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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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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프럼은 1930년대 후반 바누아투에서 시작된 종교로, 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주둔과 함께 인기를 얻었다. 이 종교는 백인 식민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며, 존 프럼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서양식 물품을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존 프럼 운동은 미군이 남긴 물품을 얻기 위한 상징적인 활주로 건설, "탄나 군대" 창설 등의 활동을 보였으며, 바누아투의 독립에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도 나타냈다. 현재도 2월 15일 "존 프럼 데이"를 기념하며, 존 프럼 운동은 바누아투의 문화와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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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롬
존 프럼
페루의 고대 인물 형상 2개
페루의 고대 인물 형상 2개
인물 정보
이름 (영어)John Frum, John From, Jon Frum
설명존 프럼은 "당신처럼 생겼어요. 얼굴은 하얗고, 키가 큰 남자이며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다"고 묘사됨.

2. 역사

존 프럼 운동은 바누아투가 뉴헤브리디스로 알려졌던 1930년대 후반, 탄나 섬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투코스메라 산과 관련된 신인 케라페라문 숭배 등 기존 종교 관습의 영향을 받았다.[6] "존 프럼"이라는 인물은 백인 식민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섬에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여겨졌다.[7]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미군이 뉴헤브리디스에 주둔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자를 가져오자 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14] 1941년, 추종자들은 돈을 없애고 전통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주했다.[10] 식민 당국은 이를 탄압했으나,[11][12][13] 바누아투 노동대에 복무한 니바누아투 남성들을 통해 운동은 더욱 퍼져나갔다.

전후 존 프럼 추종자들은 상징적인 활주로를 건설하며 미군 비행기의 귀환을 기다렸다. 1957년, 지도자 나코마하는 "탄나 군대"를 창설하여 매년 2월 15일("존 프럼 데이")에 군대 스타일의 퍼레이드를 열었다.

1970년대 후반, 존 프럼 추종자들은 바누아투 독립에 반대하며 중앙 정부와 대립했다. 이들은 나그리멜이라는 자체 정당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존 프럼 신앙의 핵심은 탄나 섬의 자치와 외부와의 직접 교류 요구였으며, 영불 공동 통치령에 대한 반발로 전통 방식(카스텀)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다.[20]

태평양 전쟁 중 탄나 섬 주민들은 미군 노동대에 참여하며 이전과는 다른 외국인과의 관계를 경험했다. 이들에게 부유함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닌, 미국과의 직접 교류와 노동의 대가였다.[25] 종전 후 미군이 남긴 물자는 많지 않았지만, 이들의 기억은 존 프럼 신앙과 연결되어 반식민지 운동으로 이어졌다.

1956년, 식민 당국은 존 프럼 신앙을 종교로 인정했다. 1957년, 나코마하는 미군 훈련을 재현하는 '타나 육군'을 조직했다.[20] 1973년, 앙투안 포르넬리는 존 프럼 운동 간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 세력을 키웠다. 1999년에는 존 프럼과 기독교를 연결한 '지저스 존' 개념을 주장하는 예언자 프레드의 등장으로 신앙 내 분열이 일어났다.

존 프럼 운동은 현재도 바누아투 탄나 섬 라마카라 마을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다.[24]

존 프럼 화물 숭배 의식용 십자가 (1967년, 탄나 섬)


존 프럼 화물 숭배 의식용 깃발 게양


존 프럼 광장. 기념 행사가 열리는 곳.

2. 1. 기원

존 프럼 종교는 바누아투가 뉴헤브리디스로 알려졌던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1949년의 주장에 따르면 이 종교는 1910년대 초에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5] 이 운동은 탄나 섬의 설퍼 베이 지역에서 기존의 종교적 관습, 특히 투코스메라 산과 관련된 신인 케라페라문 숭배에 영향을 받았다.[6]

이 컬트에 대한 한 분석에 따르면, 이 인물은 처음에는 존 브룸으로 알려졌는데, 추종자들은 그가 언젠가 멀리 떨어진 땅에서 돌아와 백인 식민지배자들을 쓸어내고 섬에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7] 어떤 이야기에서는 "존 프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토착민인 마네히비가 서양식 코트를 입고 탄나의 토착민들 사이에 나타나 그들에게 집, 옷, 음식, 교통수단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5][8]

다른 사람들은 존 프럼이 약한 정신 활성 물질을 가진 식물인 카바에 의해 유발된 영적 환영이라고 주장한다.[9] 케라페라문의 화신이라고 하는 이 존 프럼은 선교사를 포함한 모든 백인이 뉴헤브리디스를 떠나 그들의 상품과 재산을 토착 멜라네시아인들에게 남겨두는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탄나 사람들이 , 서양 교육, 기독교코프라 농장에서의 노동을 포함한 유럽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카스톰''(관습을 의미하는 비슬라마어 단어)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1년, 존 프럼 추종자들은 돈을 쓰는 열풍으로 돈을 없애고 선교 교회, 학교, 마을, 농장을 떠나 전통적인 축제, 춤,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주했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장로교 교회에서 왔다.[10] 유럽 식민 당국은 이 운동을 진압하려고 노력하여, 한때 스스로를 존 프럼이라고 부르는 탄나 사람을 체포하여 공개적으로 굴욕을 주고, 감옥에 가두고, 결국 컬트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군도의 다른 섬으로 추방했다.[11][12][13]

존 프럼이라는 이름을 처음 기록한 것은 영국의 식민지 행정 당국자 제임스 니콜(James Nicol)이 안식일 재림파 교회의 염소가 잇따라 사라지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기록한 1940년 11월 보고서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원본을 포함한 초기 존 프럼 신앙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유실되었고, 현재의 연구와 논의는 외국인이 후년에 집필한 문헌에 기초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신앙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20]

존 프럼 신앙의 핵심은 탄나 섬의 자치와 외부와의 직접적인 교류에 대한 요구이다. 영불 공동 통치령 시대에 행해진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신앙의 부정에 대한 반발을 배경으로, 그들이 정한 규범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 즉 카스텀(Kastom, 비슬라마어로 "관습"의 의미)으로 회귀함으로써 존 프럼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여겨진다.[20]

「뉴헤브리디스, 타나 섬 상륙」(1775년 - 1776년). 쿡 선장의 원정에 동행한 박물학자 윌리엄 호지스의 작품.


선교사 존 윌리엄스의 상륙 (1841년). 1839년에 행해진 상륙의 모습을 그린 것.


타나 섬과 유럽인의 접촉은 제임스 쿡 선장이 상륙한 177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포경업자와 백단 거래업자가 뒤를 이었다. 1840년부터 1865년에는 타나 섬 주민들이 백단 무역선에 선원으로서 승선하여 담배, 도구, 칼, 낚시 바늘, 기타 유럽의 물품을 얻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시도된 선교사에 의한 접촉은 실패했다. 1865년경 백단이 고갈된 후에는 노동 무역이 이루어졌지만, 1875년에는 면화 가격 하락과 섬 주민들의 반발로 플랜테이션이 폐쇄되었다.[22]

19세기 후반, 선교사가 타나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섬 주민들에게 유럽식 생활과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습관을 모두 버리도록 강요했다. 이는 예를 들어, 춤이나 카바, 의식, 마을의 통치 방법, 결혼, 아이의 양육 등이다. 선교사는 커스텀을 부정하는 것의 일환으로, 전통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석비를 파괴하기도 했다.[20]

존 프럼 신앙은 솔퍼 만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토착 종교, 특히 타나 섬 최고봉인 투코스메라 산의 신 중 한 명인 카라페라문(Keraperamun)의 영향이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23] 일반적으로 존 프럼 신앙의 기원은 1930년대 후반(당시 바누아투는 뉴헤브리디스로 알려져 있었다)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1910년대에 일부 촌장들이 맺은 커스텀으로의 회귀와 선교사의 배척을 위한 합의에 기원을 둔다는 주장도 있다.[26] 선교사의 상륙 이후, 장로교회나 식민지 행정 당국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은 뿌리 깊어, 1920년대부터 1930년대의 타나 섬에서는, 장로교회의 쇠퇴나 커스텀으로의 회귀를 알리는 존재를 소재로 한 노래가 유행했다.[22]

존 프롬의 "신화"는 세부 사항이 다르고 서로 모순되는 형태로 다양하게 이야기되지만, 1939년에 그린 포인트에 나타난 백인이 "존 프롬 아메리카"(John from America, "미국에서 온 존")라고 자칭한 것이, 이른바 존 프럼 신앙의 시작이라고 한다. 존은 외모는 인간과 같았지만, 타나의 말을 능숙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장소에 자유자재로 나타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정령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존은 사람들에게 선교사의 말을 잊고, 커스텀으로 돌아갈 것을 설교하고, 더 나아가 섬의 촌장들에게 그린 포인트에 모일 것을 요청했다. 이 회담에서, 존은 촌장들에게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었다. 한편, 아이작 완의 아들, 아이작 주니어가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프롬이라는 이름은 브룸(Broom, 빗자루)에서 유래하며, 그는 "더러움", 즉 선교사나 유럽인이 정한 규범을 일소하는 존재라고 한다.[20] 식민지 행정 당국자인 알렉산더 렌톨(Alexander Rentoul)도, 1949년에는 아이작 주니어와 같은 견해를 밝혔다.[24]

1939년에 나타난 존 프롬의 정체는 전혀 불분명하지만, 정정 불안을 초래하려는 일본군의 스파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식민지 행정 당국도 당시 조사를 실시했다. 최종적으로는 섬 주민 중 누군가가 사기를 목적으로 자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이후 다수의 용의자를 체포 및 처벌했다.[25] 일설에는, 마네히비(Manehivi)라는 이름의 섬 주민이, 1939년의 존 프롬의 정체이며, 서구식 코트를 입고 나타난 그는 현지인들에게 주거, 의류, 식량 등의 약속을 했다고도 한다.[26][27] 혹은, 그 원형은 카바의 잎이 만들어낸 환각이라는 설도 있다.[28]

당시의 조사에 따르면, 당초 1939년의 존 프롬은 전통적인 춤이나 카바를 마시는 것을 권장하고, 협력하여 일하는 것을 칭찬하며, 게으름을 비난하고, 집단 행동에 관한 조언을 하는 정도였지만, 마침내 선교사의 배척 등의 과격한 주장을 더한 다음, 자신은 카라페라문의 화신이며, 이제 이름을 존 프롬으로 고쳤다고 주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백인의 배척 후에 존 프롬에 의한 새로운 물질 문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고, 섬 주민이 가진 백인들의 화폐를 모두 버리거나 백인들에게 돌려줌으로써, 백인들이 섬에 머무는 목적을 소멸시켜야 한다고 했다.[26]

존 프롬의 정체가 누구이든, 일련의 주장은 민족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촌장들을 비롯하여, 매일의 종교적 봉사에 반발하고 성적인 자유를 원하는 여성에게도 지지받았다. 마네히비의 체포 후에도, 진짜 존 프롬은 아직 자유의 몸이다, 존 프롬의 아들이 왕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투코스메라 산은 존 프롬에게 지휘받는 보이지 않는 비행기로 지켜지고 있다 등, 다양한 소문이 "신화"에 덧붙여졌다.[26]

이 신앙이 식민지 행정 당국에게 심각한 우려가 된 것은, 1941년의 일이다. 존 프롬 신자들은 통화, 선교사 및 교회, 학교, 마을, 농장 등을 버리고, 전통적인 제사나 춤 등에 참가하기 위해 내륙부로 이동해 갔다. 식민지 행정 당국에서는 이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해, 존 프롬을 자칭하는 현지인 및 신앙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공공연한 모욕, 투옥, 추방 등의 처분을 했다.[29][30][31]

보고된 바에 따르면, 1941년 4월 16일에 존 프롬 신자들의 운동은 갑작스럽게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날, 섬 주민들은 현금 저축을 다 써버리려고 가게에 몰려들었고, 백인에게 고용된 섬 주민들은 일제히 퇴직했다. 단 하루 만에 1,000 파운드가 가게에서 사용되었다. 5월 11일, 장로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섬 주민은 섬 전체에서 8명뿐이었다. 6월 21일,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니콜은 경찰 부대의 증파를 요청했고, 존 프롬 신앙의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북부를 중심으로 퍼져 있던 존 프롬 신앙은, 머지않아 동부의 이페우켈(Ipeukel)로 파급되었다. 이페우켈은 동부에서 가장 큰 기독교도의 마을로, 이전에는 전도의 거점이기도 했다. 여기서 이야기된 "신화"에서는, 존 프롬이 투코스메라 산에 나타난 카라페라문의 화신이라고 여겨지는 동시에,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이페우켈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1939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4109명(섬 주민의 71.3%)이 기독교도였다. 그러나 1941년 6월이 되자, 기독교도는 100명 미만이었다.

존 프롬은, 타나 섬의 사람들이 영불 식민지 당국과 싸울 때, 미국인이 돕기 위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국은 1941년에 이러한 내용을 포함한 편지를 확인했지만, 진주만 공격에 의해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것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였다.[25]

2. 2. 1940년대의 확산과 탄압



존 프럼을 중심으로 한 종교는 바누아투가 뉴헤브리디스로 알려졌던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1949년의 주장에 따르면 이 종교는 1910년대 초에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5] 이 운동은 탄나 섬의 설퍼 베이 지역에서 기존의 종교적 관습, 특히 투코스메라 산과 관련된 신인 케라페라문 숭배에 영향을 받았다.[6]

이 컬트에 대한 한 분석에 따르면, 이 인물은 처음에는 존 브룸으로 알려졌는데, 추종자들은 그가 언젠가 멀리 떨어진 땅에서 돌아와 백인 식민지배자들을 쓸어내고 섬에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7] 어떤 이야기에서는 "존 프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토착민인 마네히비가 서양식 코트를 입고 탄나의 토착민들 사이에 나타나 그들에게 집, 옷, 음식, 교통수단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5][8]

다른 사람들은 존 프럼이 약한 정신 활성 물질을 가진 식물인 카바에 의해 유발된 영적 환영이라고 주장한다.[9] 케라페라문의 화신이라고 하는 이 존 프럼은 선교사를 포함한 모든 백인이 뉴헤브리디스를 떠나 그들의 상품과 재산을 토착 멜라네시아인들에게 남겨두는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탄나 사람들이 , 서양 교육, 기독교코프라 농장에서의 노동을 포함한 유럽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카스톰''(관습을 의미하는 비슬라마어 단어)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1년, 존 프럼 추종자들은 돈을 쓰는 열풍으로 돈을 없애고 선교 교회, 학교, 마을, 농장을 떠나 전통적인 축제, 춤,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주했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장로교 교회에서 왔다.[10] 유럽 식민 당국은 이 운동을 진압하려고 노력하여, 한때 스스로를 존 프럼이라고 부르는 탄나 사람을 체포하여 공개적으로 굴욕을 주고, 감옥에 가두고, 결국 컬트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군도의 다른 섬으로 추방했다.[11][12][13]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5만 명의 미군이 뉴헤브리디스에 주둔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자(또는 "화물")를 가져오면서 1940년대 초에 인기를 얻었다.[14] 전쟁 중 약 10,000명의 니바누아투 남성이 미국 군대의 노동대인 바누아투 노동대에서 복무했다. 그들은 과달카날 전역 동안 연합국의 군사적 노력을 위한 군수 지원을 제공했다. 니바누아투 남성들이 노동대에 대거 참여한 것은 존 프럼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화물 숭배의 특징을 부여했다.

1943년 8월, 섬 북부에 위치한 그린힐의 이통가 마을(Itonga)에 살고 있던 네로이아그(Nelawiyang)라는 남자가 꿈에서 존 프럼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존 프럼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개인적인 동맹을 맺고 있으며 북부 신자들을 모두 모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네로이아그는 독자적으로 '경찰대'를 조직하고, 미군 비행기를 수용하기 위한 활주로 건설에 착수했다. 그들은 낮에는 활주로 건설 작업을 하고, 해가 지면 카바를 마시며 춤을 추며 존 프럼을 칭송했다. 니콜은 즉시 순찰대를 파견했지만, '경찰대'의 저항으로 어쩔 수 없이 철수시켰다. 이것은 멜라네시아인이 식민지 행정 당국의 권한에 대한 명확한 저항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니콜의 보고에 따르면 '경찰대' 구성원은 250명 정도였으며, 당시 탄나 섬의 인구가 6,000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10월 16일, 네로이아그는 니콜과의 회담을 위해 이산겔로 향했고, 이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다음 날부터 네로이아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존 프럼 신자들이 속속 이산겔에 모이기 시작했고, 10월 18일에는 '경찰대'도 도착했다. 이때 '경찰대'는 곤봉 외에도 수 정의 총화기도 보유하고 있었다. 네로이아그 본인의 설득으로 '경찰대'와 치안 부대의 충돌은 피했지만,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니콜은 조속히 증원을 보내도록 당국에 요청했다. 10월 20일, 증원과 함께 두 명의 미국인 장교가 탄나 섬에 도착했다. 이 장교들의 임무는 존 프럼의 신화가 환상에 불과하며, 영국인은 미국인의 친구임을 '진짜 미국인'으로부터 섬 주민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에도 몇 차례 반복되었지만, 신앙의 규모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증원을 받은 치안 부대는 그린힐로 향했고, 기관총의 위협 사격을 가해 네로이아그 지지자들을 제압했다. 네로이아그를 포함한 체포자들은 모두 포트 빌라에 수감되었다.

당시 행정 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섬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좁은 독방에 많은 사람들이 갇히고, 하루에 두 번 물고문을 하는 등 당국의 죄수 처우는 극도로 비인도적이었다고 한다. 이 기억은 '신화'와 함께 이후에도 전해져 존 프럼 신앙의 반권위적인 성격을 강조하게 된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네로이아그는 다시는 탄나 섬의 땅을 밟을 수 없었다. 영국 측 보고에 따르면, 그는 수감 중에 정신 이상을 일으켜 탈옥하여 에파테 섬 내륙에 잠복하여 3년간 고독하게 지냈다. 그리고 당국에 자수 후 누메아 정신 병원에 보내졌다고 한다.

사건 후, 니콜은 "의심의 여지 없이, 존 프럼 운동은 단지 한 명의 남자나 한 개의 작은 부족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섬 전체의 믿음에 의해 지지되고 영감을 받았다"라는 보고를 했다. 이것은 니콜이 탄나 섬에서 한 마지막 보고였다. 이 보고 직후, 그는 사고로 사망했다.

1944년 니콜의 사망으로 존 프럼 운동의 '창성기'가 끝났다고도 한다. 탄나 섬의 당국 대표를 오랫동안 역임하며 섬 주민들에게 식민지 행정 당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니콜은 이미 존 프럼의 숙적으로서 '신화'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의 후임으로는 영국인과 프랑스인 대표가 한 명씩 파견되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처음으로 탄나 섬에서 정치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니콜의 마지막 보고는 자신이 주도한 폭력적인 탄압 정책이 효과가 없었음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두 대표는 이를 따랐고, 이후에도 존 프럼 운동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다.

1945년 이후, 니콜 통치기에 체포된 존 프럼 운동 관계자들의 형기가 끝나고 조금씩 석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출소에 즈음하여 당국에 대한 충성 선언에 서명했지만,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신앙에 따른 파멸적인 예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지도자의 귀환은 존 프럼 운동을 다시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미군의 영향



제2차 세계 대전미군이 뉴헤브리디스에 주둔하면서 가져온 엄청난 양의 물자("화물")는 1940년대 초 존 프럼 운동이 인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14] 전쟁 기간 동안 약 10,000명의 니바누아투 남성이 미군 노동대인 바누아투 노동대에서 복무하며 과달카날 전역에서 연합군을 지원했다. 이들의 노동대 참여는 존 프럼 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 화물 숭배의 특징을 부여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철수하자, 존 프럼 추종자들은 미군 비행기의 착륙과 "화물" 반입을 유도하기 위해 상징적인 활주로를 건설했다. 이들은 "존 프럼"을 "존 (미국에서 온)"으로 해석하며 미국과의 연관성을 강조했다(바누아투 출신이 아닌 경우 "존 출신"을 의미할 수도 있음).

에스피리투산토 섬 미 해군 기지 정문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군은 뉴헤브리디스에 약 30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고, 주민들은 이들의 물질적 풍요를 목격했다. 엉클 샘, 산타클로스, 세례자 요한 등도 존 프럼의 이미지에 통합되었다.[32] 미군의 남태평양 진주는 1942년 초 개전 직후 결정되었으며, 목적은 일본군의 남진 저지와 오스트레일리아 항로 확보였다. 1943년까지 일본군 공격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뉴헤브리디스 기지들은 후방 지원 기지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잦은 인력 및 군수 물자 출입은 바누아투 사람들에게 전투보다 더 강렬한 전쟁 기억으로 각인되었다.[25]

1941년 개전 직전 뉴헤브리디스 인구는 약 4만 명으로, 도로, 전화, 수도 시설이 미비했고 비행장도 없었다. 주민 대다수는 자급 농업에 종사했고, 플랜테이션 노동이나 코코넛 재배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군 진주 후 수개월 만에 해군 건설 공병대(시비)와 육군 건설 공병대는 비행장, 항만, 급수 시설, 병영, 창고, 영화관, 도로, 식당, 클럽, 술집 등 기지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건설했다. 미군은 현지인과의 과도한 접촉을 금지했지만, 뉴헤브리디스에서는 이 규칙이 거의 무시되어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졌다.[25]

제임스 니콜은 미군 진주 초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42년, 미군은 현지인 노동자로 Vanuatu Labor Corps영어를 조직했다. 영불 공동 통치 특성상 미군은 직접 고용 방식을 취했다. 존 프럼의 예언 덕분에 탄나 섬 주민들은 자원했으며, 1942년 말까지 섬 내 노동 가능 남성 대부분(약 1,000명)이 에파테 섬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군 잉여 제복, 식량, 담배, 물품, 급여를 제공받았다. 미군 기술, 차량, 병기, 대량 물자를 목격하고, 효율적인 미국식 노동에 감명을 받았다. 공습, 잠수함 경보, 사고, 질병, 부상병 후송은 노동을 위험하게 인식시켰다. 흑인 부대인 제24보병연대와의 협업에서, 현지인들은 흑인 병사들이 물자 관리의 중요 직책을 맡는다고 여겼다.[25] 흑인 병사들의 평등한 대우는 카스텀에 부합했고, 선교사들과의 차이를 부각했다.[24] 포트 빌라 수감 존 프럼 신자들의 석방도 미군에 대한 호감 요인이었다.[22]

미군과의 만남은 탄나 섬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영국과 프랑스인은 사치 금지령으로 섬 주민과의 경계를 유지하며 식민 통치를 시도했으나, 미군은 이러한 경계에 관심이 적었고, 현지인과 식사, 물품 공유, 사진 촬영 등을 했다. 이러한 "우정"은 일방적이거나 억압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영국 및 프랑스인과는 확연히 달랐다.[25]

2. 4. 전후의 발전과 정치 참여



존 프럼을 중심으로 한 종교는 바누아투가 뉴헤브리디스로 알려졌던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탄나 섬의 설퍼 베이 지역에서 기존의 종교적 관습, 특히 투코스메라 산과 관련된 신인 케라페라문 숭배에 영향을 받았다.[6]

이 컬트에 대한 한 분석에 따르면, 이 인물은 처음에는 존 브룸으로 알려졌는데, 추종자들은 그가 언젠가 멀리 떨어진 땅에서 돌아와 백인 식민지배자들을 쓸어내고 섬에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7] 어떤 이야기에서는 "존 프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토착민인 마네히비가 서양식 코트를 입고 탄나의 토착민들 사이에 나타나 그들에게 집, 옷, 음식, 교통수단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5][8]

1941년, 존 프럼 추종자들은 돈을 쓰는 열풍으로 돈을 없애고 선교 교회, 학교, 마을, 농장을 떠나 전통적인 축제, 춤,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주했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장로교 교회에서 왔다.[10] 유럽 식민 당국은 이 운동을 진압하려고 노력하여, 한때 스스로를 존 프럼이라고 부르는 탄나 사람을 체포하여 공개적으로 굴욕을 주고, 감옥에 가두고, 결국 컬트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군도의 다른 섬으로 추방했다.[11][12][13]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5만 명의 미군이 뉴헤브리디스에 주둔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자(또는 "화물")를 가져오면서 1940년대 초에 인기를 얻었다.[14] 전쟁 중 약 10,000명의 니바누아투 남성이 미국 군대의 노동대인 Vanuatu Labor Corps|바누아투 노무 부대영어에서 복무했다. 니바누아투 남성들이 노동대에 대거 참여한 것은 존 프럼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화물 숭배의 특징을 부여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인들이 떠난 후, 존 프럼의 추종자들은 미국 비행기가 착륙하여 "화물"을 가져오도록 장려하기 위해 상징적인 활주로를 건설했다.

1957년, 존 프럼 운동의 지도자 나코마하는 "탄나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 군대는 의식적인 색상으로 얼굴을 칠하고 "T-A USA"(탄나 군대 USA)라는 글자가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군대 스타일의 퍼레이드를 조직하는 비폭력 의식적 사회였다. 이 퍼레이드는 매년 2월 15일에 열리는데, 추종자들은 존 프럼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날이며, 바누아투에서는 "존 프럼 데이"로 기념된다.

1970년대 후반, 존 프럼 추종자들은 바누아투의 독립된 통일 국가 수립에 반대했다. 그들은 서양 현대성과 기독교를 선호하여 지역 관습에 해로울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중앙 정부에 반대했다. 존 프럼 운동은 송 키스파이가 이끄는 자체 정당인 나그리멜을 가지고 있다.

존 프럼 신앙의 핵심은 탄나 섬의 자치와 외부와의 직접적인 교류에 대한 요구이다. 영불 공동 통치령 시대에 행해진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신앙의 부정에 대한 반발을 배경으로, 그들이 정한 규범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 즉 카스텀(Kastom, 비슬라마어로 "관습"의 의미)으로 회귀함으로써 존 프럼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여겨진다.[20]

태평양 전쟁 중 많은 탄나 섬 주민들이 미국군의 보조 부대인 바누아투 노무 부대에 지원하여 비행장 건설 등에 참여했다. 탄나 섬 사람들과 미국군의 전시 중 관계는 식민지 행정 당국에 의해 중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외국인과의 관계와는 크게 달랐다. 탄나 섬 주민들에게 부유함은 단순히 기다린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인 교류의 결과이자, 노무 부대를 통한 기여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전후 존 프럼의 이미지에 미국군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은 이러한 전시 중의 기억에 기초한 부분이 크다.[25]

종전 후 철수하는 미군이 남긴 것은 반드시 많지 않았다. 비행장이나 도로, 몇몇 병영과 차량 등은 그대로 남겨졌지만, 재고로 남아 있던 물품 중 필요 없다고 여겨진 것은 모두 바다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기억과 존 프럼 신앙은 에파테 섬에서 돌아온 노무부대 전 대원들에 의해 명확히 연결되어,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반식민지 운동 조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코프라의 재배 및 판매 보이콧 등이 이루어졌고, 섬 북부에서는 미군을 다시 맞이하기 위한 비행장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식민지 행정 당국은 1956년경까지 탄압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존 프럼 신앙은 점차 조직화되어 관련 정당과 교회 등도 파생되었다.[25]

1956년 10월, 식민지 행정 당국은 활동을 합법적인 범위 내에 한정하는 한에서 존 프럼 신앙을 종교로 인정했다.

1957년, 당시 존 프럼 신앙의 지도자 나코마하(Nakomaha)는 타나 육군(Tanna Army)이라는 조직을 설립했다. 이는 진짜 군사 조직이 아니라, 의식의 일환으로 미군의 행진과 훈련 등을 재현하는 조직이다. 타나 육군에서는 한때 상반신을 노출하고 몸에 USA라는 글자를 쓴 모습으로 행진을 했지만, 나중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인물로부터 기증받은 군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행진 시 그들은 끝이 빨갛게 칠해진 죽창(착검한 소총을 나타냄)을 든다.[20]

1970년대 후반, 존 프럼 신자들은 통일 국가인 바누아투 공화국의 독립에 반대했다. 그들은 통일 정부가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기독교 신앙을 지지함으로써 오래된 관습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다.

1973년, 전 프랑스 군인이자 에파테 섬의 농장주였던 앙투안 포르넬리는 장로교회로부터 지지받은 친영파 국민당에 대항하는 합법적이고 온건한 정당을 조직하려 생각하고 타나 섬으로 건너갔다. 이윽고 포르넬리 그룹은 교류를 맺었던 존 프럼 운동 간부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세력을 키웠다.

1978년에는 의식에서 처음으로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1982년에는 성조기를 포함한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의 대부분이 공화국 정부에 몰수되었지만, 후에 다시 게양되었다.[25]

1999년, 존 프럼 신앙의 분열이 일어났다. 존 프럼 운동의 간부였던 예언자 프레드(Fred)가, 존 프럼과 기독교를 연결한 지저스 존(Jesus-John)의 개념을 제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 5. 최근의 동향

존 프럼 운동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으며, 바누아투의 탄나 섬에 있는 라마카라 마을이 신앙의 중심지이다.[24] 매년 2월 15일은 '존 프럼의 날'로 기념되며, 신자들은 존 프럼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이날에 퍼레이드 등 다양한 의식을 거행한다.[20] 이 날은 1957년 2월 15일에 마지막으로 구속되었던 신자가 풀려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21]

존 프럼 신앙은 종종 '카고 컬트'의 전형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탄나 섬의 자치와 외부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요구하는 민족주의적, 반식민지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20] 바누아투 문화 센터의 장-파스칼 와헤는 존 프럼이 단순한 '카고' 숭배가 아니라, 탄나 섬 주민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20]

1970년대 후반, 존 프럼 추종자들은 중앙 정부에 반대하며 바누아투의 독립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구의 현대성과 기독교가 지역 관습에 해로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존 프럼 운동은 자체 정당인 나그리멜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정당은 송 키스파이가 이끌었다.[15]

2007년 2월 15일, 존 프럼 운동은 창당 50주년을 기념했다. 지도자인 이삭 완 니키아프 추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존 프럼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예수"이며 결국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15]

2011년에는 딩 반 탄 사업가의 여동생인 베트남계 여성 티탐 고이세트가 존 프럼 운동(및 나그리멜)의 회장을 맡아 이례적인 사례로 주목받았다. 이전까지 운동의 지도부는 주로 남성 추장들이 맡아왔기 때문이다.[16] 그러나 2013년, 티탐 고이세트는 부패 혐의로 러시아 주재 바누아투 대사 직에서 해임되었다.[17][18]

2006년, 존 프럼 신앙을 취재한 폴 라파엘레는 라마카라의 촌장이자 신앙 지도자인 아이작 완에게 오랫동안 '카고'가 오지 않았음에도 왜 존 프럼을 믿는지 질문했다. 아이작 완은 "당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2000년 동안 기다리고 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잖아요"라고 답했다.[24]

3. 신앙과 의례

존 프럼 신앙은 탄나 섬의 토착 종교, 특히 투코스메라 산의 신 카라페라문(Keraperamun) 숭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23] 영불 공동 통치령 시대에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신앙을 부정당한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며, 전통(카스텀)으로 돌아감으로써 존 프럼이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20] 존 프럼이라는 이름은 빗자루(Broom)에서 유래하며, 선교사나 유럽인이 정한 규범, 즉 '더러움'을 쓸어내는 존재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20] 1949년 식민지 행정관 알렉산더 렌톨도 이와 같은 견해를 밝혔다.[24]

존 프럼 신앙의 신자들은 존 프럼이 약속한 부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바누아투 노동대를 통한 기여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다.[25] 이러한 믿음은 태평양 전쟁 중 탄나 섬 주민들이 미국 군대의 보조 부대인 바누아투 노동대에 지원하여 비행장 건설 등에 참여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바누아투 문화 센터의 장-파스칼 와헤는 존 프럼이 외부 변화가 아닌 탄나 섬 주민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1939년 촌장들과 맺은 약속이 수 세대에 걸쳐 모두 이루어졌다고 말한다.[20] 존 프럼 신앙의 민족주의적, 반식민지적 사상은 1980년 바누아투 독립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32]

3. 1. 주요 신앙

존 프럼을 중심으로 한 종교는 바누아투가 뉴헤브리디스로 알려졌던 1930년대 후반, 탄나 섬의 설퍼 베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종교는 투코스메라 산과 관련된 신인 케라페라문 숭배 등 기존의 종교적 관습에 영향을 받았다.[6]

이 종교에서 존 프럼은 케라페라문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선교사를 포함한 모든 백인이 뉴헤브리디스를 떠나고 토착 멜라네시아인들에게 상품과 재산을 남겨두는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탄나 사람들은 , 서양 교육, 기독교, 코프라 농장 노동 등 유럽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카스톰''(관습을 의미하는 비슬라마어 단어)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1년, 존 프럼 추종자들은 돈을 없애고 선교 교회, 학교, 마을, 농장을 떠나 전통적인 축제, 춤,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주했다.[10] 유럽 식민 당국은 이 운동을 진압하려 했으나,[11][12][13]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이 뉴헤브리디스에 주둔하면서 이 운동은 더욱 인기를 얻었다.[14]

전쟁 후, 존 프럼의 추종자들은 미국 비행기가 착륙하여 "화물"을 가져오도록 상징적인 활주로를 건설하기도 했다. 1957년, 존 프럼 운동의 지도자 나코마하는 "탄나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들은 의식적인 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T-A USA"(탄나 군대 USA)라는 글자가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입고 군대 스타일의 퍼레이드를 하는 비폭력 의식적 사회였다. 이 퍼레이드는 매년 2월 15일 "존 프럼 데이"에 열린다.

존 프럼 신앙의 핵심은 탄나 섬의 자치와 외부와의 직접적인 교류에 대한 요구이다. 영불 공동 통치령 시대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신앙 부정에 대한 반발을 배경으로, 전통적인 생활 방식, 즉 카스텀(Kastom)으로 회귀함으로써 존 프럼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20]

태평양 전쟁 중 많은 탄나 섬 주민들이 미국군의 보조 부대인 Vanuatu Labor Corps영어에 지원하여 비행장 건설 등에 참여했다. 탄나 섬 사람들과 미국군의 전시 중 관계는 이전의 외국인과의 관계와는 크게 달랐으며, 이는 존 프럼의 이미지에 미국군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25]

존 프럼 신앙의 근본에 있는 민족주의·반식민지적인 사상은 1980년 바누아투 독립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현재 라마카라 마을(Lamakara)이 신앙의 거점이다.[24] 매년 2월 15일 "존 프럼의 날"에는 퍼레이드 등의 의식을 포함한 기념 행사가 개최된다.

2006년, 존 프럼 신앙을 취재한 폴 라파엘레는 라마카라의 촌장이자 신앙의 지도자인 아이작 완에게 "존은 60년도 더 전에 당신에게 많은 카고를 약속했고,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를 계속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이작 완은 "당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2000년 동안 기다리고 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잖아요"라고 대답했다.[24]

3. 2. 존 프럼의 날

존 프럼의 날은 매년 2월 15일 바누아투에서 기념하는 날로, 존 프럼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날이다.[15] 이 날은 존 프럼이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한 날이자,[20] 1957년 2월 15일에 마지막으로 식민지 행정 당국에 구속되어 있던 신자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21]

이날에는 퍼레이드 등의 의식을 포함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1957년 존 프럼 운동의 지도자 나코마하는 '탄나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 군대는 의식적인 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T-A USA'(탄나 군대 USA)라는 글자가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군대 스타일의 퍼레이드를 하는 비폭력 의식적 사회였다.[15]

2006년, 존 프럼 신앙을 취재한 폴 라파엘레는 라마카라의 촌장이자 신앙의 지도자인 아이작 완에게 "존은 60년도 더 전에 당신에게 많은 카고를 약속했고,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를 계속 믿습니까? 왜 당신은 아직도 그를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이작 완은 "당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2000년 동안 기다리고 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잖아요"라고 대답했다.[24]

3. 3. 상징

존 프럼 숭배는 바누아투가 뉴헤브리디스로 알려졌던 1930년대 후반, 탄나 섬의 설퍼 베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종교는 투코스메라 산과 관련된 신인 케라페라문 숭배 등 기존 종교 관습의 영향을 받았다.[6]

이 종교에 대한 한 분석에 따르면, 처음에는 존 브룸으로 알려졌는데, 추종자들은 그가 언젠가 멀리 떨어진 땅에서 돌아와 백인 식민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섬에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7] 어떤 이야기에서는 "존 프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토착민인 마네히비가 서양식 코트를 입고 탄나의 토착민들 사이에 나타나 그들에게 집, 옷, 음식, 교통수단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5][8]

다른 사람들은 존 프럼이 카바에 의해 유발된 영적 환영이라고 주장한다.[9] 케라페라문의 화신이라고 하는 이 존 프럼은 선교사를 포함한 모든 백인이 뉴헤브리디스를 떠나 그들의 상품과 재산을 토착 멜라네시아인들에게 남겨두는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탄나 사람들이 , 서양 교육, 기독교코프라 농장에서의 노동을 포함한 유럽 사회의 모든 측면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카스톰''(관습을 의미하는 비슬라마어 단어)으로 돌아가야 했다.

1941년, 존 프럼 추종자들은 돈을 없애고 선교 교회, 학교, 마을, 농장을 떠나 전통적인 축제, 춤,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주했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장로교 교회에서 왔다.[10] 유럽 식민 당국은 이 운동을 진압하려고 노력하여, 한때 스스로를 존 프럼이라고 부르는 탄나 사람을 체포하여 공개적으로 굴욕을 주고, 감옥에 가두고, 결국 컬트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군도의 다른 섬으로 추방했다.[11][12][13]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5만 명의 미군이 뉴헤브리디스에 주둔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자를 가져오면서 1940년대 초에 인기를 얻었다.[14] 전쟁 중 약 10,000명의 니바누아투 남성이 미국 군대의 노동대인 바누아투 노동대에서 복무하며 과달카날 전역 동안 연합국의 군사적 노력을 위한 군수 지원을 제공했다. 니바누아투 남성들이 노동대에 대거 참여한 것은 존 프럼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화물 숭배의 특징을 부여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인들이 떠난 후, 존 프럼의 추종자들은 미국 비행기가 착륙하여 "화물"을 가져오도록 장려하기 위해 상징적인 활주로를 건설했다. 미국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이 컬트의 버전은 "존 프럼"을 "존 (미국에서 온)"의 변형으로 해석한다.

1957년, 존 프럼 운동의 지도자 나코마하는 "탄나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 군대는 의식적인 색상으로 얼굴을 칠하고 "T-A USA"(탄나 군대 USA)라는 글자가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군대 스타일의 퍼레이드를 조직하는 비폭력 의식적 사회였다. 이 퍼레이드는 매년 2월 15일에 열리는데, 추종자들은 존 프럼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날이며, 바누아투에서는 "존 프럼 데이"로 기념된다.

1970년대 후반, 존 프럼 추종자들은 바누아투의 독립된 통일 국가 수립에 반대했다. 그들은 서양 현대성과 기독교를 선호하여 지역 관습에 해로울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중앙 정부에 반대했다. 존 프럼 운동은 자체 정당인 나그리멜을 가지고 있다.

존 프럼 신앙의 핵심은 탄나 섬의 자치와 외부와의 직접적인 교류에 대한 요구이다. 영불 공동 통치령 시대에 행해진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신앙의 부정에 대한 반발을 배경으로, 그들이 정한 규범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 즉 카스텀으로 회귀함으로써 존 프럼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여겨진다.[20]

태평양 전쟁 중 많은 탄나 섬 주민들이 미국군의 보조 부대인 Vanuatu Labor Corps영어에 지원하여 비행장 건설 등에 참여했다. 탄나 섬 사람들과 미국군의 관계는 식민지 행정 당국에 의해 중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외국인과의 관계와는 크게 달랐다. 탄나 섬 주민들에게 부유함은 단순히 기다린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인 교류의 결과이자, 노무 부대를 통한 기여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전후 존 프럼의 이미지에 미국군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은 이러한 전시 중의 기억에 기초한 부분이 크다.[25]

바누아투 문화 센터의 직원 장-파스칼 와헤는 존 프럼은 모든 카스텀, 돌과 정령, 계승된 전통의 통일된 상징이며, 외부로부터 오는 변화가 아니라 탄나 섬 주민의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이라고 한다.[20]

존 프럼 신앙의 근본에 있는 민족주의·반식민지적인 사상은 1980년 바누아투 독립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4. 현대적 의의와 평가

존 프럼 신앙은 탄나 섬의 자치와 외부와의 직접 교류를 핵심으로 한다. 영불 공동 통치령 시대에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신앙이 부정된 것에 대한 반발로, 그들이 정한 규범을 버리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인 카스텀(Kastom, 비슬라마어로 "관습")으로 돌아가면 존 프럼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믿는다.[20]

태평양 전쟁 중 탄나 섬 주민들은 미국군의 보조 부대인 Vanuatu Labor Corps영어에 지원하여 비행장 건설 등에 참여했다. 탄나 섬 사람들과 미국군의 관계는 이전의 외국인과의 관계와는 달리, 식민지 행정 당국을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것이었다. 탄나 섬 주민들에게 부유함은 기다림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 교류와 노무 부대를 통한 기여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전후 존 프럼의 이미지에 미국군이 겹쳐지는 것은 이러한 전시의 기억에 기초한다.[25]

바누아투 문화 센터의 장-파스칼 와헤(Jean-Pascal Wahé)는 존 프럼이 카고 컬트처럼 "앉아서 도움을 기다리는 이야기"와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존 프럼은 모든 카스텀, 돌과 정령, 계승된 전통의 통일된 상징이며, 외부로부터의 변화가 아닌 탄나 섬 주민의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이라고 한다. 또한, 탄나 섬 사람들이 아직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1939년에 촌장들과 맺은 약속은 대부분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금전적 풍요를 추구한 촌장의 마을은 Lenakel영어이라 불리고, 지혜를 추구한 촌장의 손자들은 모두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부두 건설이나 섬 내 인프라 정비 등도 약속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유일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은 Sulphur Bay영어 근처 마을의 촌장과 맺은 "당신이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의 테이블을 마주하고 함께 식사를 합시다"라는 것이다.[20]

존 프럼 신앙의 민족주의적이고 반식민지적인 사상은 1980년 바누아투 독립에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바누아투를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존 프럼 신앙은 국외에도 알려지게 되었다.[32]

현재 신앙의 거점은 라마카라(Lamakara) 마을이다.[24] 신자들은 2월 15일을 "존 프럼의 날"이라고 부르며 기념한다. 이 날은 존 프럼이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한 날이자,[20] 1957년 2월 15일에 마지막으로 식민지 행정 당국에 구속되었던 신자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21] 이 날에는 퍼레이드 등의 의식을 포함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2006년, 존 프럼 신앙을 취재한 폴 라파엘레(Paul Raffaele)는 신앙 지도자인 아이작 완(Isaac Wan)에게 "존은 60년도 더 전에 당신에게 많은 카고를 약속했고,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를 계속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이작 완은 "당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2000년 동안 기다리고 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잖아요"라고 답했다.[24]

참조

[1] 웹사이트 Jon Frum http://www.jonfrumar[...] 2017-06-23
[2] 웹사이트 The Fantastic Invasion https://m.dailykos.c[...] 2020-07-25
[3] 서적 People of Paradise Harper & Brothers
[4] Youtube Waiting for John Frum: Cargo Cult of the South Pacific {{!}} When God is An American Soldier Documentary https://www.youtube.[...] 2021-05-03
[5] 간행물 John Frum Movement in Tanna http://horizon.docum[...] 1952-03
[6] 서적 The Trumpet Shall Sound: A Study of 'Cargo' Cults in Melanesia MacGibbon & Kee 1957
[7] 웹사이트 'There was a prophecy I would come': the western men who think they are South Pacific kings https://www.theguard[...] 2021-11-28
[8] 문서 Worsley, The Trumpet Shall Sound, pp. 153–9.
[9] 문서 Tabani, Marc, Une pirogue pour le Paradis : le culte de John Frum à Tanna (Vanuatu). Paris : Editions de la Maison des Sciences de l'Homme, 2008.
[10] 서적 Melanesia and Its Churches: Past and Present https://books.google[...] Melanesian Institute
[11] 문서 Geoffrey Hurd et al., Human Societies: An Introduction to Sociology (Boston: Routledge, 1986) p. 74.
[12] 문서 "[[Peter Worsley]], ''From Primitives to Zen'', [[Mircea Eliade]] ed. (New York: Harper & Row, 1977) p. 415."
[13] 문서 Lamont Lindstrom in Cargo Cults and Millenarian Movements: Transoceanic Comparisons of New Religious Movements G. W. Trompf ed. (New York: Mouton de Gruyter, 1990) p. 244
[14] 웹사이트 Western Oceanian Religions: Jon Frum Movement http://philtar.ucsm.[...] 2003-10-16
[15] 웹사이트 Vanuatu cargo cult marks 50 years http://news.bbc.co.u[...] BBC News 2007-02-15
[16] 뉴스 "Vanuatu appoints ambassador to Russia" http://www.rnzi.com/[...] Radio New Zealand International 2011-12-05
[17] 뉴스 "Vanuatu's ambassador to Russia sacked" http://www.abc.net.a[...] ABC News Australia 2013-04-23
[18] 뉴스 "Vanuatu anti-corruption lobby: Russia ambassador a business deal" http://www.radionz.c[...] Radio New Zealand 2012-01-16
[19] 서적 People of Paradise Harper & Brothers
[20] 웹사이트 Who Is John Frum? https://www.topic.co[...]
[21] 웹사이트 John Frum Movement (Tanna Island, Vanuatu) https://www.crwflags[...]
[22] 웹사이트 JOHN FRUM: AN INDIGENOUS STRATEGY OF REACTION TO MISSION RULE AND THE COLONIAL ORDER http://ojs-dev.by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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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웹사이트 Western Oceanian Religions: Jon Frum Movement http://www.philtar.a[...]
[33] 웹사이트 Nation of Tanna (Vanuatu) https://www.crwfla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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