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 이탈리아 (1966년 FIFA 월드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는 아시아 팀 최초의 월드컵 승리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경기이다. 북한은 예선에서 호주를 꺾고 본선에 진출하여, 1차전에서 소련에 패했으나 2차전에서 칠레와 비겨 1무 1패를 기록했다. 이탈리아는 1차전에서 칠레를 이겼지만 소련에 패해 1승 1패로 북한과의 경기에서 8강 진출을 다퉜다.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 42분 박두익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이탈리아를 탈락시키고 8강에 진출했다. 이 경기는 이탈리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북한은 8강에서 포르투갈에 패했으나, 아시아 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 포르투갈 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010년 FIFA 월드컵)
2010년 FIFA 월드컵 G조 2차전에서 포르투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6-0으로 꺾었으며, 포르투갈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경기력에 대한 비판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다 실점팀 중 하나가 되었다. - 1966년 축구 경기 - 1966년 아랍컵
1966년 아랍컵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10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어 이라크가 시리아를 꺾고 우승했으며 알리 알-비스키가 득점왕을 차지했다. - 1966년 축구 경기 - 1966년 FIFA 월드컵 결승전
1966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은 잉글랜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와 서독 간에 치러진 경기로, 잉글랜드가 서독을 4-2로 꺾고 우승했으며, 제프 허스트의 해트트릭과 논란의 "웸블리 골"이 나왔고 영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된 행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 1966년 FIFA 월드컵 -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은 잉글랜드(개최국)와 브라질(전 대회 우승국)을 제외한 14장의 본선 진출 티켓을 놓고 74개국이 경쟁했으며, 대륙별 예선을 통해 진출국이 결정되었고,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의 보이콧 등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본선에 진출하는 이변이 있었다. - 1966년 FIFA 월드컵 - 1966년 FIFA 월드컵 결승전
1966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은 잉글랜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와 서독 간에 치러진 경기로, 잉글랜드가 서독을 4-2로 꺾고 우승했으며, 제프 허스트의 해트트릭과 논란의 "웸블리 골"이 나왔고 영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된 행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 이탈리아 (1966년 FIFA 월드컵) | |
---|---|
경기 정보 | |
제목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 이탈리아 |
대회 | 1966년 FIFA 월드컵 4조 3차전 |
날짜 | 1966년 7월 19일 |
경기장 | 에이섬 파크 |
도시 | 미들즈브러, 영국 |
관중수 | 18,727명 |
심판 | 피에르 슈빈테 |
경기 결과 | |
팀 1 협회 | PRKFA |
팀 1 득점 | 1 |
팀 2 협회 | FIGC |
팀 2 득점 | 0 |
최우수 선수 | 박두익 |
관련 정보 | |
참고 자료 | 英 일간지 “한국-독일전 ‘역대 월드컵 충격적인 경기’ 2위”... 1위는? |
2. 경기 전 상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FIFA 월드컵 첫 번째 대결이자 첫 A매치 경기였다. 이 경기는 이탈리아가 아시아 팀과 처음으로 맞붙는 경기이기도 했다. 대회 전, 영국의 도박사들은 이탈리아의 우승 확률을 20%로 예측하여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50%),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25%)에 이어 3위로 꼽았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로 16개국 중 최하위였다. 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과 같았다. 축구 전문가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경기에서 1득점만 해도 선전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 경기의 관중은 2만 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의 압승을 예상했다.
전력 차이가 큰 두 팀의 대결이었기에 많은 이들은 경기 전부터 이탈리아의 압승을 점쳤다. 하지만 축구공은 둥글고, 축구는 신체 중 가장 부정확한 발로 하는 스포츠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2.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대회를 앞두고 FIFA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묶어 단 1장의 출전권만을 부여하였다. 이에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런 FIFA의 명백한 차별적 행위에 분노를 품고 집단 보이콧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또한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의 전력이 강성하다는 걸 알고 맞대결을 피하기 위해 불참을 선언했다. 결국 이 대회의 지역예선은 북한과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맞대결로 압축되었다. 이 당시는 냉전 체제였기 때문에 북한과 호주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역예선은 반드시 홈 &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야 하는데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중립지역인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예선전 2경기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예선 1차전에서 북한은 호주를 상대로 6 : 1 압승을 거두었고 2차전에서도 3 : 1 완승을 거두어 합산 점수 9 : 2로 첫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다.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 출연했던 당시 북한의 중앙 수비수 림중선의 말에 따르면 북한이 본선 진출을 확정 짓고 귀국한 그 날 김일성이 일일이 선수들을 안아주면서 "우리가 아시아, 아프리카, 대양주(오세아니아) 등 유색인종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것인 만큼 가서 1~2 팀이라도 이기고 돌아오라."는 과업을 부여했다고 한다.북한은 1차전에서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과 맞붙었다. 북한과 소련은 같은 공산권 국가였고 그 때문에 북한은 월드컵을 앞두고 주로 같은 공산권 국가인 동유럽을 돌면서 평가전을 치렀다고 한다. 그래서 소련은 북한이 왕성한 체력과 빠른 기동력을 앞세운 축구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북한 선수들보다 우세한 체격 조건과 완력을 앞세워 더티 플레이를 일삼았다. 소련의 이 같은 더티 플레이 때문에 북한 선수들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고 중앙 공격수인 강용운이 부상으로 퇴장당하는 불운을 겪었다.[2] 이 대회까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만약 한 선수가 부상을 당해 더 이상 못 뛰게 되면 그 선수가 빠진 채로 계속 경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북한은 10명이 뛰어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였고 결국 소련에 0 : 3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2차전 상대는 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던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다. 당시 칠레도 1차전에서 이탈리아에 0 : 2로 패배한 상황이었기에 두 팀은 서로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북한은 칠레를 맞아 투지 넘치고 빠른 스피드를 앞세운 공격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전반 26분, 루벤 마르코스에게 페널티킥 선제골을 허용하며 0 : 1로 끌려갔다. 패색이 짙어지던 북한은 후반 43분, 박승진의 극적인 동점골에 힘입어 1 : 1 무승부를 기록했고 첫 득점과 첫 승점을 챙겼다.
1무 1패를 기록한 북한이 8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탈리아를 이겨야 했고 그 다음에 다음 날에 열리는 소련과 칠레의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3] 비기거나 질 경우엔 다른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무조건 탈락이었다.
2. 2. 이탈리아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전력이 약화된 이탈리아는 1950년 FIFA 월드컵과 1954년 FIFA 월드컵에서 연달아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1958년 FIFA 월드컵에서는 아예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1950년대 월드컵에서 부진했던 이탈리아는 1960년대에 어느 정도 암흑기에서 벗어났지만, 1962년 FIFA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한 암흑기에서 벗어나고, 당시 브라질과 함께 월드컵 최다 우승국(2회)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마침 이 대회에는 파올로 바리손, 자코모 불가렐리, 자친토 파케티, 산드로 마촐라, 지아니 리베라 등 세리에 A의 스타 선수들이 총출동하여,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암흑기를 벗어나 우승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탈리아는 1차전에서 칠레를 상대로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력을 보이며 2 : 0으로 가볍게 승리하여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2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는 90분 내내 고전하다가 결국 0 : 1로 패배했다.1무 1패를 기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8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탈리아를 이겨야 했고, 다음 날 열리는 소련과 칠레의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기거나 지면 다른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무조건 탈락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기면 무조건 8강에 진출하고, 비길 경우에는 소련이 칠레를 상대로 무승부 이상을 기록해야만 했다. 만약 이탈리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기고 칠레가 소련을 이기면 두 팀의 골득실을 비교해야 했다. 이탈리아 역시 패배하면 소련과 칠레의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무조건 탈락이었다.
3. 경기
이 경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FIFA 월드컵 첫 번째 맞대결이자 첫 A매치 경기였다. 이탈리아는 아시아 팀과의 첫 경기였다. 대회 전, 영국 도박사들은 이탈리아의 우승 확률을 20%로 예측하여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50%),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25%)에 이어 3위로 예상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로 16개국 중 최하위였다. 즉,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었다. 축구 전문가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경기에서 1골만 넣어도 선전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저평가했다. 이 경기의 관중은 2만 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의 압승을 예상했다.[1]
경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966년 7월 19일 19:30 (UTC+1) |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1 – 0 | 이탈리아 |
박두익 (42') | ||
에이섬 파크, 미들즈브러 | ||
관중: 18,727명 | ||
주심: 피에르 슈빈테 (프랑스) |
'''최우수 선수:'''
박두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심:'''
존 아다이르 (니제르)
존 테일러 (잉글랜드)
3. 1. 전반전
경기는 이탈리아가 북한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양상으로 시작되었다. 전반 초반 마리노 페라니가 왼발 강슛을 날렸으나 골문 왼쪽 밖으로 벗어났다. 산드로 마촐라의 패스를 받은 페라니가 다시 오른발 슛을 시도했지만, 신영규의 밀착 수비에 막혀 리찬명 골키퍼가 선방했다. 페라니는 빠른 발로 1:1 기회를 만들었으나, 이 역시 리찬명 골키퍼에게 막혔다. 이탈리아 응원단은 승리를 확신하며 여유롭게 경기를 관람했지만, 득점 기회를 연달아 놓친 선수들은 점차 초조해했다.[1]이후 북한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북한 선수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바탕으로 빠른 속도를 활용해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흔들었다. 특히 라이트 윙 한봉진의 빠른 발은 이탈리아 수비진을 당황하게 했다. 에드문도 파브리 감독은 레프트백 자친토 파케티에게 한봉진을,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에게 박두익을 막도록 지시했지만, 두 선수 모두 북한 선수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1]
전반 34분, 이탈리아의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가 박승진에게 거친 태클을 시도하다 오히려 자신이 부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 나갔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남은 시간을 10명으로 싸워야 했다. 선장을 잃은 배처럼 이탈리아 선수들은 심리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1]
전반 42분, 임성휘가 전방으로 보낸 공을 이탈리아 수비수가 걷어냈으나, 하정원이 다시 헤더로 연결했다. 이 공을 받은 박두익은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 오른발 땅볼 슛을 날렸고, 공은 골문 왼쪽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며 북한의 선제골이 되었다. 박승진은 골망을 흔들며 기뻐했다. 전반전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북한이 1 : 0으로 앞선 채 종료되었다.[1]
3. 2. 후반전
자코모 불가렐리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수적으로 불리해졌고, 선제 실점까지 한 이탈리아는 심리적으로 조급해졌다. 이탈리아는 이 경기에서 지면 탈락이었기에 필사적으로 경기했지만, 평정심을 잃고 조직력이 무너져 득점 기회를 놓쳤다. 오히려 선제골을 넣은 북한은 빠른 역습으로 이탈리아를 위협했다. 박두익이 김봉환에게 패스하여 골키퍼와 1대1 상황을 만들었으나 골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이탈리아의 지아니 리베라가 중거리 슛을 날렸지만, 북한 골키퍼 리찬명의 선방으로 무산되었다.[1]시간이 흐르면서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북한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리찬명은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서 "내 뒤에는 조국이 있고 인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죽어도 골문을 사수해야 한다는 각오로 임했다"고 회고했다. 명례현 감독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2팀은 이기라는 과업을 주셨기에 이를 관철하려 했다"고 말했다. 북한 선수들은 승리에 대한 의지가 강했지만, 이탈리아 선수들은 심리적 조급함과 경기 부진으로 무너졌다.[1]
이탈리아는 계속 공격했지만 골은 터지지 않았고, 북한 선수들은 몸을 던져 막아냈다. 림중선은 <천리마 축구단>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결국 경기는 북한의 1 : 0 승리로 끝났다. 이는 아시아 팀의 월드컵 첫 승리였다. 이탈리아는 1승 2패로 탈락했고, 북한은 1승 1무 1패로 조 2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최초로 8강에 진출했다.[1]
3. 3. 상세 정보
1966년 7월 19일 19:30 (UTC+1) |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1 – 0 | 이탈리아 |
박두익 (42') | ||
에이섬 파크, 미들즈브러 | ||
관중: 18,727명 | ||
주심: 피에르 슈빈테 (프랑스) |
포지션 | 등번호 | 이름 | 비고 |
---|---|---|---|
GK | 1 | 리찬명 | |
CB | 3 | 신영규 | |
CB | 5 | 림중선 | |
LM | 6 | 임성휘 | |
CF | 7 | 박두익 | |
RM | 8 | 박승진 | (주장) |
RF | 11 | 한봉진 | |
LB | 13 | 오윤경 | |
RB | 14 | 하정원 | |
CF | 15 | 양성국 | |
LF | 17 | 김봉환 |
포지션 | 등번호 | 이름 | 비고 |
---|---|---|---|
GK | 1 | 엔리코 알베르토시 | |
MF | 3 | 파올로 바리손 | |
MF | 4 | 자코모 불가렐리 | (주장) |
DF | 6 | 자친토 파케티 | |
MF | 7 | 로마노 포글리 | |
DF | 8 | 아리스티데 과르네리 | |
DF | 9 | 프란체스코 자니치 | |
DF | 11 | 스파타코 란디니 | |
CF | 14 | 산드로 마촐라 | |
MF | 17 | 마리노 페라니 | |
CF | 19 | 지아니 리베라 |
'''최우수 선수:'''
박두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심:'''
존 아다이르 (니제르)
존 테일러 (잉글랜드)
4. 경기 후
경기 후 이탈리아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성난 자국 축구팬들을 피해 비밀리에 귀국하려 했으나, 제노바의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공항[10]에서 썩은 토마토와 날달걀 세례를 받았다. 마리노 페라니를 포함한 3명의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영원히 퇴출되었고,[11]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은 즉시 경질된 후 1년간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할 때까지 1950년 FIFA 월드컵, 1954년 FIFA 월드컵, 1962년 FIFA 월드컵,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모두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고, 1958년 FIFA 월드컵에서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20년 동안 5번의 월드컵을 모두 망쳤다. 수페르가의 비극이라는 악재가 있었다고 해도, 아시아 팀인 북한에 패배해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도 2무 1패로 조 최하위로 탈락하자, 44년 전처럼 썩은 토마토를 준비하겠다는 팬들도 있었다.[12]
2002년 FIFA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1 : 2로 역전패를 당해, 이탈리아는 월드컵에서 남북한 모두에게 패배한 최초이자 유일한 팀이 되었다. 1966년 대회에 출전했던 산드로 마촐라와 지아니 리베라는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 출연해 당시 경기를 회고했다. 지아니 리베라는 오만과 방심을, 산드로 마촐라는 선제 실점 후 평정심을 잃은 것을 패배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4.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FIFA는 이 대회를 앞두고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3개 대륙에 출전권 1장만을 부여했다. 이에 아프리카 국가들은 집단 보이콧을 했고,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불참했다. 결국 북한과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맞대결로 지역예선이 압축되었다. 당시 냉전 체제로 인해 양국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중립지역인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예선 2경기를 치렀다. 북한은 1차전에서 6 : 1, 2차전에서 3 : 1로 승리하여 합산 점수 9 : 2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 출연한 림중선에 따르면, 김일성은 선수들에게 "유색인종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것인 만큼 1~2팀이라도 이기고 돌아오라."는 과업을 부여했다고 한다.북한은 1차전에서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 0 : 3으로 패배했다. 당시 선수 교체 제도가 없어, 강용운의 부상 퇴장으로 10명이 뛰어야 하는 불리함을 겪었다.[2] 2차전에서는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박승진의 동점골로 1 : 1 무승부를 기록, 첫 득점과 승점을 챙겼다.
1무 1패를 기록한 북한은 8강 진출을 위해 이탈리아를 반드시 이겨야 했다.[3] 비기거나 지면 무조건 탈락이었다.
4. 2. 이탈리아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성적을 거둔 이탈리아는 1966년 대회에서 반드시 좋은 성적을 기록해야 했다.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한 암흑기에서 벗어나, 당시 브라질과 함께 월드컵 최다 우승국(2회)의 명예를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파올로 바리손, 자코모 불가렐리, 자친토 파케티, 산드로 마촐라, 지아니 리베라 등 세리에 A 스타 플레이어들이 총출동하여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암흑기에서 벗어나 우승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1차전에서 이탈리아는 칠레를 2 : 0으로 가볍게 이겼으나, 2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는 0 : 1로 패배했다. 1무 1패를 기록한 북한이 8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를 반드시 이겨야 했고, 이탈리아는 북한을 이기면 8강에 진출하고 비기면 소련이 칠레를 상대로 무승부 이상을 기록해야만 했다.[3] 전력 차이가 컸기에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의 압승을 예상했지만, 축구공은 둥글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경기 후 이탈리아 선수들은 락커룸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성난 자국 축구팬들을 피해 비밀리에 귀국하려 했으나, 제노바의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공항[10]에서 썩은 토마토와 날달걀 세례를 받았다. 마리노 페라니를 포함한 3명의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영원히 퇴출되었고,[11]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은 즉시 경질된 후 1년간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할 때까지 1950년, 1954년, 1962년, 1966년 월드컵에서 모두 조별 리그 탈락, 1958년에는 지역 예선 탈락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20년 동안 5번의 월드컵을 모두 망쳤다. 수페르가의 비극이라는 악재가 있었다고 해도, 아시아 팀인 북한에 패배해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도 2무 1패로 조 최하위로 탈락하자, 44년 전처럼 썩은 토마토를 준비하겠다는 팬들도 있었다.[12]
2002년 FIFA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1 : 2로 역전패를 당해, 이탈리아는 월드컵에서 남북한 모두에게 패배한 최초이자 유일한 팀이 되었다. 1966년 대회에 출전했던 산드로 마촐라와 지아니 리베라는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 출연해 당시 경기를 회고했다. 지아니 리베라는 오만과 방심을, 산드로 마촐라는 선제 실점 후 평정심을 잃은 것을 패배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5. 기록
이 경기는 승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는 영광스러운 기록이, 반대로 패자인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게는 치욕스러운 기록들이 다양하게 수립된 경기였다. 시칠리아에 유학을 갔던 요리사 박찬일의 증언에 따르면 이탈리아 노인들이 아직도 박두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6]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붉은악마들이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Again 1966'이란 카드 섹션으로 응원을 펼쳤는데, 이를 본 이탈리아 측에서 노발대발하며 카드 섹션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만큼 1966년에 있었던 이 경기는 이탈리아인들 입장에선 지우고 싶고 잊고 싶은 수치스러운 역사였다.
승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 경기를 통해 수립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월드컵 본선에서 아시아 팀 최초로
- * 승리를 기록한 팀[7]
-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리한 팀
- * 월드컵 우승 경험이 있는 팀을 상대로 승리한 팀
- * 유럽 팀을 상대로 승리한 팀
- * 무실점을 기록한 팀
패자인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 경기를 통해 수립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월드컵 본선에서 최초로
- *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유럽 팀
- *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월드컵 우승 유경험팀
- * 아시아 팀에게 무득점을 기록한 팀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패배한 팀[8]
- * 아시아 팀에게 패배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0 : 1로 패배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36년 후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1 : 2로 패배해 전 세계에서 최초로 월드컵에서 남한과 북한에 모두 패배한 팀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게 됨과 동시에 아시아 팀에게 2회 패배한 팀이란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례현 감독은 아시아 국가 국적 축구 감독으로서 최초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리한 감독이란 타이틀을 가져가게 되었다.
6. 영향
이 경기는 냉전 시대에 국제 정세와 스포츠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북한을 1966년 FIFA 월드컵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만나 0:1로 패배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이 경기 패배로 이탈리아는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했다. 선수들은 귀국 즉시 성난 팬들로부터 썩은 토마토와 날달걀 세례를 받았으며,[10][11] 몇몇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영구 제명되는 수모를 겪었다.[11]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 역시 경질과 함께 1년간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이 패배를 포함, 1950년대와 1960년대 월드컵에서 연이은 부진을 겪으며 암흑기를 맞이했다.[12]
반면, 북한은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여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과 맞붙었으나, 에우제비오의 활약으로 3:5로 역전패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세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훗날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도 패배하면서, 월드컵에서 남북한 모두에게 패배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6. 1. 남북한 관계
이 경기는 당시 냉전 체제하에서 이념 대립 관계에 있던 남북한 간의 간접적인 대결로도 여겨졌다. 비록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했지만, 포르투갈에 패배하면서 남북한 간의 직접적인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하지만 북한 대표팀은 귀국 후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이탈리아전 결승골을 기록한 박두익은 1970년대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차범근도 현역 시절 박두익 감독이 이끄는 북한 대표팀과 경기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9]
당시 남한에는 북한 선수들이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숙청당했다는 루머가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 출연한 당시 북한 선수들과 감독 명례현은 훈장을 받고 북한 축구계에서 고위층으로 활동하는 등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9]
남한에서는 북한 사회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므로, 탈북자들의 증언만을 맹신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6. 2. 국제 관계
이 경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1승 1무 1패,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강 진출은 3승을 거둔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에 이어 이룬 성과였다. 이후 북한은 미들즈브러에서 리버풀로 이동, 구디슨 파크에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과 8강전을 치렀다.[9]경기 당시 미들즈브러 시민 3,000여 명이 버스를 대절해 리버풀까지 가서 북한을 열렬히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포르투갈에 5:3으로 역전패했다. 비록 패했지만, 조별리그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르는 등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9]
귀국 후 북한 선수단은 영웅 대접을 받았고, 이탈리아전 결승골의 주인공 박두익은 1970년대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한편, 남한에는 북한 선수들이 숙청되었다는 루머가 퍼졌으나, 이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 출연한 당시 선수들과 감독은 훈장을 받고 북한 축구계에서 고위층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9]
6. 3. 이탈리아 축구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패배한 후, 성난 자국 축구팬들로부터 썩은 토마토와 날달걀 세례를 받았다.[10][11] 이탈리아 축구팬들은 수페르가의 비극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패배하여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을 납득할 수 없어했다.[12]이 패배로 인해 이탈리아는 1950년부터 1966년까지 5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암흑기를 겪었다.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1950년과 1954년, 1962년, 1966년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 1958년에는 지역 예선 탈락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2년 FIFA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1:2로 역전패를 당하며, 이탈리아는 월드컵에서 남북한 모두에게 패배한 유일한 팀이 되었다. 다만, 이 경기에서는 심판 판정 논란이 있어 선수들이 토마토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12]
1966년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였던 산드로 마촐라와 지아니 리베라는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대표팀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천리마 축구단>에 출연하여 당시 경기를 회고했다. 지아니 리베라는 오만과 방심을, 산드로 마촐라는 선제 실점 후 평정심을 잃은 것을 패배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7. 평가
이 경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FIFA 월드컵 첫 번째 대결이자 첫 번째 A매치 경기였다. 또한 이 경기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처음으로 아시아 팀과 맞붙는 경기였다. 대회 전 영국의 도박사들은 이탈리아의 우승 확률을 20%로 예측했는데, 이는 50%를 차지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과 25%를 차지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이어 3번째로 높은 확률이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의 우승 확률로 16개 출전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과 비견될 정도였다. 당시 축구 전문가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경기에서 1득점만 기록해도 매우 선전한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저평가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경기를 보러 온 관중은 2만 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의 압승을 예상했다.
참조
[1]
뉴스
英 일간지 “한국-독일전 ‘역대 월드컵 충격적인 경기’ 2위”... 1위는?
https://sports.news.[...]
2018-11-11
[2]
문서
선수 교체제도는 [[1970년 FIFA 월드컵]] 때부터 실시되었다.
[3]
문서
이 당시엔 조별리그 최종전이 동시에 열리지 않았다. 조별리그 최종전을 동시에 열도록 한 것은 [[1982년 FIFA 월드컵]]에 있었던 [[히혼의 수치]] 때문에 생긴 조치이며 이것은 [[1986년 FIFA 월드컵]]부터 시행되었다.
[4]
문서
"[[FIFA]] 보고서에는 박승진이 주장으로 되어 있어서 이렇게 표기하지만 실제 당시 북한 대표팀의 주장은 [[신영규]]였다고 한다."
[5]
문서
부상으로 퇴장당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당시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부상으로 뛰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이 빠진 채로 계속 경기를 해야 했다.
[6]
뉴스
"[뉴스 뒷이야기]이탈리아엔 박두익이, 북한엔 에우제비오가 산다"
https://news.naver.c[...]
2018-10-03
[7]
문서
이 경기 이전까지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둔 사례는 단 1번도 없었다.
[8]
문서
2018년까지 월드컵에서 북한에 패배한 팀은 이탈리아가 유일하다. 아울러 북한을 상대로 1득점도 기록하지 못한 팀 역시 이탈리아가 유일하다.
[9]
뉴스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北선수들 탄광행?' 그래도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https://sports.v.dau[...]
2018-10-07
[10]
문서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다. 콜롬버스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읽으면 크리스토포르 콜롬보다. 본래 콜롬버스가 이탈리아의 [[제노바]] 출신이기에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1]
뉴스
북한 축구 영욕의 40년…'통일축구'로 다시 선보여
https://sports.news.[...]
2018-10-07
[12]
뉴스
"'무승 탈락'에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 “썩은 토마토 준비하겠다”"
https://sports.news.[...]
2018-1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