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팅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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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 팅커는 1902년 시카고 컵스에서 데뷔하여 1916년 은퇴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다. 유격수로서 컵스에서 10년간 활약하며 4번의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1907년과 1908년에 우승했으며, "팅커 투 에버스 투 챈스"의 더블 플레이 조합으로 유명하다. 1913년 신시내티 레즈, 1914년과 1915년 시카고 웨일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16년 컵스로 복귀하여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부동산 사업을 했으며, 194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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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팅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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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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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지 버트 팅커 |
원어 이름 | Joseph Bert Tinker |
출생일 | 1880년 7월 27일 |
출생지 | 미국캔자스주무스코타 |
사망일 | 1948년 7월 27일 (향년 68세) |
사망지 | 미국플로리다주올랜도 |
포지션 | 유격수 / 감독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MLB |
데뷔 날짜 | 1902년 4월 17일 |
데뷔 팀 | 시카고 오펀스 |
마지막 리그 | MLB |
마지막 날짜 | 1916년 9월 22일 |
마지막 팀 | 시카고 컵스 |
선수 경력 (팀) | 시카고 오펀스 / 컵스 (1902년–1912년) 신시내티 레즈 (1913년) 시카고 치-페즈 / 웨일스 (1914년–1915년) 시카고 컵스 (1916년) |
감독 경력 | |
감독 경력 (팀) | 신시내티 레즈 (1913년) 시카고 치-페즈/웨일스 (1914년 - 1915년) 시카고 컵스 (1916년) |
기록 | |
타율 | 0.262 |
홈런 | 31 |
타점 | 782 |
수상 | |
주요 수상 | 2× 월드 시리즈 우승 (1907년, 1908년) 페더럴 리그 우승 (1915년) 시카고 컵스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헌액 | 종류: 미국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날짜: 194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방법: 올드 타이머 위원회 |
2. 선수 경력
시카고 컵스의 주전 유격수로서 1902년부터 1912년까지 활약했다. 그는 빠른 발을 가져 시즌 평균 28개의 도루를 기록했으며, 1910년 7월 28일 경기에서는 한 경기에서 홈스틸을 두 번 성공시키기도 했다.[43] 수비 능력 또한 뛰어나 여러 수비 지표에서 내셔널 리그 선두를 차지했고, 특히 수비율 부문에서는 네 차례나 1위에 올랐다. 컵스 소속으로 10년간 뛰면서 월드 시리즈에 네 번 진출하여 1907년과 1908년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통산 타율은 0.268로 당대 기준으로 평균적인 수준이었으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44]을 상대로는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 통산 0.350의 타율을 기록했다.[69] 매튜슨은 1912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위기의 투구''에서 팅커를 "내셔널 리그에서 내가 상대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타자"라고 평가했다.[1]
팅커는 1910년 뉴욕 이브닝 메일의 칼럼니스트 프랭클린 피어스 아담스가 쓴 시 "야구의 슬픈 어휘"에 등장하는 "팅커 투 에버스 투 챈스"(Tinker to Evers to Chance)라는 유명한 병살타 조합의 일원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는 당시 시카고 컵스에게 연이어 패배하던 뉴욕 자이언츠 팬의 슬픔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63] 2루수 조니 에버스, 1루수 프랭크 찬스와 함께 만들어낸 이 수비 조합은 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내야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특히 팀 동료였던 에버스와는 1905년 경기장에서 주먹다짐을 벌인 이후 오랫동안 말을 섞지 않았으며,[63] 다른 선수들과의 싸움이나 팬과의 충돌로 폭행 혐의로 체포되는 등[46] 여러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폭행 혐의는 무죄 판결[47]).
1912년 시즌 후, 컵스와의 연봉 협상이 결렬되면서 1913년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했다. 이후 1914년과 1915년에는 신생 리그인 페더럴 리그의 시카고 웨일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1915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페더럴 리그가 해체된 후 1916년에 시카고 컵스로 복귀하여 다시 선수 겸 감독을 맡았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에는 플로리다 주 리그에서 감독과 스카우트를 맡았고 부동산 사업도 운영했다. 1938년 월드 시리즈 해설을 계기로 에버스와 33년 만에 화해했으며, 1946년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48년 68번째 생일에 당뇨병 합병증으로 플로리다 주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마이너 리그 (1880-1901)
팅커는 캔자스주 머스코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쌍둥이 자매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1] 팅커가 두 살 때 가족은 캔자스주 캔자스시티로 이사했고, 그는 그곳에서 14세 때 학교 야구팀에서 야구를 시작했다.[1] 1898년에는 Hagen's Tailors라는 세미프로 팀에서 뛰며 시 챔피언십 우승을 경험했다.[69] 1899년에는 캔자스주 파슨스를 연고로 하는 팀에서 잠시 뛰었으나 팀이 해체되면서, 남은 시즌 동안 캔자스주 코피빌 팀에 3루수로 합류했다.[69]1900년, 19세의 나이로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코피빌 팀 동료였던 빌리 훌렌의 추천으로 웨스턴 리그 소속 덴버 그리즐리스의 감독 조지 테보에게 발탁되었다.[1] 덴버에서 2루수로 뛰며 첫 32경기에서 .219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6월에 몬태나주 리그의 그레이트 폴스 인디언스로 이적했다. 그레이트 폴스 팀은 재정난으로 인해 시즌 후반 팅커를 같은 리그의 헬레나 세너터스에 200USD를 받고 팔았다.[1]
1901년에는 퍼시픽 노스웨스트 리그의 포틀랜드 웹풋에서 3루수로 활약하며 .290의 타율을 기록했고, 37개의 도루로 리그 1위에 올랐다.[1] 이러한 활약 덕분에 내셔널 리그(NL)의 시카고 컵스와 신시내티 레즈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팅커는 팀 동료였던 잭 매카시가 레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카고 컵스를 선택했다.[1]
2. 2. 시카고 컵스 (1902-1912)

1902년, 시카고 컵스의 감독 프랭크 실리는 주전 유격수였던 배리 매코믹이 라이벌 아메리칸 리그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로 이적하자 그의 대체 선수를 찾던 중 조 팅커의 계약을 사들였다. 팅커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주전 유격수 자리를 확보했다.[1] 데뷔 시즌인 1902년에 타율 0.261을 기록했지만, 수비에서는 72개의 실책을 저질러 내셔널 리그(NL) 유격수 중 가장 많은 실책을 기록하기도 했다.[1] 이 해에 역시 신인이었던 조니 에버스가 컵스의 2루수로 합류했고, 기존의 1루수 프랭크 찬스와 함께 팅커, 에버스, 찬스 세 사람은 1902년 9월 13일에 처음으로 함께 경기에 나섰으며,[43] 9월 15일에는 첫 병살타를 합작했다.[63] 당시 컵스의 감독이었던 프랭크 세레이는 수비가 서툴렀던 팅커에게 집중적인 수비 훈련을 시켰다.
1903년 시즌, 팅커는 타율 0.291, 70타점으로 타격 성적이 향상되었다. 1905년 9월 14일에는 에버스가 팀 동료들을 호텔 로비에 남겨두고 혼자 택시를 타고 경기장으로 가버린 일로 인해 경기장에서 에버스와 주먹다짐을 벌였다. 이 사건 이후 둘은 몇 년간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63] 그럼에도 불구하고 팅커-에버스-챈스로 이어지는 내야 수비진은 뛰어난 협력 플레이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05년 시즌에 팅커는 NL 유격수 중 가장 많은 병살타를 기록했다.[2]
팅커, 에버스, 찬스가 이끄는 컵스는 1906년 시즌에 116승 36패라는 경이적인 승패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가 세운 메이저 리그 역대 단일 시즌 최다승 기록과 동률이다.[3] (2001년 매리너스는 1906년 컵스보다 10경기를 더 치렀다.[69]) 팅커는 이 해 0.944의 수비율로 NL 유격수 중 1위를 차지하며 수비에서도 발전을 보였다.[1] 하지만 190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0.167로 부진했고, 팀은 지역 라이벌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6경기 만에 패배했다.[4]
1907년 시즌 전, 팅커는 충수염 수술을 받았다.[5] 1907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0.154에 그쳤으나, 컵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5경기 만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6] 1908년 시즌에는 컵스의 157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타율 0.266, 팀 내 최다인 146안타, 6홈런, 14개의 3루타, 0.391의 장타율을 기록했고,[1] 570개의 어시스트로 리그 1위에 올랐다.[7] 특히 머클의 본 헤드 사건으로 유명한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크리스티 매튜슨을 상대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쳐냈다.[1] 시즌 후 열린 1908년 NL 플레이오프 경기에서는 매튜슨을 상대로 3회초 선두 타자 3루타를 쳐 4득점 빅이닝의 발판을 마련하며 팀의 리그 우승 확정에 기여했다.[1] 이어진 1908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0.263을 기록했고, 컵스는 다시 타이거스를 5경기 만에 꺾으며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8] 팅커는 이 시리즈에서 빌 도노반을 상대로 홈런을 쳤는데, 이는 1905년 규칙 합의 이후 월드 시리즈에서 나온 첫 홈런이었다.[9]
1909년, 당시 1500USD를 받던 팅커는 2500USD의 연봉을 요구했으나, 결국 200USD 인상된 금액에 합의했다.[10] 컵스는 1910년 월드 시리즈에도 진출했지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게 5경기 만에 패했다. 팅커는 이 시리즈에서 타율 0.333을 기록하며 분전했다.[11] 1910년 시즌 후, 팅커는 또다시 연봉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겪으며 컵스를 떠나 호주에서 야구를 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12] 그는 빠른 주자이기도 해서 시즌 평균 28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1910년 7월 28일 경기에서는 한 경기에서 홈스틸을 두 번이나 성공시키기도 했다.[43]
1911년 시즌, 팅커는 486개의 어시스트로 다시 한번 NL 1위를 차지했고, 333개의 풋아웃으로도 유격수 중 1위를 기록했다.[13] 그해 8월에는 당시 감독이던 프랭크 찬스가 욕설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팅커에게 남은 시즌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으나,[14] 이틀 만에 징계를 철회하고 그를 복귀시켰다.[15]
1912년 시즌을 앞두고 신시내티 레즈의 구단주 개리 헤르만은 팅커를 팀의 선수 겸 감독 후보로 고려했다.[16] 팅커에 따르면 레즈의 주주들이 그에게 감독직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그는 컵스 구단주 찰스 W. 머피와 감독 찬스를 만났으나 그들은 팅커의 신시내티행을 반대했다. 이에 팅커는 불쾌감을 느꼈다.[17] 결국 레즈는 행크 오데이를 감독으로 선임했다.[17] 1912년 시즌, 팅커는 타율 0.282, 개인 최고 기록인 80득점과 75타점을 올렸고,[1] 354개의 풋아웃으로 다시 리그 유격수 1위를 차지했다.[18] 시즌 후 챌머스상 투표에서는 래리 도일, 호너스 와그너, 치프 마이어스에 이어 4위에 올랐다.[19]
팅커는 1902년부터 1912년까지 11시즌 동안 시카고 컵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팀의 네 차례 월드 시리즈 진출(1907년, 1908년 우승)에 기여했다. 그는 뛰어난 수비수였으며, 여러 수비 지표에서 리그 상위권에 올랐고 특히 수비율 부문에서는 네 차례나 리그 1위를 기록했다. 통산 타율은 0.268로 평범한 수준이었지만(당시가 타격이 강했던 시대임을 감안해야 함), 명예의 전당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44]을 상대로는 통산 0.350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다.[69] 매튜슨은 1912년에 쓴 자신의 책 ''위기의 투구''에서 팅커를 "내셔널 리그에서 내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타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
팅커는 무엇보다도 조니 에버스, 프랭크 찬스와 함께 "팅커 투 에버스 투 챈스"(Tinker to Evers to Chance)라는 유명한 병살타 조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문구는 1910년 뉴욕 이브닝 메일의 칼럼니스트 프랭클린 피어스 아담스가 쓴 시 "야구의 슬픈 어휘"에 등장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시는 당시 컵스에게 번번이 패배하던 뉴욕 자이언츠 팬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63]
한편, 팅커는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싸움에도 자주 휘말렸다. 에버스와의 주먹다짐 외에도 경기 후 동료 선수 리 매기(Lee Magee)와 싸워 이겼고,[63] 경기 중에는 래빗 마란빌과 싸우기도 했다.[45] 1908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술집에서 팬과 싸움을 벌여 폭행 혐의로 체포되었으나,[46] 무죄 판결을 받았다.[47] 1912년 시즌 후, 팀과의 연봉 협상이 결렬되면서 팅커는 1913년에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하게 된다.
2. 3. 신시내티 레즈 (1913)

1912년 시즌 후 시카고 컵스 구단주 찰스 머피는 조니 에버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했다. 팅커는 에버스 밑에서 뛰고 싶어하지 않았고[1], 1912년 팀과의 연봉 협상도 틀어진 상태였기에 머피 및 에버스와 만나 신시내티 레즈로의 이적을 논의했다.[20] 머피는 팅커의 높은 연봉 요구에 불만을 품었지만, 결국 1912년 12월 팅커를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하는 데 동의했다. 이 트레이드로 팅커, 해리 채프먼, 그로버 로우더밀크가 레즈로 이적했고, 레즈는 레드 코리덴, 버트 험프리스, 피트 나이즐리, 마이크 미첼, 아트 펠런을 컵스로 보냈다.[1][21] 팅커는 공개되지 않은 연봉으로 레즈와 계약을 체결했다.[22]
1913년 시즌 중, 팅커는 아내의 수혈을 위해 헌혈하면서 몇 주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23] 그 해 팅커는 11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17, 장타율 0.445, 수비율 0.968을 기록했는데, 이는 모두 그의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 그러나 레즈는 팀으로서 부진하여 시즌을 64승 89패로 마감했다.[1] 레즈의 부진으로 인해 구단주 헤르만은 팅커의 감독 스타일에 이의를 제기하며 사임을 요구했지만, 팅커는 이를 거부했다.[24]
2. 4. 시카고 웨일스 (1914-1915) 및 컵스 복귀 (1916)
1913년 10월, 팅커는 신시내티 레즈의 구단주 헤르만과 협의하여 1914 시즌에도 감독으로 남기로 계약했다.[25] 그러나 헤르만은 11월에 팅커를 해고했고, 팅커는 다른 팀과의 계약을 알아봐야 했다. 팅커는 헤르만이 선수 이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고 불평했고, 헤르만은 팅커가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25][26]찰스 에베츠 브루클린 다저스 구단주는 1913년에 방출된 밥 피셔를 대체할 선수로 팅커를 눈여겨보았다.[27] 컵스, 자이언츠, 피츠버그 파이리츠, 필라델피아 필리스 역시 팅커 영입에 관심을 보였다.[28] 에베츠는 레즈로부터 1.5만달러에 팅커의 방출 동의를 얻어냈고, 팅커에게 추가로 1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두 팀은 선수 교환에도 합의하여 얼 잉글링과 허비 모란이 신시내티로, 딕 이건이 브루클린으로 이적했다. 에베츠는 팅커와 계약 협상을 시작했다.[29]
하지만 팅커는 에베츠가 약속한 1만달러를 받지 못했다.[30] 그는 1914 시즌 연봉으로 1만달러를 요구했지만, 브루클린은 5천달러 이상 지불할 의사가 없었다. 팅커는 연봉 7500USD의 3년 계약은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31][32] 결국 팅커는 브루클린과 계약하는 대신, 신생 리그인 페더럴 리그로 이적하기로 결정하고 3.6만달러의 3년 계약을 맺었다.[33][34] 그는 페더럴 리그로 이적한 최초의 스타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69][35] 모데카이 브라운과 같은 날 페더럴 리그와 계약했다.[36]
시카고 페더럴스(나중에 웨일스로 명칭 변경)에 합류한 팅커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다른 메이저 리그 선수들을 페더럴 리그로 영입하려 노력했지만,[37] 아메리칸 리그의 투수 월터 존슨을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스모키 조 우드를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데려오는 데는 실패했다.[38] 웨일스는 1914년과 1915년 두 시즌 동안 컵스보다 더 많은 관중을 동원했다. 1914년 웨일스는 리그 2위를 차지했고, 팅커는 시즌 중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259의 타율을 기록했다. 1915년 5월에는 근육 파열 부상으로 시즌을 일찍 마감했지만,[39] 그가 이끈 웨일스는 1915년 페더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 그러나 페더럴 리그는 1915 시즌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찰스 위그먼 웨일스 구단주는 시카고 컵스를 인수하여 웨일스와 컵스의 선수단을 통합했고, 팅커를 계속 감독으로 임명했다.[40] 브라운과 로저 브레스나한을 포함하여 컵스와 웨일스 선수들의 높은 연봉 때문에, 팅커는 필요 없는 선수들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41] 그는 1916 시즌 동안 컵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42]

1916년 선수 은퇴 후, 그해 12월 팅커는 토마스 E. 윌슨과 함께 아메리칸 협회 소속의 콜럼버스 세네터스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두 사람은 팀 지분 75%를 6.5만달러에 인수했으며,[48] 팅커는 감독직도 겸임했다. 1919년에는 그로버 하틀리에게 감독직을 넘겼고, 1920년 시즌에는 빌 클라이머를 감독으로 선임하자 하틀리는 트레이드를 요청했다.[49]
1946년 조니 에버스, 프랭크 찬스와 함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72] 이듬해인 1947년에는 올랜도의 지역 지도자들이 그를 기리는 기념 만찬을 열었다.[73]
1916년 12월, 팅커는 토마스 E. 윌슨과 함께 아메리칸 협회 소속 콜럼버스 세네터스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팀 지분 75%를 6.5만달러에 인수했으며, 팅커는 감독도 겸임했다.[48] 1919년 그로버 하틀리에게 감독직을 넘겼고, 1920년에는 빌 클라이머를 감독으로 임명하여 하틀리가 트레이드를 요청하게 만들었다.[49]
[1]
웹사이트
Joe Tinker
http://bioproj.sabr.[...]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2009-10-15
3. 은퇴 이후
아내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자, 팅커는 1920년 시즌 후 콜럼버스 팀 지분을 매각하고 플로리다주 올랜도로 이주했다.[50] 그곳에서 플로리다 주 리그의 올랜도 타이거스를 인수하여 소유주 겸 감독이 되었다.[1] 팀은 "팅커 타이거스"[61]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 동시에 팅커는 레즈의 스카우트로도 활동했다.[50] 그러나 1923년 크리스마스에 그의 아내가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다 권총으로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51] 팅커는 1926년 올랜도에서 메리 로스 에딩턴과 재혼했으며, 이때 레즈의 잭 헨드릭스가 신랑 들러리를 섰다.[52] 이후 1942년에는 수산나 마가렛 샤보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53]
팅커는 프로 야구계를 잠시 떠나 1920년대 플로리다 토지 투기 붐을 타고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성공적인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며[54] 플로리다주 오렌지 카운티와 플로리다주 세미놀 카운티의 토지를 매매했다.[61] 1926년에는 현재 국립 사적지로 등재된 롱우드 호텔을 매입하기도 했다.[2] 또한 레즈 구단주 개리 헤르만을 설득하여 1923년부터 올랜도에 있는 자신의 구장을 레즈의 스프링 트레이닝 장소로 사용하게 했다.[69]
부동산 사업으로 팅커는 최대 25만달러를 벌어들였다.[64] 하지만 1926년 주식 시장 하락과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이 남부 플로리다 지역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그의 사업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61] 결국 대공황 시기에 대부분의 부동산 자산을 처분해야 했다. 이 시기 팅커는 당구장을 운영했으며, 금주법 폐지 후에는 올랜도에서 최초로 술집을 열기도 했다.[69]
이후 팅커는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다. 1929년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컵스를 위해 상대 팀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타자들을 분석하는 스카우트 역할을 맡았다.[55] 1930년 시즌에는 인터내셔널 리그의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코치로 활동했으며, 당시 감독은 빌 클라이머였다.[56] 같은 해 8월에는 닉 앨런의 해임 후 인터내셔널 리그의 저지 시티 스키터스 감독으로 부임했다.[57] 1931년에는 이스턴 리그의 스프링필드 포니즈 구단주가 그에게 감독직을 제안하기도 했다.[58] 1937년 5월 중순에는 올랜도 갈스의 감독을 잠시 맡았으나, 구단이 급여를 지불하지 못하자 7월에 사임했다.[59][60]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올랜도 공군 기지에서 보일러 검사관으로 일했다.[61]
오랜 앙숙이었던 조니 에버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반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05년 다툼 이후 33년간 서로 말을 하지 않다가 1938년 월드 시리즈(컵스 대 뉴욕 양키스) 라디오 중계에 함께 초청되면서 극적으로 화해했다고 한다. 당시 두 사람은 서로가 초청된 사실을 몰랐다고 전해진다.[10][62]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1929년에 팅커와 에버스는 이미 야구를 주제로 한 연극 스킷 공연을 위해 10주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계약을 맺은 바 있다.[63]
말년에 팅커는 당뇨병과 브라이트병 합병증으로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었다. 1936년에는 의사가 24시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으며, 1944년에는 상태가 위독하여 산소 텐트 신세를 지기도 했다.[64][65] 그럼에도 건강을 회복하여 1946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마이너 리그 스카우트로 활동했다.[66] 1946년, 그는 조니 에버스, 프랭크 찬스와 함께 "팅커에서 에버스로 그리고 찬스로"라는 유명한 병살 플레이 조합으로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하지만 당뇨병 관련 감염으로 1947년 발가락을 절단했고, 결국 무릎 위 왼쪽 다리 전체를 절단해야 했다.[67][68]
조 팅커는 1948년 7월 27일, 자신의 68번째 생일에 당뇨병 합병증으로 올랜도의 오렌지 메모리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69][70] 그는 그린우드 묘지에 안장되었으며,[71] 네 명의 자녀를 남겼다.[70]
4. 명예의 전당
과거 캠핑 월드 스타디움(옛 시트러스 볼) 인근에 위치했던 팅커 필드와 올랜도에 있는 그의 사무실이었던 팅커 빌딩은 국립 사적지로 등재되어 있다.[10] 2009년에는 플로리다 주 리그 명예의 전당이 처음 설립될 때, 최초 헌액자 중 한 명으로 사후에 이름을 올렸다.[74]
5. 유산
팅커는 아마도 1910년 뉴욕 이브닝 메일(New York Evening Mail)의 칼럼니스트 프랭클린 피어스 아담스(Franklin Pierce Adams)가 쓴 시 '야구의 슬픈 어휘'에 등장하는 '팅커 투 에버스 투 챈스' 더블 플레이 조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는 뉴욕 자이언츠 팬의 관점에서 시카고 컵스에게 계속 패배하는 팀에 대한 애환을 담은 시이다.[63] 이 유명세에 힘입어 팅커는 조니 에버스, 프랭크 챈스와 함께 194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72]
선수 시절 팅커는 1902년부터 1912년까지 시카고 컵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빠른 발(시즌 평균 28도루, 1910년 한 경기 홈스틸 2회)[43]과 뛰어난 수비(수비율 포함 여러 부문 리그 선두 4회)로 명성을 얻었다. 컵스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에 4번 진출하여 1907년과 1908년 우승에 기여했다. 통산 타율은 0.268로 평범했지만, 명예의 전당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을 상대로는 통산 0.350의 타율을 기록하며 강한 면모를 보였다.[69] 매튜슨은 팅커를 "내셔널 리그에서 내가 상대해야 할 최악의 선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
선수 은퇴 후 팅커는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정착하여 지역 사회에 기여했다. 그는 플로리다 주 리그의 올랜도 타이거스 구단주 겸 감독을 맡아[1] 팀을 '팅커 타이거스'[61]로 알렸으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2] 또한 레즈 구단주 개리 헤르만을 설득하여 1923년 올랜도에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를 유치했다.[69] 1920년대 플로리다 토지 투기 시기에는 성공적인 부동산 사업가로 활동했고[54] 플로리다주 오렌지 카운티와 세미놀 카운티에서 부동산을 개발했다.[61] 이때 매입한 롱우드 호텔은 현재 국립 사적지로 등재되어 있다.[2] 대공황으로 재산을 잃었으나, 이후에도 올랜도에서 당구장과 술집을 운영했으며[69] 여러 팀에서 코치, 감독, 스카우트 등으로 야구계 활동을 이어갔다.
오랜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에버스와는 불화 후 오랫동안 말을 섞지 않았으나, 1938년 월드 시리즈 라디오 방송[10][62] 또는 1929년 연극 공연[63]을 계기로 화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말년에는 당뇨병과 브라이트병의 합병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64][65]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1947년에는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67][68] 1948년 7월 27일, 자신의 68번째 생일에 올랜도의 오렌지 메모리얼 병원에서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고[69][70] 그린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71]
올랜도 지역 사회는 1947년 그를 기리는 만찬을 열었고,[73] 그의 이름을 딴 팅커 필드(과거 캠핑 월드 스타디움 인근 경기장)와 팅커 빌딩(사무실)은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10] 팅커는 2009년 플로리다 주 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사후 헌액되었다.[74]
6. 플레이 스타일
시카고 컵스의 주전 유격수로서 1902년부터 1912년까지 활약했다.[43] 그는 조니 에버스, 프랭크 찬스와 함께 "팅커 투 에버스 투 챈스"라는 유명한 병살 조합의 일원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프랭클린 피어스 아담스의 시 "야구의 슬픈 어휘"를 통해 대중에게 각인되었다.[63]
수비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902년 신인 시절에는 72개의 실책으로 내셔널 리그 유격수 중 가장 많은 실책을 기록하기도 했지만,[1] 이후 수비력을 향상시켜 1906년에는 0.944의 수비율로 리그 1위를 차지하는 등[1] 총 4번이나 수비율 부문 리그 선두에 올랐다.[43] 또한 어시스트(1908년 570개, 1911년 486개)[7][13]와 풋아웃(1911년 333개, 1912년 354개)[13][18] 부문에서도 여러 차례 리그 1위를 기록했다. 1914년 리글리 필드를 방문했던 일본 메이지 대학 야구부의 나카자와 후지오는 팅커의 송구에 대해 "뒤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크게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공이 휘면서 1루수 미트에 정확히 들어갔다"고 묘사하며 그의 천부적인 송구 능력을 언급했다.[75]
타격 면에서는 통산 타율 0.268로 당대 기준으로 평균적인 수준이었으나,[69] 명예의 전당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을 상대로는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 통산 0.350의 타율을 기록했다.[69] 매튜슨은 팅커가 스크류볼(당시 '페이드 어웨이')을 치는 데 능숙했다고 언급하며,[75] 자신의 저서에서 팅커를 "내셔널 리그에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타자"라고 평했다.[1] 1908년에는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매튜슨을 상대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했으며,[1] 같은 해 월드 시리즈에서는 빌 도노반을 상대로 1905년 규칙 합의 이후 월드 시리즈 역사상 첫 홈런을 치기도 했다.[9] 1912년에는 타율 0.282, 80득점, 75타점으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1]
주루 능력도 뛰어나 빠른 발을 가졌으며, 시즌 평균 28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특히 1910년 7월 28일 경기에서는 한 경기에서 홈스틸을 두 번이나 성공시키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43]
한편, 팅커는 다혈질적인 성격으로도 알려져 동료 에버스를 포함해 상대 선수, 팬과도 물리적 충돌을 빚는 등[63][45][46] 싸움꾼으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팬과의 폭행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46][47]
7. 기타
아내의 건강 악화로 1920년 시즌 후 콜럼버스 팀 지분을 매각하고 플로리다주 올랜도로 이주했다.[50] 그곳에서 플로리다 주 리그의 올랜도 타이거스 소유주 겸 감독이 되었고,[1] 팀은 "팅커 타이거스"[61]로 불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 동시에 레즈의 스카우트로도 활동했다.[50]
팅커는 야구계를 떠나 1920년대 플로리다 토지 투기 시기에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었다.[54] 플로리다주 오렌지 카운티와 플로리다주 세미놀 카운티에서 토지를 거래했으며,[61] 1926년에는 현재 국립 사적지로 등재된 롱우드 호텔을 매입했다.[2] 또한 레즈 구단주 개리 헤르만을 설득해 1923년부터 올랜도의 구장을 스프링 트레이닝 장소로 사용하게 했다.[69] 부동산 사업으로 최대 25만달러를 벌었으나,[64] 1926년 주식 시장 하락과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의 피해로 재산을 잃기 시작했다.[61] 대공황 시기에는 대부분의 부동산 자산을 처분해야 했고, 당구장과 금주법 폐지 후 올랜도 최초의 술집 중 하나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69]
대공황 이후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다. 1929년에는 1929년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컵스를 위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타자들을 분석하는 스카우트 역할을 했다.[55] 이후 여러 마이너 리그 팀에서 코치와 감독을 맡았다.
'''감독 및 코치 경력'''연도 팀 리그 직책 1916–1918 콜럼버스 세네터스 아메리칸 협회 감독 1921 올랜도 타이거스 플로리다 주 리그 감독 1930 버팔로 바이슨스 인터내셔널 리그 코치 1930 저지 시티 스키터스 인터내셔널 리그 감독 1937 올랜도 갈스 플로리다 주 리그 감독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올랜도 공군 기지에서 보일러 검사관으로 일했다.[61] 1946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마이너 리그 스카우트로 잠시 활동했다.[66]
팅커와 에버스가 오랜 불화 끝에 1938년 월드 시리즈 라디오 방송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10][62] 실제로는 1929년에 이미 함께 야구 관련 연극 스킷을 공연하며 미국 순회공연을 한 바 있다.[63]
팅커는 세 번 결혼했다. 첫 아내는 1923년 크리스마스에 신경쇠약 증세 중 권총으로 자살했다.[51]
'''결혼'''
말년에는 당뇨병과 브라이트병 합병증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1936년과 1944년에는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64][65] 1947년에는 당뇨병 관련 감염으로 발가락과 왼쪽 다리를 무릎 위까지 절단해야 했다.[67][68] 1948년 7월 27일, 자신의 68번째 생일에 올랜도의 오렌지 메모리얼 병원에서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69][70] 그린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71] 유족으로는 네 자녀가 있었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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