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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초테크 폰 호헨베르크 여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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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피 초테크 폰 호헨베르크 여공작은 보헤미아 백작 가문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결혼했으나, 신분 차이로 인해 황제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황족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자녀의 황위 계승을 불허하는 조건으로 결혼이 승인되었지만, 공식 행사에서 냉대를 받았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남편과 함께 암살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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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초테크 폰 호헨베르크 여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피 호테크 여공작
조피, 1910년경
작위호엔베르크 여공작
전체 이름조피 마리아 요제피네 알비나 초테크 폰 초트코프 운트 보그닌
출생일1868년 3월 1일
출생지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사망일1914년 6월 28일
사망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라예보
매장지아르트슈테텐 성
배우자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1900년 결혼)
자녀조피 폰 호엔베르크 여공녀
막시밀리안, 호엔베르크 공작
에른스트 폰 호엔베르크 공자
가문초테크 가문
호엔베르크 가문 (창시)
아버지보후슬라프 초테크 폰 초트코프 운트 보그닌 백작
어머니빌헬미네 킨스키 폰 브히니츠 운트 테타우
이름
독일어Sophie Marie Josephine Albina Gräfin Chotek von Chotkow und Wognin
체코어Žofie Marie Josefína Albína hraběnka Chotková z Chotkova a Vojnína

2. 생애

보헤미아 백작 가문 출신으로,[16]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의 시녀로 일하던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사랑에 빠졌다. 신분 차이로 인한 귀천상혼 문제로 황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조피가 황족 특권을 포기하고 자녀의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1900년 결혼이 승인되었다.[16]

결혼 후 '호엔베르크 여공작' 칭호를 받았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공식 석상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17]

1914년 6월 28일, 남편과 함께 방문한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했다.[18]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다.[15] 귀천상혼으로 인한 차별은 사후에도 이어져, 장례식에서 그녀의 관은 남편의 관보다 45cm 낮은 곳에 놓였다.

2. 1. 초기 생애

조피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보후슬라프 초테크 폰 초트코프 운트 보그닌 백작과 그의 아내 빌헬미네 킨스키 폰 브치니츠 운트 테타우 백작 부인의 다섯 번째 자녀이자 네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귀족 가문인 오래된 초테크 가문 출신으로, 오스트리아대사로서 슈투트가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브뤼셀 등에서 활동했다.

어린 시절, 조피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아내인 이사벨라 대공비의 시녀가 되었다.[16] 프리드리히 대공은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방계인 테셴 공작가의 수장이었다. 시녀로 일하던 중, 조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중 한 명이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조피는 백작 가문 출신이었지만, 황가의 기준에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신분 차이가 컸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귀천상혼에 해당했다. 당시 황제이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백부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16] 주변의 극심한 반대 끝에, 조피가 황족으로서의 특권을 모두 포기하고 장래에 태어날 자녀에게 황위 계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1900년 6월 28일 결혼이 승인되었다.[16]

1900년 7월 1일 조피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혼식에는 황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궁정 귀족들이 참석하지 않았다.[16] 결혼 후에도 조피는 '대공비 전하'(Kaiserliche und königliche Hoheit|deu)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공식 행사에서는 가장 낮은 서열의 황족보다도 뒷자리에 앉아야 했고, 극장 관람이나 무도회 등 공적인 자리에서 남편과 나란히 있거나 팔짱을 끼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17] 대신 그녀에게는 '호엔베르크 여공작'(Fürstin von Hohenberg|deu)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2. 2. 프란츠 페르디난트와의 만남과 결혼

보헤미아의 백작 가문 출신인 조피는[16] 프리드리히 대공의 아내 이자벨라 대공비의 시녀로 일했다.[3] 그녀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처음 만난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894년 프라하에서 열린 무도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 당시 프라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저택인 할브투른 성을 자주 방문했는데, 처음에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장녀인 마리 크리스틴 대공녀와 사랑에 빠진 것으로 여겨졌다.[3]

그러나 이 관계의 진실은 이사벨라 대공비에 의해 우연히 밝혀졌다. 그녀는 테니스 코트에 놓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펜던트를 열어보았는데, 딸의 사진 대신 시녀인 소피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발견은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3]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1889년 사촌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과 1896년 아버지 카를 루드비히 대공의 사망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추정 상속자가 된 상태였다.[3] 그의 삼촌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소피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엄격한 결혼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귀천상혼을 금지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규칙에 따르면, 황족의 배우자는 유럽의 군주 가문이나 과거 군주 가문 출신이어야 했다.[3][16] 초테크 가문은 14세기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보헤미아 귀족 가문이었고 1745년 신성 로마 제국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왕조의 일원으로 인정받기에는 신분이 부족했다.[3] (흥미롭게도 소피는 루돌프 1세의 딸 마틸다 폰 합스부르크의 후손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먼 합스부르크 조상을 공유했지만, 이는 결혼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3][5]

소피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공통 조상인 알브레히트 4세 폰 합스부르크의 인장.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소피를 포기하라는 황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왕위 계승자를 낳기 위해 동등한 신분의 여성과 결혼하라는 요구를 거부했으며, 이는 이미 마이얼링 사건 등으로 얼룩진 황실에 또 다른 논란거리를 안겨주었다.[3]

결국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900년 6월 28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는 제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서약을 조건으로 결혼을 마지못해 승인했다.[16] 1900년 7월 1일, 소피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결혼식을 올렸지만, 황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황족과 궁정 귀족들은 결혼식에 불참하며 이들의 결합에 대한 황실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16]

결혼 후에도 소피는 귀천상혼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그녀는 정식 대공비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공식 행사에서는 황족 중 가장 낮은 서열에 앉아야 했으며, 심지어 극장 관람이나 무도회 참석 시에도 남편과 나란히 자리하거나 팔짱을 끼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겪었다.[17] 대신 그녀에게는 '호엔베르크 여후작 전하'(Ihre Durchlaucht Fürstin von Hohenberg|이레 두르흘라우흐트 퓌르스틴 폰 호엔베르크deu)라는 개인적인 칭호가 주어졌고, 이는 1909년에 '호엔베르크 여공작 전하'(Ihre Hoheit Herzogin von Hohenberg|이레 호하이트 헤르초긴 폰 호엔베르크deu)로 격상되었지만, 여전히 황족에게 부여되는 '전하'(Imperial and Royal Highness) 칭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호엔베르크 공작 칭호는 소피 사후 장남 막시밀리안에게 세습되었다.

2. 3. 호엔베르크 여공작

뵈멘 지방의 백작 가문 출신인 조피는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의 아내 이자벨라 대공비의 시녀로 일하던 중,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위 계승자였고, 조피는 황족과 결혼하기에는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를 비롯한 주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16]

결국 1899년, 황제의 시누이이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계모인 마리아 테레사 여대공 등 가족들의 설득 끝에 결혼 허가가 내려졌다.[3] 하지만 이는 귀천상혼으로, 조피와 그 자녀들은 황족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제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했다.[16] 1900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왕족과 고위 관료들이 모인 앞에서 조피가 귀천상혼의 아내로서 황후, 여왕, 대공비 등의 칭호를 결코 받지 못하며, 그들의 후손 역시 왕위 계승권이나 관련 특권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공식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3][6]

1900년 7월 1일, 조피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의 레히슈타트(현재 자쿠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황제는 물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형제들을 포함한 어떤 대공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황실 가족 중에서는 계모 마리아 테레사 여대공과 그녀의 두 딸 마리아 안눈치아타와 엘리자베트 아말리에만이 참석했다.[3][16]

결혼 후 조피는 '호엔베르크 후작 부인(Fürstin von Hohenbergde)'이라는 작위와 '전하(Durchlauchtde)'라는 경칭을 받았으나, 대공비 전하의 칭호는 사용할 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17] 1909년에는 '호엔베르크 여공작(Herzogin von Hohenbergde)'으로 승격되었고, 더 높은 경칭인 '폐하(Hoheitde)'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식 석상에서 모든 여대공, 메디아티제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주 및 백작부인들보다 낮은 서열에 위치해야 했다. 심지어 남편과 나란히 오페라를 관람하거나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17] 이러한 차별적인 대우는 황실의 궁정 대관(Obersthofmeister)이었던 알프레트 폰 몬테누오보 2세 공이 엄격하게 궁정 예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3] 이러한 문제로 인해 많은 유럽 왕실에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왕위 계승자임에도 부부를 초대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영국조지 5세 국왕과 메리 테크 여왕은 1913년 11월 윈저 성에서 부부를 따뜻하게 맞이했는데, 이는 메리 여왕의 아버지인 테크 공작 프랜시스 역시 귀천상혼의 자손이었던 배경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7]

부부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4]

이름생몰년배우자
호엔베르크의 조피 공주1901–1990노스티츠-리네크 백작 프리드리히 폰 (1891–1973)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1902–1962발트부르크-발트제 백작부인 엘리자베트 폰 (1904–1993)
호엔베르크의 에른스트 공1904–1954마리-테레즈 우드 (1910–1985)
사산 아들1908



1914년 6월 28일, 조피는 남편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통치 구역이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사라예보를 방문했다. 환영 인파 속에서 부부가 탄 차는 폭탄 테러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부상을 피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에게 호텔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남편 곁을 떠나기를 거부했다.[18] 부부는 다른 일정을 소화한 뒤 폭탄 테러로 다친 부하들을 문병하러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운전사가 길을 잘못 들었고, 그 순간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나타나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을 쏘았다. 이어서 프린치프는 조피의 배에도 총을 발사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에게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죽으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몇 분 뒤 부부는 함께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이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다.[18][15] 당시 조피는 46세였으며 임신 중이었다고 전해진다.[15]

합스부르크가의 엄격한 가문 규칙 때문에 조피는 죽어서도 차별을 받았다. 장례식에서 그녀의 관은 남편의 관보다 45cm 낮은 위치에 놓였다.

조피가 생전에 가졌던 칭호는 다음과 같다.

기간독일어 칭호한국어 칭호
1868년 – 1900년Gräfin Sophie Chotek von Chotkovade호테크 폰 호트코우바 백작 영애 조피
1900년 – 1909년Ihre Durchlaucht Fürstin von Hohenbergde호엔베르크 후작 부인 전하
1909년 – 1914년Ihre Hoheit Herzogin von Hohenbergde호엔베르크 여공작 전하


2. 4. 사라예보 사건과 죽음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주지사인 오스카 포티오레크 장군의 초청으로 사라예보에서 열리는 군사 훈련을 참관하게 되었다. 조피는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해 공식 방문에 남편을 동반하는 것이 보통 허용되지 않았으나, 이번 방문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군 사령관 자격으로 초청받았기 때문에 동행이 가능했다.[9] 대공은 조피가 방문 마지막 날인 6월 28일에 합류하여 군대 열병식에 참석하고 새 박물관 헌정식에 참여한 후 함께 비엔나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이 날은 부부가 귀천상혼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서약의 14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방문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는 부부가 함께 공개적으로 기념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10분경, 부부가 탄 차량 행렬이 사라예보 중앙 경찰서를 지날 때,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대공의 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운전사가 이를 보고 속도를 높여 피했지만, 수류탄은 다음 차량 아래에서 폭발하여 탑승자 2명(에릭 폰 메리치, 보스-발덱 백작)이 중상을 입고 14명의 구경꾼이 다쳤다.

시청에서 예정된 환영 행사를 마친 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수류탄 테러로 부상당한 일행을 문병하러 가겠다고 주장했다. 대공의 측근인 안드레아스 폰 모르세이 남작은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황실 경호를 책임진 포티오레크 장군은 "사라예보에 암살자가 가득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며 일축했다. 포티오레크는 조피만이라도 시청에 남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으나, 조피는 "대공이 오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한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며 남편 곁을 지켰다.[18]

포티오레크 장군은 시내 중심가를 피해 아펠 가를 따라 병원으로 바로 가도록 경로를 변경했으나, 이 사실을 운전사 레오폴드 로이카에게 알리는 것을 잊었다.[10] 병원으로 향하던 중, 사라예보 라틴 다리를 지나 프란츠 요제프 거리로 잘못 들어선 순간, 그곳에 있던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나타났다. 포티오레크가 "이게 무슨 일인가? 잘못된 길이다! 아펠 가로 가야 한다!"라고 외치자 운전사는 차를 멈추고 후진하기 시작했다.

차가 천천히 후진하는 사이, 프린치프는 앞으로 다가가 약 약 1.52m 거리에서 권총을 두 발 발사했다. 첫 발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을 관통했고, 두 번째 총알은 조피의 복부에 명중했다. 조피는 쓰러지면서 남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18]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의식을 잃기 전 "소페를! 소페를! 죽지 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살아있어!"라고 애타게 외쳤지만,[9][18] 부부는 총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당시 조피는 46세였으며, 임신 중이었다고도 전해진다.[15]

이 암살 사건, 즉 사라예보 사건7월 위기를 촉발하여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조피는 귀천상혼으로 인해 결혼 후에도 합스부르크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공식 석상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차별은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져, 장례식에서 남편의 관보다 45cm 낮은 위치에 관이 놓이는 차별을 받았다.

2. 5. 장례식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유해는 전함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에 실려 트리에스테로 옮겨졌고, 이후 특별 열차를 통해 으로 운구되었다. 호프부르크 왕궁에서는 가까운 황실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짧은 공동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장례 절차에서도 조피에 대한 차별은 드러났는데, 그녀의 관은 남편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관보다 45cm 낮은 위치에 놓였다. 이는 합스부르크가의 엄격한 귀천상혼 규정 때문이었다.

이후 부부의 유해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생전 요청에 따라[9]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장이었던 아르트슈테텐 성의 지하 묘소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조피는 황족이 아니었기에 빈의 황제 묘소에 묻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11] 오늘날 아르트슈테텐 성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기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Arstetten Castle, its chapel, and the final resting place of the couple, showing each resting at equal heights.
사진 몽타주 (2012) 아르트슈테텐 성, 그 예배당, 부부의 마지막 안식처를 보여주며, 각 무덤의 높이가 동일하게 표시되어 있음

3. 자녀

wikitext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조피 폰 호엔베르크 여후작
조피 폰 호엔베르크 여후작1901년 7월 24일1990년 10월 27일 (89세)슬하 3남 1녀
막시밀리안 폰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폰 호엔베르크 공작1902년 9월 29일1962년 1월 8일 (59세)슬하 6남
에른스트 폰 호엔베르크 후작
에른스트 폰 호엔베르크 후작1904년 5월 27일1954년 3월 5일 (49세)슬하 2남


  • 남자 (1908년) - 요절


제2차 세계 대전 중, 조피,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3명은 막시밀리안이 나치 독일안슐루스(독일-오스트리아 합병)에 반대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패전할 때까지 수용되어 있었다.

4. 유산

(내용 없음)

4. 1. 기념 주화

조피 여공작이 묻힌 아르트슈테텐 성은 2004년 10월 13일에 발행된 10EUR 아르트슈테텐 성 기념 주화의 주요 모티프로 선정되었다. 주화 뒷면에는 호엔베르크 가문 묘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그려져 있으며, 왼쪽에는 조피 여공작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옆모습 초상이 겹쳐져 묘사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Burke's Guide to the Royal Family Burke's Peerage 1973
[2] 서적 The Descendants of King George I of Great Britain Clearfield Company 2002
[3] 서적 La Descendance de Marie-Therese de Habsburg ICC 1996
[4] 간행물 Genealogisches Handbuch des Adels, Fürstliche Häuser XV. "Hohenberg" C.A. Starke Verlag 1997
[5] 웹사이트 Descendancy for Mathilde von Habsburg: Genealogics https://www.genealog[...]
[6] 웹사이트 Pragmatic Sanction of 1713 http://www.heraldica[...] 2011-11-11
[7] Citation Pope-Hennessy, (Richard) James (Arthur) (1916–1974) http://dx.doi.org/10[...] Oxford University Press 2018-02-06
[8] 뉴스 Austria Will Avenge Murder https://newspaperarc[...] 1914-06-29
[9] 서적 An Incomplete History of World War I Pier 9
[10] 웹사이트 Time Magazine Milestones (as Leopold Lojka) https://web.archive.[...] Time (magazine) 2012-07-08
[11] 뉴스 The Funeral of the Archduke https://archive.org/[...] 2013-08-09
[12]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1915) http://alex.onb.ac.a[...]
[13] Citation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Druck und Verlag der K.K. Hof- und Staatsdruckerei 1914
[14] 뉴스 Almanach de Gotha https://archive.org/[...] Justus Perthes 1913
[15] 웹사이트 「20世紀はここで始まった」 サラエボ事件の意味を解き明かす会議を開催した教授に聞く(小林恭子) https://news.yahoo.c[...] 2020-11-30
[16] 서적 쿠오 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1 푸른숲 2002
[17] 서적 제국의 종말 가람기획 2005
[18] 서적 쿠오 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1 푸른숲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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