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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B. 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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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B. 콜터는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1891년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한국 전쟁 중에는 제1군단과 제9군단을 지휘했다. 1951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8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후 1952년 퇴역했다. 퇴역 후에는 유엔 한국 재건단 대표 대사 및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재건을 지원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1983년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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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B. 콜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 B. 콜터
존 B. 콜터, 제1차 세계 대전 중 사진
개인 정보
이름존 브레이틀링 콜터
출생일1891년 4월 27일
사망일1983년 3월 6일 (향년 91세)
출생지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사망지워싱턴 D.C.
안장지알링턴 국립묘지, 버지니아주
군사 경력
복무 기간1912년 – 1952년
최종 계급[[파일:US-O9 insignia.svg|30px|alt=네 개의 은성]] 중장
병과[[파일:ArmyCAVBranchPlaque.gif|25px]] 기병 병과
주요 지휘제2대대, 508개척보병연대
제3기병여단
제2기병사단
제85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1군단
제9군단
참전 전투판초 비야 원정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전역
한국 전쟁
부산 교두보 전투
주요 훈장육군 공로 훈장 (3회)
은성 훈장 (2회)
동성 훈장
수훈 비행 십자장
항공 훈장
기타
기타 이력유엔 한국 재건단 사무총장

2. 생애

존 B. 콜터는 1891년 4월 27일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나 1911년 웨스트 텍사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미국 육군 기병대 소위로 임관했다.[1] 1916년 제14기병연대에서 판초 비야 원정에 참가했으며,[1]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제42사단 사령관의 부관으로 복무했다.[1]

1918년 11월 11일 휴전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콜터는 전쟁부 인사과, 아이오와주 포트 디모인에서 제14기병 연대 제2비행대대 지휘관을 역임했다.[1] 1922년 미 육군 기병학교 졸업 후 기병 병기 주임, 기병 참모장 총괄 책임자(XO)를 맡았다. 1927년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교 졸업 후, 제8기병 연대 비행대대 지휘, 제1기병 사단 계획 및 훈련 보좌관, 군사 정보국 라틴 아메리카 문제 전문가를 역임했다.

1933년과 1934년에 각각 미 육군 전쟁대학교와 해군 전쟁대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중령으로 진급, 제4기병 연대 총괄 책임자를 거쳐 1940년 연대장이 되었다. 1941년 임시 계급 대령으로 진급했다.[1]

1941년 준장으로 진급, 제3 기병 여단 여단장이 되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멕시코 국경에 배치되었고, 서부 방위군 남부 국토 국경 지역 사령관으로 추가 배속되었다. 1942년 제2기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다.[1]

1943년 소장으로 진급, 제85보병사단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이탈리아로 원정, 구스타프 선에서 고딕 선까지 진군하며 로마-아르노 전투, 북아펜니노 산맥 전투, 포 평원 전투에 참여했다. 콜터는 산악전에 능숙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1]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콜터는 제1군단 지휘를 맡았다. 태스크 포스 잭슨 사령관으로서 북한의 진격을 저지했고,[2][3] 1950년 9월 제9군단 지휘를 맡아 제1군단을 지원했다.

1951년 중장으로 진급, 제8군 부사령관이 되어 매슈 리지웨이 대장의 대한민국 육군이승만 대통령과의 연락 담당관이었다.

은퇴 후 유엔 한국 재건단(UNKRA) 대표 대사, 1953년 유엔 사무차장보 직위로 UNKRA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2억달러 이상을 투입, 한국 재건에 힘썼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당시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평화 유지군 활동에 대해 조언했다.[1]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 서울 이태원동에 세워졌다가 1977년 광진구 능동으로 이전되었다.[1] 1960년대에는 한국문화자유재단 회장을 역임했다.[1]

콜터는 1983년 3월 6일 워싱턴 D.C.에서 사망,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존 B. 콜터 중장의 묘.

2. 1. 어린 시절 및 군경력

존 B. 콜터는 1891년 4월 27일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1년 웨스트 텍사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미국 육군 기병대에서 소위장교 임관을 받았다.[1] 1916년 텍사스의 제14기병연대에서 처음 군무에 종사, 판초 비야 원정에 참가했다.[1]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서부 전선에서 제42 (레인보우) 사단 사령관 윌리엄 에이브람 만 소장(Major General)의 부관으로 복무했다.[1] 메릴랜드주 캠프 미드에서 제154 보병 여단의 부관으로 5개월 동안 미국으로 돌아온 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대인 제508 개척 보병 연대 제2 대대장으로 프랑스로 다시 파견되었다.[1]

2. 2.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으로 끝난 후, 콜터는 전쟁부 인사과에서 근무했고, 아이오와주 포트 디모인에서 제14기병 연대 제2비행대대를 지휘했다.[1] 1922년 미 육군 기병학교를 졸업하고 전쟁부에 배속되어 기병 병기 주임으로 근무했으며, 나중에는 기병 참모장에게 총괄 책임자 (XO)로 근무했다.

1927년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한 후,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에서 제8기병 연대의 비행대대를 지휘했고, 이후 제1기병 사단의 계획 및 훈련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그 후 그는 참모부의 군사 정보국에 라틴 아메리카 문제 전문가로 배속되었다.

1933년 미 육군 전쟁대학교를 졸업했고, 1934년 해군 전쟁대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8월 1일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사우스다코타주 포트 미드에서 제4기병 연대의 총괄 책임자로 배속되었다. 1940년 12월 그는 연대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6일, 그는 임시 계급인 대령으로 진급했다.[1]

2. 3.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콜터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애리조나주피닉스에서 제3 기병 여단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그의 휘하 병사들은 미국-멕시코 국경에 배치되었고, 콜터는 서부 방위군 남부 국토 국경 지역 사령관으로 추가 배속되었다. 1942년 초, 콜터는 제2기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다.[1]

1943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85보병사단 지휘를 맡았다. 미국 본토에서 훈련을 받은 후, 그는 사단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이탈리아로 원정했다. 제85사단은 구스타프 선에서 고딕 선에 걸쳐 진군했으며, 로마-아르노 전투, 북아펜니노 산맥 전투, 포 평원 전투에 참여했다. 콜터는 군사 등산과 산악전의 숙련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1]

2. 4. 한국 전쟁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터는 제8군의 일부로 제1군단 지휘를 맡았다. 그는 한국군과 미군으로 구성된 임시 부대인 태스크 포스 잭슨 사령관을 맡아 북한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3] 1950년 9월에는 제9군단 지휘를 맡아 북한에 대한 반격에서 제1군단을 지원하는 부대를 통솔했다.

1951년 콜터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8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제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대장의 대한민국 육군이승만 대통령과의 연락 담당관이었다.

2. 5. 은퇴 이후

은퇴 후 존 B. 콜터는 워싱턴 D.C.에서 유엔 한국 재건단(UNKRA)의 대표 대사가 되어,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재건을 위한 국제적인 노력을 지휘했다. 1953년 유엔 사무차장보 직위로 UNKRA의 사무총장에 취임하여 1958년까지 재직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2억달러 이상을 투입하여 한국의 산업, 학교, 병원, 도로 및 주택 재건을 감독했다. 1956년에는 수에즈 위기 당시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평화 유지군 활동에 대해 조언했다.[1]

1959년,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은 한국 재건에 기여한 콜터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그의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 원래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가, 1977년 서울 광진구 능동으로 이전되었다.[1]

1960년대에 콜터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을 기리고 미국과 한국 간의 문화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한국문화자유재단 회장을 역임했다.[1]

콜터는 1983년 3월 6일 워싱턴 D.C.에서 사망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

3. 표창과 훈장

콜터는 육군 공로 훈장 (3회), 은성 훈장 (2회), 동성 훈장, 수훈 비행 십자장, 항공 훈장 (6회) 등을 수여받았다.[3]

3. 1. 육군 공로 훈장 (첫 번째)

1944년 6월 18일, 존 B. 콜터 장군은 1943년 2월 21일부터 1944년 6월 5일까지 제85보병사단 사령관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첫 번째 육군 공로 훈장을 받았다. 그는 매우 어려운 지형에서 100마일 이상을 진격하는 훌륭한 작전을 이끌었으며, 이는 1944년 6월 4일 로마 진입으로 이어졌다. 콜터 장군은 가혹하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적을 상대로 그의 부대가 첫 전투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도록 이끌었으며, 이는 그의 공격적인 리더십 덕분이었다.

그는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강조하고, 부하들에게 전투에 대한 정신적 준비를 시켰으며, 군사 전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Colle San Martino, Hill 121, Formia, Terracina 및 Mount Ceraso에서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는 리더십 역량을 발휘하고 최전선에 끊임없이 참여함으로써 로마 앞에서 적군을 궤멸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2. 육군 공로 훈장 (두 번째)

Major General영어 존 B. 콜터에게 수여된 두 번째 육군 공로 훈장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3]

'''육군 공로 훈장 (두 번째)'''[3]

: 1945년 5월 16일

: 1944년 8월 17일부터 1945년 5월 2일까지 이탈리아에서 막중한 책임을 맡은 임무를 수행하며 뛰어난 공로를 세웠다. 콜터 장군은 세시나 강에서 아르노 강과 고딕 라인까지 작전을 수행하는 제85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강력하게 점령되고 준비된 고딕 라인을 격파하는 어려운 과정에서 콜터 장군의 뛰어난 지휘 아래 제85사단은 5일간의 전투 끝에 9월 18일 Mount Altuzzo를 점령했다. 이는 고딕 라인의 가장 중요한 전술적 특징 중 하나였으며, 그 점령은 강력하게 방어된 독일군 진지를 통해 제5군이 더 진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펜니노 산맥에서의 겨울 작전과 봄의 승리한 연합군 공세 동안, 콜터 소장은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을 궤멸적으로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그의 부대를 훌륭하게 이끌었다. 그는 공세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단을 준비하면서, 그의 부대 배치를 능숙하게 재조정하고, 취약하고 중요한 산악 지대를 통합하고 강화했으며, 동시에 혹독한 날씨 속에서 산악 전투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의 부대의 복지를 위해 가능한 모든 편의 시설을 제공했다. 공세를 위한 계획을 완벽하게 세운 콜터 소장은 공격적인 리더십과 공격을 신속하고 끈질기게 추진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로 그의 부하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그의 사단을 맹렬한 공격으로 이끌었다. 그는 포 계곡을 가로질러 진격하면서 제85사단은 매우 중요한 하이웨이 9번을 끊고, 포 강을 건너 아디제 라인을 넘어 10일 만에 약 160.93km 이상 진격했다. 콜터 소장의 뛰어난 전술적 기술과 영감을 주는 리더십은 제15군 집단이 달성한 승리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of Lieutenant-General John Breitling Coulter (1891 – 1983), USA https://generals.dk/[...]
[2] 서적 (제목 없음) https://books.google[...] 2003
[3] 서적 (제목 없음) https://archive.org/[...]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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