호코지에서의 향응은, 에도 막부가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거대한 호코지 대불·대불전을 보여주고 국위를 선양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호코지는 히데요시의 절"이라고 인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코지는 히데요시와 무관계"라고 하는 거짓말을 거듭한 것으로 조선통신사 일행의 감정을 거스르게 해 버렸고, 부처의 공덕은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거액의 재산을 들여 무익한 대불을 만들었다고, 일행에게 조롱받는 것으로 이어져 버렸음을 비판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통신사의 여정에 호코지가 짜여진 경위에 대해, 호슈는 일본 측의 국위 선양이 노림수였던 것이 아닌가 하고 있지만, 간에이 20년(1643년)의 제5회 조선통신사 일행이 호코지 대불의 배관을 희망했고, 그 이후 관행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반론도 있다. 규슈 국립 박물관은 방대한 쓰시마 소 가문 문서를 소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로부터 쓰시마 번주 소 요시나리에게 보내는 서신이 있어, "조선통신사가 교토에 도착했을 때 대불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한다. 쇼군의 귀에 들어간 결과, 허가를 받았으니 통신사에게 전하도록. 또한 교토 쇼시다이에게도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상기가 제5회 조선통신사 일행이 호코지 대불의 배관을 희망한 것에 대한 증거로 여겨진다. 다만 제5회 조선통신사 일행은, 호코지 대불을 발원한 것이 히데요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대불 구경을 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쇼군이 될 무렵에 에도 성의 서쪽 마루의 화재, 흉작, 매튜 페리의 우라가 내항이 일어나, 이조에서는 흉작으로 인해 통신사의 비용 조달이 곤란하게 되었다. 일·조 쌍방에서 재정난이나 외압의 어려움이 있으면서도, 쓰시마에서의 빙례를 합의한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이 될 무렵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조인이나 러시아 군함 대마도 점령 사건 등이 잇따랐기 때문에, 통신사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부산의 왜관이나 쓰시마의 이즈하라에서 교류를 유지했다。조선통신사는, 후에 세계의 기억에 등록되었다(후술)。
2. 2. 19세기 ~ 20세기 전반: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동안, 규슈에서 출항한 해적들은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을 공격했으며, 일본 해적(왜구)으로 악명을 떨쳤다. 15세기부터 쓰시마의 영주들은 일본 사절과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반도 남해안에 세 곳의 조약 항구를 세웠다.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서구 열강들은 "보호령", "세력권", "조차" 등의 용어로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경제에 간섭하려 했다. 새롭게 근대화된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식민지화에 동참하고자 1873년 정한론을 주장했다.[37]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메이지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촉발되었다.[37]
당시 청나라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한국을 두고 사무라이 지도자들은 한국을 점령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38] 찬성론자들은 또한 사무라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한국을 일본 팽창의 교두보이자 자원 공급원으로 삼고자 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3년 10월 작성된 "7개 조항 문서"에서 이를 비판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후 일본 군사 관계자들은 일본군이 서구 열강과의 충돌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 한국 침략은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을 설득하여 재고하게 했고, "한국 위기" 논쟁을 종식시켰다.[39]
1840년대~1850년대에 청나라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한국은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복종을 거부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급속히 근대화되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정착지 확장을 결정하고, 시장을 추가했으며 부산에 거점을 확보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 사이의 궁정 내 갈등이 지속되었다. 1882년, 대원군은 청나라 군에 의해 체포되어 톈진시 (임오군란)에 감금되었다. 민씨 일가가 권력을 잡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민씨 일가는 친일 정책에서 친청 정책으로 전환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40] 일본은 러시아가 명성황후가 매각한 광업권, 임업권, 관세권 등 한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이를 다시 매입하여 복원했다.[41]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중국의 조공 체제에서 해방시켰지만,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등 한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42]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명성황후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고 불태워졌다.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복이었다.[43][44] 명성황후의 잔혹한 암살은 한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갑오개혁과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 내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다.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의병을 결성했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며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 관리들은 점차적으로 한국 정부를 통제했지만,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반일 활동은 계속되었다. 일본은 한국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고, 일본이 도입한 근대화 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감을 간과했다.[45]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제2차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열강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07년 7월, 일본은 한국 내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미 7조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통감으로서 한국을 장악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거에 의해 암살당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다.[46][47]
일제강점기 동안 1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일본 제국 육군에서 복무했다.[48][49] 많은 한국 여성들은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갔다.[50][51][52] "위안부" 문제는 198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 간 외교적 긴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
김일성은 조선 독립 운동을 이끌었으며,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했다.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에서 그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보천군을 습격하여 일본 수비대를 격파했다.[53] 일본 측 기록은 김일성이 직접 습격을 지휘했다는 주장에 반박하며 최현이 지휘했다고 주장한다.[54] 김일성은 북한을 건국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아직 일본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이끌었으며,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이동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로비를 벌였고,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해 남한 행정관으로 인정받았다.[55]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군에 대한 무장 저항을 조정했다. 여기에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그리고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일본군 장교 암살 사건이 포함된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도피하여 한국의 주권 회복 계획을 세웠다.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한국인들은 군사 전술과 전략을 훈련받았다.[56]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임시 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1945년 일본 항복까지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57] 1945년 9월 9일, 일본 조선총독이 서울에서 미국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전역을 통치하며, 초창기에는 군사력을 전면에 내세운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산업 구조의 변화와 노동자 수요의 급증 등 한일 양국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을 주창했고, 일본 유학생들은 이를 주목했다. 유학생들은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고, 이 선언서는 김마리아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으로 옮겨져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3·1 운동은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무단 통치는 문화 통치로 전환되었고,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병합의 결과, 만주의 조선인 주민에 대한 지배권 및 간도에서 조선과 만주의 국경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보통 선거법과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을 때, 조선에는 보통 선거법이 시행되지 않았다.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고 있었고, 선거에서 의원으로 당선되는 조선인도 있었다.
2. 2. 1.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조선은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했고,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1910년에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했다.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개화 정책을 추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했다.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서방 정부들은 "보호령", "세력권", "조차"와 같은 방식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경제에 간섭했다.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는 식민지화 노력에 동참하고자 정한론을 내세웠다.[37]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그들은 일본이 메이지 천황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청나라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한국을 점령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고자 했으며,[38] 이는 새로운 메이지 정치 질서에서 전통적인 지방 정부 역할을 잃은 실업 상태의 사무라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일본의 팽창을 위한 아시아 대륙의 교두보를 확보하며, 일본 산업을 위한 풍부한 원자재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3년 10월에 작성된 "7개 조항 문서"에서 이를 공격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군이 서방 세계와의 어떠한 충돌에도 대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결론내렸고, 한국 침략은 일본을 파괴적인 전쟁에 노출시킬 것이므로 한국에 대한 행동은 시기상조였다. 또한,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주요 전쟁을 지원하기에는 너무 미발달되었고, 탄약 산업은 유럽 기술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을 설득하여 재고하도록 했고, 이로써 "한국 위기" 논쟁을 종식시켰다.[39]
1840~1850년대에 청나라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한국은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복종을 거부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급속히 근대화되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정착지 확장을 결정하고, 시장을 추가했으며 부산에 거점을 확보했다.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궁정 갈등이 지속되었고, 1882년 대원군은 청나라 군에 의해 체포되어 톈진시에 감금되었다(임오군란). 민씨 일가는 권력을 잡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민씨 일가는 친일 정책에서 친청 정책으로 전환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40] 일본은 러시아가 명성황후가 매각한 청송 및 경원 광업권, 북부 임업권, 관세권 등 한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이를 다시 매입하여 복원했다.[41]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중국의 조공 체제에서 해방시켰고,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이 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시작했지만, 명성황후는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42]
1895년 일본 낭인들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43][44]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복이었다. 명성황후의 잔혹한 암살은 한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은 한국 내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일으켜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60개 이상의 의병 부대를 결성하게 했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고 궁궐로 돌아온 후 러시아 경비병을 사용하는 등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일본은 에도 시대 말기에 개항했다. 왕정복고로 성립된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를 목표로 했고, 조선에서는 국왕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지도 아래 쇄국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조선은 구미의 개항 요구에 대해 청이 종주국이라는 이유로 독자적인 외교를 하지 않았고, 무력 행사도 꺼리지 않았다. 조선의 종주국인 청과 남하 정책을 계속하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은 한반도에 주목했다. 메이지 정부는 왕정복고를 조선에 알리기 위해 조선의 동래부에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중화 질서의 관점에서 수령을 거부했다. 민씨 정권이 들어서도 교섭은 진전되지 않았고, 일본은 무력으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켜 조일수호조규를 맺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전까지 쓰시마 번에 의한 교섭을 폐지하고, 메이지 시대 이후의 교섭은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조일수호조규에 대해, 일본 측은 독립국 간의 외교로 해석했지만, 조선 측에서는 일본과의 교린 관계의 부활이며, 종속 관계에는 청이 있다는 해석을 했다.
조일수호조규는 일본 측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이 개항할 때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불평등한 점이 많았으며, 개항장에서 4km 이내의 여행 및 통상권, 개항장에서의 일본 화폐 사용, 미곡 수출의 자유, 무관세 등도 정해져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조선 무역은 확대되었다. 조일수호조규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조선수신사를 파견하여 개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일본은 왜관 부지를 이어받아 일본인 거류지를 건설했고, 조선은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을 개항했다. 1880년에 일본 공사관이 한성에 설치되었다.[73]
2. 2. 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82년 7월 19일(음력 6월 5일) 구 훈련도감 소속 구식 군인들의 폭동이 발생했는데, 이는 군료 배급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폭동은 7월 22일(음력 6월 8일)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민씨 정권에 대항하며 일본 세력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 일본 공관원들은 인천으로 도피했으며, 공사관 건물은 불에 탔다. 또한 군인들은 별기군 병영 하도감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37]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상호군 조영하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윤치호의 아버지)을 통해 일본 공사에게 군변 사실을 알리고 자위책 강구를 요구했으나, 이미 공관원들은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청의 신속한 군사 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일본은 청에 대항하지 못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강경한 태도에 책임을 물어 8월 30일(음력 7월 17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대가로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시도가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었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졌으며, 지나치게 대일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정착지 확장을 결정하고, 시장을 추가했으며 부산에 거점을 확보했다. 흥선 대원군, 고종 (조선 왕)의 생부, 과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사이의 궁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1882년, 대원군은 청나라 군에 의해 체포되어 톈진시 (임오군란)에 감금되었다.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를 포함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민씨 일가는 친일 정책에서 친청 정책으로 전환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38] 일본은 러시아가 명성황후가 매각한 청송 및 경원 광업권, 북부 임업권, 관세권 등 한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이를 다시 매입하여 복원했다.[39]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중국의 조공 체제에서 해방시켰고,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이 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시작했지만, 명성황후를 포함한 민씨 일가는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40]
1895년, 명성황후는 집단 살해당한 후 일본 군에 의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는데,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복이었다.[41][42] 명성황후의 잔혹한 암살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를 감안할 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갑오개혁과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 내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60개 이상의 의병 부대를 결성하게 했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고 궁궐로 돌아온 후 러시아 경비병을 사용하는 등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2. 2. 3. 갑오개혁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청나라, 일본, 러시아 3파전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부합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해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년).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191]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왔고, 결국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서방 정부들은 "보호령", "세력권", "조차"와 같은 용어로 묘사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운명에 간섭하고 영향을 미치려 했다. 이는 경쟁하는 유럽 열강 간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의 필요성을 최소화했다. 새롭게 근대화된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는 이러한 식민지화 노력에 동참하고자 했고, 1873년 정한론("한국에 대한 징벌적 원정 주장의 옹호")이 시작되었다. 이 노력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은 일본이 메이지 천황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천황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고 군사적 개입은 "연기될 수 없다"고 했다.[37]
이 논쟁은 당시 청나라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한국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사무라이 지도자들은 한국을 점령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38] 찬성론자들은 또한 이 문제를 새로운 메이지 정치 질서에서 전통적인 지방 정부 역할을 잃은 수천 명의 실업 상태에 놓인 사무라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자리를 찾을 기회로 여겼다. 더욱이, 한국을 획득하는 것은 일본의 팽창을 위한 아시아 대륙의 교두보를 제공하고 일본 산업을 위한 풍부한 원자재 공급원이 될 것이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3년 10월에 작성된 "7개 조항 문서"에서 이를 공격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과 유럽에 파견된 일본 외교 사절단이었으며, 일본 군사 관계자들은 일본군이 서방 세계와의 어떠한 충돌에도 대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 침략은 일본을 파괴적인 전쟁에 노출시킬 것이므로 한국에 대한 행동은 시기상조였다. 또한,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주요 전쟁을 지원하기에는 너무 미발달되었고, 탄약 산업은 유럽 기술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쿠보의 견해는 반전파에 의해 지지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을 이끌었던 외교관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을 설득하여 재고하도록 했고, 이로써 "한국 위기" 논쟁을 종식시켰다.[39]
1840~1850년대에 청나라의 권위가 급격히 약화되면서 한국은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복종을 거부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급속히 근대화되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정착지 확장을 결정하고, 시장을 추가했으며 부산에 거점을 확보했다. 흥선 대원군, 고종 (조선 왕)의 생부, 과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사이의 궁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1882년, 대원군은 청나라 군에 의해 체포되어 톈진시(임오군란)에 감금되었다.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를 포함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민씨 일가는 친일 정책에서 친청 정책으로 전환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40] 일본은 러시아가 명성황후가 매각한 청송 및 경원 광업권, 북부 임업권, 관세권 등 한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이를 다시 매입하여 복원했다.[41]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중국의 조공 체제에서 해방시켰고,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이 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시작했지만, 명성황후를 포함한 민씨 일가는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42]
1895년, 명성황후는 집단 살해당한 후 일본 군에 의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는데,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복이었다.[43][44] 명성황후의 잔혹한 암살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를 감안할 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갑오개혁과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 내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60개 이상의 의병 부대를 결성하게 했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고 궁궐로 돌아온 후 러시아 경비병을 사용하는 등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청나라는 일본과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막기 위해 이씨 조선에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을 권유했다. 청나라 주일 공사관의 황준헌은 수신사로 일본에 온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건네 외교에 대한 조언을 했다. 그러나 청나라와 이씨 조선이 종속 관계를 강화하자,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다른 나라들이 이씨 조선과의 불평등 조약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병사들의 봉급 지연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이씨 조선에서는 개화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종주권을 지키려는 사대당과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독립당이 대립했고, 청불 전쟁의 영향으로 청군이 감소하자 김옥균 등의 독립당은 쿠데타를 계획했다.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 공사는 독립당에 협력하여 공사관의 일본군도 쿠데타에 참여했다. 그러나 독립당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사대당은 청군과 협력하여 반격했고, 일본군은 철수하고 독립당은 패배했다 (갑신정변). 일본은 쿠데타 실패 후 공사관 손해 배상을 이씨 조선에 요구하여 한성 조약을 맺었고, 청나라와는 톈진 조약을 맺었다[37].

갑신정변 이후의 한반도에서는 재정이 악화되어 수탈을 하는 이씨 조선 정부와 불평등 조약 아래 진출을 강화하는 일본과 청나라에 대한 반발이 높아졌다. 이전의 정부 내 운동이 아닌, 생활을 위협받은 민중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 농민군에 의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군과 청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진압 후 철수를 두고 일본과 청나라가 대립했다. 일본군은 쿠데타로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씨 조선 정부를 종속시키면서,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이 청군에 승리하자 농민군은 재봉기했지만 진압되었다. 일본과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고, 이씨 조선은 청나라와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났다. 청일 전쟁 중에 성립된 김홍집 정권은 근대화 정책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했지만, 일본의 간섭으로 실현된 정권이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종속이 심화되는 내용이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부임한 후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고, 흥선대원군과 왕비의 국정 관여 금지, 일본인 고문의 대량 채용, 엔 차관 등이 이루어졌다[46].
2. 2. 4.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참고).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참고).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고 궁궐로 돌아온 후 러시아 경비병을 사용하는 등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삼국 간섭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러시아 제국에 접근하는 파벌이 생겨 민씨가 중심이 되었다. 김홍집 정권을 지지하는 일본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와 대립하여, 미우라 고로 공사 등의 계획에 따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암살된다. 미우라 공사와 김홍집 정권은 명성황후 사건의 은폐를 시도했지만, 미국인이나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발각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고, 민중이 일본과 김홍집 정권에 대한 반발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정부군과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김홍집은 살해된다. 이완용 등은 러시아와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다. 고종은 1년 이상 러시아 공사관에서 집정했으며, 아관파천이라고 불렸다. 러시아는 광산과 산림의 권리 획득, 정부군의 훈련, 러·한 은행의 창설 등으로 진출했고, 구미 열강도 러시아를 따랐다. 조선에서는 고종이 권력을 강화하여 독립의 유지를 꾀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고종은 황제에 즉위했다. 러시아에 대한 접근과 정부 권한의 약화는 개혁파의 우려를 낳아, 서재필과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는 근대화와 자주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독립 협회를 설립한다. 독립 협회는 법치주의, 산업의 육성, 황제 권력의 제한, 정부 권한의 강화, 애국심 등을 주장하며, 공개 토론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독립 협회는 입헌 군주제 하에서의 국정 개혁을 목적으로 했지만, 공화제의 수립이 목적이라는 오정보가 수구파에 의해 유포되어, 황제 칙령으로 독립 협회는 강제 해산된다. 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도 독립 협회에 참여했으며, 탄압으로 체포되었다. 독립 협회의 활동의 일부는, 일진회와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진다.
러시아 제국 이외의 열강에게도,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시키기 위해, 러일 전쟁 중에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는다. 그 대가로, 일본은 미국령 필리핀과 영국령 인도 제국을 승인했다.
2. 2. 5. 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1904년(광무 8년)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른바 고문정치였다.이때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다는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한국의 토종 자본을 몰락시켰다. 아울러 일본에 의해 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위촉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는 일제의 침략 의도를 미화하는 데 앞장섰다. 스티븐스는 훗날 장인환, 전명운에 의해 미국에서 처단되었다.
1904년(광무 8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러일 전쟁은 1905년(광무 9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과 러시아 간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매듭지어졌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같은 해 일본은 일방적으로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통감정치였다.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그 대가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조선에 대한 '보호 통치'를 인정할 것을 약속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민영환 등은 자결로써 항거하였으며, 조병세 등은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다. 장지연은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일본과 을사오적을 규탄하였다.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을사오적의 저택을 불사르고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으며, 민종식, 신돌석, 최익현 등은 의병을 조직해 무장 항전을 벌였다.
또한 독립협회가 해체된 뒤 개화 자강 계열의 단체들이 설립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군주제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융희 원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 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운동이었다.
1840~1850년대에 서방 정부들은 "보호령", "세력권", "조차"와 같은 용어로 묘사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운명에 간섭하고 영향을 미치려 했다. 이는 경쟁하는 유럽 열강 간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의 필요성을 최소화했다. 새롭게 근대화된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는 이러한 식민지화 노력에 동참하고자 했고, 1873년 정한론이 시작되었다. 이 노력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은 일본이 메이지 천황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천황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고 군사적 개입은 "연기될 수 없다"고 했다.[37]
이 논쟁은 당시 청나라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한국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사무라이 지도자들은 한국을 점령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38] 찬성론자들은 또한 이 문제를 새로운 메이지 정치 질서에서 전통적인 지방 정부 역할을 잃은 수천 명의 실업 상태에 놓인 사무라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자리를 찾을 기회로 여겼다. 더욱이, 한국을 획득하는 것은 일본의 팽창을 위한 아시아 대륙의 교두보를 제공하고 일본 산업을 위한 풍부한 원자재 공급원이 될 것이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73년 10월에 작성된 "7개 조항 문서"에서 이를 공격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과 유럽에 파견된 일본 외교 사절단이었으며, 일본 군사 관계자들은 일본군이 서방 세계와의 어떠한 충돌에도 대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 침략은 일본을 파괴적인 전쟁에 노출시킬 것이므로 한국에 대한 행동은 시기상조였다. 또한,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주요 전쟁을 지원하기에는 너무 미발달되었고, 탄약 산업은 유럽 기술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쿠보의 견해는 반전파에 의해 지지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을 이끌었던 외교관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을 설득하여 재고하도록 했고, 이로써 "한국 위기" 논쟁을 종식시켰다.[39]
1840~1850년대에 청나라의 권위가 급격히 약화되면서 한국은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복종을 거부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급속히 근대화되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정착지 확장을 결정하고, 시장을 추가했으며 부산에 거점을 확보했다. 흥선대원군, 고종(조선 왕)의 생부, 과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사이의 궁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1882년, 대원군은 청나라 군에 의해 체포되어 톈진시에 감금되었다(임오군란).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를 포함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민씨 일가는 친일 정책에서 친청 정책으로 전환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40] 일본은 러시아가 명성황후가 매각한 청송 및 경원 광업권, 북부 임업권, 관세권 등 한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이를 다시 매입하여 복원했다.[41]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중국의 조공 체제에서 해방시켰고,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이 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시작했지만, 명성황후를 포함한 민씨 일가는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42]
1895년, 명성황후는 집단 살해당한 후 일본 군에 의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는데,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복이었다.[43][44] 명성황후의 잔혹한 암살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를 감안할 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갑오개혁과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 내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60개 이상의 의병 부대를 결성하게 했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고 궁궐로 돌아온 후 러시아 경비병을 사용하는 등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 관리들은 점차적으로 한국 정부를 통제했지만, 현지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하여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반일 활동의 여지를 남겼다. 이러한 새로운 지위는 다양한 경제적, 역사적, 정서적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실패했다. 일본은 한국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고, 일본이 도입한 근대화 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45]
고종 황제는 이 조약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조약의 강제성과 무효성을 비난하기 위해 1907년 열린 제2차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어떤 나라도 이 특사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일본은 한국 내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미7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통감으로서 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에 의해 암살되었다. 한국 민족주의자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보호 통치를 종식시키고 완전한 합병으로 이어졌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다. 보호 통치의 한 가지 결과는 일본이 극동에서 가장 강력한 단일 세력임을 세계에 보여준 것이었다. 주요 강대국들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46][47]
활빈당은 양반이나 부호, 일본의 광산주와 철도 사업자를 습격하여 소작농과 빈민의 생활 개선을 위한 정책을 요구했다. 요구에는 곡물 수출 금지, 개항장 외 외국 상인의 진출 금지, 철도 부설권 금지 등도 포함되었다. 러일 전쟁 후에도 의병 운동이 일어나 일본군도 치안 유지에 출동했다. 무장 투쟁과는 다른 노선으로 독립 협회를 계승하여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났다. 애국 계몽 운동은 자국의 역사를 알고 애국심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도시 주민과 각지의 양반이 참여하여 교육 및 출판을 통한 언론 활동을 했다.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강점기에 한국 독립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에서 러시아로 이주하여 항일 운동을 하는 조선인도 늘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新韓村/신한촌한국어이라는 조선인 거리가 생겨 항일 운동에도 활용되었다.
일본은 제1차 한일 협약을 통해 한국의 재정과 외교 고문에 일본의 추천자를 앉혔다. 제2차 한일 협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고종은 헤이그 평화 회의에 일본의 간섭 배제와 한국의 외교권 보호를 요청하는 밀사를 파견하지만 이미 일본의 권익을 인정한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이완용 등의 친일파 세력이 황제 퇴위를 추진하고 대한제국 의회는 고종을 퇴위시킨다. 제3차 한일 협약으로 일본이 설치한 한국 통감부에 의해 내정도 일본의 관리하에 들어가고 한국군은 해산되었다.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경제적 측면에서 한일 병합에 반대하며 보호 정책의 지속을 주장했다. 이토는 마찬가지로 병합 반대파인 소네 아라스케를 차기 통감으로 하지만 이토의 암살과 소네의 요양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육군벌이 대한 정책을 주도한다. 이리하여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 한국 병합을 했다.
3·1 운동이 진정된 후에는 한반도를 떠나 미국, 중국, 러시아령 등에서 항일 운동과 독립 운동을 벌이거나, 각지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거 독립 협회에 참가했던 이승만은 고종의 특사로 도미한 것을 계기로 미국 유학을 하게 된다.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과 친분을 맺었고, 한일 병합 조약 후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윽고 이승만은 내분으로 임시 정부를 떠났고,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김구가 지도하는 임시 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하여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과 협력했다.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령으로 할 것을 요청했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즉시 독립을 목표로 하는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반발을 샀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이승만의 주장에 가까운 형태로 한국이 해방되면서 평가가 높아졌다. 이승만의 망명 생활은 통산 40년에 달하며, 대전 후에 귀국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조선 북부에서 만주국에 걸쳐 항일유격대가 활동했다. 항일 유격대는 소련의 붉은 군대나 중국의 중화민국군과 협력하는 국면도 있었으며, 러시아 내전에서는 붉은 군대, 항일 유격대, 중화민국 해군이 니콜라예프스크를 파괴하는 니항 사건도 일어났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하여 항일 유격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소련의 제88특별여단에 편입되어 귀국했다. 대전 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조선반도 내에는 민족운동가 여운형과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등이 있었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감시를 받으면서도 연합군의 정보를 입수하여 일본 패전 후의 건국 준비를 진행했으며, 조선건국동맹이라는 지하 조직을 결성했다. 이러한 활동이 종전 후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결실을 맺는다.[37][38][39][40][41][42][43][44][45][46][47]
2. 2. 6. 한일 병합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 제국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37], 순종을 즉위시켜 연호를 ‘융희(隆熙)’로 정하게 했다. 순종 즉위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7월 24일)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해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했으며, 이면 협약을 통해 8월에서 9월 사이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는 명백한 주권 침해 행위였다.1909년(융희 2년) 7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 교도 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 제국에 넘겨주게 되고(기유각서), 대한제국은 명목상의 국권만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은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한일 병합을 강행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국에서 약 4,000년간 지속되던 군주제도 막을 내렸다. 일본 제국은 한국을 식민 통치 지역으로 편입하여 민족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서방 정부들은 "보호령", "세력권", "조차"와 같은 용어로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운명에 간섭하고 영향을 미치려 했다. 이는 경쟁하는 유럽 열강 간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의 필요성을 최소화했다. 새롭게 근대화된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는 이러한 식민지화 노력에 동참하고자 했고, 1873년 정한론("한국에 대한 징벌적 원정 주장의 옹호")이 시작되었다. 이 노력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은 일본이 메이지 천황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천황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고 군사적 개입은 "연기될 수 없다"고 했다.[37]
당시 청나라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한국을 둘러싸고 사무라이 지도자들은 한국을 점령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38] 찬성론자들은 또한 이 문제를 새로운 메이지 정치 질서에서 전통적인 지방 정부 역할을 잃은 수천 명의 실업 상태에 놓인 사무라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자리를 찾을 기회로 여겼다. 더욱이, 한국을 획득하는 것은 일본의 팽창을 위한 아시아 대륙의 교두보를 제공하고 일본 산업을 위한 풍부한 원자재 공급원이 될 것이다. 오쿠보 토시미치는 1873년 10월에 작성된 "7개 조항 문서"에서 이를 공격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과 유럽에 파견된 일본 외교 사절단이었으며, 일본 군사 관계자들은 일본군이 서방 세계와의 어떠한 충돌에도 대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결론내렸다. 한국 침략은 일본을 파괴적인 전쟁에 노출시킬 것이므로 한국에 대한 행동은 시기상조였다. 또한,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주요 전쟁을 지원하기에는 너무 미발달되었고, 탄약 산업은 유럽 기술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쿠보의 견해는 반전파에 의해 지지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사절단을 이끌었던 외교관 이와쿠라 토모미는 천황을 설득하여 재고하도록 했고, 이로써 "한국 위기" 논쟁을 종식시켰다.[39]
1840~1850년대에 청나라의 권위가 급격히 약화되면서 한국은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복종을 거부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급속히 근대화되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가 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정착지 확장을 결정하고, 시장을 추가했으며 부산에 거점을 확보했다. 흥선 대원군, 고종 (조선 왕)의 생부, 과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사이의 궁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1882년, 대원군은 청나라 군에 의해 체포되어 톈진시 (임오군란)에 감금되었다. 민씨 일가는 명성황후를 포함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민씨 일가는 친일 정책에서 친청 정책으로 전환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제거되었다.[40] 일본은 러시아가 명성황후가 매각한 청송 및 경원 광업권, 북부 임업권, 관세권 등 한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이를 다시 매입하여 복원했다.[41]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중국의 조공 체제에서 해방시켰고,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이 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시작했지만, 명성황후를 포함한 민씨 일가는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42]
1895년, 명성황후는 집단 살해당한 후 일본 군에 의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는데, 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증진하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보복이었다.[43][44] 명성황후의 잔혹한 암살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를 감안할 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갑오개혁과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 내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일부 유교 학자들과 농민들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60개 이상의 의병 부대를 결성하게 했다.
1897년,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며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변경했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통치하고 궁궐로 돌아온 후 러시아 경비병을 사용하는 등 러시아와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 관리들은 점차적으로 한국 정부를 통제했지만, 현지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하여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반일 활동의 여지를 남겼다. 이러한 새로운 지위는 다양한 경제적, 역사적, 정서적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실패했다. 일본은 한국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고, 일본이 도입한 근대화 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45]
고종 황제는 이 조약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조약의 강제성과 무효성을 비난하기 위해 1907년 열린 제2차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어떤 나라도 이 특사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일본은 한국 내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미 7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통감으로서 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되었다. 한국 민족주의자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보호 통치를 종식시키고 완전한 합병으로 이어졌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다. 보호 통치의 한 가지 결과는 일본이 극동에서 가장 강력한 단일 세력임을 세계에 보여준 것이었다. 주요 강대국들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46][47]
일제강점기 동안 1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일본 제국 육군에서 복무했다. 이 한국인들의 군 복무는 자발적이기도 하고 강제적이기도 했다.[48][49] 또한 수많은 한국 여성들이 다른 일본 제국 통치 지역 출신의 여성들과 함께, 브로커들에 의해 일본 제국 육군의 매춘부인 "위안부"로 전쟁 전선으로 보내져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50][51][52] "위안부" 문제는 198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 간 외교적 긴장의 원인이 되어왔다.
김일성은 조선 독립 운동을 이끌었고, 특히 상당한 규모의 한민족이 거주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지역에서 활동했다. 김일성은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했다. 김일성의 가장 유명한 승리는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에서 발생했는데, 그는 150~200명의 한국인 및 중국인 게릴라를 이끌고 국경 도시인 보천군을 습격했다.[53] 그의 부대는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 수비대를 기습하여 몇 시간 또는 하루 동안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측 기록은 김일성이 직접 습격을 지휘했다는 주장을 주로 반박하며, 대신 최현이 습격을 지휘했다고 주장한다.[54] 김일성은 북한을 건국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아직 일본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이끌었으며,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이동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로비를 벌였고,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해 남한 행정관으로 인정받았다.[55]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군에 대한 무장 저항을 조정했는데, 여기에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그리고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일본군 장교 암살 사건이 포함되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종종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도피하여 한국의 주권 회복 계획을 세웠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예로는 한국인의 황포군관학교 입학이 있는데, 여기서 많은 한국인들이 군사 전술과 전략을 훈련받았다.[56] 1937년 일본 제국이 중국을 침략하여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하여 중국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울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원래 중화민국은 한국 광복군을 중국군 총사령관의 최고 지휘하에 두었다. 이 규정은 1944년 임시 정부가 재정적 입지를 개선하고 중국 정부의 눈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후 폐지되었다.[57] 수백 명 규모의 광복군은 1945년 일본 항복까지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57] 1945년 9월 9일, 일본 조선총독이 서울에서 미국의 항복 문서를 서명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끝났다.
조선반도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활빈당은 양반이나 부호, 일본의 광산주와 철도 사업자를 습격하여 소작농과 빈민의 생활 개선을 위한 정책을 요구했다. 요구에는 곡물 수출 금지, 개항장 외 외국 상인의 진출 금지, 철도 부설권 금지 등도 포함되었다. 러일 전쟁 후에도 의병 운동이 일어나 일본군도 치안 유지에 출동했다. 무장 투쟁과는 다른 노선으로 독립 협회를 계승하여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났다. 애국 계몽 운동은 자국의 역사를 알고 애국심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도시 주민과 각지의 양반이 참여하여 교육 및 출판을 통한 언론 활동을 했다.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독립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에서 러시아로 이주하여 항일 운동을 하는 조선인도 늘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Shin Hanchon/신한촌한국어이라는 조선인 거리가 생겨 항일 운동에도 활용되었다.
일본은 제1차 한일 협약을 통해 한국의 재정과 외교 고문에 일본의 추천자를 앉혔다. 제2차 한일 협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고종은 헤이그 평화 회의에 일본의 간섭 배제와 한국의 외교권 보호를 요청하는 밀사를 파견하지만 이미 일본의 권익을 인정한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이완용 등의 친일 세력이 황제 퇴위를 추진하고 대한제국 의회는 고종을 퇴위시킨다. 제3차 한일 협약으로 일본이 설치한 한국 통감부에 의해 내정도 일본의 관리하에 들어가고 한국군은 해산되었다.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경제적 측면에서 한일 병합에 반대하며 보호 정책의 지속을 주장했다. 이토는 마찬가지로 병합 반대파인 소네 아라스케를 차기 통감으로 하지만 이토의 암살과 소네의 요양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육군벌이 대(對)한 정책을 주도한다. 이리하여 일본은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 한국 병합을 했다.
2. 3. 20세기 후반 ~ 현재
해방 후 한국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고, 양국의 대일 정책도 다소 달라지게 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한국은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서 독립을 되찾았다. 얄타 회담의 합의에 따라,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여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미국군은 38선 이남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한반도의 분단으로 소련(북한)과 미국(남한)의 세력권으로 나뉘었다. 대한민국(남한)은 일본과의 외교 및 무역 관계를 거부하며, 일본과의 긴장 상태를 이용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켰다. 초기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과 북한에 대한 반대를 정당성으로 삼아, 남한을 북한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일본과 대한민국 간의 외교 관계는 1965년 한일 기본 관계 조약이 체결되면서 수립되었으며, 일본은 이후 대한민국 (남한의 공식 명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일본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냉전의 영향으로, 한반도는 남부가 미국, 북부가 소련의 각각 점령지가 되었다 (연합군 군정기).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대한 항복을 결정했다 (일본의 항복).
조선총독부는 다음 날인 8월 15일 옥음방송 전에 독립운동가 여운형 등과 협상하여, 행정 기구를 이관하고 혼란을 최소한으로 방지하려는 계획을 수립한다.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지만, 일본군을 대신하여 서울을 포함한 남부를 미국군이, 북부를 소련군이 군사 통치를 실시했다.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소련군 장교로서 조선 북부의 평양에 입성했고, 미국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이승만이나 김구 등의 독립운동가가 서울로 돌아왔다. 미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이승만이 권력 기반을 굳히는 한편,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나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된다. 여운형은 이승만 측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고, 해방 3년 후 이승만과 김일성에 의해 남북에 두 개의 국가가 건국되었다. 김구는 남북 통일 국가를 주장하며, 독립 후 암살되었다.
연합국에는, 항복 후의 일본에 대해서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분할 통치 계획이 존재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국 최고 사령부 (GHQ/SCAP, 실질적으로 미국군 중심) 아래에서,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 통치가 실시되었다.
그런 가운데, 1946년2월 3일 조선인을 주체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일본인 수천 명이 학살되는 통화 사건이 일어났다. 1948년4월 3일에 일어난 제주 4.3 사건에서는, 다수의 제주 도민이 남한 정부의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밀입국했다[76]. 또한, 경제적인 성공을 목표로 남한에서 일본으로 밀입국하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밀입국자에 의한 외국인 등록증 위조가 횡행한 것이, 지문날인 제도의 설립 이유가 되었고, 이것이 후대에는 차별적 대우로서 지문날인 거부 운동이 되었다.
2. 3. 1. 대한민국
1952년 이승만은 평화선을 설정하여 일본 어선의 불법 조업을 막았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65년 12월 18일 국교정상화로 정부 차원의 교류가 재개되었으며, 현재 도쿄와 서울에 대사관이, 여러 대도시에 총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다.일본의 침략 행위로 인해 한국에는 반일 감정이 상당수 존재한다. 김대중 정부의 일본 대중 문화 개방 정책으로 일본에 대한 친근감이 증가했지만, 민주화와 함께 정권의 친일 성향에 대한 반감으로 반일 감정도 부상했다. 노무현 정부는 일본과의 영토, 역사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며 반일 운동이 활발했다.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내각 당시 한일 셔틀 외교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후쿠다 야스오 내각 출범과 이명박 정부의 실용 외교로 양국 관계에 훈풍이 불었다. 2008년 4월, 대한민국과 일본은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동해(일본해) 명칭 분쟁이 있으며,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 역사 문제도 남아있다. 2000년대에는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한국 문화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한류 열풍이 일어 양국 교류가 증진되었지만,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혐한 감정도 나타났다.
2021년 12월 기준 대한민국의 대(對)일본 수출은 300억6181만USD, 일본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546억4217만USD에 달한다.[192] 일본은 대한민국에 5위 수출국이자 3위 수입국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통이 발달했고, 2020년 12월 기준 818,865명의 한민족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한국은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서 독립했다. 얄타 회담에 따라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 38선 이북을, 미국군은 38선 이남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한반도의 분단으로 소련(북한)과 미국(남한)의 세력권으로 나뉘었다. 대한민국은 일본과의 외교 및 무역 관계를 거부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정부 지지를 결집했다. 1965년 한일 기본 관계 조약 체결로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고, 일본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본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양국은 2002년 FIFA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고, 한국 대중문화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어 한류 현상을 일으켰다. 반대로 애니메이션, 만화, 비디오 게임과 같은 일본 대중문화 콘텐츠는 대한민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일본은 2022년 1월 1일에 발효된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 (RCEP)에 참여했다. 이 협정은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포괄하며 관세를 철폐하고 지역 간 무역을 촉진한다.[58] 이 협정을 통해 중국-일본-대한민국 자유 무역 협정 (CJK FTA)을 시작하기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다.
양국은 북한의 위협과 미국의 삼자 관계 추구를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2년 9월 말, 대한민국, 미국, 일본은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응하여 연합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했다.[60] 10월 말에는 북한 핵실험 재개 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61]
정치적 긴장은 여전하며, 일본 식민 통치의 영향이 남아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국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다. 이 신사는 한국에서 전쟁 범죄와 잔혹 행위에 참여한 이들을 포함한 사망한 일본 군인들을 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62]
중국에 대한 양국의 상이한 견해도 긴장을 유발한다. 일본은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에 대한 중국의 주장에 대한 공격성이 증가하면서 중국을 안보적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중국과 영토 분쟁이 없고, 중국을 군사적 위협으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강력한 경제 동맹국이자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원천 중 하나로 여겨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58] 일본은 대한민국이 일본과의 관계보다 중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고 생각한다.[58]
2015년, 양국 관계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며 절정에 달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일본 정부가 생존한 위안부들을 돕기 위해 10억 엔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헤아릴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고 불치의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은 여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이 합의는 처음에는 환영받았지만, 문재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선거에서 이 합의에 대한 비판을 활용했다.
문재인과 활동가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생존한 "위안부"들과 소통 없이 이 거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주장했다.[64][65] 또한 일본 내각 구성원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한국 내 혼란을 야기했다.
2018년 한일 레이더 조준 사건 이후, 일본은 대한민국이 수소 불화물을 북한에 유출했다는 의심을 키웠다. 2019년 일본은 반도체 재료 수출을 통제하고, "우선적 무역 대상국" 목록에서 한국을 삭제했다. 전문가들은 이 통제가 한국 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명령에 대한 보복일 수 있다고 말했다.[66][67]
2023년 8월 18일, 일본은 대한민국 및 미국과 3자 안보 협약을 체결했다.[68]
1948년 8월 15일 한반도 남부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의 영향 아래 반공주의를 내세웠지만, 한국에서는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승만을 필두로 반일 감정을 가진 정치인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승만 정권은 망명 운동가를 각료로 기용하는 한편, 행정, 군, 경찰에는 일제강점기의 친일 인원을 재고용했다. 반 이승만 정권 사상을 가진 시민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고, 여수·순천 사건과 같은 한국군 반란 사건 때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49년 1월 17일 이승만은 대마도의 한국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 반환을 요구했다.[77]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반정부적인 입장을 취하는 많은 한국인이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전투가 종식되자, 이승만은 한국 영역 주변 공해상에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일본 어선에 대한 총격·나포 사건이 발생하여 수십 명이 살상되고 수천 명이 억류되었다.
1954년에는 이승만 라인에서 대한민국 측에 편입된 독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점거했다. 현재까지 대한민국 무장 경찰이 주재하고 있으며, 일본은 이를 대한민국에 의한 무력 불법 점거라고 항의하고 있다 (독도 문제).
1959년 재일 조선인의 북송 사업이 시작되자, 한국 공작원이 북한 귀환을 저지하려 니가타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1960년 2월 12일 동해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 "제8야하타마루"가 대한민국 경비정에 부딪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2월 15일 항의했다[78]。 양국 관계는 이승만 실각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5·16 군사 정변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대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 사정에 정통했다. 박정희는 북한의 압박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한 경제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자유민주당 정권도 동북아시아 반공 동맹 강화와 제2차 세계 대전의 부정적 유산 청산을 위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원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학생 5000여 명이 "대일 굴욕 외교" 반대 시위를 벌였다.[79]
1965년 한일 기본 조약과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어 한일 양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일본은 한국에 5억 달러를 지불했다. 일본 정부는 이 지불에 관해 배상이 아닌 경제 협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미국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개입으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고, 한일 양국 정부는 모두 미국에 협력했다. 한국은 약 5만 명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참전했고, 군수 물자 생산, 건설, 노동자 파견, 병사 처우 등을 미국으로부터 얻었다. 일본은 남베트남을 비롯해 한국, 타이완(중화민국), 홍콩, 태국, 필리핀 등 베트남 주변 지역에 수출을 했다. 이를 베트남 특수라고도 불렀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한국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엔 차관 등 경제 협력을 이용하여 지하철·고속도로 등 각종 교통 인프라를 정비하여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공업화·경제 발전을 실현했다. 일본 상사는 한국에 진출했고, 노동력이 저렴한 한국은 일본에 중요한 수출 기지가 되었다. 또한 안전 보장에서도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평화와 안전 유지가 일본에게도 중요하다는 한국 조항을 발표했다.
일본 패전 후, 신적강하가 이루어진 구 황족 이방자는 대한제국 이은의 비가 된 후, 종전 후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는 귀국하지 못하고, 박정희 정권이 되어서야 이은과 함께 부부로서 한국 귀국이 실현되었다. 귀국 후 방자는 장애아 교육에 힘써 한국에서 사랑받았고, 장례는 조선 왕조의 예식에 따라 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쇼와 천황의 막내 동생이자 황족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비 유리코 부부가 참석했다.
한일 국교는 외교와 투자에 관해서는 정상화되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 아래에서 김대중 사건, 문세광 사건, 박정희 암살 사건이 일어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1974년 문세광 사건에서는 한국 측으로부터 "반한국적 범죄 집단"(조선총련)에 대한 규제가 요구되는 등 외교적 양보가 이루어졌다.[80]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는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일어나는 등 양국 국민 감정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측에서는 한국에서 진출해 온 통일교(현재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의한 영감상법 비판도 있었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내각총리대신이 취임 후 처음으로 외국 방문지로 미국이 아닌 한국을 선택하고, 40억 달러의 엔 차관을 결정한 것으로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한국인 최초 일본 공식 방문이 실현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대에는 지방 자치 추진,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해외 여행 자유화가 있었고, 정부나 비즈니스 주도의 교류에 더해, 자매 도시나 수학여행 등 지역 수준 민간 교류가 증가했다.
축구 월드컵이 2002년 한일 공동 개최로 결정되면서, 이를 계기로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높아졌다.
한일 공동 선언이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발표되었고, "한일 양국은 과거의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데 합의했으며, 대한민국 내 일본 대중 문화 유입 제한도 단계적으로 해제해 나가기로 표명했다. 2000년은 '한일 국민 교류의 해'로 지정되어, 한일 양국의 '사증 (비자) 면제 상호 방문'을 상시화하고, 관광 분야 교류 확대가 이루어졌다. 양국 도시에는 상대국 언어로 된 안내 표지 등이 정비되었으며, 일본 관광지에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는 등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해서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단념하고, 한일 역사 공동 연구를 제창하는 등 한국에 대한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또한 아키히토 천황이 『속일본기』에 '고야노 노카사가 백제 왕족의 먼 친척'이라고 기록된 것에 대해 언급하며, 이른바 '한국과의 인연' 발언을 했다.[81]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일 관계가 좋아졌다"라고 말해지기도 했지만, 양국 간 논쟁도 벌어지고 있으며, 2010년대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한일 문제라고도 불리는 논쟁은 역사 인식에 기인하며, 교육(역사 교과서 문제), 영토(독도 문제), 제2차 세계 대전(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이른바 위안부 문제), 문화(문화재 반환 문제) 등이 있다. 역사 인식에 대해서는 양국 전문가에 의한 한일 역사 공동 연구가 시작되었고,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된 한국인에 대한 배상 문제에 관해서는 대한변호사협회장이 화해안을 제시했다.[82]
한일 관계 과제에는 북한에 대한 안전 보장 문제도 있다. 2006년10월 9일 북한의 핵 실험이 처음으로 행해져, 아베 신조 총리와 노무현 대통령의 한일 정상 회담에서는 한일 연대가 확인되었다. 한일 군사 정보 보호 협정 (GSOMIA)이 체결되었지만, 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은 한미, 미일에서는 체결되었지만, 2017년 1월 시점에서는 한일에서 체결되지 않았다.
한일의 자매 도시는 2016년 11월 현재 161개 조이다. 후쿠오카시와 부산광역시는 자매 도시 협력을 진행하여 국경을 넘어 공도를 달릴 수 있는 더블 넘버 차량을 채택했다.[83]
2017년9월 20일 아키히토 천황, 미치코 황후가 재위 중 8번째 사적 여행으로 고려 신사를 참배했다.
2010년대 후반, 일본 아베 신조 정권과 한국 (박근혜 →) 문재인 정권 하에서 외교 정책상의 대립 및 상호 강경 노선의 영향으로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 파기, 징용공 소송 문제, 대한민국 해군 레이더 조사 문제 발생, 한일 무역 분쟁 발발, 한국 측에 의한 한일 군사 정보 보호 협정 (GSOMIA) 파기 등 양국 관계 악화가 심화되었다.
2020년대 들어서도 한일 관계 냉각은 계속되었다. 2021년 6월 영국에서 열린 G7 정상 회담에서 한국 문재인 대통령도 초청되었지만, 한일 정상 간 회담은 성사되지 못하고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 1분 정도 인사를 나누는 것에 그쳤다. 6월 14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한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G7 정상 회의에 맞춰 회담을 하는 것으로 한일 양국이 합의했지만, 일본이 일방적으로 회담을 취소했다", "일본 측이 한국군의 독도 수호 훈련을 이유로 약식 회담에 응하지 않았다"라고 일본 측을 비난하는 보도를 했지만[85],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런 사실은 전혀 없다"라고 부인하며 도쿄와 서울 외교 루트를 통해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86].
한일 기본 조약 체결로 일본은 한국과 국교를 맺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규정했기 때문에, 북한과의 국교 수립을 요구하는 조총련과 일본 사회당 등의 강한 반발을 받았지만, 사토 에이사쿠 정권은 국회에서 강행 처리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대한민국 국적을 인정했고, 재일 한국·조선인 중에는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변경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또한,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한국"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으로 정착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한"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늘었다.
1970년 일본항공 여객기가 하이재킹되는 요도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일본 내 혁명 운동에 좌절한 타미야 타카마로 등 신좌익에 속하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그룹이었으며, 북한은 그들의 망명을 받아들이는 한편 기체와 승무원의 일본 반환에 응했다. 타미야 일행의 사상과 행동 방침은 북한 측과 일치하지 않았지만, 타미야 일행은 평양 교외에 소규모 그룹을 형성하여 북한 지시를 받아 대일 선전·공작 활동에 종사했다.
냉전이 데탕트 시기에 접어들고, 남북 공동 성명으로 한국과의 대립이 완화되었으며, 일본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를 회복하는 가운데, 조일 관계도 점차 무역액을 확대했다. 재일 조선인 집단 귀국 사업은 만경봉호에 의한 조국·친족 방문으로 변화되어 이어졌지만, 북한 귀국자 재방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2. 3.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5년, 소련은 조선반도 북부를 장악하고, 기존의 일본에 의한 통치 시스템을 해체하고 공산주의에 의한 새로운 체제의 건설을 진행했다. 조선 북부는 구 만주국 (현재의 중국 동북부)에서 온 일본인 이주자 및 재류자들의 귀국 경유지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1948년 9월 9일에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이 수립되었다. 이후, 조선인민군이 북위 38도선 이남으로 침공하여 남쪽의 대한민국과의 사이에 한국 전쟁 (북한 측 호칭: 조국 해방 전쟁)이 발발하여, 수도 평양을 포함한 광범위한 국토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중인 1952년 4월 28일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독립을 회복했지만,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있는 반공주의 국가가 된 일본의 자유민주당 정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 승인하지 않고, 매스 미디어와 함께 "북선"이라고 불렀다.
한편, 일본사회당과 총평 등, 일본의 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조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조선반도 유일의 합법 정권"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이라고 호칭하며, 대한민국 (한국)을 미국의 군사 지배 하에 있는 "남조선"으로 불렀다. 과거 독립 전 남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박헌영은 북한에서 부수상이 되었지만, 한국 전쟁 휴전 후에 스파이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무렵부터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의 경제력이 공산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역전하며 크게 격차를 벌이게 된다.
위기감을 느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일본인을 납치하여 자국의 공작원으로 대체하고 한국에 입국시키는 것을 계획했다.
1973년, 후쿠이현 오바마시에서 2자녀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1975년, 마츠오마루호 사건으로 일본 어선을 총격·나포했다. 1977년, 후에 북일 양국 정부가 사실을 인정한 최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 15일에는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13세(당시)의 요코타 메구미가 납치되어, 후에 이 문제의 상징적인 존재로 다루어지게 되었지만, 1983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이 밝혀지기까지는 더욱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사건에는 요도호 납치 사건의 범인 그룹 및 그 아내들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본의 검찰청으로부터 기소되었다.
1980년대에 한일 관계의 큰 현안이 된 것은 납치 문제가 아니라 제18후지산마루 사건이었다. 북일 간을 항해 중이던 화물선에 잠입해 있던 조선인민군 병사 민홍구가 망명을 신청했기 때문에 일본은 그의 국내 체류를 인정하고 석방했다. 다시 북한에 입항한 화물선의 승무원들이 구금되었고, 선장과 기관장은 스파이 혐의로 교화 노동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선체는 몰수되었다. 일본 국민 여론은 일본인 선원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국교가 없는 양국 간의 협상은 난항을 겪어 귀국까지 7년이 걸렸다.
이 사건의 전 달에는 랑군 암살 사건이 북한 공작원의 소행으로 발표되었고, 일본의 대북한 경계심은 다시 높아졌다. 게다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또한 북일 관계를 냉각시켰다. 폭파로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했으며, 테러 실행범으로 바레인에서 구금되어 독극물 자살을 시도한 것은 일본인을 자칭하는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였다. 살아남은 하치야 마유미는 한국으로 송치되어 자신이 북한 공작원 김현희임을 자백하고, 일본인화 교육을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성으로부터 받았다고 진술했다.
1990년 9월 28일, "북일 관계에 관한 3당 공동 선언"(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조선로동당) 발표.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 국가 주석이 사망하고, 세습으로 권력이 계승되는 형태로 실질적인 장남인 김정일 체제로 이행된 후, 고난의 행군으로 불린 북한의 경제 상황과 식량 사정이 악화되는 것이 빈번하게 보도되었고, 탈북자라고 불리는 망명자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1998년에는 미사일 발사 실험이 이루어졌고,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일본 측의 북한에 대한 불신은 증가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북일정상회담을 개최하고, 17일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했다. 이 방문에서 김정일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일부 영웅주의자가 폭주한 것"으로 공식 인정하고, 5명의 납치 피해자가 귀국했다. 그러나 8명 사망, 1명 행방불명이라는 북한 측의 답변은 일본 측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것으로 비춰졌고, 납치 피해자 가족의 귀국이 거부되는 등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으며, 여론도 북한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에서는 특정 선박 입항 금지법도 성립되었다.[87]
북한은 2002년에 핵 개발을 인정했고, 북핵 문제에 관해 6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일본, 대한민국,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가 참가했지만, 2007년 이후로는 개최되지 않고 있다. 2006년에는 북한의 핵실험이 단행되었고,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한일 연대가 확인되었다. 이 핵실험은 각국의 비판을 불러왔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난 결의로 이어졌다. 지역 교류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에서 유일하게 북한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던 사카이미나토시는 핵실험 이후 원산시와의 관계를 파기했다.[88]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세습에 의해 김정일의 삼남인 김정은이 북한의 제3대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면서 신체제로 이행했다.
2016년, 일본 정부는 북한의 잦은 미사일 발사 실험과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제재 조치로 북한 국적자의 입국 및 재입국을 금지했다.[89] 2017년 9월, 북한의 대외 창구 기관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핵무기를 사용해 일본 열도를 침몰시키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일본 정부는 이에 항의했다.[90][91]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국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으며, 2021년 현재까지 국교는 없다.[92]
3. 경제
한일 관계에서 경제 교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약 2000년 전 야요이 시대에 야요이인들이 벼농사법을 일본에 전수해 준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196] 교토 대학의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토기 연구를 통해 벼농사가 한반도 남쪽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되어, 조몬 시대에 한국 문화와의 접촉이 있었음을 시사한다.[197]
가락국은 왜에 철을 공급했으며,[119][198] 야요이인들은 청동과 철을 얻기 위해 조선반도를 방문했다. 철 관련 유적에서는 야요이식 토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일지국의 수도였던 하라노쓰지 유적은 대륙 및 반도 남부와의 무역 거점 역할을 했다. 한(漢)이 건설한 낙랑군에서는 토기, 청동기, 철기가 생산되었고,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왜인)도 방문하여 물품을 운반했다.[119] 『한서』에는 "낙랑해 중에 왜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동경, 철제품, 유리 구슬 등 대륙의 물품을 얻기 위해 소금, 벼, 생구(노예) 등을 보냈다. 야마타이국, 규슈 북부의 노국, 세토 내해의 기비씨 등도 조선반도와 무역을 했다.[119]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 수탈을 자행했다. 조선총독부는 인프라 정비와 함께 식민 정책을 추진하여 조선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한일 병합 후 일본으로부터의 이주민이 급증하여 33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토지 정책으로 확보된 토지에 정착했다.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일본 화폐가 조선의 개항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제일은행은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대한제국의 통화로 유통시켰다. 이후 설립된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가 창립을 주도하고 중역을 일본인이 맡았으며, 한국은행권은 금화 또는 일본은행권과 교환할 수 있도록 하여 일본에 종속된 금융기관이었다.[119]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은 자국 경제 보호를 위해 일만지 경제 블록을 추진했고, 조선도 이에 포함되었다. 조선은행은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일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은행 간 예치 계약을 사용했고, 조선은행은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중국 연합 준비 은행과 계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119]
한국 전쟁은 일본 경제에 한국 전쟁 특수를 가져다주었다. 미국 군 및 유엔군 관련 기관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물자를 조달했고, 이는 일본 외화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119]
1980년대 초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플라자 합의와 엔고 현상으로 일본 기업은 해외 생산을 늘렸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신흥공업경제지역에 투자하여 수출 산업 성장과 고용을 창출했다.
최근에는 일본이 연구 개발(R&D) 거점으로 대한민국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119] 소비 시장에서는 일본 기업이 대한민국에 진출하고 있으며, 특히 2000년대 이후 자동차, 외식, 소매업 분야에서 활발하다. 대한민국 대기업 또한 판매 및 R&D를 위해 일본에 진출하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 온라인 게임, IT 관련 기업, 항공, 화객선, 방송 등에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119]
일본 국제협력은행의 2017년 조사에서 대한민국은 "일본 제조업의 투자 유망 지역·국가 랭킹" 10위를 차지했다.[119]
일본은 버블 경제 이후 경제가 저성장하는 반면, 한국은 경제 규모가 커졌다. 2000년부터 2020년까지 1인당 국민총생산(GDP) 성장률은 일본 1.02배, 한국 2.56배로 나타났다.
3. 1. 무역
문자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지만, 일본 사가현이 원산지인 흑요석이 한반도(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도 발굴되고 있으며, 매우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114][193]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했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 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했다. 하동에서 쓰시마섬을 축으로 이키섬, 그리고 규슈의 마쓰우라 반도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섬에서 오키노시마,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126]무역에 있어서는 신라와 왜가 긴밀하게 통교하였다.[194] 8세기의 통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은 일본의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사절단의 공무역은 대당무역에 비해 빈번하지 않았다. 사절단 일행은 최대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상인도 포함되어 이들에 의한 사무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공무역은 주로 사절단이 건너 와서 예물을 바치면 후대해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절단이 무례한 행위를 할 경우 접견을 거부하고 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보물을 통해, 신라와 나라 시대의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관된 보물 중에는 신라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 문방사구 등이 있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라는 문서에 나타나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 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 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 기물, 모직 가죽제품, 불교 관계 물건, 약물, 향료, 염료 등 다양하다.[195]
7000년 전에는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논벼 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일본으로 건너온 경로에 대해서는, 한반도 루트, 대륙에서 직접 오는 루트, 남서 제도 루트로 크게 설이 나뉜다. 벼농사 도래 경로 연구로서, 벼 유전자 연구, 각종 유적에서 출토된 농기구나 의례 연구, 수경 논밭 유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및 한반도, 요동반도 등 극동 아시아에 존재하는 벼는 온대성 자포니카종과 열대성 자포니카종의 크게 2종류로 나뉜다. 아오모리현의 다카하 III 유적과 시가현의 시모노고 유적을 시작으로, 야요이 시대 유적에서 온대성과 열대성 벼가 모두 발견되었다. 벼의 재래 품종 DNA를 핵 SSR(단순 반복 서열)법으로 분석한 결과, 대륙으로부터의 도래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양쪽 모두에서 확인되었다.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후반, 장소는 북큐슈의 겐카이 해 연안에서 시작되었으며, 가라쓰의 나바타 유적과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유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규모 도래는 크게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기원전 7세기~8세기, 기원전 4세기~5세기, 기원전 2세기~3세기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이키섬을 경유한 품종과, 대륙에서 북부 큐슈로 직접 건너온 품종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조선반도를 방문하는 야요이인의 주요 목적은 청동과 철이었다. 조선반도에서 철 관련 자료가 있는 유적 중 45%의 장소에서 야요이식 토기도 발견되었다. 철광석이 생산되는 닷카와 유적이나, 철 거래를 행했던 로쿠시마 유적 등이 있다. 『위지왜인전』의 일지국의 수도로 여겨지는 하라노쓰지 유적에는 인공적인 항구가 있었고, 대륙과 반도 남부와의 무역 거점으로서 건설되었다. 한(漢)이 건설한 낙랑군에서는 토기, 청동기, 철기가 생산되었으며, 조선인 외에 일본인(왜인)도 방문하여 이키, 쓰시마, 북부 규슈로 운반했다. 『위지』 변진전에는 변한의 철을 구하는 왜로부터의 방문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의 지리지에는 "낙랑해 중에 왜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경, 철제품, 유리 구슬 등 대륙의 물품을 입수하기 위해, 일본 측에서는 해안에서 생산한 소금, 그리고 벼나 생구(노예)를 보냈다. 가야에는 철을 얻기 위해 왜인이 방문했다는 기술이 『위지』에 있다. 야마토 왕권에 의한 통일 전에는 야마타이국, 규슈 북부의 노국이나 이토국, 세토 내해의 기비씨 등이 조선반도와 무역을 했다. 왜국은 왜금이나 솜과 같은 비단 제품과, 규슈 북부의 곡물을 수출했다. 『위지』에는 이키 섬이나 쓰시마가 시적(곡물 무역)을 남북으로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倭)는 삼국 중에서 백제(百濟)와의 증여가 활발해졌으며, 백제로부터 증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칠지도는 이소노카미 신궁에 현존한다. 한반도에서는 공예품과 기술자, 왜(倭)에서는 병사, 무기, 곡물, 섬유품이 증여되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온 도래인 중에는 공인도 있었으며, 4세기에 띠금식 갑옷, 4세기 후반에 마구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농기구와 공구도 수입되었다.
야마토 왕권에 의한 일본의 통일과 신라의 한반도 통일로, 일본과 신라는 견신라사(遣新羅使)와 신라사(新羅使)가 관리 무역을 행했다. 이것이 외교의 긴장으로 사절의 왕래가 뜸해지면서, 신라의 해상 상인들이 활동했다. 안사의 난으로 당(唐)의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육상보다 해상 무역이 증가하여, 일본, 신라, 당, 중국 연안의 이슬람 상인 등이 항해를 했다. 해역의 안전 보장에 기여한 것은 신라의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해적의 노예 무역을 단속하고, 탐라(耽羅)와 완도를 거점으로 하여 일본, 신라, 당에서 무역을 행했다. 신라 상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파사국, 천축 등의 산물도 일본에 전해졌다. 율령법에서는 구입 권한이 조정, 관사, 귀족의 순서로 정해져 있었으며, 귀족이 신라의 수입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로 신청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기록이 정창원 문서로 남아 있다. 일본의 수출품은 솜, 비단 등이었고, 신라의 수출품은 고려 인삼, 사파리라고 불리는 합금제 식기, 안료, 황금, 향료 등이었다. 마지막 견당사(遣唐使)의 일원으로서 유학을 했던 승려 엔닌은, 장보고와 신라 상인의 도움으로 당으로부터의 귀국을 완수했다. 엔닌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치안이 악화되는 장안에서의 생활, 당인과 신라인과의 교류, 신라 상인의 항해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과 고려는 외교 관계는 없었지만 11세기부터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대마도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그 외에 지쿠젠과 사쓰마가 있었다. 일본은 진주, 도검, 수은, 감귤류 등을 수출했으며, 일본 배는 진공선이라고도 불리며 연 1회 왕래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한때 무역이 끊어졌다.
조선 왕조에서는, 왜구의 침입 이후 무역 관리를 진행하여 무역을 허가받은 일본인은 수도서인이라고 불렸다. 조일 무역은 크게 (1) 공식적인 통교인 사절의 진상과 회사, (2) 관료에 의한 공정 가격을 사용하는 공무역, (3) 상인끼리의 시장 가격을 사용하는 사(私)무역의 3종류가 있다. 거래액은 (2)와 (3)이 대부분을 차지했다.(1)과 (2)에는 규슈 탄다이, 슈고, 고쿠진과 같은 외교와 공무역을 겸한 통교가 허가되었으며, 공식적인 사절은 사송선을 이용했다.(3)에는 흥리왜인이라고 불린 상인이 다수 있었으며, 소규모 상인은 대마도의 해산물과 소금을 곡물과 교환하여 식량을 입수했다. 대규모 흥리왜인은 호족인 소다 씨, 나카오 씨, 코지마 씨와 같이 조선-대마도-지쿠젠, 히젠을 잇는 루트로 무역을 했다. 일본이 입항할 수 있는 곳은, 태종 시대에는 부산포와 내이포였으며, 세종 시대에 염포가 더해져 삼포라고도 불렸다. 삼포왜란과 왜구의 영향으로, 최종적으로 입항지는 부산포가 된다.
왜은의 생산이 늘어난 후부터는, 일본의 수출품은 은, 조선의 수출품은 면포였다. 면포는 돛단배의 돛이나 의류로 일본에 널리 보급되었다. 가장 활발하게 무역을 한 것은 대마도의 소 씨였으며, 다른 지역은 세견선이 연 1~2척인데 비해 연 50척이 허가되었다. 조선으로부터의 수출품은 하카타에서 국내로 유통되었으며, 대마도와 하카타 사이는 조일 무역의 왕래가 많았다. 그 외에 오우치 씨, 규슈 탄다이의 시부카와 씨, 히젠의 무나카타 씨, 히고의 기쿠치 씨, 사쓰마의 시마즈 씨 등도 왕래했다. 조일 무역은 일시 중단된 후 15세기 중반에 재개되는데, 이는 조선 왕조가 밀무역을 통제하려 했던 목적이 있었다.
중세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유통되는 한편, 한반도에서는 고려청자가 수출되었다. 고려청자는, 한반도에 가까운 대마도 외에도, 동북의 안도 씨가 다스린 토사미나토에서도 발견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조일수호조규에 의거하여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했고,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정치적 진출이 후퇴하는 대신 경제적 진출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일본의 수출은 영국의 면제품이었으나, 방적업의 발전에 따라 일본산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의 수출은 쌀, 콩 등 곡물이 중심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상인인 객주에게 자금을 제공하여 곡물을 매입했고, 조선에서는 쌀 부족과 쌀값 폭등이 일어났다. 조선 지방 정부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일통상장정에서 승인된 방곡령을 발령하여 곡물의 역외 반출을 금지했다. 그러나 선대금으로 곡물을 매입했던 일본 상인들은 역외 반출 금지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분쟁이 발생했다. 이씨 조선의 상인들은 불평등 조약에 따른 일본 및 청나라 상인들의 진출에 반발하여 한성에서 철시(파업)를 했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자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단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조선의 수출 80%에서 90%, 수입 60%에서 70%가 일본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한일 무역 협정의 체결로 한일 무역이 시작되었다. 일본과 한국은 수출 지향형 공업화에 따른 경제 성장이란 공통점이 있어, 수출 산업에서는 자동차, 전기, 조선, 철강 등의 분야에서 경쟁했다. 한일 무역의 특징으로, 한국의 수출과 대일 수입의 상관 관계가 있다. 원인은, 한국의 제조업에 조립 산업이 많고, 일본으로부터의 중간재 수입이 크다는 점에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대세계 수출이 증가하면 대일 수입도 증가하고, 대일 적자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80년대까지의 한국은 대일 적자를 대미 흑자로 보충하는 구조였지만, 아시아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일본, 한국 모두 아시아 역내 무역이 높아졌으며, 최근에는 중국의 영향이 크다. 일본의 대한 수출은 1996년에 미국에 이어 2위였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 대미와 대일 무역의 비중이 컸으며, 그 이후에는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비중이 계속 늘었다. 한국의 대일 수입은 1986년, 대일 수출은 1989년이 정점을 찍었다. 1992년에 한국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 수출이 급증하여, 2010년에는 대중 수출이 25.1%가 되어, 일미구의 합계(28.2%)에 필적했다. 한국이 세계 금융 위기로부터의 회복이 빨랐던 한 요인에는, 대중 무역 흑자의 크기가 있다.
남북 공동 선언 이후, 일본의 공업 제품이 점차 북한 측으로 들어가고, 북한산 저렴한 송이버섯이나 해산물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한때는 일본으로의 선박 입항이 연간 천 수백 척에 달했다. 내역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수송 기기가 중심이었고, 일본으로의 수출은 수산물이 중심이었다. 2009년 이후에는 수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3. 2. 산업
약 2000년 전에 야요이인들이 벼농사법을 일본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196] 교토 대학의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적 측면에서 벼농사의 전래를 다루며, 한반도 남쪽을 거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되어 조몬 시대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97]일찍이 가락국은 왜에 철을 공급했다.[119][198] 야요이인은 청동과 철을 얻기 위해 조선반도를 방문했으며, 철 관련 자료가 있는 유적에서 야요이식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일지국의 수도로 여겨지는 하라노쓰지 유적은 대륙과 반도 남부와의 무역 거점이었다. 한(漢)이 건설한 낙랑군에서는 토기, 청동기, 철기가 생산되었고, 조선인 외에 일본인(왜인)도 방문하여 물품을 운반했다.[119] 『한서』에는 "낙랑해 중에 왜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경, 철제품, 유리 구슬 등 대륙의 물품을 얻기 위해 일본은 소금, 벼, 생구(노예) 등을 보냈다. 야마타이국, 규슈 북부의 노국, 세토 내해의 기비씨 등은 조선반도와 무역을 했다.[119]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 수탈을 자행했다.
조선총독부는 인프라 정비와 병행하여 식민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는 조선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기반 작업이었다. 일본으로부터의 이주민은 한일 병합 후 급증하여 33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토지 정책으로 확보된 토지에 정착했다.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일본 화폐가 조선의 개항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제일은행은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대한제국의 통화로 유통시켰다. 후에 설립된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가 창립을 주도하고 중역을 일본인이 맡았으며, 한국은행권은 금화 또는 일본은행권과 교환할 수 있도록 하여 일본에 종속된 금융기관이었다.[119]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은 자국 경제 보호를 위해 일만지 경제 블록을 추진했고, 조선도 포함되었다. 조선은행은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일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은행 간 예치 계약을 사용했고, 조선은행은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중국 연합 준비 은행과 계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119]
한국 전쟁은 일본 경제에 한국 전쟁 특수를 가져다주었다. 미국 군 및 유엔군 관련 기관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물자를 조달했고, 이는 일본 외화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119]
1980년대 초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플라자 합의와 엔고 현상으로 일본 기업은 해외 생산을 늘렸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신흥공업경제지역에 투자하여 수출 산업 성장과 고용을 창출했다.
최근에는 일본이 연구 개발(R&D) 거점으로 대한민국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119] 소비 시장에서는 일본 기업이 대한민국에 진출하고 있으며, 특히 2000년대 이후 자동차, 외식, 소매업 분야가 많다.
대한민국 대기업은 판매 및 R&D를 위해 일본에 진출하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 온라인 게임, IT 관련 기업, 항공, 화객선, 방송 등에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119]
일본 국제협력은행의 2017년 조사에서 대한민국은 "일본 제조업의 투자 유망 지역·국가 랭킹" 10위를 차지했다.[119]
일본은 버블 경제 이후 경제가 저성장하는 반면, 한국은 경제 규모가 커졌다. 2000년부터 2020년까지 1인당 국민총생산(GDP) 성장률은 일본 1.02배, 한국 2.56배이다.
4. 사회
한일 관계의 사회 분야에서는 양국 간 인구 이동과 사회 문화 교류를 살펴볼 수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해외여행을 완전 자유화했고, 동시에 한국은 일본 방문 외국인 여행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서울 올림픽은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여행 증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에는 한일 양국 왕래자 수가 354만 명에 달했으며, 2006년에는 비자 상호 면제가 시행되었다. 워킹 홀리데이는 1999년 시작되어, 2016년 기준 양국 모두 1만 명에 달할 정도로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방문지로 자리 잡았다.[98] 2016년 상호 교류 인원은 700만 명을 넘어 2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으며, 양국 정부는 "한일 관광 진흥 협의회"에서 상호 교류 1000만 명을 목표로 설정했다.[98]
백제는 일찍이 일본에 학술과 교육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령왕 시대인 513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를, 516년에는 고안무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문화를 전수했다. 577년에는 더 많은 백제 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131][132][140][142]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주자학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귀국 후에는 일본 견문기인 『간양록』을 저술했다. 문록·경장역을 통해 한반도의 많은 서적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슨가 문고에서 하야시 라잔 등이 이를 보관했다. 일본은 유교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조선에서는 성리학 중심의 학풍이 강고하여 이설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의 주류 학계는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 슌다이 등의 학설을 비판했지만, 실학자들은 일본 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131]
1880년부터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유학이 시작되었으며, 1883년 게이오기주쿠와 육군 토야마 학교에서 본격적인 집단 유학이 이루어졌다.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양반과 지방 유지들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으나, 일본은 사립학교령 등을 통해 이를 규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초등 교육부터 일본어 교육과 함께 조선어 교육이 병행되었고, 한글 보급이 진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1938년에는 조선어를 임의 과목으로 격하시키고 황민화 교육을 강화했다.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국민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후 한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이방자 여사는 나시모토노미야 가문 출신으로, 이왕가의 비였으나, 광복 후 한국에 남아 장애아 교육에 헌신했다. 그녀의 공헌은 한국 사회에서 높이 평가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131]
1984년에는 일본 공영 방송인 NHK에서 "안녕 하십니까・한글 강좌"가 시작되어 한국어 교육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는 모리 요시로 총리의 제안으로 일본 대학입학공통테스트 외국어 과목에 한국어가 추가되었다.
규슈 대학은 한국 연구 센터를 설립하고, 2011년부터 부산대학교 등과 공동 교육 프로젝트인 한일 해협권 칼리지를 운영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부산대학교, 규슈 대학, 세이난가쿠인 대학, 하와이 대학교가 참여하는 아시아 태평양 칼리지로 확대되었다.
한편, 전라남도에서 발견되는 장구형 무덤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왜인이 백제에 정착하여 살다가 사망했을 때, 백제의 양식보다는 왜의 고유 무덤 양식인 장구형 무덤을 선택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4. 1. 이주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110] 역으로, 기원전 20년에 신라에서 활동한 신하 중에는 왜 출신인 호공(瓠公)도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127] 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28][129][130]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최초의 조선인 마을은 현재 오사카시의 이쿠노구 내 지역으로 1909년에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인 집주인이 조선인에게 임대를 꺼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해발 0미터 지대나 공장 부근 등 일본인이 적은 곳에서 정착이 진행되었다. 조선반도의 불황과 농민층의 해체, 그리고 일본 내의 노동 수요로 인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이나 돈을 벌기 위해 오가는 사람이 급증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일본의 노동 수요가 높아져 일본 내의 대학에 유학하는 사람도 있었고, 재일 조선인은 1915년 약 4000명에서 1920년에는 3만 명, 1923년에는 9만 명으로 급증하여, 1920년대에 재일 조선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일본인과의 조선관을 둘러싼 갈등도 일어나, 도쿄부립제1중학교 교장을 비판하여 퇴학 처분된 사람 중에는 삼일 독립 선언에 서명한 최린도 있었다. 조선인에 대한 멸시는 일본인 측에서도 문제시되어, 주한 일본 대사인 하야시 곤스케가 일본인에게 훈령을 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인은 저렴한 임금으로 일했고, 일본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반발했다. 또한, 조선반도의 민족 운동이 일본 내에서는 불온 행위로 보도되어 악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원인으로 관동 대지진에서는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지진 후 9월 1일 오후에는 경찰과 군대가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를 용인하여 조선인을 살상했다. 경찰은 9월 3일에 유언비어 부인을 했지만, 군대와 민간 자경단은 살상을 멈추지 않았고, 다수의 조선인, 중국인, 그리고 오인된 일본인이 희생되었다. 일본 정부는 자경단의 책임만을 추궁하여 검거하고, 개별 희생자에 대한 공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진 후에 중국에서 일본 지원 운동이 일어났지만, 중국인도 살해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저장성의 자연 재해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온 농민이었다. 관청 기록에 의한 희생자 수는 578명, 조선총독부의 관헌 조사에 의한 희생자 수는 813명에 달했다.
1920년대에는 가족 단위의 정착이 늘어나 1930년의 국세 조사에서는 40만 명 중 3만 명이 일본 출신의 2세가 되었다. 1940년에 예정되었던 도쿄 올림픽 때에는 도쿄의 후카가와와 시오자키에 재일 조선인들이 모였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 정책의 결과인 조선인을 해외의 눈에서 멀리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총독부의 비용으로 매립지 위에 판잣집이 건설되었다.
재일 조선인의 항일 활동에는 노동조합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이 있었다. 융화를 목적으로 한 상애회 등의 단체는 일본 치안 당국과 협력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지지가 늘지 않았다. 임금 인상과 고용 등 생존권을 중시하는 노동 운동과, 한반도의 해방과 독립을 중시하는 민족 운동은 방침의 통일을 이루지 못해, 조선인의 보호와 생활 구제를 통해 동화 정책을 추진하는 융화 단체가 우세해졌다. 각 도도부현에는 협화회가 조직되어, 재일 조선인의 통제와 동화를 목적으로 활동했다.
만주국(현재의 중국 동북부), 관동주(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랴오닝성다롄시 일부 지역), 점령 지역 민간인의 보호 및 귀환은 대동아성의 관할이었다. 대동아성은 재류 일본인에 대해서는 현지 정착 방침을 취했고, 조선인과 대만인은 추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종전대로 유지했다. 조선, 대만, 사할린을 관할하는 내무성도 이 방침에 따라,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는 각지의 민간인의 생명 재산 보호를 포기했다.
항복 후 일본군부와 대기업에서는, 강제 징용을 한 재일 한국·조선인의 귀국을 서둘렀다. 전범으로서의 처벌을 회피하기 위해서와, 폭동 발생을 피하고 싶다는 이유가 있었다. 연합군 병사의 포로들을 노동에 종사시키고 있던 지역에서는, 전시 중부터 미군기가 포로 학대를 경고하는 삐라를 투하하고 있었고, 사정을 아는 기업은 종전 직후에 포로 및 강제 징용자의 자료 파기 및 강제 징용자의 송환을 실시했다.
전후 혼란으로 정부의 방침이 결정되기 전에 송환이 서둘러지면서, 희생도 발생했다. 종전 직후인 1945년 8월 24일에는, 오미나토 경비부의 군용호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되었던 자들을 포함하여 3700명 이상의 조선인을 송환하는 수송선이 폭침하여, 승무원을 포함해 549명이 사망하는 우키시마마루 사건도 일어났다.
중소 규모의 탄광 및 공장에서는 강제 징용자가 방치되었고, 어항에서 자력으로 귀국을 시도하다 난파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받아, 1945년9월 1일에 「조선인 집단 이주 노무자의 긴급 조치 건」이라는 통첩을 내렸다. 그 후에도,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일본인이 승선한 화객선이 폭침하여 545명이 사망하는 주마루 사고가 일어났다.
한반도 내에는 재조 일본인이 80만 명 가까이 있었고, 게다가 만주에서도 12만 명이 도망쳐 와서, 귀환은 난항을 겪었다. 전 조선군의 군인이나 경찰관 관계자는 수송 수단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많은 일본 이민은 자력으로의 귀국이 필요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미국의 주도에 의해 1946년에 본국 수송이 종료되었지만, 한반도 북부에서는 계획적인 수송이 없었고, 1946년에는 3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재일 조선인은 종전 시에 200만 명이 있었고, 1946년 내에 150만 명이 귀국했다.
사할린 및 남양 군도에도, 조선인이 징용 등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남양 군도에는 조선인이 7천 명, 사할린이 된 남사할린에는 2만 3천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남양 군도의 조선인은 본국으로 직접 귀환했다. 남사할린의 조선인의 대부분은 남조선 출신이었지만, 소련은 북조선으로의 귀국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1990년의 한소 수교까지 귀국을 기다리게 된다.
북한의 성립은 일본 국내의 정치 상황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합법 정당으로 재건된 일본 공산당에는 다수의 조선인 활동가가 있었지만, 이윽고 분리되어 북한으로의 귀환이나 일본 국내에서의 재일 한국·조선인 운동 전개를 선택했다.
그중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조선총련, 조선총련)이 성립했다. 조선총련의 지도에 따라 재일 조선인은 민족 차별 해소·생활 상황 개선 등을 목표로 한 투쟁을 전국 각지에서 전개했다. 한국에서의 혼란과 압정은 일본에서도 보도되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출신자도 조선총련에 참가하는 자가 많았다. 또한, 김일성에 의해 이끌어진 북한의 지도 정당, 조선로동당은 이윽고 일본 공산당의 의회 중시·평화 혁명 노선을 비판하고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에, 조선로동당의 교류 상대는 일본 사회당이 중심이 되었다.
1959년, 재일 조선인의 북송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는 일본 적십자사가 관할한, 대한민국 정부의 귀환 거부로 귀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북한 귀환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일본 정부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수십만 명의 재일 조선인이 바다를 건너갔다고 전해지지만, "지상의 낙원"이라고 자화자찬했던 북한 측의 경제 상황은 어려웠고, 일본에서의 빈곤과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바랐던 귀국자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독재 색채를 강화하는 김일성 정권은 일본에서 온 귀국자들을 잠재적 스파이 등으로 간주하여 경계했고, 그들 중 다수를 처형하거나 강제 수용소에서의 장기 구금에 처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엄격한 정보 통제를 뚫고 흘러나오는 현지 상황을 알게 된 재일 조선인들 사이에서 귀국에 대한 열정이 서서히 식었고, 고도 경제 성장에 따라 일본에서의 생활 상황이 개선되면서, 귀환 사업은 1960년대 중반에 종료되었다.
다만, 귀국자의 재입국은 실현되지 않았고, 일본 국적을 소지한 채 가족과 함께 도항한 배우자나 자녀의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측에서는, 북한으로의 귀환 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방해 공작을 계획하여, 니가타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4. 2. 학술과 교육
백제는 일찍이 일본에 학술과 교육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령왕 시대인 513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131]를, 516년에는 고안무(高安茂)[132]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문화를 전수했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더 많은 백제 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140][142]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주자학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귀국 후에는 일본 견문기인 『간양록』을 저술했다. 문록·경장역을 통해 한반도의 많은 서적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슨가 문고에서 하야시 라잔 등이 이를 보관했다. 일본은 유교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조선에서는 성리학 중심의 학풍이 강고하여 이설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의 주류 학계는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 슌다이 등의 학설을 비판했지만, 실학자들은 일본 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131]
1880년부터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유학이 시작되었으며, 1883년 게이오기주쿠와 육군 토야마 학교에서 본격적인 집단 유학이 이루어졌다.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양반과 지방 유지들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으나, 일본은 사립학교령 등을 통해 이를 규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초등 교육부터 일본어 교육과 함께 조선어 교육이 병행되었고, 한글 보급이 진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1938년에는 조선어를 임의 과목으로 격하시키고 황민화 교육을 강화했다.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국민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후 한국 정부에 인계되었다.
이방자 여사는 나시모토노미야 가문 출신으로, 이왕가의 비였으나, 광복 후 한국에 남아 장애아 교육에 헌신했다. 그녀의 공헌은 한국 사회에서 높이 평가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84년에는 일본 공영 방송인 NHK에서 "안녕 하십니까・한글 강좌"가 시작되어 한국어 교육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는 모리 요시로 총리의 제안으로 일본 대학입학공통테스트 외국어 과목에 한국어가 추가되었다.
규슈 대학은 한국 연구 센터를 설립하고, 2011년부터 부산대학교 등과 공동 교육 프로젝트인 한일 해협권 칼리지를 운영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부산대학교, 규슈 대학, 세이난가쿠인 대학, 하와이 대학교가 참여하는 아시아 태평양 칼리지로 확대되었다[100]。
4. 3. 장례
전라남도에서도 장구형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장구형 무덤의 발견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왜인이 백제에 정착하여 살다가 사망했을 때 백제의 양식보다는 왜의 고유 무덤 양식인 장구형 무덤을 선택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5. 문화
한일 관계 - 문화
조선 통신사는 한일 문화 교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후쿠젠지 경내에 건립된 영빈관 대조루는 일본의 한학자, 서예가 등과의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해동제국기』에는 일본 지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에도 시대에는 일본에서 동서의 사본이 유통되었다.
다이묘 행렬과는 달리, 조선 통신사는 외교관 외에도 아름답게 차려입은 어린아이, 악대, 문화인, 의사, 통역 등이 수행원으로 참여하여 이국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휘호 요청이 쇄도하여 통신사에게 부담이 되었기에, 덴와 시대 이후에는 직접 요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552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음악가가 파견된 기록이 있으며, 통신사를 본뜬 예능으로는 당인춤, 당자춤 등이 있다. 통신사가 닛코 도쇼구에 참배한 영향으로 나고야 도쇼구와 센다이 도쇼구의 제례에서도 조선풍의 당인 행렬이 등장했다. 간다 축제나 산노 축제에서도 통신사 분장이 등장했고, 조선풍 의상으로 쓰지오도리도 유행했으나 막부의 금지령이 내려졌다. 가부키와 조루리 또한 통신사를 소재로 활용했는데, 특히 당인 살해 사건은 『세와 요리 스즈키 호초』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일본의 무악은 통신사에게 선보여졌으며, 사루가쿠, 가가쿠 연주, 가부키 공연도 이루어졌다. 가가쿠의 나소리와 료오는 조선에서 악보가 소실되었으나, 통신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39]
백제는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인물화상경(5~6세기)을 보냈는데, 이는 백제와 왜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577년(위덕왕 24년)에는 금속공예사와 기와 굽는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579년에는 신라에서 불상을 보냈다.[140][142][143] 588년(위덕왕 35년)에는 백제가 불사리, 승려 6명, 노반박사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등 4명, 화공 1명 등 사찰 건설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148][204][205]
5세기에는 구운 그릇인 스에키, 금속 가공 기술, 부뚜막 등의 기술이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인 아스카데라 건설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지원했다. 건설에는 소가가 휘하의 도래인 기술자인 동한씨, 인소씨, 조처씨, 안부씨, 산서씨 등이 참여했으며, 본존불 제작에는 고구려가 황금을 보냈다.
외교에서 한시를 사용하는 습관은 중세에도 이어졌으며, 교섭에 시가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에 온 일본 사절의 창화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족자에 한시와 수묵화를 함께 표현하는 시화축이 한일 교류에 사용되었다. 세슈의 「산수도」에는 조선 관인 이손과 박형문의 찬이 있다.
상국사의 화승 슈분이 일본 사절로 조선에 체류하며 조선 수묵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통신사는 한시 등 중국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일본의 문인, 묵객 및 민중과 교류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율시 서축에는 차운 형식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한일 교류의 지속을 희망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시인 허난설헌은 뛰어난 한시를 지었으나 조선에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후에 명나라에서 평판이 높아져 일본에도 소개되어 인기를 끌었다.
통신사 행렬 그림 두루마리가 그려졌으며, 『낙중낙외도』나 『에도도 병풍』에도 통신사가 등장한다. 통신사를 그린 화가로는 가노 야스노부, 가노 마스노부, 하나부사 잇초, 오쿠무라 마사노부, 하네카와 후지에이, 우타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 등이 있다. 통신사의 이름과 직함 등을 담은 우키요에 판화는 가이드북으로 인기를 끌었다. 통신사의 화원은 일본 화가와 교류했고, 그 활동은 『고화비고』에 정리되었으며, 일본에서는 가노파의 병풍 그림을 선물했다. 통신사는 각지에 묵적을 남겼으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모시는 다이유인 영묘에는 '영산법계숭효정원'이 증정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 다이묘들은 조선에서 유학자들과 함께 많은 도공을 데려갔고, 일본 각지에서 도예가 성행했다. 특히 사가현아리타정의 이마리 도자기는 나가사키 무역을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유럽으로 수출하는 품목이 되었다. 시가현히가시오미시고쇼의 오바타 인형 중에는 통신사 수행원인 어린아이와 악대를 인형으로 만든 당인형도 있다.
박정희 정권은 국교 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문화 유입을 경계하여, 대한민국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 제한으로 대중문화 접촉을 금지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미국 배급 회사를 통해 일본산 애니메이션이 방송되어 한국 젊은층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이 만국 저작권 협약에 가입한 이후 저작권법에 의한 수입이 시작되었고, 문화 유입 제한은 김대중 정권부터 완화되었다. 국교 회복으로 공동 제작도 가능하게 되어, 초기 애니메이션으로는 『황금박쥐』나 『요괴인간 벰』, 드라마로는 『프렌즈』 등이 있다.
1992년에는 문화방송(MBC)이 이조의 후예가 천황을 저격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프로그램 『분노의 왕국』을 방송하여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일류가 있으며, 일본에서는 2003년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영된 뒤 2004년 재방송으로 인기를 끌어, 한류라는 말이 일본에서도 사용되게 되었다.
한국인 가수 조용필은 처음으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일본 대중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01] 2010년 9월 10일, 일본 아이돌 그룹 SKE48가 '강한 자여'와 '푸른 하늘 첫사랑'을 일본어로 부르는 모습이 한국 지상파 방송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이는 일본 대중문화 4차 개방으로 일본어 노래 방송이 허용된 이후 최초의 생중계 사례였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방송이 결정되었다[102]. 한국 대중음악인 K-POP은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BoA(2002), 동방신기(2008, 2011), 소녀시대(2011), KARA(2011) 등이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한일 문화 교류에 기여했다.[103][104][105]
5. 1. 종교
백제는 성왕 때인 538년에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133]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는데, 이때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함께 전달되었다.[134]불교 수용을 놓고 왜국 조정은 갈등에 휩싸였다. 소가노 마치의 후손인 호족 소가노 이나메는 불교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또 다른 호족인 모노노베노 오코시와 나카토미노 가마소는 반대했다. 긴메이 천황은 이들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135][199]
552년,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노리사치계 등을 통해 일본에 보냈다.[137] 특히 번개는 그 장엄함이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였다.[138] 사원 건설을 위해 백제의 학자와 기술자들이 파견되었으며,[139] 577년에는 경론,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등 승려 집단과 불상 제작 기술자, 목수들이 파견되어 일본에서 절과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140][141] 이후 금속공예사와 기와 굽는 기술자들도 건너갔다.[142] 신라 역시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143]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가 건너갔다.[144][145]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는데,[146] 당시 대신이었던 소가노 우마코(소가노 이나메의 아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147] 588년(위덕왕 35년) 백제는 불사리, 승려 6명, 노반박사 장덕 백매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석마제미, 화공 1명 등 사찰 건설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백제 공예미술을 일본에 전파했다.[148][200][201]
관륵은 602년 일본에 건너가 천문, 책력, 지리, 둔갑방술 등에 관한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했다.[202]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배불파이자 국신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와의 정쟁에서 승리,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로부터 불교가 들어오면 자신들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203]
백제를 중심으로 불교 전래가 이루어졌으며, 백제는 불사리 외에도 승려, 사사, 노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 기술자를 파견했다. 성명왕은 긴메이 천황에게 불상, 불화, 경전을 보냈고, 고구려는 승려를 보냈다. 백제에서 왜국에 경론과 율사, 조불공이 전해졌고, 신라도 불상 등을 보냈다. 이러한 삼국의 문물은 일본 아스카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입조한 승려 중에는 백제의 관륵, 고구려의 담징, 쇼토쿠 태자의 스승 혜자 등이 있었다.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간 승려도 있었으며, 백제에서 수계하여 일본 최초의 여승이 된 선신니와 고구려에서 수행한 혜자 등이 있다.
오진 천황 시대에 백제에서 초빙된 박사 왕인이 유교 경전인 『논어』를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제 출신 왕진이 역시 유교 보급에 기여했다. '왕'을 성으로 가진 이들은 중국 출신 백제인일 가능성이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와 하야시 라잔 등 일본 유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된 조선 유학자 및 통신사들과 교류했다.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주자학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귀국 후 일본 견문기 『간양록』을 저술했다. 문록·경장역에서 다량의 서적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옮겨졌고, 이후 슨가 문고에서 보관되었다.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중심이었고 이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학은 일본의 유학을 평가했다.
5. 2. 음악
552년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음악가가 파견된 기록이 있다.[139] 통신사를 본뜬 예능에는 당인춤, 당자춤 등이 있다. 통신사가 닛코 도쇼구에 참배한 영향으로 나고야 도쇼구와 센다이 도쇼구의 제례에서도 조선풍의 당인 행렬이 등장했다. 간다묘진 축제나 산노 축제에서도 통신사 분장이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조선풍 의상으로 쓰지오도리도 유행했으나 막부의 금지령이 내려졌다. 가부키와 조루리 또한 통신사를 소재로 활용했다. 특히 당인 살해 사건은 유명하며, 『세와 요리 스즈키 호초』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일본의 무악은 통신사에게 선보여졌으며, 사루가쿠와 가가쿠 연주, 그리고 가부키 공연도 이루어졌다. 가가쿠의 나소리와 료오는 조선에서는 악보가 소실되었으나, 통신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한국인 가수 조용필은 처음으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일본 대중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01] 2010년 9월 10일, 일본 아이돌 그룹 SKE48가 '강한 자여'와 '푸른 하늘 첫사랑'을 일본어로 부르는 모습이 한국 지상파 방송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이는 일본 대중문화 4차 개방으로 일본어 노래 방송이 허용된 이후 최초의 생중계 사례였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방송이 결정되었다[102]. 한국 대중음악인 K-POP은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BoA(2002), 동방신기(2008, 2011), 소녀시대(2011), KARA(2011) 등이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한일 문화 교류에 기여했다[103][104][105].
5. 3. 미술
백제는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인물화상경(5~6세기)을 보냈는데, 이는 백제와 왜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577년(위덕왕 24년)에는 금속공예사와 기와 굽는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140][142], 579년에는 신라에서 불상을 보냈다.[143] 588년(위덕왕 35년)에는 백제가 불사리, 승려 6명, 노반박사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등 4명, 화공 1명 등 사찰 건설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148][204][205]5세기에는 구운 그릇인 스에키, 금속 공예 및 제철 등의 금속 가공 기술, 부뚜막 등의 기술이 일본 열도로 전해져 빠르게 보급되었다.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인 아스카데라 건설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지원했다. 건설에는 소가가 휘하의 도래인 기술자인 동한씨, 인소씨, 조처씨, 안부씨, 산서씨 등이 참여했으며, 본존불 제작에는 고구려가 황금을 보냈다.
외교에서 한시를 사용하는 습관은 중세에도 이어졌으며, 교섭에 시가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에 온 일본 사절의 창화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족자에 한시와 수묵화를 함께 표현하는 시화축이 한일 교류에 사용되었다. 세슈의 「산수도」에는 조선 관인 이손과 박형문의 찬이 있다.
상국사의 화승 슈분이 일본 사절로 조선에 4개월간 체류하며 조선 수묵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thumb|150px|세슈의 「산수도」. 향설미술관 소장]]
통신사는 한시 등 중국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일본의 문인, 묵객 및 민중과 교류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율시 서축에는 차운 형식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한일 교류의 지속을 희망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시인 허난설헌은 뛰어난 한시를 지었으나 조선에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후에 명나라에서 평판이 높아져 일본에도 소개되어 인기를 끌었다.
|300px|thumb|하네카와 후지에이 그림 『조선 통신사 내조도』. 에도 시내를 행렬하는 1748년(엔쿄 5년) 조선 통신사 행렬을 묘사. 고베 시립 박물관 소장, 이케나가 하지메 컬렉션.]]
통신사 행렬 그림 두루마리가 그려졌으며, 『낙중낙외도』나 『에도도 병풍』에도 통신사가 등장한다. 통신사를 그린 화가로는 가노 야스노부, 가노 마스노부, 하나부사 잇초, 오쿠무라 마사노부, 하네카와 후지에이, 우타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 등이 있다. 통신사의 이름과 직함 등을 담은 우키요에 판화는 가이드북으로 인기를 끌었다. 통신사의 화원은 일본 화가와 교류했고, 그 활동은 『고화비고』에 정리되었으며, 일본에서는 가노파의 병풍 그림을 선물했다. 통신사는 각지에 묵적을 남겼으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모시는 다이유인 영묘에는 '영산법계숭효정원'이 증정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 다이묘들은 조선에서 유학자들과 함께 많은 도공을 데려갔고, 일본 각지에서 도예가 성행했다. 특히 사가현아리타정의 이마리 도자기는 나가사키 무역을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유럽으로 수출하는 품목이 되었다. 시가현히가시오미시고쇼의 오바타 인형 중에는 통신사 수행원인 어린아이와 악대를 인형으로 만든 당인형도 있다.
6. 과학
552년에 백제의 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으며,[139] 성왕은 의박사와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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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協調へ努力 椎名・朴会談で確認 補足メモも渡す 田中親書と同時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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強制徴用訴訟で和解を提案 韓国弁護士協会会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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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紙、「歴代天皇で初」と詳報=埼玉の高麗神社参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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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G7韓日略式首脳会談に合意しておきながら一方的にキャンセ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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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首脳会談合意の事実なし 政府、韓国に抗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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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江原道元山市との友好都市盟約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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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報】 米国の入国禁止に静観決め込む日本 そもそも人権後進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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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が「核で沈める」と日本を威嚇-「言語道断」と菅官房長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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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列島、核で海に沈める」=制裁に便乗と日本非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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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が国製造業企業の海外事業展開に関する調査報告 -2017年度 海外直接投資アンケート結果(第29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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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が中国に売った「日本海」漁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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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 中国に東海NLLの漁業権も販売=代金は統治資金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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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船相次ぎ漂着 制裁下、食糧・外貨は漁業頼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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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相互交流1000万人目標 観光振興協議会、熊本市で開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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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5回日韓共同世論調査 日韓世論比較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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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地上波放送で日本歌手が日本語の歌、初の生放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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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村上春樹旋風」と「東野圭吾人気」に見る時代の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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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시즈오카 대학 농학부의 사토 요이치로 조교수와 미국의 많은 바이오계 연구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과 한반도, 요동반도 등 극동아시아에 존재하는 벼는, 온대성 자포니카종 및 열대성 자포니카종으로 크게 2종류로 나뉘는데, 그 중 일부 유전자를 가지고 종묘군의 유전자를 확인하면 중국 동북부부터 한반도를 원산지로 하는 개량종에서는 해당 유전자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 명확해졌다. 또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 의하여 분석해 보아도 일본에서의 탄화된 쌀은 기원전 4천년 정도까지 소급하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증거들을 가지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벼농사가 전래되었다고 본다.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역으로 일본에서 한반도에 전래되었다는 설명이 일본에서는 유력시되고 있다. 佐藤洋一郎『稲のきた道』裳華房/『DNAが語る稲作文明』日本放送出版協会、松尾孝嶺『栽培稲の種生態学的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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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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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진구 황후]]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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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왜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친백제 노선을 견지했다는 설과, 고토쿠 천황 중심의 친백제파와 나카노오에 황자 중심의 친신라(친당)파로 나뉘어 있었다는 설, 거꾸로 고토쿠 천황이 친신라(친당)파였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친백제파였다는 등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재석은 고토쿠 천황의 지휘 아래 이루어져 온 친신라(친당) 정책이 당의 백제 공격 결정에 의해 파탄나고, 친백제파였던 나카노오에가 아스카 천도를 단행하면서 고립된 고토쿠 천황을 실각시켰다는 견해를 주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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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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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윤기의 역사기행] ①일본 속 백제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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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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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이 대조선 무역에서 사용하던, 조선 정부가 일본의 통교자에게 발급해 준 도장. 도서는 도장의 면에 실명이나 성명을 새긴 구리로 된 도장이다. 이를 받은 일본인을 수도서인(受圖書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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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조선에 오가는 일본인이 쓰시마 도주 소 씨에게서 받은 도항증명서. 1436년부터 실시되었으며,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대조선 통교자는 문인을 지참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또한 조선 연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에 대해서도 쓰시마 소 씨의 문인이 발급되었다. 이로 인해서 조선으로 오는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할 수 있었고, 한반도 남해안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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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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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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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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