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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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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감영은 조선 시대 경상도 지역을 관할하던 감영으로, 초기에는 경주에 설치되었으나 여러 차례 위치를 옮겨 다녔다. 임진왜란 중 대구에 처음 설치되었고, 이후 안동을 거쳐 다시 대구로 옮겨져 갑오개혁으로 8도제가 폐지될 때까지 경상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상감영은 행정, 사법, 군사 기능을 수행했으며, 영영장판을 통해 출판 문화에도 기여했다. 현재는 경상감영의 건물인 선화당과 징청각이 남아 있으며, 경상감영 부지는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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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한국어 이름경상감영공원
한자 표기慶尙監營公園
로마자 표기Gyeongsang gamyeong gongwon
다른 이름중앙공원
위치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99
주소포정동, 감영공원
역사
지정2017년 4월 26일
사적 번호538
시설
주요 시설선화당
진청각
문화재 정보
문화재 이름대구 경상감영지
영문 이름Gyeongsanggamyeong Provincial Office Site, Daegu
유형사적
시대조선시대
소유대구광역시
면적3필지 14,678.7m2
문화재청13,05380000,22

2. 연혁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감사)를 파견하여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을 행사하게 했다. 관찰사가 머무는 관청을 감영(監營)이라 불렀다.

초기 경상도 감영은 경주부에 있었으나, 태종 대에 상주목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중종 대에는 경상도를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누었다가 합치기를 반복하면서 감영의 위치도 성주, 대구부달성, 안동부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9년(1596년),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대구부에 처음으로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정유재란으로 대구가 파괴되고 감영 건물이 불타면서 감영은 안동으로 옮겨졌다.

전쟁이 끝난 후인 선조 34년(1601년), 이덕형의 건의에 따라 감영은 다시 대구부로 이전하여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부사가 경상감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며, 현재 경상감영공원이 있는 자리에 감영 건물이 세워졌다. 대구는 감영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달성평야 등을 기반으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성장해 온 배경이 있었다.

현종 10년(1669년) 감영 제도가 복구되면서 대구는 다시 감영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고, 숙종 대에는 일부 주변 지역이 대구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후 갑오개혁으로 8도제가 폐지될 때까지 대구는 경상도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2. 1. 조선 초기 경상감영의 변천

조선고려의 5도 양계 지방행정체계를 조정하여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했다. 관찰사는 감사(監司)라고도 불렸으며, 해당 도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가졌고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겸직하여 군사 지휘권까지 행사했다. 도내의 모든 수령과 진관의 장수들은 관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관찰사는 중앙에서 파견되기도 했지만, 예산 절감 등을 이유로 관할 지역 대표 수령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아, 관찰사를 겸한 수령의 관저가 곧 감영이 되었다.

조선 초기 경상도 감영은 경주부에 있었고, 경주부윤이 경상감사를 겸했다. 태종 7년(1407년), 경상도가 넓고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을 우도, 동쪽을 좌도로 나누었다. 좌도는 경주부윤이, 우도는 상주목사가 관찰사를 겸하게 했다. 하지만 이 분도는 조세 체계 혼란 등 부작용을 일으켜 이듬해 다시 합쳐졌고, 감영은 상주로 옮겨져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되었다.

중종 14년(1519년), 감사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지적에 따라 다시 우·좌도로 나누어 상주목사와 경주부윤이 각각 관찰사를 맡았다가, 같은 해 12월 분도의 폐해가 크다는 이유로 다시 합쳐졌다. 이는 당시 기묘사화의 여파로 동요하던 영남 사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후에도 경상도는 상황에 따라 분도와 합도를 반복했고, 경상감영도 성주의 속현이었던 팔거현, 대구부의 달성, 안동부 등지를 옮겨 다녔다.

경상감영은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9년(1596년) 처음으로 대구부에 설치되었다. 좌우로 나뉘었던 경상도를 다시 합치면서, 경상도 중심부에 위치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대구가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으로 대구가 파괴되고 달성에 있던 감영도 불타면서, 감영은 내륙의 안동대도호부로 옮겨졌다.

왜란이 끝난 선조 34년(1601년), 이덕형은 안동이 교통이 불편하여 감영 위치로 부적합하다며 다시 대구로 옮길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감영은 대구부로 이전되었고, 대구부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되었으며, 대구부 실무를 담당할 판관직이 신설되었다. 감영 운영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경산, 하양, 화원이 대구부에 합속되었다. 이때 새로 지어진 경상감영 부지가 현재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된 선화당 일대이다. 선조 40년(1607년)에는 충청, 전라도 등과 함께 예산 절감을 이유로 감영 제도가 일시 폐지되어 대구부는 이전 상태로 돌아갔고 합속되었던 현들도 독립했지만, 이는 명칭과 예산 삭감에 그쳤을 뿐 경상도의 주요 업무는 계속 대구부에서 처리되었다.

대구가 감영 소재지로 부상한 배경에는 감영 설치 이전부터 축적된 성장 잠재력이 있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 건국 초기까지 현(縣)으로 존재했던 대구현은 태조 3년(1394년) 수성현을 합병하고, 태종 14년(1414년)에는 해안현과 하빈현을 합속하며 영역을 넓혔다. 이들 직속현은 대구현의 실질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달성평야, 수성평야, 해안평야의 농산물을 기반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세종 원년(1419년)에는 인구가 1,300호로 늘어나 군수가 파견되는 대구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조정은 대구군의 사회·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세종 30년(1448년) 전국 최초로 사창(社倉) 제도를 대구군에서 시범 실시했다. 세조 원년(1455년)에는 전국 내륙지방에 군사기지인 거진(巨鎭)이 설치되면서 대구와 인근 고을이 대구도(大邱道)에 편제되었고, 2년 뒤 진관체제가 확립되면서 대구에 대구진이 설치되어 인근 9개 군현의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는 대구가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발판이 되었다. 세조 12년(1466년) 대구는 이미 도호부사가 파견되는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어 있었다.

현종 10년(1669년) 감사의 임기를 2년으로 하는 감영제도가 복구되면서 대구부는 다시 감영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숙종 11년(1685년)에는 성주 소속의 화원 8개 방(坊)과 밀양 소속의 풍각(豊角) 4개 면이 대구에 추가로 합쳐졌다.

갑오개혁으로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로 개편될 때까지 대구는 명실상부한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유지했다.

2. 2. 임진왜란과 대구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던 경상감영은 처음으로 대구부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조선 조정은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뉘어 있던 경상도를 다시 합치면서, 경상도 중앙에 위치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대구를 주목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대구는 왜군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고, 달성에 있던 감영 건물도 불타버렸다. 이에 감영은 내륙에 위치하며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던 안동으로 다시 옮겨가게 되었다.

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4년(1601년), 이덕형은 안동이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하므로 감영의 위치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감영을 다시 대구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경상감영은 대구부로 이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대구부사가 경상감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또한 대구부의 실무를 담당할 판관(判官) 직책이 새로 만들어졌으며, 감영 운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인근의 경산, 하양, 화원 지역이 대구부에 통합되었다. 이때 새로 지어진 경상감영의 터가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으로 남아있는 선화당(宣化堂) 일대이다.

선조 40년(1607년), 충청도, 전라도 등 다른 도(道)와 마찬가지로 경상도에서도 예산 절감을 이유로 감영 제도가 일시적으로 폐지되면서 대구부는 이전의 지위로 돌아갔고, 합병되었던 현들도 다시 독립했다. 하지만 이는 명칭과 예산을 줄인 형식적인 조치에 가까웠고, 실질적으로 경상도의 주요 행정 업무는 계속해서 대구부에서 처리되었다.

이처럼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감영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꾸준히 성장해 온 덕분이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작은 현(縣)에 불과했던 대구는 태조 3년(1394년) 수성현을, 태종 14년(1414년)에는 해안현과 하빈현을 차례로 통합하며 영역을 넓혔다. 달성평야, 수성평야, 해안평야 등 넓은 농경지를 바탕으로 경제력을 키웠고, 세종 원년(1419년)에는 인구가 1,300호로 늘어나 군수가 파견되는 대구군으로 승격되었다.

세종 30년(1448년)에는 사창(社倉) 제도를 전국 최초로 시범 운영할 만큼 행정적으로도 중요성이 커졌으며, 세조 대에는 군사적으로도 요충지가 되었다. 1455년 지방 군사 조직 개편 과정에서 대구는 인근 고을을 포함하는 대구도(大邱道)의 중심이 되었고, 1457년 진관체제가 확립되면서 대구진(大邱鎭)이 설치되어 청도, 경산 등 주변 9개 군현의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 군사적 성장을 바탕으로 대구는 세조 12년(1466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현종 10년(1669년) 감사의 임기를 2년으로 하는 감영 제도가 복구되면서 대구부는 다시 감영 소재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이후 숙종 11년(1685년)에는 성주에 속했던 화원의 일부 지역과 밀양에 속했던 풍각의 일부 지역이 추가로 대구에 편입되면서 그 영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갑오개혁으로 8도제가 폐지될 때까지 대구는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2. 3. 대구의 성장과 경상감영

대구신라 시대부터 조선 왕조 개창 시기까지 지방 행정의 말단인 현(縣)으로 존재하며 인근 군이나 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 대구의 위상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태조 3년(1394년)에는 쇠약해진 수성현을 병합했고, 태종 14년(1414년)에는 해안현과 하빈현까지 합속하여 영역을 넓혔다. 이들 3개 현은 수령이 따로 파견되지 않는 직속현으로, 사실상 대구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달성평야, 수성평야, 해안평야 등 비옥한 농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기반으로 대구는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상업도 발달했다. 세종 원년(1419년)에는 상주하는 인구가 1,300호로 늘어나면서, 종4품 군수(郡守)가 파견되는 대구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조정 역시 대구군의 사회적,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세종 30년(1448년)에는 사창(社倉) 제도를 전국 최초로 대구군에서 시범 실시하기도 했다.

세조 시기에는 대구의 군사적 중요성도 커졌다. 세조 원년(1455년) 전국 내륙지방에 군사기지인 거진(巨鎭)이 설치될 때, 대구를 포함한 인근 고을들은 대구도(大邱道)에 편제되었다. 2년 뒤에는 진관체제가 확립되면서 대구에 대구진이 설치되어 청도, 경산, 신령, 하양, 현풍, 창녕, 의흥, 인동, 영산의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 군사적 성장을 바탕으로 대구는 세조 12년(1466년)에 이미 종3품 도호부사가 파견되는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어 있었다.

한편, 경상도를 관할하는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으나, 태종 7년(1407년) 경상도를 낙동강 기준으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누면서 좌도는 경주, 우도는 상주목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분도로 인한 조세 체계 혼란 등 부작용으로 이듬해 다시 합쳐지고 감영은 상주로 옮겨졌다. 중종 14년(1519년)에는 감사의 과중한 업무를 이유로 다시 분도했다가, 기묘사화 이후 영남 사림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 다시 합쳐지는 등 분도와 합도가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상감영은 성주의 속현이었던 팔거현, 대구부의 달성, 안동부 등을 전전했다.

경상감영이 처음으로 대구부에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이었다. 좌우도를 다시 합치면서 경상도 중심부에 위치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대구가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으로 대구가 파괴되고 달성에 있던 감영도 불타면서 감영은 다시 안동으로 옮겨졌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 34년(1601년), 이덕형은 안동이 내륙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하므로 감영을 다시 대구로 옮길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대구부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되었고, 대구부의 실무를 담당할 판관(判官)직이 신설되었다. 또한 감영 운영을 위한 재정 지원을 위해 경산, 하양, 화원이 대구부에 합속되었다. 이때 새로 지어진 경상감영 터가 현재 경상감영공원이 있는 대구 중구 포정동 일대이다. 선조 40년(1607년) 예산 절감을 이유로 감영 제도가 잠시 폐지되어 대구부가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합속되었던 현들도 독립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조치에 가까웠고 경상도의 주요 업무는 계속 대구부에서 처리되었다.

현종 10년(1669년) 감사의 임기를 2년으로 하는 감영 제도가 복구되면서 대구부는 다시 감영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숙종 11년(1685년)에는 성주에 속했던 화원의 8개 방(坊)과 밀양 소속 풍각(豊角) 4개 면이 추가로 대구에 편입되었다. 이후 갑오개혁으로 8도제가 폐지될 때까지 대구는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지이자 감영 소재지로서의 위치를 유지했다.

2. 4. 감영 제도 복구와 갑오개혁

선조 40년(1607년), 경상도를 비롯하여 충청, 전라도 등지의 예산 절감을 이유로 감영 제도가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 이 조치로 대구부는 이전의 지위로 돌아갔고, 대구부에 합쳐졌던 경산, 하양, 화원 등의 현(縣)들도 다시 원래대로 독립했다. 하지만 이는 감영의 이름을 없애고 관련 예산을 줄인 것에 가까웠으며, 실제 경상도의 각종 업무는 계속해서 대구부에서 처리되고 있었다.

현종 10년(1669년), 감사의 임기를 2년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감영 제도가 다시 복구되면서 대구부는 다시 감영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이후 숙종 11년(1685년)에는 성주에 속해 있던 화원의 8개 방(坊)과 밀양 소속의 풍각(豊角) 4개 면이 대구에 추가로 편입되었다.

갑오개혁으로 기존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로 나누어지는 지방 행정 개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대구는 명실상부한 감영(현재의 도청) 소재지로서 경상도의 중심지 역할을 유지했다.

3. 구조

경상감영은 대구읍성 안에 설치되었다. 성 안에는 관찰사가 경상도 전체의 행정과 사법, 그리고 수군과 육군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감영과, 대구부만의 행정 및 사법 업무를 담당하는 부아(府衙)가 별도로 존재했다. 만약 감사가 부사를 겸임하는 경우에는 판관이 부아 업무를 보았다. 또한, 대구진관 내의 군사 행정과 훈련을 맡은 영장(營將)의 집무실인 진영(鎭營)과 객사(客舍) 등도 성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관청 운영을 위해 실무를 전담하는 아전을 비롯하여 군교(軍校), 잡무를 맡는 사령(使令), 나장(羅將) 등이 있었고, 잔심부름 등 궂은일을 도맡는 관노비들도 있었다. 이들이 조선 후기 경상도의 행정 중심지였던 대구부성을 구성하는 주요 인원이었다. 읍성 주위에는 관청에서 근무하는 향리를 비롯해 상공인, 관노비, 중인 계층과 평민, 천민들이 주로 거주하며 각종 상업 활동에 종사했다.

4. 영영장판(嶺營藏板)

조선 시대의 감영은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널리 읽히는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경상감영에서 제작한 목판을 영영장판(嶺營藏板)이라 부르며, 이 영영장판으로 찍어낸 서적은 영영본(嶺營本)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의 출판은 중앙 정부에서 금속활자를 이용해 주요 서적을 먼저 간행하면, 각 지방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목판본을 만들어 보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고도의 전문 기술과 많은 비용, 물자를 동원할 수 있었던 지방의 감영이 자연스럽게 출판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경상감영의 이러한 역할은 조선 시대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구가 근대에 이르러 문학과 잡지 출판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등 출판 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5. 사적 지정사유

대구 경상감영 터는 경상감영의 건물인 선화당징청각이 원위치에 보존되어 있고 발굴조사 결과 감영지가 확인됨에 따라 조선 시대 임진왜란 이후 8도의 관아 구성을 보여주는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유적이다.[2]

6. 경상감영공원

경상감영 부지는 1966년 경상북도 청사가 산격동으로 이전한 후, 1970년 '''중앙공원'''으로 처음 조성되었다. 이후 1999년 현재의 이름인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3] 공원은 주로 노년층이 휴식을 위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대구 지역에서는 '''대구 탑골공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원 내에는 선화당징청각 등 역사적 건물이 남아 있다.

6. 1. 선화당

선화당은 관찰사가 공무를 보던 곳이다. 1730년 두 차례의 화재를 겪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1807년)에 재건된 것이다. 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6. 2. 징청각

징청각(澄淸閣)은 선화당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1730년 두 차례의 화재를 입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정조 13년(178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징청각은 선화당 뒤쪽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선화당과 함께 대구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7. 통일의 종

조국 통일을 기원하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달구벌대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제야의 종 타종식을 거행했다.

참조

[1] 웹사이트 Gyeongsang Gamyeong Park https://terms.naver.[...] 2023-06-07
[2]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7-60호(대구 경상감영지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http://gwanbo.mois.g[...] 관보 2017-04-26
[3] 간행물 대구광역시고시 제1999-38호 http://theme.archive[...] 대한민국정부 관보 199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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