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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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조네는 16세기 초 베네치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로,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이자 베네치아파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을 통해 일부 알려져 있으며, 흑사병으로 30대 초반에 사망했다. 조르조네는 섬세한 색채 기법인 스푸마토를 사용하고, 제단화에서 배경 풍경을 중요하게 다루는 등 혁신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풍경화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폭풍', '잠자는 비너스', '세 명의 철학자' 등이 있으며, 티치아노 등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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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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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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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르조 바르바렐리 다 카스텔프랑코 |
출생일 | 1477년–78년 또는 1473년–74년 |
출생지 |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베네치아 공화국 (현재의 베네토, 이탈리아) |
사망일 | 1510년 (31–37세) |
사망지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현재의 베네토, 이탈리아) |
국적 | 베네치아 공화국 |
활동 분야 | |
분야 | 회화 |
사조 | 盛期ルネサンス (베네치아 학파) |
스승 | 조반니 벨리니 |
주요 작품 | |
작품 | 폭풍 잠자는 비너스 카스텔프랑코 마돈나 세 철학자 |
영향 관계 | |
영향을 준 인물 | 티치아노 |
2. 생애
조르조네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며, 주로 조르조 바사리의 ''화가·조각가·건축가 평전'' 기록에 의존한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내륙으로 약 40km 떨어진 작은 마을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출신이다. 그의 이름은 때때로 '조르조'(Giorgioit)로도 표기되나, '조르조네'(Giorgioneit) 또는 '조르존'(Zorzonit)은 "큰 조르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린 시절 베네치아로 이주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화풍으로 미루어 카를로 리돌피의 기록처럼 조반니 벨리니 밑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베네치아에 정착하여 거장으로서 명성을 얻었다.[5][6]
조르조네는 스승으로 여겨지는 조반니 벨리니 이래 색채를 중시하는 베네치아파의 화풍을 한층 더 발전시킨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키아로스쿠로(명암법)를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킨 스푸마토 기법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슷한 시기에 사용했다. 스푸마토는 미묘한 색조 변화를 통해 빛과 원근감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조르조네 작품 특유의 매혹적인 빛의 효과를 만들어냈다.[41] 조르조 바사리는 조르조네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에서 스푸마토를 배웠다고 주장했지만, 바사리가 예술의 발전을 피렌체 중심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주장의 정확성은 확실하지 않다. 레오나르도의 기법은 미세한 점묘에서 유래했을 수 있으며, 조르조네는 이러한 기법을 활용하여 작품에 마법 같은 빛의 광채를 부여했다.
조르조네는 스승 조반니 벨리니의 화풍을 이어받아 베네치아파의 색채 중심적인 특징을 심화시켰다. 그의 작품은 종종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와 서정성으로 유명하며, <태풍>이나 <잠자는 비너스>와 같은 그림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잠자는 비너스>는 이후 티치아노 등에게 영향을 주어 유사한 주제의 작품들이 많이 그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르조네의 작품들은 그의 짧은 생애와 기록 부족, 그리고 동시대 화가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진위나 제작 경위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경우가 많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재능은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1500년, 20대 초반의 나이에 베네치아 총독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와 용병대장 콘살보 페란테의 초상화를 그리는 영예를 안았다. 1504년에는 고향 카스텔프랑코 대성당으로부터 또 다른 용병대장 마테오 코스탄초를 기리는 제단화 제작을 의뢰받았다. 1507년에는 십인 위원회의 의뢰로 베네치아 도제궁 청중 회의장을 위한 그림(주제 불명) 작업에 대한 대금을 일부 받기도 했다. 1507년부터 1508년까지는 새로 재건된 베네치아의 독일 상인회관(Fondaco dei Tedeschiit) 외부를 장식하는 프레스코화 작업에 당대의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는 이전에도 카사 소란조, 카사 그리마니 알리 세르비 등 베네치아 저택 외부에 유사한 작업을 수행한 경험이 있었으나, 이 작업들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바사리는 150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조르조네를 만났다고 기록했다. 모든 기록은 조르조네를 뛰어난 매력과 낭만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 위대한 연인이자 음악가로 묘사한다. 그의 예술은 당시 베네치아 생활의 관능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우아함과 시적인 멜랑콜리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약 20년 전 레오나르도가 토스카나 회화에 가져온 발전과 유사하게, 조르조네가 베네치아 회화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티치아노와 매우 긴밀하게 교류했다. 바사리는 티치아노가 조르조네의 제자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리돌피는 두 사람 모두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였으며 그의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말한다.[7] 그들은 독일 상인회관 프레스코화 작업을 함께 했고, 조르조네 사후 티치아노가 그의 미완성작 일부를 완성했다고 전해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조르조네는 조반니 벨리니 이래 색채를 중시한 베네치아파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그는 제단화와 초상화 외에도 새로운 주제의 범위를 개척했다. 성경이나 고전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때로는 이야기를 암시하면서도 구체적인 행동 묘사를 생략하고 형태와 색채를 통해 서정적이거나 낭만적인 분위기를 구현했다. 이는 마치 음악가가 소리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의 혁신적인 시도는 동시대 베네치아 화파의 화가들과 직계 후계자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는 티치아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팔마 베키오, 일 카리아니, 줄리오 캄파뇰라(와 그의 형제), 그리고 스승으로 여겨지는 조반니 벨리니까지 포함된다. 베네치아 본토에서는 '조르조니즘'(Giorgionism영어)이 모르토 다 펠트레, 도메니코 카프리올로, 도메니코 만치니 등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잠자는 비너스>(1508년 시작)는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았으나, 풍경 부분은 그의 화풍을 계승한 티치아노가 완성했다.
조르조네는 1510년 9월 또는 10월경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로 사망했다.[8] 전통적으로 베네치아 석호의 포베글리아 섬에서 사망하여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으나,[9][10][11][12][13] 2011년에 발표된 기록 보관소 문서는 그의 사망 장소를 라자레토 누오보 섬으로 밝히고 있다. 두 섬 모두 페스트 유행 시기 검역 장소로 사용되었다.[14] 1510년 10월 이사벨라 데스테가 베네치아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르조네가 이미 사망했음을 인지하고 그의 그림 구매를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 달 후 답장에는 그의 작품을 어떤 가격으로도 구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당시 그의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의 이름과 작품은 후세에도 계속해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과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화가들의 유사한 작품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한 세기 전, 조르조네 풍의 그림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간주했던 "판 조르조니즘"("Pan Giorgionismus")[15][40]은 더 이상 지지받지 않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현존하는 그림 중 확실하게 그의 진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작품 수를 극히 제한적으로 보기도 한다.
3. 화풍 및 기법
조르조네는 제단화나 초상화 외에도, 명확한 성경적 또는 고전적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형태와 색채를 통해 서정적이거나 낭만적인 분위기를 구현하는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시도했다. 이는 마치 음악가가 소리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혁신을 거듭하며 티치아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팔마 베키오, 일 카리아니, 줄리오 캄파뇰라 등 동시대 베네치아 화가들과 심지어 스승 조반니 벨리니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본토에서도 그의 화풍, 이른바 '조르조니즘'은 모르토 다 펠트레, 도메니코 카프리올로, 도메니코 만치니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 중 고향 카스텔프랑코 베네토의 산 리베라레 성당을 위해 그린 『카스텔프랑코 마돈나』는 성화 대화 형식의 제단화이지만, 배경에 그려진 풍경에 중요성을 부여하여 베네치아 회화의 혁신을 보여주었다. 이 기법은 벨리니를 비롯한 다른 화가들에게 빠르게 수용되었다.[16][41]
조르조네의 가장 중심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드레스덴의 『잠자는 비너스』는 조반니 모렐리에 의해 처음 그의 작품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는 16세기 문헌에 언급된 그림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17] 이 작품은 우아한 선과 윤곽으로 관능미를 절제하며, 여신이 누운 흰 천과 빛나는 배경 풍경이 조화를 이루어 신성함을 표현한다. 특히 야외 풍경 속에 누드를 배치한 것은 혁신적이었으며, 잠든 모습은 신비감을 더한다. 마르칸토니오 미켈의 기록에 따르면, 조르조네는 이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겼고, 배경 풍경과 후에 제거된 큐피드는 그의 사후 티치아노가 완성했다고 한다.[17]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비롯한 후대 베네치아파 화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원작의 명성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상화된 아름다움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유딧』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작품은 조르조네 특유의 풍부한 색채와 낭만적인 풍경 묘사를 통해 삶과 죽음이 동반자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조르조네의 현존하는 작품 대부분은 부유한 베네치아 수집가들을 위해 제작된 소형 그림으로, 긴 변이 60cm 미만인 경우가 많다. 이는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미술 시장의 특성을 반영하며, 조르조네는 이러한 소형 그림 제작에 집중한 최초의 주요 이탈리아 화가 중 한 명이었다.
『폭풍』은 서양 회화사상 최초의 풍경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림의 주제는 명확하지 않지만, 폐허가 된 도시 풍경과 다가오는 폭풍 속 개울 양쪽에 서 있는 남자(원래는 앉아있는 여성 누드였다는 것이 X선 분석 결과 밝혀졌다[18])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을 묘사하며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보여준다. 수많은 상징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으나, 어느 것도 명확한 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그림이 고대 그리스 화가 페아레스가 누구도 그릴 수 없는 것, 즉 태풍을 그렸다는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에 싸인 『세 명의 철학자』는 어두운 동굴 근처에 서 있는 세 인물을 묘사한다. 플라톤의 동굴이나 세 동방박사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명확한 주제보다는 조르조네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잠겨 있는 듯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루브르 박물관의 『전원의 연주』(현재는 티치아노 작품으로 전시됨[51])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작품은 "살, 직물, 나무, 돌, 잎의 모양을 거의 만져볼 수 있을 정도로 묘사"하여 질감에 대한 베네치아 화파의 애호를 보여준다.[19] 명확한 윤곽선 없이 부드럽게 처리된 풍경은 종종 목가적인 시에 비유된다.
조르조네와 젊은 티치아노는 초상화 장르에서도 혁신을 이루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초기 작품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조르조네의 작품 중 서명이 있거나 제작 연도가 확실한 것은 드물다.[20] 유일하게 1506년 6월 1일 제작 연도가 기록된 『라우라』는 인물의 존엄성, 명료함, 세련된 특징 묘사로 "근대적 방식"으로 그려진 초기 초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베를린의 『젊은 남자의 초상화』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평온함과 움직이지 않는 특징, 그리고 윤곽과 모델링의 깎아낸 효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19] 그의 초상화 중 일부는 단순히 외모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분위기나 기분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진 유형화된 인물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조르조네가 시작한 초상화 전통의 특징 중 하나로, 반드시 주문자에게 판매될 목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의 비종교적 인물화들의 주제 역시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많은 미술사가는 이 그림들이 특정한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기보다는, 조르조네의 혁신적인 스타일 자체가 중요하며, 16세기 전반 베네치아 비종교화의 특징인 학문적, 문학적 내용의 부재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21]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확실히 인정되는 그림의 수는 매우 적으며, 그의 작품과 그 영향을 받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구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한때 조르조네풍의 그림을 모두 그의 작품으로 간주하던 "판 조르조니즘"[15]은 더 이상 지지받지 않지만, 어떤 그림을 그의 진작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4. 주요 작품
4. 1. 작품 목록
아래는 조르조네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작품명 | 제작 연도 | 기법 및 크기 | 소장처 | 비고 |
---|---|---|---|---|
모세의 불 시험 | 1500–1501 | 유화, 89cm × 72cm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
솔로몬의 심판 | 1500–1501 | 유화, 89cm × 72cm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
유딧 | 약 1504 | 유화, 판넬에서 캔버스로 이전, 144cm × 66.5cm |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 |
양치기들의 경배 | 약 1505–10 | 유화, 90.8cm × 110.5cm |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 |
카스텔프랑코 마돈나 | 약 1505 | 유화, 200cm × 152cm | 두오모,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 성 프란체스코와 성 니카시우스 사이에 앉은 마돈나와 아기 |
젊은 신부의 초상 (라우라) | 약 1506 | 유화, 41cm × 33.5cm | 미술사 박물관, 빈 | |
폭풍 (라 템페스타) | 약 1508 | 유화, 82cm × 73cm |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 |
라 베키아 (늙은 여인) | 약 1508 | 유화, 68cm × 59cm |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 |
목가적 콘서트 | 약 1509 | 유화, 110cm × 138cm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현재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짐 |
청년의 초상 | 1508–10 | 유화, 72.5cm × 54cm | 미술박물관, 부다페스트 | |
세 명의 철학자 | 1509 | 유화 | 미술사 박물관, 빈 | |
기수와 함께 있는 전사의 초상 | 약 1509 | 유화, 90cm × 73cm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
잠자는 비너스 | 약 1510 | 유화, 108.5cm × 175cm | 옛 명화 회화관, 드레스덴 | 티치아노가 완성했다는 기록 있음 |
열정적인 가수 | 약 1510 | 유화, 102cm × 78cm |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
젊은 남성의 초상 | 목판 유화, 69.4cm × 53.5cm |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 ||
화살을 든 젊은이 (Garçon à la flèche) | 귀속 논란 있음 |
산 리베라레 성당(카스텔프랑코 베네토)
조르조네의 고향인 카스텔프랑코 베네토의 산 리베라레 성당에는 1503년경에 그려진 『'''카스텔프랑코 제단화'''(왕좌의 성모자와 성 리베라레, 성 프란체스코)』가 있다. 이 작품은 왕좌에 앉은 성모자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성 리베라레, 왼쪽에 성 프란체스코를 배치한 성화 대화 형식이다. 배경에는 베네치아 회화의 혁신이라 할 수 있는 풍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이 기법은 스승인 벨리니를 비롯한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주었다.[41] 조르조네는 명암법인 키아로스쿠로를 더욱 세련되게 하여 미묘한 음영으로 원근감을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동시대에 사용했다.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는 조르조네의 스푸마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바사리가 베네치아 화가를 다소 낮게 평가하고 예술의 모든 발전과 혁신을 피렌체 예술가의 공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어 이 기록의 정확성은 확실하지 않다. 조르조네의 스푸마토 기법은 그의 작품에 매혹적인 빛 표현을 부여하며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르조네의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드레스덴의 옛 거장 미술관이 소장한 『'''잠자는 비너스'''』이다. 우아하고 음악적인 곡선 구성으로 고요한 관능미를 표현하며, 여신이 누워 있는 흰 천과 배경의 신선한 풍경이 조화를 이루어 여신의 신성을 드러낸다. 단 한 명의 나체 여인을 야외에 그린 이 작품은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으며, 야외 배경은 잠든 여신에게 신비감을 더한다.
이 그림을 처음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본 것은 19세기 미술사가 조반니 모렐리이다. 베네치아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의 기록에 따르면, 『잠자는 비너스』는 미완성 상태였고 배경에는 큐피드가 그려져 있었으나 후에 지워졌으며, 조르조네 사후 티치아노가 완성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 후대 베네치아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조르조네의 원작을 능가하는 평가는 드물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의 『'''유딧'''』 역시 『잠자는 비너스』처럼 이상화된 여성상을 보여준다. 애수 어린 화풍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조르조네 특유의 뛰어난 색채 감각과 서정적인 풍경 묘사를 통해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표현하고 있다.
제단화와 프레스코화를 제외하면, 현존하는 조르조네의 작품 대부분은 부유한 베네치아인 저택에 걸기 적합한 작은 크기(긴 변이 60cm 정도)이다.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작은 그림 시장이 발달했으며, 조르조네는 이 시장의 성장에 기여한 초기 주요 화가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는 사회적 번영과 귀족들의 대저택 장식 수요 증가로 그림 크기가 점차 커졌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의 『'''템페스타'''』는 서양 미술사상 최초의 풍경화 중 하나로 꼽힌다. 작품의 정확한 의도는 불분명하지만, 조르조네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강 양쪽에 병사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이 배치되고, 무너진 건물과 다가오는 폭풍이 그려져 있다. 많은 상징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정설은 없다. 초기에는 도시와 시골, 남성과 여성의 이중 구조로 해석되었으나, X선 촬영 결과 원래 왼쪽에 병사 대신 앉아 있는 나체 여인이 그려졌던 것이 밝혀져 이 설은 힘을 잃었다.[42]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의 『'''세 명의 철학자'''』는 어두운 동굴 주위에 세 인물을 그린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일부 연구자는 진품 여부에 의문을 제기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나 신약성서의 동방 박사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다른 조르조네 작품 특유의 흐릿한 빛과 서정적인 분위기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다. 최근에는 조르조네가 "인물, 의복, 나무, 바위, 나뭇잎을 명확하게 구별하려 한 결과"라는 설도 제기되었다.[43] 이 작품의 명확한 윤곽 부족과 풍경 표현은 루브르 박물관 소장의 『목가적 콘서트』와 비교되기도 한다.
조르조네와 그의 제자로 알려진 젊은 티치아노는 초상화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두 사람의 초기 작품을 정확히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때도 있다. 조르조네는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고, 제작 연월일이 정확히 밝혀진 작품은 단 하나뿐이다.[44] 유일하게 1506년 7월 1일 제작 연월일이 확인된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라우라'''』는 "후기의 화풍"으로 그려졌으며, 품격 있고 섬세한 성격 묘사로 다른 작품과 구별된다. 베를린 그림 갤러리 소장의 『'''젊은 남성의 초상'''』 역시 "고요한 남성의 표정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깊이 있는 입체감 넘치는 표현"으로 높이 평가받는다.[43]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중에는 주문 기록 등이 남아 있다고 하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주문 기록의 대부분은 그 작품의 분위기나 모습이 적혀 있을 뿐이며, 조르조네의 영향을 받아 그 화풍을 모방한 그림의 대부분에 해당하고, 더욱이 반드시 모델이 된 인물에게 작품이 팔렸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조르조네가 그린 종교적 함의를 갖지 않는 초상화는 단순히 주문 기록의 정보로부터 판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그 기록과 그림과의 상세한 대조와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많은 미술사가는 "기록으로부터 조르조네의 작품을 판별하는 것은 현저하게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조르조네 특유의 혁신적인 화풍이 보이는지, 16세기 전반의 종교적 함의를 갖지 않고 그려진 베네치아 그림의 거의 모든 특징인 학문적 또는 문학적 요소의 결여를 조사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45]
샌디에이고 미술관(캘리포니아), 1508년경
5. 작품의 진위 논쟁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귀속시키는 문제는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당시 그의 그림 중 일부는 다른 화가들이 완성했으며, 그의 높은 명성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잘못된 귀속 주장을 낳았다. 이 시대 회화에 대한 기록은 주로 교회나 정부를 위한 대규모 의뢰와 관련된 것이 많아, 조르조네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규모 가정용 패널 그림은 기록될 가능성이 훨씬 적었다. 또한 다른 화가들이 수년 동안 그의 화풍을 따라 그렸고, 16세기 중반부터는 의도적으로 속이려는 위작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2][46]
작품 특정에 있어 주요한 초기 기록은 베네치아 수집가 마르칸토니오 미켈(Marcantonio Michiel)이 1525년부터 1543년까지 작성한 기록에서 나온다. 이 기록에는 12점의 회화와 1점의 드로잉이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중 5점의 회화는 미술사가들에 의해 현존하는 작품과 거의 만장일치로 동일시된다.[23][47] 이 5점은 『템페스타』(The Tempest), 『세 명의 철학자』(The Three Philosophers), 『잠자는 비너스』(Sleeping Venus), 『화살을 든 소년』(Boy with an Arrow)[24][48], 그리고 『피리를 부는 목동』(Shepherd with a Flute)이다(마지막 작품은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의견도 있다). 미켈은 『세 명의 철학자』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완성했고, 『잠자는 비너스』는 티치아노가 완성했다고 기록했다(현재는 티치아노가 풍경 부분을 그렸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일부 최근 미술사가들은 『세 명의 철학자』에도 티치아노가 참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템페스타』는 조르조네가 전적으로 혼자 그린 것으로 널리 인정받는 유일한 주요 작품이다. 이 외에도 고향 카스텔프랑코의 제단화(카스텔프랑코 제단화)는 거의 의심받지 않았으며, 독일 창고에서 발견된 파손된 프레스코 조각들도 마찬가지이다. 빈의 『라우라』(Laura)는 뒷면에 그의 이름과 날짜(1506년)가 적힌 유일한 작품이지만, 반드시 그의 손으로 직접 쓴 것은 아니더라도 그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초기 그림 한 쌍(『모세의 불 시험』 등)도 일반적으로 그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화가·조각가·건축가 열전』(Vite) 초판(1550년)에서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Christ Carrying the Cross)를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돌렸으나, 1568년에 완성된 두 번째 판에서는 이 작품의 저자를 조르조네(1565년 인쇄된 전기)와 티치아노(1567년 인쇄된 전기)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바사리는 이 기간 사이에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다른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26][49] 조르조네와 젊은 티치아노의 그림을 구분하는 어려움은 루브르 박물관의 『목가적 콘서트』(Fête champêtre)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2003년에 "아마도 전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서 가장 논쟁이 많은 귀속 문제"로 묘사되었으며[27][50], 조르조네 말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그림에 영향을 미친다.
『목가적 콘서트』는 프라도 미술관의 『성모자와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성 로쿠스』[28][52]를 포함한 소수의 그림들과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미술사학자 찰스 호프(Charles Hope)에 따르면, 이 그림들은 "조르조네보다 그럴듯하지 않은 후보였기 때문에 티치아노에게 더 자주 귀속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작품들을 포함하는 티치아노 초기 작품의 일관된 연대기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일반적인 지지를 받거나 그의 경력에 대한 알려진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는 대안으로 이 그림들을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 도메니코 만치니(Domenico Mancini)에게 귀속시키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29][53] 과거 크로우와 카발카셀레(Crowe and Cavalcaselle)는 피티 궁전의 『콘서트』를 조르조네의 걸작으로 보았지만 루브르의 『목가적 콘서트』는 제외했고, 레르몰리에프(Lermolieff)는 반대로 『목가적 콘서트』를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복원하고 피티 궁전의 『콘서트』를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주장했다.[30]
조르조네 양식을 판화로 옮긴 것으로 알려진 판화가 줄리오 캄파뇰라(Giulio Campagnola) 역시 때때로 고려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고(故) W.R. 리어릭(W.R. Rearick)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일 트라몬토』(Il Tramonto)를 캄파뇰라의 작품으로 보았으며,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의 작품일 수 있는 여러 드로잉에 대한 대안적 귀속 대상으로도 제시된다.[31][54]
조르조네의 짧은 경력 초기 그림 그룹은 때때로 워싱턴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 있는 『앨런데일 양치기들의 경배』(Allendale Nativity)를 따서 "앨런데일 그룹"으로 불린다. 이 그룹에는 워싱턴의 또 다른 그림인 『성가족』과 런던 런던 국립 미술관의 『동방박사의 경배』 프레델라 패널이 포함된다.[32][55] 이 그룹은 종종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매우 유사한 『양치기들의 경배』[33][56]를 포함하도록 확장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앨런데일 양치기들의 경배』는 1930년대에 화상 조지프 듀빈 경(Lord Duveen)과 미술사가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 사이의 유명한 불화를 일으켰다. 듀빈은 이 그림을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사무엘 크레스(Samuel Kress)에게 팔았지만, 베렌슨은 초기 티치아노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베렌슨은 조르조네의 작품 목록을 20점 미만으로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34][57]
상황은 확실하게 조르조네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드로잉이 거의 없다는 점(로테르담에 있는 한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과 조르조네 후기 양식을 정의하는 논쟁의 여러 측면이 드로잉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당대 작가들에게 크게 칭찬받고 이탈리아에서 위대한 이름으로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조르조네는 더 넓은 세계에는 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것으로 추정되던 그림들은 다른 화가들에게 귀속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유딧』은 오랫동안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드레스덴의 『잠자는 비너스』는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19세기 후반에 조르조네 부흥이 시작되면서 유행은 반대로 돌아섰다. 1세기 이상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현재에도 활발하며, 특히 초상화를 중심으로 1세기 전에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그림들이 이제 그의 작품에서 확실하게 제외되었지만, 논쟁 자체는 그때보다 더 치열하다.[35][58] 논쟁은 주로 인물과 풍경이 있는 그림과 초상화라는 두 가지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다. 데이비드 로샌드(David Rosand)는 1997년에 "알레산드로 발라린(Alessandro Ballarin)의 작품 목록에 대한 급진적인 개정...[파리 전시회 카탈로그, 1993년]...뿐만 아니라 마우로 루코(Mauro Lucco)...[밀라노 서적, 1996년]에 의해 상황이 새로운 비판적 혼란에 빠졌다"고 언급했다.[36][59] 2004년 빈과 베네치아, 2006년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전시회는 미술사가들에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작품들을 나란히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2012년 찰스 호프는 "사실, 오늘날 그가 그린 것이라는 명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초기 증거가 있는 그림은 세 점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일반적으로 20점에서 40점 사이의 그림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들 대부분은...방금 언급한 세 점과 전혀 유사하지 않다. 그중 일부는 조르조네의 작품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알 수 없다"고 비판했다.[37]
6. 영향 및 유산
조반니 벨리니 이후 색채를 중시한 베네치아파를 한층 더 발전시킨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제단화나 초상화 외에도, 성경적이거나 고전적인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지 않으면서 형태와 색채를 통해 서정적이거나 낭만적인 분위기를 구현하는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시도했다. 이는 마치 음악가가 소리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태풍>(1505? 추정)은 특정한 이야기를 명확히 드러내기보다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는 고대 그리스의 화가 페아레스가 누구도 그릴 수 없는 것, 즉 태풍을 그렸다는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조르조네는 종교적, 풍유적 또는 역사적 목적 없이, 독립적인 틀 안에 인물이 있는 풍경화를 그린 최초의 이탈리아 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 속 색채는 열정적이고 빛나며 녹아드는 듯한 강렬함을 지녔는데, 이는 이후 베네치아 화파 전체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밑그림 없이 그림을 그리고, 예술적 효과를 감상적인 표현이나 이야기 전달에 종속시키지 않는 등 기법적인 혁신도 보여주었다. 1508년경 그리기 시작한 <잠자는 비너스>는 밝은 광채 아래 풍만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관능미를 현실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의 요절로 미완성으로 남았으나 풍경 부분은 티치아노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러한 천재성과 혁신성은 동시대 및 후계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티치아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팔마 베키오, 일 카리아니, 줄리오 캄파뇰라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그의 스승으로 여겨지는 조반니 벨리니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베네치아 본토에서는 그의 화풍을 따르는 경향을 '조르조니즘'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이는 모르토 다 펠트레, 도메니코 카프리올로, 도메니코 만치니 등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티치아노와는 매우 긴밀하게 교류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티치아노를 조르조네의 제자로 기록했지만, 카를로 리돌피는 두 사람 모두 조반니 벨리니 밑에서 함께 수학했다고 주장한다.[7] 그들은 독일 상인회관 프레스코화 작업을 함께 했으며, 조르조네가 요절한 후 티치아노가 그의 미완성 작품 일부를 완성했다는 설이 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조르조네의 이름과 작품은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화가들의 유사한 작품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한때 조르조네 풍의 그림을 무분별하게 그의 작품으로 간주하던 "판 조르조니즘"[15][40]은 더 이상 지지받지 않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현재 남아있는 그의 진품 수를 극히 제한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조네가 남긴 유산, 특히 색채 사용과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은 티치아노와 17세기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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