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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표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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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표는 후한 말, 삼국 시대 인물로, 역사 기록은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을 단 내용에 유일하게 나타난다. 도겸, 유비를 섬겼으며, 유비가 원술을 토벌하러 간 사이 여포에게 호응하여 하비를 잃게 되는 사건에 연루되었다. 조표는 장비와의 갈등으로 인해 여포를 불러들여 장비를 공격하게 했으며, 이후 장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설과, 조표가 살아남았다는 설이 존재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의 장인으로 등장하며, 장비와의 갈등이 극화되어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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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표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조표
원어 이름曹豹
출생일알 수 없음
사망일196년
사망 장소피저우, 장쑤 성
직업관료
소속후한
관직 정보
관직하비 재상
재임 시작알 수 없음
재임 종료196년
군주헌제

2. 사적

조표의 행적은 《삼국지》 〈무제기〉, 〈선주전〉 등에 전해져 온다. 조표에 대한 역사적 정보는 배송지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단 내용에서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영웅기》(왕찬 저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웅기》의 또 다른 주석에는 다른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두 번째 기록을 사용했다.[5]

도겸의 휘하 중신으로, 하비군 제후상의 지위에 있었다. 조조가 도겸을 공격했을 때 장군이 되어 조조군과 싸웠으나 패퇴했다. 도겸 사후, 유비의 가신이 되었다. 유비가 원술 토벌을 위해 서주를 비웠을 때, 여포에게 호응했다.

2. 1. 도겸 휘하

흥평 원년(194년),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비와 함께 조조를 요격했으나 격파당했다.[3]후한서》 〈도겸전〉에 “조조가 담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이후 조조의 진격로가 실제로는 퇴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때는 초평 4년의 일로 도겸이 담으로 들어가 수비하여 조조가 이기지 못하고 후퇴한 것이므로 조표와는 관계없다.

건안 원년(196년), 유비가 원술과 대치하고 있는 도중 여포하비를 습격하자, 배반하고 여포를 맞아들였다.[4]삼국지》에 인용된 《영웅기》는 두 가지 설을 제시하고 있다.

  • 〈선주전〉에 인용된 쪽에 따르면, 하비를 지키고 있던 장비가 조표를 죽이려 하자 조표가 둔영을 지키면서 여포를 불러들여,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했다.
  • 〈여포전〉에 인용된 쪽에 따르면,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許耽)이 여포에게 가서 하비상 조표와 장비가 서로 다투다가 장비가 조표를 죽여 성 안이 혼란에 빠졌으니, 단양병이 성의 서문에 주둔하고 있는데 여포가 군을 이끌고 오면 내응할 것이라고 했다. 여포가 그 말을 듣고 서문으로 진격하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내응하고, 여포는 장비를 무찌르고 하비성을 손에 넣었으며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 부곡, 제장들의 가족을 노획했다.[5]

2. 2. 여포와의 관계 및 최후

196년, 유비원술과 대치하는 사이 여포하비를 습격하자 배반하고 여포를 맞이했다.[3]삼국지》에 인용된 《영웅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장비가 조표를 죽이려 했다는 설''': 장비가 조표를 죽이려 하자 조표는 둔영을 지키면서 여포를 불렀고,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했다.[3]
  • '''장비가 조표를 죽였다는 설''': 유비의 중랑장 단양 사람 허탐(許耽)이 여포에게 "장비가 조표를 죽여 성 안이 혼란스러우니, 단양병이 성의 서문에 주둔하고 있는데 여포가 군을 이끌고 오면 내응할 것"이라고 했다. 여포가 그 말을 듣고 서문으로 진격하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었고, 여포는 장비를 무찌르고 하비성을 손에 넣었으며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 부곡, 제장들의 가족을 노획했다.[4]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두 번째 기록을 사용했다.[5] 어느 쪽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후 조표의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3. 삼국지연의의 묘사

193년 서주성 전투 당시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자 조조군의 선봉장 하후돈맞붙었으나,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싸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도겸이 죽은 후에는 유비를 섬겼고, 딸을 여포에게 시집보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여포와 일기토를 벌이다가 사로잡히는 이야기가 있다.

코에이 테크모 게임스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능력이 매우 낮게 설정되어 있으며 (다만, 무관이기 때문에 무력은 그럭저럭 있다), 특히 초기 시리즈에서는 모든 무장 중 종합적으로 가장 낮은 수치였다. 이 때문에 오히려 소재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인기를 얻었다. 과거 코에이가 출판했던 잡지 "코에이 게임 파라다이스"와 "코에이 역사 파라다이스"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다.

3. 1. 장비와의 갈등

194년 유비가 서주 전투에서 원술과 싸울 때 장비와 함께 하비성을 수비했지만, 장비가 술을 강요하자 거절하여 채찍을 맞았다.[6]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조표는 그날 밤 사위 여포를 하비성으로 불러들여 장비를 토벌하려 했으나, 장비를 추격하던 중 오히려 장비에게 죽임을 당했다.[6]

조표와 장비의 갈등은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었다.[6] 소설에서 조표는 장비에게 "사위 생각해서 봐달라"며 술을 그만 마시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장비는 여포를 증오했기 때문에 격노했다.[6] 장비는 부하들에게 조표를 50대 매질하라고 명령했고, 다른 장수들이 그만하라고 간청하자 비로소 멈췄다.[6] 매질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조표는 몰래 여포에게 연락하여 사위가 하비를 장악하는 것을 도왔다.[6] 여포가 도시를 공격했을 때 장비는 술에 취해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비에서 도망쳤다.[6] 조표는 약 1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비를 추격했지만, 결국 장비에게 살해당했다.[6]

''삼국지연의''에서 조표의 딸은 여포의 측실이 되었다. 조표는 장비와 사이가 좋지 않아 늘 대립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비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서주를 비우자, 조표는 장비와 함께 성을 지켰지만, 장비의 음주를 간하다가 매를 맞는다. 이 때문에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조표는 당시 유비를 의지하고 있던 여포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그러나 조표는, 여포의 원군이 오기 직전에 도주한 장비를 추격하다가 장비에게 반격을 당해 죽임을 당한다.

3. 2. 여포의 하비 점령 및 조표의 죽음

194년 유비서주 전투에서 원술과 싸울 때 장비와 함께 하비성의 수비를 담당했다. 그러나 장비가 술을 강요하자 이를 거절하여 채찍을 맞았다. 이에 앙심을 품고 그날 밤 사위 여포를 하비성으로 불러들여 장비를 토벌하려 했으나, 장비를 추격하던 중 오히려 장비에게 죽임을 당했다.[6]

조표와 장비의 갈등은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 극화되었다. 소설에서 조표는 여포의 장인이었다. 장비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조표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했다. 조표는 장비에게 "사위 생각해서 봐달라"며 술을 그만 마시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여포를 증오했던 장비는 격노했다. 장비는 부하들에게 조표를 50대 매질하라고 명령했고, 다른 장수들이 간청하자 비로소 멈췄다. 매질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조표는 몰래 여포에게 연락하여 사위가 하비를 장악하는 것을 도왔다. 여포가 도시를 공격했을 때 장비는 술에 취해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비에서 도망쳤다. 조표는 약 1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비를 추격했지만, 결국 장비에게 살해당했다.[6]

삼국지연의》에서 조표의 딸은 여포의 측실이 되었다. 조표는 장비와 사이가 좋지 않아 늘 대립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비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서주를 비우자, 장비와 함께 유수(留守)를 맡았지만, 장비의 음주를 간하다가 매를 맞았다. 이 때문에 조표는 이대로라면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여, 당시 유비를 의지하고 있던 여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표는, 여포의 원군이 오기 직전에 도주한 장비를 추격하다가 장비에게 반격을 당해 인마(人馬)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참조

[1] 문서
[2] 서적 Houhanshu
[3] 서적 Yingxiong Ji
[4] 서적 Yingxiong Ji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Sanguo Ya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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