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계
1. 개요
정희계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민왕에게 발탁되어 근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호군에 이르렀으며, 우왕 시기에는 왜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유배를 겪기도 했다. 이후 이성계의 일파로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좌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계림군에 봉해졌다. 1396년 판한성부사 재직 중 사망하였으며, 사후 시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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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호군 -
최영
최영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국방을 굳건히 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공민왕을 보필했으나, 우왕의 요동정벌에 참여했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에 의해 처형당한 후 무민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무신이다. -
고려의 대호군 -
김저 (고려)
고려 후기 문신 김저는 우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공민왕 때 배원정책을 지지, 신돈을 비판하다 유배를 다녀왔으며, 공민왕 시해 후 은거,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제거를 모의하다 처형되었다. -
고려의 상호군 -
남은
남은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이성계, 정도전 등과 조선 건국에 기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나, 정도전과 함께 요동 정벌을 추진하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살해되었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
고려의 상호군 -
조인옥
조인옥은 공민왕 때 벼슬을 시작하여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고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1등공신으로 녹훈되었으며, 용성군, 한산군에 봉해지고 사후 충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1396년 사망 -
이색
이색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격변기 속에서 관료 생활을 이어가면서 고려 시대 문학의 대가로 평가받고 《목은고》 등의 저서를 남겼다. -
1396년 사망 -
신덕왕후
신덕왕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이성계의 계비이자 조선 초대 왕비로서 조선 건국에 기여했으며,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된 의안대군 옹립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후 지위가 강등되었다가 복위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2. 고려 말의 관직 생활
정희계는 처음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공민왕의 눈에 띄어 근시(近侍)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공민왕 사후에는 최영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1383년에는 왜구와 싸웠으나 패했다. 우왕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승진했으나, 무진피화 때 임견미, 염흥방 일파가 숙청될 때도 우왕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화를 면했다. 최영의 일파로 몰려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창왕의 생일을 맞아 풀려났다. 복직 후 김종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다시 유배를 갔지만, 국대비의 생일을 맞아 경외종편(京外從便)이 허락되었다.
2.2. 우왕 시대
공민왕 시해 후 최영의 막하로 예속되었다. 1383년(우왕 9) 밀직상의(密直商議)로서 전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 남좌시 등과 함께 왜구와 싸웠으나 패했다.
이듬해 우왕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했고, 이후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
우왕 14년 정월 무진피화로 임견미, 염흥방과 그 일당이 숙청될 때 역시 우왕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화를 면했다. 6월 최영의 일파로 지목되어 음죽(陰竹)으로 유배되었으나, 8월 창왕의 생일을 맞아 풀려났다.
2.3. 공양왕 시대
1390년(공양왕 2)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로 복직되었으나, 김종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다시 안변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국대비(國大妃)의 생일을 맞아 경외종편(京外從便)이 허락되었다.
3.1. 좌명공신 책록과 계림군 책봉
1392년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개국에 동참한 이성계의 일파로서, 같은 달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이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팔위상장군(八衛上將軍)·계림군(雞林君)에 임명되었으며, 12월 판팔위사(判八衛事)가 더해졌다.
3.2. 군사 활동
1393년 좌도수군도절제사(左道水軍都節制使) 박자안과 우도수군도절제사(右道水軍都節制使) 김을귀(金乙貴)가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를 토벌하러 갈 때, 고만량만호(高灣梁萬戶) 신용무(申用茂)의 죽음을 면하고 박자안과 함께 종군시킬 것을 청해 관철시켰다.
3.3. 사망과 시호
1396년(태조 5)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재직 중 등창으로 사망했다.
사후 봉상시(奉常寺)에서 그의 시호를 안양(安煬)·안황(安荒)·안혹(安惑) 등으로 의논해 예조(禮曹)에 올렸는데, 다시 예조에서 이를 보고받은 문하부(門下府)가 문안(文案)을 만들어 태조에게 결재를 청했다.
이에 태조는 정희계에게 악시(惡諡)를 올린 최견 등 5명을 장형(杖刑)에 처한 후 유배보냈고, 예조의 관리인 전백영·이황, 문하부의 관리인 맹사성·조사수는 파직했다.
고쳐진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4. 가족 관계
정희계의 증조부는 삼사정랑을 지낸 정공단이며, 조부는 유비창승을 역임한 정자초이다. 아버지는 문하평리를 지낸 월성군 정휘(1317년 ~ 1381년)이고, 어머니는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화평부원군을 지낸 충숙공 김심(1262년 ~ 1338년)의 7녀이다.
첫째 부인은 영삼사사, 곡성부원군, 충경공 염제신(1304년 ~ 1382년)의 3녀이고, 둘째 부인은 판서를 지낸 신귀의 차녀이다. 아들은 상호군을 지낸 정길상이며, 정발의 5대조이다. 첫째 사위는 중추원부사를 지낸 이만, 둘째 사위는 장령을 지낸 곽덕연, 셋째 사위는 군기시판관을 지낸 최도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