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죽
1. 개요
주세죽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3·1 운동 참여 후 상하이로 유학, 피아노를 공부했다. 1921년 박헌영과 결혼 후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여했으며, 근우회 결성에도 참여했다. 1920년대 말 소련으로 탈출하여 활동하다가, 1930년대 김단야와 재혼 후 소련에서 체포되어 유배 생활을 했다. 한국 전쟁 중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중 사망했으며, 1989년 명예 회복 후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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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성동우회의 인물 -
정칠성
정칠성은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사회운동에 투신, 여성 계몽과 사회 부조리 개선을 주장하며 신간회와 근우회에서 항일 의식을 고취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
조선여성동우회의 인물 -
황신덕
황신덕은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까지 교육, 여성 운동, 정치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며, 동성애 고백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
한국의 무신론자 -
신채호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문필가로,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한국의 무신론자 -
김단야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단야는 3·1 운동 참여, 서울청년회, 고려공산청년회 등에서 활동하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주도했으나, 소련에서 총살된 후 복권되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
안막
안막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월북할 때까지 활동한 문학 평론가이자 카프 이론가로, 사회주의 운동 참여 및 카프 활동을 통해 임화, 김남천 등과 문단 논쟁을 주도했으며, 광복 후 월북했으나 숙청당한 인물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
박영호 (극작가)
박영호는 일제강점기 카프 계열 극작가이자 〈짝사랑〉, 〈오빠는 풍각쟁이〉 등의 히트곡을 낸 작사가로, 친일 활동으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광복 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인동맹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2. 생애
주세죽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영생여학교를 2년 동안 다녔다. 이후 경성으로 유학하여 중등학교에 진학했으나,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1921년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피아노를 공부했고, 1921년 4월 상하이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5월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박헌영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같은 해 1월 허정숙, 박원희 등과 조선여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2월 화요회 주도로 열린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4월 중순 조선공산당 창당준비대회에 참여한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참가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2개월 만에 풀려났다. 1927년 5월 김활란, 박순천, 유영준, 최은희, 박원민, 박차정, 정종명 등과 함께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를 결성하여 항일 구국 운동과 여성 지위 향상 운동을 벌였다.
1928년 박헌영과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여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코레예바(조선 여자라는 뜻)’라는 가명으로 모스크바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2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하이로 옮겨갔으나 1933년 박헌영이 일본 경찰에 다시 체포되어 연락이 끊겼다. 주세죽은 박헌영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독립운동가 김단야와 1933년 재혼했다.
1937년 김단야는 '일본 간첩' 혐의로 소련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주세죽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38년 5월 22일 소련 내무인민부 특별협의회는 주세죽에게 5년간 카자흐스탄으로 유배 보낸다는 판결을 내렸다. 1940년 카르마크치의 협동조합에서 노동형을 받고 1946년까지 일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 체류 중 광복 소식을 접했으나, 스탈린에게 요청한 조선 귀환은 거절당했다. 1946년 7월 10일부터 크질오르다의 한 방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주세죽은 크질오르다에 체류 중에 한국 전쟁 소식을 접하였다. 딸 박 비비안나가 있던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길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
2.1. 생애 초반 (1901~1921)
1901년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함흥의 영생여학교를 2년 동안 다녔으며, 이후 경성으로 유학하여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중등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어 학업을 중단했고, 1921년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피아노를 공부했다. 1921년 4월 상하이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5월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2.2. 사회주의 운동 (1921~1937)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경성부에서 박헌영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고려공산청년회 활동 경력을 숨길 수 있었으므로 증거 불충분으로 곧 풀려났다. 1925년 1월 허정숙, 박원희 등과 함께 조선여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2월 화요회 주도로 열린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4월 중순 경성부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당준비대회에 참여한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6년에는 6.10 만세 운동 참가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
1927년 5월 김활란, 박순천, 유영준, 최은희, 박원민, 박차정, 정종명 등과 함께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를 결성하여 항일 구국 운동과 여성 지위 향상 운동을 벌였다. 1928년, 정신병자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박헌영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여,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을 졸업했다.
이듬해부터 '코레예바(조선 여자라는 뜻)’라는 가명으로 모스크바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2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하이로 옮겨갔으나 1933년 박헌영이 일본 경찰에 다시 체포되어 연락이 끊겼다.
주세죽은 박헌영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역시 아내 고명자와 소식이 끊긴 독립운동가 김단야와 1933년 재혼했다. 그러나 1929년경부터 주세죽과 김단야가 불륜 관계였으며 이를 안 박헌영이 주세죽과 결별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한 박헌영과 헤어진 후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로 알았으나 김단야가 그의 생존 사실을 알면서도 주세죽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설도 있었다.
2.3. 1930년대 이후 ~ 유형 생활과 광복 이후 (1937~1946)
1937년 김단야는 화요파 인물들과 함께 '일본 간첩' 혐의로 소련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처형되었다. 주세죽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밀정이라는 이유로 소련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8년 5월 22일 소련 내무인민부 특별협의회는 주세죽에게 5년간 카자흐스탄으로 유배 보낸다는 판결을 내렸고, 이후 5년간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아 그곳에서 생활했으며, 유형 생활 중 아들이 사망했다. 1940년 카르마크치의 협동조합에서 노동형을 받고 1946년까지 일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 체류 중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광복 직후 주세죽은 스탈린에게 '조선으로의 귀환을 허용해달라'는 청원을 하였으나 이 청원은 거절당했다. 다만, 소련 정부는 1946년 7월 10일부터 크질오르다의 한 방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2.4. 생애 후반과 사망 (1946~1953)
주세죽은 크질오르다에 체류 중에 한국 전쟁 소식을 접하였다. 이후에도 꾸준히 한국을 오가는 연락원과 상인들을 통해 대한민국 및 북조선의 소식을 수소문하곤 했다. 딸 박 비비안나가 있던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길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 당시 그의 임종은 사위인 빅토르 마르코프가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