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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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사성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창이다. 1386년 고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조선 개국 후 예조 판서, 호조 판서, 공조 판서를 역임했다. 태종과 세종 시대를 거치며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세종 때 예악 정비, 여진 정벌을 지원하는 등 정치, 문화,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427년 우의정, 1431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청렴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칭송받았다. 저서로는 《강호사시가》가 있으며, 여러 드라마에서 그의 생애가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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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맹사성 |
원어명 | 孟思誠 |
로마자 표기 | Maeng Sa-seong |
별명 |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
출생일 | 1360년 8월 28일 / 음력 7월 17일 |
출생지 | 고려 양광도 온양 |
사망일 | 1438년 10월 22일 / 음력 10월 4일 (78세) |
사망지 | 조선 한양 |
거주지 | 조선 충청도 아산 설화산 및 고택 |
국적 | 조선 |
종교 | 유교 |
배우자 | 최씨 부인(최영의 손녀) |
자녀 | 맹귀미(아들) |
부모 | 맹희도(부), 홍양조(모) |
친인척 | 최영(장조부) |
경력 | |
직업 | 문인 겸 정치가 |
학력 | 1386년 문과 급제 |
고려 관직 | |
직책 | 고려 전의시승 |
임기 | 1387년 1월 18일 ~ 1388년 2월 29일 |
군주 | 고려 우왕 |
섭정 | 문하찬성사 반복해(前) |
조선 관직 | |
군주 | 조선 세종대 |
섭정 | 상왕 이방원 |
직책 | 조선의 판한성부사 |
임기 | 1419년 음력 9월 25일 ~ 1419년 음력 12월 7일 |
기타 |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1386년 고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춘추관 검열, 전의감승, 기거사인, 우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처가 동주 최씨의 조부 최영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살해되었지만, 그는 관직에 나아갔다.
1406년 (조선 태종 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귀국 후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 중 태종의 허락 없이 부마 조대림을 신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로 유배되었으나, 영의정 성석린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이후 예조 참판을 거쳐 1416년 예조판서에 승진하였고,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박탈하려 하자, 그는 왕세자 책봉 박탈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종 즉위 후에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이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425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7년(세종 9년)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고, 1429년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1년 좌의정에 임명되어 춘추관영사를 겸임하며 「신찬팔도지리지」의 편찬 및 발행에 참여하였다.
2. 1. 생애 초반
맹사성은 1360년 충청남도 아산 온양에서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맹희도는 고려 말 수문전제학에 이르는 관직을 역임했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도 검교한성윤에 임명되었다.[1] 맹사성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뒤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훗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되었다.[1]맹사성은 1386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典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 우헌납 등의 벼슬을 거쳤다.[1]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했다.[1]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였는데, 처조부인 최영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1] 이성계는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사위인 맹사성을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하였다.[1]
2. 2. 정치 활동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다. 1408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태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고문했다.[1]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과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나 당시 영의정이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1]1406년 (조선 태종 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귀국 후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생원시의 시관이 되어 권채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람한 문과복시에 득권관이 되었다. 그해 노부의 병환을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1418년 세종 즉위 후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때도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박탈하려 하자, 그는 왕세자 책봉 박탈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종 즉위 후에도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이조 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를 지냈다. 1425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27년(세종 9년)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고, 1429년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1년 좌의정에 임명되어 춘추관령사를 겸임하며 《신찬팔도지리지》의 편찬 및 발행에 참여하였다.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세종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자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고 태종 때 억울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자, 그는 세종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집현전 학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불교 귀의를 반대하였다.
그는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게는 관대했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자식에게 절을 하여 술버릇을 가르쳤다. 또한 김종서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냈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2. 3. 예악의 정비
조선 시대 유교 정치에서 예악, 즉 예의와 음악은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었다. 공자는 자신의 삶을 도덕에 근거하고 인애에 의지하며 예술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라고 했다. 예악은 유교적 삶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계였다. 그러기에 법치보다는 예치를 추구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정치를 지향한 것이었다.세종 때 예악의 정비가 우의정 맹사성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박연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전통 음악을 버리고 중국 음악 중심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맹사성은 전통 음악과 중국 음악을 조화하고 융합하는 방향에서 음악을 정비했다.
2. 4. 여진 정벌
세종 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방 영토가 확정되었다.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요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복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했다.세종은 1433년 1만 5천 명의 병력으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이 정벌에서 조선군은 적 170명을 사살하고, 36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과 소 170마리를 얻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0명에 불과했다.
이때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권진과는 달리 세종의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했다. 정벌 시기, 군사 규모,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 조직, 7개 부대에 의한 동시다발적 기습 작전 등은 모두 맹사성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정벌 후 맹사성은 모든 공을 최윤덕에게 돌려 그를 좌의정에 승진시켜 줄 것을 건의했다. 그는 좌의정 직을 사임할 각오까지 했지만, 세종은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세종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여진족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맹사성의 역할이 컸다.
2. 5. 온양 온천
세종은 격무로 인해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어 온양으로 내려와 온천욕으로 질병을 치료했다. 이 기념으로 '온양'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그런데 세종은 온천 치료의 혜택이 백성에게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백성을 위한 온천탕을 만들고 백성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이러한 세종의 뜻에 대해 맹사성은 즉시 찬성하여 시행되도록 했다. 온양에 살았던 맹사성은 온천 치료의 효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사성은 세종이 조선의 온천 복지 정책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3]
2. 6. 최후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나 한미한 사람이 방문해도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서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 주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 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맹사성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21호)는 경기도 광주 직동에 있다.
3. 평가
맹사성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효성이 지극한 관리로 평가받는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고, 세종 시대에 정승으로서 황희, 윤회 등과 함께 정치, 외교, 문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국방력 강화에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3. 1. 황희, 윤회와의 비교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황희, 맹사성, 윤회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겼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맹사성은 교육과 제도 정비를, 윤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았다.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가 분담하였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르면서 국방 업무는 김종서가 보좌하게 되었다.[5]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5]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5]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5]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했다.[5] 반면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5]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 남용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 않았다. 이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담하거나 공유하기도 했다. 이들은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4. 저서
〈강호사시가〉
5. 가족 관계
6. 관련 작품
맹사성과 관련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방영 연도 | 방송사 | 드라마 제목 | 배우 |
---|---|---|---|
1973년 | KBS | 세종대왕 | 이종만 |
1983년 | MBC | 뿌리깊은 나무 | 박규채 |
1996년~1998년 | KBS | 용의 눈물 | 임혁주 |
2008년 | KBS | 대왕 세종 | 안대용 |
2016년 | KBS | 장영실 | 김병기 |
2021년 | KBS | 태종 이방원 | 이동훈 |
6. 1. 드라마
7. 일화
맹사성은 평소 소탈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1435년, 맹사성은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항상 그의 의견을 구했다.[1]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맹사성은 항상 예의를 갖춰 대문 밖까지 나가 맞이하고 윗자리에 앉혔으며, 돌아갈 때에도 공손히 배웅하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고 한다.[1]
맹사성은 공무가 아닌 일에는 역마(驛馬)를 이용하지 않고 소를 타거나 걸어 다녔다.[1] 또한,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여 재산을 모으지 않고 조정에서 주는 녹미(祿米)로 생활했으며, 소를 타고 다녀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고 한다.[1] 이러한 맹사성의 지혜롭고 청렴결백한 성품은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1]
8. 관련 문화재
전세맹고불유물은 대한민국의 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이다.
참조
[1]
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
백과사전
맹사성
[3]
뉴스
고불 맹사성이 민족사에 남긴 세 가지 업적
http://ionyang.com/d[...]
온양신문
2011-04-22
[4]
웹인용
아산시청 홈페이지 중 아산을 빛낸 사람들
http://www.asan.go.k[...]
2008-02-19
[5]
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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