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엘리엇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지 엘리엇은 1819년 영국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이며, 필명 조지 엘리엇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아담 비드》, 《플로스 강가의 제분소》, 《미들마치》 등 사실주의적 경향의 소설을 통해 사회적 소외 계층과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또한, 독일 철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며, 자신의 작품에 불가지론적 휴머니즘을 반영했다. 1880년 사망했으며, 20세기 이후 비평가들의 재평가를 통해 서양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80년 사망 -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은 1859년 "미합중국 황제 노턴 1세"를 자칭하고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21년간 "통치"한 샌프란시스코의 유명인이었다. - 1880년 사망 - 폴 브로카
폴 브로카는 뇌 기능 국재화 연구의 선구자이자 프랑스의 외과의, 인류학자였지만, 그의 인류학 연구는 과학적 인종주의적 편견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으며, 특히 브로카 영역 연구는 신경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두개골 측정을 통한 인종 간 지능 비교 연구는 과학적 인종주의 논쟁의 사례로 비판받는다. - 잉글랜드의 번역가 - 퍼시 비시 셸리
퍼시 비시 셸리는 급진적인 신념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낭만주의 시대의 영국 시인이자 작가로서, 《서풍의 노래》, 《프로메테우스의 해방》, 《오지맨디아스》 등의 작품을 통해 낭만주의적 열정과 자유, 이상을 노래하며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잉글랜드의 번역가 - 제프리 초서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로 유명한 중세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이며 영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프랑스어와 이탈리아 문학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문학 스타일을 구축하여 중세 영어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현대 영어 발전에도 기여했다. - 잉글랜드의 수필가 - 아서 C. 클라크
영국의 SF 작가이자 발명가, 해저 탐험가인 아서 C. 클라크는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로 유명하며 SF계의 '빅3'로 불리고, 정지 궤도 통신 위성의 개념을 제안하여 '클라크 궤도'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 잉글랜드의 수필가 - 올더스 헉슬리
올더스 헉슬리는 영국의 작가이자 사회 풍자 작가로,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 전체주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하며 현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조지 엘리엇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필명 | 조지 엘리엇 |
본명 | 메리 앤 에번스 |
출생일 | 1819년 11월 22일 |
출생지 | 잉글랜드, 워릭셔, 너니턴 |
사망일 | 1880년 12월 22일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첼시 |
안장 장소 | 런던, 하이게이트, 하이게이트 묘지 (동쪽) |
직업 | 소설가, 시인, 저널리스트, 번역가 |
국적 | 영국 |
시대 | 빅토리아 시대 |
배우자 | 존 크로스 (1880년 5월 16일 결혼) |
파트너 | 조지 헨리 루이스 (1854–1878) |
주요 작품 | 《성직자 생활 장면》 (1857) 《아담 비드》 (1859)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1860) 《사일러스 마너》 (1861) 《로몰라》 (1862–1863) 《급진주의자 펠릭스 홀트》 (1866) 《미들마치》 (1871–1872) 《다니엘 데론다》 (1876) |
모교 | 런던, 베드포드 칼리지 |
작품 활동 | |
언어 | 영어 |
장르 | 소설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로버트 에번스, 어머니) 크리스티나 피어슨 |
친척 | 크리스티나, 아이작, 로버트, 페니 에번스 (형제자매) |
2. 생애
메리 앤 에번스(Mary Ann Evans)는 영국 워릭셔주 너니턴 근처 사우스 팜에서 로버트 에번스와 크리스티아나 에번스 부부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7]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그녀는 여러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6세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을 도우며 독학으로 학식을 넓혔다.[9][11]
21세 무렵 아버지와 함께 코번트리 근교로 이주한 뒤, 찰스 브레이 부부 등 급진적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종교관에 큰 변화를 겪었다.[13] 이 시기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1846)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1854)을 영어로 번역하며 지적 활동을 이어갔다.[14][15][16] 1849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잠시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렀다.
1850년 영국으로 돌아와 작가의 길을 걷기로 하고 런던으로 이주, '메리언 에번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23] 좌파 성향의 잡지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부편집장으로 활동하며(1851-1854) 많은 글을 기고했다.[13][27] 이 시기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조지 헨리 루이스와 만나 사실혼 관계를 시작했으며, 이 관계는 루이스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9]
여성 작가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조지 엘리엇'이라는 남성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35][36][37] 1857년 첫 소설을 발표하고, 이를 포함한 단편집 《교직 생활의 단면들》(1858)로 호평을 받았다.[38] 첫 장편소설 《아담 비드》(1859)의 큰 성공으로 당대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38] 이후 《플로스 강가의 물레방앗간》(1860), 《사일러스 마너》(1861), 《로몰라》(1863), 《미들마치》(1871-72), 《대니얼 데론다》(1876) 등 영국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들을 발표하며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그녀는 작품 활동 외에도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부 지지, 아일랜드 자치 운동 지지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존 스튜어트 밀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권리 신장에도 목소리를 냈다.[42][43][45]
1878년 루이스가 사망한 후, 1880년 20세 연하의 존 월터 크로스와 결혼했으나 결혼 7개월 만인 1880년 12월 22일, 런던 첼시에서 신장 질환으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8][49] 그녀는 하이게이트 묘지에 루이스 곁에 안장되었고,[50][51] 1980년 사망 100주기를 맞아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코너에 추모석이 세워졌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 ~ 1836)
메리 앤 에번스(Mary Ann Evans)는 영국 워릭셔주 누니턴에 위치한 아버리 홀(Arbury Hall) 부지 내 사우스 팜(South Farm)에서 태어났다.[7] 그녀의 아버지는 웨일스 혈통의 로버트 에번스(Robert Evans, 1773~1849)로, 아버리 홀 부지의 관리인이었고, 어머니는 지역 제분소 주인의 딸인 크리스티아나 에번스(Christiana Evans, née Pearson, 1788~1836)였다. 메리 앤은 세 번째 자녀였으며, 때때로 메리언(Marian)으로 불리기도 했다. 형제자매로는 언니 크리스티아나(Christiana, 1814~1859, 크리시(Chrissey)로도 불림), 오빠 아이작(Isaac, 1816~1890), 그리고 1821년 3월에 태어나 며칠 만에 사망한 쌍둥이 남동생들이 있었다. 또한 아버지와 전처 해리엇 포인턴(Harriet Poynton, ?1780~1809)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 오빠 로버트(Robert Evans, 1802~1864)와 이복 언니 프랜시스 "패니" 에번스 호턴(Frances "Fanny" Evans Houghton, 1805~1882)이 있었다. 1820년 초, 가족은 누니턴과 베드워스 사이에 있는 그리프 하우스(Griff House)라는 집으로 이사했다.[8]어린 시절 에번스는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으며 지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져 스스로 결혼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과 그녀의 명석함을 고려하여, 아버지는 당시 여성들에게는 흔치 않았던 교육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9] 에번스는 다섯 살부터 아홉 살까지 언니 크리시와 함께 애틀버러에 있는 미스 레이덤(Miss Latham) 학교에서 기숙하며 공부했다. 아홉 살부터 열세 살까지는 너니턴의 월링턴 부인(Mrs. Wallington) 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교사 마리아 루이스(Maria Lewis)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엘리엇이 쓴 가장 오래된 편지들은 바로 마리아 루이스에게 보낸 것들이다. 열세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는 코번트리에 있는 프랭클린 양(Miss Franklin) 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의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에번스는 복음주의와는 다른, 조용하고 규율 잡힌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10] 그녀는 저교회파 성공회 가정에서 자랐으나, 당시 미들랜즈 지역은 비국교도의 수가 증가하던 곳이었다.
1836년, 에번스가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 크리스티아나가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녀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이후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게 되었다.[11] 아버지의 부지 관리인이라는 지위 덕분에 그녀는 아버리 홀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이는 그녀의 독학과 광범위한 학문 탐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의 고전 교육은 뚜렷한 흔적을 남겼는데, 크리스토퍼 스트레이(Christopher Stray)는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소설은 그리스 문학에 크게 의존하며(그녀의 책 중 단 한 권만 그리스 활자체를 사용하지 않고 정확하게 인쇄될 수 있다), 그녀의 주제는 종종 그리스 비극의 영향을 받는다"라고 언급했다.[12] 또한 부지에 자주 방문하면서 지주들의 부유한 삶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대조적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녀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2. 2. 코번트리로의 이사 (1836 ~ 1849)
183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16세였던 메리 앤 에번스(훗날의 조지 엘리엇)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살림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교사 마리아 루이스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적 교류를 이어갔다.[13] 그녀가 21세가 되던 해(1841년경), 오빠 아이작이 결혼하여 본가를 물려받게 되자, 에번스는 아버지와 함께 코번트리 근처 폴레실(Poleshill)로 이사했다.코번트리 지역 사회와의 교류는 그녀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을 주었는데, 특히 리본 제조업으로 부를 쌓아 학교 건립 등 자선 사업에 힘쓰던 찰스 브레이와 그의 아내 카라 브레이의 영향이 컸다. 이전부터 종교적 믿음에 대해 고민해왔던 에번스는 급진적인 자유사상가였던 브레이 부부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브레이 부부의 저택 "로즈힐"(Rosehill)은 로버트 오언, 허버트 스펜서, 해리엇 마티노, 랄프 왈도 에머슨 등 당대의 급진적 사상가들이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는 지적 해방구와 같은 곳이었다.[13]
이러한 교류를 통해 에번스는 더욱 자유롭고 불가지론적인 신학 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특히 성서의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한 다비드 슈트라우스와 루트비히 파이어바흐 같은 독일 신학자들의 저작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첫 주요 문학 작업은 슈트라우스의 저서 『예수의 생애, 비판적으로 검토됨』(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deu)을 영어로 번역한 것(1846년 출간)이었다. 이 번역은 원래 로즈힐 서클의 다른 멤버가 시작했으나 미완성으로 남긴 것을 에번스가 마무리한 것이었다.[14][15][16] 슈트라우스의 책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기적들이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에 덧붙여진 신화적 요소라고 주장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에번스의 번역은 영국 지성계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보수적인 샤프츠베리 백작은 이 번역본을 "지옥의 입에서 토해낸 가장 악독한 책"이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17][18][19][20] 이후 에번스는 파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deu)도 번역(1854년 출간)했는데, 이 두 사상가의 영향은 훗날 그녀의 소설 작품 세계에 깊이 반영되었다. 또한 브레이는 자신의 신문인 『코번트리 헤럴드 앤드 옵저버』(Coventry Herald and Observer)에 에번스가 쓴 서평 등 초기 글들을 실어주며 그녀의 작가 활동을 격려했다.[21]
에번스가 점차 기존의 종교적 신념에 회의를 품게 되자, 아버지는 그녀를 집에서 내쫓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에번스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존중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교회에 계속 출석했고,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당시 그녀의 나이 30세) 집안일을 돌보며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지 닷새 후, 에번스는 브레이 부부와 함께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제네바에 혼자 남기로 결정하고, 처음에는 플롱종(Plongeon, 현재 유엔 건물 근처) 호숫가에 머물다가 이후 친구인 프랑수아와 줄리엣 달베르 뒤라드 부부가 소유한 샤누안 로(Rue de Chanoines, 현재 펠리세리 로 Rue de la Pélisserie)의 저택 2층에서 지냈다. 그녀는 제네바에서의 생활을 "오래된 나무 위의 아늑한 둥지"에 비유하며 만족감을 표현했다. 그녀가 머물렀던 사실은 현재 건물에 부착된 기념 명판으로 남아있다.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독서와 아름다운 스위스 자연 속 산책을 통해 많은 지적 영감을 얻었으며, 프랑수아 뒤라드는 그곳에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22]
2. 3. 런던으로의 이사와 작가 활동 (1849 ~ 1880)
1850년 영국으로 돌아온 엘리엇은 작가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자신을 메리언 에번스(Marian Evans)라고 불렀다.[23] 그녀는 이전에 로즈힐에서 만났고 그녀의 슈트라우스 번역본을 출판했던 급진적인 출판업자 존 채프먼의 집에 머물렀다. 채프먼은 좌파 성향의 잡지인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최근 인수했으며, 에번스는 1851년에 부편집장이 되었다.[13] 채프먼이 공식 편집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잡지를 제작하고 내용을 채우는 역할은 대부분 에번스가 담당했다. 그녀는 1852년 1월호부터 1854년 상반기에 그만둘 때까지 많은 수필과 서평을 기고했다.[27] 그녀의 글은 하층민에 대한 동정심, 조직 종교에 대한 비판, 당대 사상에 대한 논평 등을 통해 그녀의 사회관과 빅토리아 시대 사고방식에 대한 견해를 보여주었다.[24][25] 그녀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상과 조직들을 비판했으며, 이는 그녀의 글이 진솔하고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게 했다.[26]엘리엇은 유럽 대륙의 1848년 혁명에 공감했으며, 이탈리아인들이 "혐오스러운 오스트리아인들"을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내고 "썩어빠진 군주들"이 폐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영국 내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점진적인 개혁주의적 접근 방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믿었다.[42][43] 1850년에서 1851년 사이에는 런던 베드퍼드 대학교의 전신인 레이디스 칼리지에서 수학 수업을 듣기도 했다.[28]

1851년, 엘리엇은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조지 헨리 루이스(1817~1878)를 만났고, 1854년에는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루이스는 이미 아그네스 저비스와 결혼한 상태였으나, 개방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29] 1854년 7월, 루이스와 에번스는 연구 목적으로 함께 바이마르와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사실상의 신혼여행이기도 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자신들을 부부로 여겼다. 에번스는 루이스를 남편이라 부르고 자신의 이름을 메리 앤 에번스 루이스로 서명하기 시작했으며, 루이스 사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변경했다.[33] 당시 사회 관습에 어긋나는 이들의 관계는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독일로 가기 전, 에번스는 포이어바흐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번역하여 신학 연구를 이어갔고(1854년 출판), 독일 체류 중에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번역 작업을 했다. 이 번역은 1856년에 완료되었으나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고,[30] 1981년에 이르러서야 토마스 디건에 의해 출판되었다.[31] 2018년 저작권 만료 후 '조지 엘리엇 아카이브'에 의해 공개되었고, 2020년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재출간되었다.[32]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계속 기고하면서 에번스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리뷰''를 위한 마지막 수필 중 하나인 "여성 소설가들의 어리석은 소설"(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 1856)에서[34] 당시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들의 피상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줄거리를 비판했다. 다른 글에서는 유럽 소설의 사실주의를 칭찬하며 자신이 추구할 문학적 방향을 예고했다. 그녀는 필명으로 조지 엘리엇을 채택했는데, '조지'는 루이스의 이름에서 따왔고, '엘리엇'은 "입에 잘 감기고 발음하기 좋은 단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35] 당시 여성 작가들도 본명으로 활동했지만, 엘리엇은 여성의 글쓰기가 가볍고 감상적인 로맨스에 국한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36] 또한 이미 널리 알려진 번역가, 편집자, 비평가로서의 명성과 별개로 소설가로서 평가받고 싶어 했으며, 루이스와의 관계로 인한 스캔들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7]
1857년, 그녀의 첫 소설인 단편 "존경할 만한 에이모스 바튼의 슬픈 운명"이 《블랙우드 매거진》에 '조지 엘리엇'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다. 이는 이후 세 편의 단편과 함께 《교직 생활의 단면들》(Scenes of Clerical Life)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1858년 출간되었고,[38]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엘리엇은 토머스 칼라일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칼라일은 엘리엇의 독일 사상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그녀가 기독교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 일, 의무, 공감, 자아의 진화와 같은 주제에 집중하도록 영향을 주었다.[39] 이러한 주제는 그녀의 첫 장편 소설인 《아담 비드》(Adam Bede, 1859)에 잘 나타나 있다.[38] 이 소설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작가의 정체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심지어 조셉 리긴스라는 남성이 자신이 조지 엘리엇이라고 주장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메리 앤 에번스 루이스는 자신이 조지 엘리엇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담 비드》는 네덜란드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사실주의 미학으로 유명하다.[40]
그녀의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많은 독자들이 놀랐지만, 소설가로서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다. 루이스와의 관계는 그녀에게 창작 활동에 필요한 격려와 안정을 제공했다. 사회적 인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877년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루이즈 공주를 만나면서 상류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빅토리아 여왕 자신도 엘리엇의 모든 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아담 비드》에 감명받아 화가 에드워드 헨리 코볼드에게 책의 장면을 그리도록 의뢰하기도 했다.[41]

엘리엇은 당대의 주요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1861년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폐지론적 신념에 따라 북부 연방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42][43] 1868년에는 철학자 리처드 콩그리브가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이를 지지했으며, 아일랜드 자치 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견해를 가졌다.[42][43]
그녀는 존 스튜어트 밀의 저작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주요 작품들을 출판되는 대로 읽었다.[44] 특히 밀의 《여성의 예속》(1869) 중 기혼 여성을 억압하는 법률을 비판한 부분을 "훌륭하다"고 평가했다.[43] 밀이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지지 의사를 표명했으며, 그가 당선되자 놀라움을 표했다.[42] 밀이 의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동의하며 "여성의 주장이 의회에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으로부터 많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45] 또한 존 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교육과 자유로운 발전의 가능성에 있어서 두 성별의 이점을 가능한 한 동등하게 설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합리적인 약속을 보여주는" 계획들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여성의 낮은 지위를 자연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일축했다.[45][43] 1870년에는 앰버리 부인이 여성 교육, 직업 선택의 자유, 결혼 및 양육권에서의 평등을 주장한 페미니스트 강연에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다.[43] (다만, 그녀의 작품 속 여성 주인공들을 단순히 "페미니스트"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며, 로몰라 데 바르디 정도가 예외일 수 있다.[46])
《아담 비드》의 성공 이후 엘리엇은 15년 동안 꾸준히 인기 소설들을 발표했다. 《플로스 강가의 물레방앗간》(The Mill on the Floss, 1860), 《사일러스 마너》(Silas Marner, 1861),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로몰라》(Romola, 1863), 정치적 이상주의와 사회 개혁을 다룬 《급진주의자 펠릭스 홀트》(Felix Holt, the Radical, 1866), 그리고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미들마치》(Middlemarch, 1871-1872) 등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소설은 《대니얼 데론다》(Daniel Deronda, 1876)였으며, 이후 그녀와 루이스는 서리주 윗리로 이사했다. 이 무렵 루이스의 건강이 악화되어 1878년 11월 30일에 사망했다. 엘리엇은 이후 6개월 동안 루이스의 마지막 저작인 《생명과 정신》(Life and Mind)을 편집하여 출판하는 데 몰두했다. 이후 오랜 친구이자 재정 고문이었던 존 월터 크로스(1840-1924)와 위안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졌다. 크로스는 그녀보다 20세 연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출신의 은행가였다.[47] 그의 어머니도 최근에 사망한 상태였다. 1880년 5월 6일, 엘리엇은 크로스와 결혼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혼한 지 불과 7개월 만인 1880년 12월 22일 런던 첼시에서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2. 4. 존 크로스와의 결혼과 죽음 (1880)

1880년 5월 16일, 조지 헨리 루이스가 사망한 지 18개월 후, 엘리엇은 자신보다 20살 어린 존 월터 크로스(John Walter Cross, 1840~1924)와 결혼하여 다시 이름을 메리 앤 크로스로 바꾸었다. 21살의 나이 차이 때문에 결혼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다소 논란이 되었지만, 그녀의 오빠 이삭은 그녀가 결혼한 것을 기뻐했다. 그는 엘리엇이 루이스와 동거하기 시작했을 때 관계를 끊었었는데, 이번에는 축하 인사를 보냈다.
신혼 여행 중 베네치아에서 크로스는 호텔 발코니에서 대운하로 뛰어내리는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살아남았고,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첼시에 새 집으로 이사했지만, 엘리엇은 인후염에 걸렸다. 이는 수년 동안 앓아온 신장병과 더불어 상태를 악화시켰고, 결국 결혼한 지 불과 7개월 만인 1880년 12월 22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8][49]
엘리엇은 기독교 신앙을 공공연히 부인했고 조지 헨리 루이스와 정식 결혼 없이 동거했기 때문에[50]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지 못했다. 대신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동쪽)에 있는 정치적, 종교적 반대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을 위한 구역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묘는 그녀의 오랜 동반자였던 조지 헨리 루이스의 옆자리에 마련되었다.[51] 근처에는 칼 마르크스와 그녀의 친구였던 허버트 스펜서의 무덤도 있다.[52]
1980년, 엘리엇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의 코너에 그녀를 위한 추모석이 세워졌다. 추모석에는 그녀의 작품 성직자 생활의 풍경의 한 구절인 "인간의 선함의 첫 번째 조건은 사랑할 무언가이고, 두 번째는 존경할 무언가이다"가 새겨져 있다.
3. 작품 세계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글을 기고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에번스는 1856년 발표한 수필 "여성 소설가들의 어리석은 소설"[34]에서 당시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들의 가볍고 비현실적인 경향을 비판하며 자신의 문학적 방향을 예고했다. 그녀는 유럽 소설계의 사실주의 경향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는 이후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녀는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이는 연인 조지 헨리 루이스의 이름 '조지'와 "입에 잘 감기고 발음하기 쉬운 단어"인 '엘리엇'을 합친 것이었다.[35] 당시 여성 작가들이 본명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엘리엇은 여성의 글쓰기가 가벼운 로맨스 정도로 여겨지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36] 또한 이미 널리 알려진 번역가, 편집자, 비평가로서의 명성과 별개로 소설 자체로 평가받기를 원했으며, 루이스와의 관계로 인한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37]
1857년, 37세의 나이에 첫 단편 "존경할 만한 에이모스 바튼의 슬픈 운명"을 '조지 엘리엇'이라는 이름으로 《블랙우드 잡지》에 발표했다.[38] 이 작품을 포함한 세 편의 단편을 묶어 1858년 출간한 교직 생활의 단면들은 좋은 평가를 받으며 작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38]
엘리엇은 토마스 칼라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칼라일은 그녀가 독일 사상에 관심을 갖게 하고 기존의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일, 의무, 공감, 자아 성찰과 같은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었다.[39] 이러한 영향은 그녀의 첫 장편 소설 아담 베이드(1859)에 잘 나타나 있다.[38] 이 소설은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작가의 정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자 결국 메리 앤 에번스 루이스는 자신이 조지 엘리엇임을 밝혔다. 《아담 베이드》는 네덜란드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사실주의적 묘사로 주목받았다.[40]
엘리엇의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많은 독자들이 놀랐지만, 소설가로서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루이스와의 관계는 그녀에게 안정적인 집필 환경과 격려를 제공해주었으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1877년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루이즈 공주에게 소개되면서 비로소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빅토리아 여왕 자신도 엘리엇의 모든 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아담 베이드》에 감명받아 화가에게 작품 속 장면을 그리도록 의뢰하기도 했다.[41]
엘리엇은 당대의 사회·정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폐지론적 신념에 따라 북부 연합을 지지했으며,[42][43] 아일랜드 자치 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42][43] 또한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의 저작들을 탐독했으며,[44] 특히 기혼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법을 비판한 《여성의 예속》(1869)의 내용을 높이 평가했다.[43] 그녀는 밀의 의회 진출을 지지했고, 그가 의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동의하며 "여성의 주장이 의회에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으로부터 많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45] 엘리엇은 교육과 자유로운 발전의 기회에 있어 성별 간의 평등을 추구하는 계획들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여성의 낮은 지위를 자연적인 것으로 돌리는 주장을 비판했다.[45][43] 1870년에는 여성 교육, 직업, 결혼 및 양육권에서의 평등을 주장한 앰버리 부인의 강연에 열정적으로 호응하기도 했다.[43]
《아담 베이드》 이후 엘리엇은 15년 동안 《프로스 강가의 물레방앗간》(1860), 《실라스 마너》(1861), 《로몰라》(1863), 《급진주의자 펠릭스 홀트》(1866), 《미들마치》(1871-1872), 《다니엘 데론다》(1876) 등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1878년 11월 루이스가 세상을 떠나자, 엘리엇은 그의 마지막 저작인 《생명과 정신》을 편집하여 출판하는 데 몰두했다. 이후 오랜 친구이자 재정 고문이었던 존 월터 크로스와 가까워졌고, 그에게서 위안을 얻었다.[47]
3. 1. 주요 작품
'''장편 소설'''- 교구 생활의 단면들 (Scenes of Clerical Life, 1857)
- * 「존경할 만한 아모스 바턴 목사의 슬픈 운명」 (The Sad Fortunes of the Rev. Amos Barton)
- * 「길필 씨의 러브 스토리」 (Mr. Gilfil's Love Story)
- * 「재닛의 참회」 (Janet's Repentance)
- 아담 베이드 (Adam Bede, 1859)
- 플로스 강가의 제분소 (The Mill on the Floss, 1860)
- 실라스 마르너 (Silas Marner, 1861)
- 로몰라 (Romola, 1863)
- 급진주의자 펠릭스 홀트 (Felix Holt, the Radical, 1866)
- 미들마치 (Middlemarch, 1871–1872)
- * [http://nrs.harvard.edu/urn-3:FHCL.HOUGH:5340370 "미들마치를 위한 채석장"], MS Lowell 13, 하버드 대학교 후턴 도서관 (연구 노트 원고)
- 다니엘 데론다 (Daniel Deronda, 1876)
- 테오프라스투스 수치의 인상들 (Impressions of Theophrastus Such, 1879)[69]
'''단편 소설'''
- 베일을 벗겨서 (The Lifted Veil, 1859)
- 브라더 제이콥 (Brother Jacob, 1864)
'''번역'''
- 다윗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비판적으로 고찰함』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de, 1846)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249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https://archive.org/details/lifeofjesuscriti02stra 2권]
- 루트비히 파이어바흐의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sde, 1854)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250 ''Das Wesen des Christentums (The Essence of Christianity)'']
- 베네딕투스 드 스피노자의 『베네딕투스 드 스피노자의 윤리학』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la, 1856)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321 ''The Ethics of Benedict de Spinoza'']
'''시'''
-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331 ''내가 곧 이 장막을 벗어 놓아야 함을 아노라''] (Knowing That I Must Shortly Put Off This Tabernacle, 1840)
- 런던 사교계에서 (In a London Drawingroom, 1865)
- 작은 예언자 (A Minor Prophet, 1865)
- 두 연인 (Two Lovers, 1866)
- 보이지 않는 합창단 (O May I Join the Choir Invisible, 1867)
-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228 ''스페인 집시''] (The Spanish Gypsy, 1868)
- 아가타 (Agatha, 1868)
- 형제와 자매 (Brother and Sister, 1869)
- 리사가 왕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How Lisa Loved the King, 1869)
-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602 ''암가르트''] (Armgart, 1870)
- 스트라디바리우스 (Stradivarius, 1873)
- 아리온 (Arion, 1873)
- 주발의 전설 (The Legend of Jubal, 1874)
- 나는 당신에게 충분한 허가를 드립니다 (I Grant You Ample Leave, 1874)
-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596 ''저녁은 오고 가고, 사랑은''] (Evenings Come and Go, Love, 1878)
-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598 ''자아와 삶''] (Self and Life, 1879)
- [https://georgeeliotarchive.org/items/show/150 ''대학 아침 식사 파티''] (A College Breakfast Party, 1879)
- 모세의 죽음 (The Death of Moses, 1879)
3. 2. 문학적 평가
조지 엘리엇은 작가 경력 내내 정치적으로 예리한 시각으로 글을 썼다. 《아담 베이드》에서부터 《프로스 강가의 물레방앗간》, 《실라스 마너》에 이르기까지 초기 작품들에서는 사회적 소외자와 소도시에서 박해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급진주의자 펠릭스 홀트》와 시집 《주발의 전설》은 더욱 공공연히 정치적인 내용을 담았으며, 정치적 위기는 그녀의 대표작 《미들마치》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엘리엇은 1832년 개혁 법안 통과 직전의 작은 영국 마을 주민들의 삶을 심오한 심리적 통찰력과 정교한 인물 묘사를 통해 그려냈다. 그녀의 사실주의 철학은 1856년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실린 존 러스킨의 《현대 화가들》에 대한 서평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다니엘 데론다》에서는 시온주의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는 사상을 표현하기도 했다.[60]빅토리아 시대 독자들은 엘리엇 소설 특유의 시골 사회 묘사를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윌리엄 워즈워스처럼 평범한 시골 생활의 세부 사항 속에서도 많은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소설의 많은 소재를 자신의 경험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엘리엇은 영국 시골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5세기 후반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로몰라》는 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삶을 바탕으로 쓰였다. 운문으로 쓴 《스페인 집시》는 발표 초기에 인기를 얻었지만 그 인기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번역가로 활동하며 접한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그리고 바뤼흐 스피노자의 《윤리학》(라틴어 원전을 번역) 등 독일 철학 및 종교 비판 서적들은 그녀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작품 세계에도 깊이 반영되었다. 특히 포이어바흐의 영향으로 신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이 신적인 존재에게 투영된 것이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철학은 《로몰라》에서 주인공이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준비성으로 종교 언어를 휴머니스트적 또는 세속적 윤리적 용어로 해석하는"[62] 모습으로 나타난다. 엘리엇 자신은 종교적이지 않았지만, 종교적 전통과 그것이 사회 질서와 도덕성을 유지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존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소설 속 종교적 요소들은 자신의 성장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프로스 강가의 물레방앗간》의 주인공 매기 툴리버의 경험은 젊은 시절 메리 앤 에번스의 모습과 많은 유사점을 공유한다. 한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엘리엇의 도덕 체계가 죄를 고통을 통해 속죄할 수 있는 빚으로 파악하는 기독교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엘리엇처럼 작은 도덕적인 여성들"의 특징이라고 깎아내렸다.[63]
마지막 소설 《다니엘 데론다》(1876)가 출판될 무렵 엘리엇의 작품 판매량은 감소했고, 대중의 관심에서도 어느 정도 멀어졌다. 이는 사후 그녀의 남편 존 월터 크로스가 쓴 전기가 스캔들이 있었던 실제 삶과는 거리가 먼, 거의 성인처럼 이상화된 여성상을 묘사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에 의해 재평가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버지니아 울프는 《미들마치》를 "성인을 위한 몇 안 되는 영국 소설 중 하나"라고 극찬하며 그녀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4] 1994년 문학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엘리엇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서구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64] 2007년 《타임》지가 작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미들마치》는 역대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 10위에 선정되었으며,[65] 2015년 BBC가 영국 이외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모든 영국 소설 중 1위로 선정되었다.[66] 엘리엇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다양한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그녀의 작품을 더 넓은 독자층에게 다시 소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4. 한국과의 관계
현재 한국에서의 조지 엘리엇 작품 번역 및 연구 현황에 대한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
참조
[1]
서적
George Eliot: A Life
https://books.google[...]
Hamish Hamilton
1996
[2]
뉴스
George Eliot's Scandalous Answer to 'The Marriage Question'
https://www.nytimes.[...]
2023-08-13
[3]
서적
The Short Oxford History of English Literature
Clarendon Press
1994
[4]
서적
George Eliot
Harcourt, Brace, and World
1925
[5]
뉴스
Martin Amis and the sex war
https://martinamiswe[...]
The Times
2010-01-24
[6]
간행물
Interviews: Julian Barnes, The Art of Fiction No. 165
http://www.theparisr[...]
[7]
서적
George Eliot: A Critical Study of her Life, Writings and Philosophy
https://books.google[...]
Kessinger
2004
[8]
웹사이트
George Eliot Biography – life, childhood, children, name, story, death, history, wife, school, young
http://www.notablebi[...]
[9]
서적
George Eliot: Voice of a Century
Norton
1995
[10]
서적
George Eliot: Voice of a Century
Norton
1995
[11]
서적
George Eliot: Voice of a Century
Norton
1995
[12]
서적
Classics Transformed
[13]
웹사이트
Los Angeles Review of Books
https://lareviewofbo[...]
2017-08-06
[14]
서적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2010
[15]
서적
The Making of the New Spirituality
2003
[16]
서적
Familiar Stranger: An Introduction to Jesus of Nazareth
2004
[17]
서적
The historical Jesus question
2001
[18]
서적
Biblical Theology: Issues, Methods, and Themes
https://books.google[...]
Presbyterian Publishing Corp
2007
[19]
서적
Victorian Jesus: J.R. Seeley, Religion, and the Cultural Significance of Anonymit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17
[20]
서적
The Secret Library: A Book-Lovers' Journey Through Curiosities of History
https://books.google[...]
Michael O'Mara Books
2016
[21]
간행물
George Eliot's Earliest Prose: The Coventry "Herald" and the Coventry Fiction
http://www.jstor.org[...]
1986-06-01
[22]
서적
George Eliot: A Critic's Biography
Continuum
2006
[23]
편지
The George Eliot Letters, Ed. Gordon S. Haight, Vol. I, New Haven, Connecticut, Yale University Press (RE: First known instance of George Eliot signing her name as ′Marian Evans′)
1851-04-04
[24]
간행물
A Dialogue of Forms: The Display of Thinking in George Eliot's 'Poetry and Prose, From the Notebook of an Eccentric' and Impressions of Theophrastus Such
http://bear.buckingh[...]
2014
[25]
간행물
Review of ''Before George Eliot: Marian Evans and the Periodical Press; Modernizing George Eliot: The Writer as Artist, Intellectual, Proto-Modernist, Cultural Critic'', by Fionnuala Dillane & K.M. Newton
2014
[26]
서적
Before George Eliot: Marian Evans and the Periodical Pres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27]
서적
George Eliot: A Life
Penguin
1997
[28]
웹사이트
Ladies College
https://www.ucl.ac.u[...]
[29]
서적
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George Eliot
Cambridge
[30]
서적
George Eliot: The Last Victorian
[31]
웹사이트
The Ethics of Benedict de Spinoza, Translated by George Eliot
https://georgeeliota[...]
[32]
서적
Spinoza's Ethics
https://press.pri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0
[33]
서적
George Eliot: A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34]
간행물
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
https://www.bl.uk/co[...]
1856-10-01
[35]
서적
1885
[36]
서적
Nature and Art
Mrs. Inchbald
1796
[37]
서적
George Eliot: Voice of a Century
Norton
1995
[38]
백과사전
Eliot, George
[39]
서적
The Carlyle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40]
논문
Adam Bede's Dutch Realism and the Novelist's Point of View
2012-10
[41]
백과사전
Evans, Marian [George Eliot] (1819–1880)
https://doi.org/10.1[...]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42]
서적
George Eliot's Intellectual Lif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43]
서적
George Eliot's Feminism: The Right to Rebellion
Springer
2015
[44]
서적
George Eliot's Intellectual Lif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45]
서적
George Eliot for the Twenty-First Century: Literature, Philosophy, Politics
Springer
2018
[46]
서적
The Short Oxford History of English Literature
Clarendon Press
1994
[47]
기타
1881 census
[48]
웹사이트
George Eliot
http://www.bbc.co.uk[...]
2009-10-15
[49]
서적
Eminent Persons: Biographies reprinted from the Times
Macmillan and Co.
[50]
서적
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George Eliot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04-07
[51]
학술지
The role of George Henry Lewes in George Eliot's career: A reconsideration
https://georgeeliots[...]
2017
[52]
서적
Resting Places: The Burial Sites of More Than 14,000 Famous Persons
McFarland & Company, Inc., Publishers
null
[53]
잡지
George Eliot's Ugly Beauty
https://www.newyorke[...]
2013-09-19
[54]
학술지
Henry James Visits the Priory
https://19.bbk.ac.uk[...]
2020-03-20
[55]
서적
George Eliot: A Critic's Biography
Continuum
2006
[56]
웹사이트
George Eliot: Biography
http://etext.lib.vir[...]
[57]
웹사이트
George Eliot's grave: Highgate Cemetery, London
https://victorianweb[...]
2017-07-29
[58]
기타
BIRMINGHAM REGIONAL HOSPITAL BOARD GROUP 20 HOSPITAL MANAGEMENT COMMITTEE
https://discovery.na[...]
1944–1974
[59]
웹사이트
Bromford Tunnel
https://www.hs2.org.[...]
[60]
서적
Zion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61]
서적
The Marriage Question. George Eliot's Double Life
Allen Lane
2023
[62]
서적
A Companion to the Victorian Novel
Greenwood Press
[63]
논문
The Defects of Perfectionism: Nietzsche, Eliot, and the Irrevocability of Wrong
2017
[64]
서적
The Western Canon: The Books and School of the Ages
Harcourt Brace
1994
[65]
잡지
The 10 Greatest Books of All Time
http://content.time.[...]
2007-01-15
[66]
뉴스
The best British novel of all time: have international critics found it?
https://www.theguard[...]
2015-12-08
[67]
뉴스
Martin Amis and the sex war
http://entertainment[...]
2010-01-24
[68]
학술지
Interviews: Julian Barnes, The Art of Fiction No. 165
http://www.theparisr[...]
[69]
웹사이트
Impressions of Theophrastus Such, Chapter 17, Shadows of the Coming Race
http://www.online-li[...]
online-literature.com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