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태
1. 개요
조진태는 1853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무관으로 활동하다 퇴직 후 친일 세력과 결탁하여 경제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대한천일은행, 경성상업회의소 등 여러 기업과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일제의 조선 경제 장악에 기여한 공로로 훈포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이후에도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에 참여했다. 1933년 사망했으며, 사후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 명단에 등재되었으며,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었다.
| 한국어 이름 | 조진태 |
|---|---|
| 한자 이름 | 趙鎭泰 |
| 로마자 표기 | Jo Jin-tae |
| 출생 | 1963년 11월 29일 (60세) |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 |
| 사망 | 2024년 5월 3일 (60세) |
| 사망 원인 | 심근경색 |
| 국적 | 대한민국 |
| 직업 | 역사학자, 대학교수 |
| 분야 | 역사학 |
| 모교 | 서울대학교 (문학사) |
| 배우자 | 김미경 |
| 자녀 | 1남 |
| 주요 경력 | 제19대 전남대학교 총장 제20대 전남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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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내역 | 제1회 김현용 학술상 제35회 송암학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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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이원수 (작가)
이원수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으로 등단하여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고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작품으로 논란이 있다. -
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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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신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조선의 무신 -
김응우
김응우는 김일성의 고조부로 평안도 대동 출신이며, 북한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고, 김일성 가문으로 이어진 전주 김씨이다.
2. 생애
조진태는 1853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875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조진태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2.1. 대한제국 시기
1895년 퇴직한 뒤 전직 관리라는 경력과 대한제국 황실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주식회사군부피복회사를 창설하며 경제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같은 무관 출신의 성공한 실업인인 백완혁의 이력과 유사하다. 특히 조진태는 친일 세도가인 조중응의 오른팔 격으로 불리는 인물이었고, 이후 일제의 조선 경제계 재편과 장악에 앞장섰다.
1900년부터 12년간 대한천일은행의 주주, 사무원과 감사, 이사를 맡았고, 1905년 발기인 겸 회장으로 경성상업회의소를 창설했다. 1906년 한성농공은행 설립위원, 1908년 한성은행 감사가 되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과 감사를 지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경성상업회의소 대표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가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때는 유길준, 백완혁과 함께 경성부 조문 대표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상장(喪章)을 만들어 무료 배포하기도 했다.
2.2. 일제강점기
1895년 퇴직한 뒤 전직 관리라는 경력과 대한제국 황실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주식회사군부피복회사를 창설하며 경제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같은 무관 출신의 성공한 실업인인 백완혁의 이력과 유사하다. 특히 조진태는 친일 세도가인 조중응의 오른팔 격으로 불리는 인물이었고, 이후 일제의 조선 경제계 재편과 장악에 앞장섰다.
1900년부터 12년간 대한천일은행의 주주, 사무원과 감사, 이사를 맡았고, 1905년 발기인 겸 회장으로 경성상업회의소를 창설했다. 1906년 한성농공은행 설립위원, 1908년 한성은행 감사가 되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과 감사를 지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는 경성상업회의소 대표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가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때는 유길준, 백완혁과 함께 경성부 조문 대표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상장(喪章)을 만들어 무료 배포하기도 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도 계속 실업계의 거물로 불렸고, 1916년 대정실업친목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친일 단체에서의 사회단체 활동도 활발했다. 1918년 조선식산은행 설립위원과 상담역을 맡았으며,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 소속 산업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두 기관 모두 식민지 경제 체제의 확립과 조선총독부의 경제 정책 시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기관이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훈6등, 훈5등 서보장, 훈4등 서보장 등 훈포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기도 했다.
3. 친일 행적 및 평가
조진태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선정되었다.
3.1. 친일파 명단 등재 및 재산 환수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그가 소유했던 경기도 파주시 소재 토지 20필지 70000m2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4. 비판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그가 소유했던 경기도 파주시 소재 토지 20필지 70000m2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