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도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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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웅진도독부는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옛 백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기구이다. 웅진(현재의 공주시)에 설치되어 백제 유민을 다스렸으며, 13개의 현과 7개의 주로 구성되었다. 백제 부흥 운동과 나당 전쟁으로 인해 신라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중국 요녕성 영구로 옮겨져 만주 지역 백제 유민 자치 기구로 변화했다. 웅진도독부에는 백제 멸망 이후에도 왜인이 존재했으며, 당나라는 이들을 외교에 활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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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도독부 | |
---|---|
지리 | |
기본 정보 | |
유형 | 도독부 |
설치 | 663년 |
폐지 | 676년 |
관할 지역 | 옛 백제 지역 |
역사 | |
배경 | 백강 전투 이후 당나라가 옛 백제 지역에 설치 |
소멸 | 나당 전쟁 중 신라에 의해 함락 |
정치 | |
통치 | 당나라 |
수장 | 웅진도독 |
2. 역사적 배경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옛 백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현재의 충청도 지역에 웅진주(熊津州)를 설치하였다. 당시 웅진(행정 중심지·사비성(고마성),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마한(고사부리성, 전라북도 정읍), 동명주(웅진성, 충청남도 공주시), 덕안주(덕안성,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 지역, 김난주(김난성, 충청남도 서산시), 대방주(죽군성, 전라남도 나주시, 회진)가 있었다.
웅진주는 우이(嵎夷), 신구(神丘), 린덕(麟徳), 윤성(尹城), 산곤(散昆), 안원(安遠), 빈문(賓汶), 귀화(帰化) 또는 마사량(麻斯良), 매나(邁羅), 감개(甘蓋) 또는 고막부리(古莫夫里), 나서(奈西), 덕안(徳安), 농산(龍山)의 13개 현을 관할했다. 앙동 지역령은 내진(熊津), 노신(鹵辛) 또는 아노곡(阿老谷), 구지(久遅) 또는 구지(仇知), 부림(富林) 또는 벌음(伐音)의 4개 현을 관할했다. 김난주는 편이(平夷) 현(주류(周留) 또는 지류(知留)라고도 함)을 관할했고, 마한 지역령은 편와(平倭), 비리(比利), 미중(辟中), 보미(布弥), 지반(支半)을 관할했다. 대방주는 지류(至留)(지류라고도 함), 군나(軍那) 또는 굴나(屈那), 도산(徒山) 또는 추산(抽山), 반나(半那) 또는 반나부리(半那夫里), 죽구(豆肸) 또는 두힐(豆肸), 보현(布賢) 또는 파노미(巴老弥)를 관할했다.
당나라 장군 왕문두가 죽자 백제 부흥 운동의 기세가 높아졌다. 백제 의자왕의 신하였던 귀실복신은 왕문두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여풍을 일본에서 불러들여 주류성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군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했다. 661년, 당나라는 유인원을 웅진주와 대방주 도독으로 임명했다. 663년, 백제와 일본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백제 탈환에 실패했다.
백강 전투 이후 유인원은 당나라로 돌아가고 유인지는 백제 지역을 다스리도록 파견되었다. 유인지는 전장을 재건하려 했다. 665년, 그는 지역령, 주, 현의 합병을 추진했다. 그 결과 6개의 지역령이 통합되어 웅진(熊津) 아래 7개의 주(동명, 지심, 노산, 고사, 사반, 대방, 분차)와 13개의 현으로 개편되었다. 중앙 정부는 사비성(충청남도 부여군)에 설치되었다. 옛 백제의 왕족이었던 부여융은 웅진 지역령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백제의 전장과 생존자들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으나, 신라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의 대신 유인궤가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인궤와 유인궤는 당나라로 돌아갔다. 부여융이 도독직을 거부하자, 그의 자리는 난한(難汗)과 예군(禰軍)이 대리하게 되었다.
그 후 신라가 반란을 일으켜 670년 7월 웅진주를 공격했다. 82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신라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고, 옛 백제 땅의 대부분이 점령당했으며, 그들은 당나라가 옛 백제 땅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를 설치했던 웅진과 사비에 이르렀다. 당나라는 설인귀를 계림 지역령 도독으로 임명하여 신라와 싸웠지만, 결국 실패했고 웅진주는 신라에 점령당했다.
소란 이후, 당나라는 웅진 지역령을 건안(建安)성(현재 중국 요녕성 영구)으로 옮겼다. 그것은 안동도호부가 관할하던 안주(安州) 지역령과 합쳐졌다.
686년, 신라는 웅진 지역령을 설치하고 757년에 웅천(熊川)으로 개칭했다. 940년, 웅천은 공주로 개칭되었고 지역령이 설치되었으며, 983년에는 공주목으로 승격되었다.
2. 1. 백제 멸망과 웅진도독부 설치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옛 백제 영토를 신라로부터 가로채 웅진(오늘날의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왕문도(王文度)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2] 당은 웅진도독부 아래 7주(동명, 지섬, 노산, 고사, 사반, 대방, 분사)와 13개 현을 두었으며, 부치는 사비성(현재 충청남도 부여군)에 설치하였다.[2]왕문도가 사망하자 백제 재흥 운동이 활발해졌고, 귀실복신(鬼室福信)은 일본에 있던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당나라에 저항하였다.[2] 당은 661년 유인원(劉仁願)을 웅진도독·대방주자사로 임명하였고,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일본 연합군을 격파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였다.[2]
백제 부흥 운동이 실패한 후, 유인원은 당으로 귀국하였고, 유인집(劉仁執)이 백제 수비에 임명되었다. 유인집은 전란 피해를 입은 지역의 복구에 힘썼고, 665년 각 도독부·주·현의 합병이 진행되었다.[2] 당나라는 전 백제 태자인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백제 옛 땅과 유민의 관리를 명하였다.[2] 그러나 부여융은 신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유인궤(劉仁軌)가 검교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였다.[2] 고구려 멸망 후, 유인궤·유인원은 귀국하게 되었으나, 부여융이 부임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웅진도독의 업무는 웅진도독부 장사 난한(難汗)과 웅진도독부 사마 녜군(禰軍)이 대행하였다.[2]
670년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82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백제 옛 땅 대부분을 점령하였다.[2] 당은 설인귀(薛仁貴)를 계림도총관에 임명하여 신라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점령당하였다.[2] 676년 당은 웅진도독부를 건안성(현재 랴오닝성 잉커우시)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와 통합하였다.[2]
2. 2. 백제 부흥 운동과 나당 전쟁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옛 백제 영토를 신라로부터 가로채고 웅진(오늘날의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도독으로는 왕문도(王文度)가 임명되었으며, 후에는 5도독을 없애고 통할케 하다가 665년 백제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당과의 화친 맹약을 맺었다.당나라 장군 왕문도가 죽자 백제 부흥 운동의 기세가 높아졌다. 백제 의자왕의 신하였던 귀실복신은 왕문도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여풍을 일본에서 불러들여 주류성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군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했다. 663년, 백제와 일본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백제 탈환에 실패했다.
백강 전투 이후 유인원은 당나라로 돌아가고 유인지가 백제 지역을 다스리도록 파견되었다. 665년, 그는 지역령, 주, 현의 합병을 추진했다. 그 결과 6개의 지역령이 통합되어 웅진(熊津) 아래 7개의 주(동명, 지심, 노산, 고사, 사반, 대방, 분차)와 13개의 현으로 개편되었다. 중앙 정부는 사비성(충청남도 부여군)에 설치되었다. 옛 백제의 왕족이었던 부여융은 웅진 지역령 도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신라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의 대신 유인궤가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인궤와 유인궤는 당나라로 돌아갔다. 부여륭이 도독직을 거부하자, 그의 자리는 난한(難汗)과 예군(禰軍)이 대리하게 되었다.
그 후 신라가 반란을 일으켜 670년 7월 웅진주를 공격했다. 82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신라는 옛 백제 땅의 대부분이 점령하고, 당나라가 옛 백제 땅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를 설치했던 웅진과 사비에 이르렀다. 당나라는 설인귀를 계림 지역령 도독으로 임명하여 신라와 싸웠지만, 결국 실패했고 웅진주는 신라에 점령당했다.
677년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옛 백제 영토를 탈환하였다. 소란 이후, 당나라는 웅진 지역령을 건안(建安)성(현재 중국 요녕성 영구)으로 옮겼다. 686년, 신라는 웅진 지역령을 설치하고 757년에 웅천(熊川)으로 개칭했다. 940년, 웅천은 공주로 개칭되었고 지역령이 설치되었으며, 983년에는 공주목으로 승격되었다.
3.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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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도독부는 백제의 옛 영토에 도독부 직할의 13현과 지방 7주 등을 설치했다.[9] 그러나 이 지방 행정 체계는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 전쟁 등으로 인해 계획으로 그치거나 제 구실을 못하다가 결국 신라에 의해 철폐되었다.[9]
도독부는 백제의 옛 수도인 사비성을 중심으로 충청남도 대부분 지역을 직할했으며, 13개 현을 두었다.[9]
- 우이현(隅夷縣): 도독부 소재지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으로 추정된다. 우이는 동이족 9종족 중 하나이다.[9]
- 신구현(神丘縣): 부여군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석성현이 있던 부여군 석성면(?)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신구는 후한이 흉노족을 토벌했던 산 이름이다.[9]
- 윤성현(尹城縣): 원래 열기현(悅己縣)으로,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이다.[9]
- 인덕현(麟德縣): 원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으로, 충청남도 청양군이다.[9]
- 산곤현(散昆縣): 원래 신촌현(新村縣)으로, 보령시 주포면이다.[9]
- 안원현(安遠縣): 원래 구시파지(仇尸波知)였으며, 위치는 미상이다.[9]
- 빈문현(賓汶縣): 원래 비물현(比勿縣)으로, 서천군 비인면이다.[9]
- 귀화현(歸化縣): 원래 마사량(麻斯良)이었으며, 위치는 미상이나 군산시 옥구면의 옛 이름인 마서량(麻西良)과 유사하다.[9]
- 매라현(邁羅縣): 마한의 만로국과 이름이 비슷하다. 만로국은 보령시 남포면에 있었다.[9]
- 감개현(甘介縣): 원래 고막부리(古莫夫里)이다. 마한의 감해비리국과 유사한데, 홍성군 금마면의 옛 이름이 감개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전까지 이 지역은 군현이 설치된 바 없었다.[9]
- 내서현(奈西縣): 미상이나, 백제 시대에 논산시 북쪽에 있던 니산현(尼山縣)과 유사하다.[9]
- 득안현(得安縣): 원래 덕근지현(德近支縣)으로 불린 논산시 가야곡면이다.[9]
- 용산현(龍山縣): 원래 고마산(古麻山)인데, 서천군 한산면으로 비정하는 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9]
웅진도독부 관할의 7주는 다음과 같다.
- 동명주(東明州): 웅진(熊津)을 중심으로 4현을 관할했다.
- * 웅진현(熊津縣): 공주시
- * 노신현(鹵辛縣): 원래 아로곡(阿老谷)인데 위치는 미상. 아로곡은 반남군 노안현 이름과 같지만 거리상 불가능.
- * 구지현(仇知縣): 신라시대 금지현(金池縣)인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 부림현(富林縣): 원래 벌음지현(伐音支縣). 신라시대에 청음현(淸音縣)으로 개명한 공주시 신풍면
- 지심주(支(水변尋)州): 관할 현 수는 9현이었다. 지심주의 위치 비정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 기문현(己汶縣): 원래 이름이 금물(今勿)이라 하여 신라시대에 금무현(今武縣)으로 불린 예산군 고덕면으로 비정되었는데 정작 《일본서기》에 기문(己汶)이라는 이름 그대로 백제와 가야의 분쟁지역으로 나오므로 위치상 백제와 가야의 경계선상에 위치했을 것임. 우륵의 12곡 중의 하나로 나오는 하기물이 있던 남원시일 것.
- * 지심현(支尋縣): 원래 지삼(只三)이라 하여 임존성으로 추측.
- * 마진현(馬津縣): 원래 고산(孤山), 오산(烏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예산군일대로 비정되었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의 백제 시대 지명인 마돌현(馬突縣)의 다른 이름도 마진현(馬珍縣)이었음.
- * 자래현(子來縣): 원래 부수지(夫首支). 당진군의 백제 시대 이름인 벌수지(伐首支)와 유사.
- * 해례현(解禮縣): 원래 해리이(皆利伊). 미상
- * 고노현(古魯縣): 원래 고마지(古麻只). 미상
- * 평이현(平夷縣): 원래 지류(知留). 미상
- * 산호현(珊瑚縣): 원래 사호살(沙好薩). 미상
- * 융화현(隆化縣): 원래 거사물현(居斯勿縣). 임실, 장수 일대.
- 노산주(魯山州): 관할 현은 6현이었다. 노성의 옛 이름과 유사하나 지금의 익산시 일대로 비정된다.
- * 노산현(魯山縣): 원래 감물아현(甘勿阿縣).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
- * 당산현(唐山縣): 원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 신라시대 금구현(金溝縣)인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 * 순지현(淳遲縣): 원래 두시(豆尸)인데 비숫한 이름으로 두시이현(豆伊縣)인 전주시 이서면
- * 지모현(支牟縣): 원래 지마마지(只馬馬知)인데 금마저(金馬渚)로 불린 익산시 금마면
- * 오잠현(烏蠶縣): 원래 마사지(馬知沙). 미상
- * 아착현(阿錯縣): 원래 원촌(遠村)인데 이름만으로는 옛날 여수시의 이름과 같지만 거리상 다른 곳으로 여겨짐. 비슷한 이름으로 전주시의 옛 이름인 완산(完山) 또는 원산(圓山)이 있음.[9]
- 고사주(古四州):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이 원래 이름이며, 5현을 관할했다.
- * 평왜현(平倭縣): 원래 이름은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 지금의 정읍시 내
- * 대산현(帶山縣): 원래 대시산군(大尸山郡). 나중에 태인현(泰仁縣)이 됨. 지금의 정읍시 대산면.
- * 벽성현(辟城縣): 원래 벽골(辟骨)이라 불린 김제시
- * 좌찬현(佐贊縣): 원래 상두(上杜). 신라시대 상질현(尙質縣)인 고창군 흥덕면
- * 순모현(淳牟縣): 원래 두내지현(豆乃知縣). 신라시대 만경현(萬頃縣)인 김제시 만경면
- 사반주(沙泮州): 소재지는 영광군이었으며, 관할 현은 4개였다.
- * 모지현(牟支縣): 원래 무시이현(武尸伊縣). 지금의 전남 영광군
- * 무할현(無割縣): 원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지금의 전북 고창군
- * 좌노현(佐魯縣): 원래 상노현(上老縣).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
- * 다지현(多支縣): 원래 부지(夫只)인데 백제시대 다기현(多岐縣)으로 불린 나주시 문평면으로 추정.
- 대방주(帶方州): 치소는 나주시 다시면이며, 관할 현은 6개였다.
- * 지류현(至留縣): 원래 지류(知留). 위치는 미상
- * 군나현(軍那縣): 원래 굴내(屈奈)이므로 신라시대 함풍현이 있던 전남 함평군
- * 도산현(徒山縣): 원래 추산(抽山). 진도군 군내면
- * 반나현(半那縣): 그 이름 그대로 원래 반나부리(半奈夫里)라 불린 나주시 반남면
- * 죽군현(竹軍縣): 원래 두힐현(豆肹縣). 나주시 다시면
- * 포현현(布賢縣): 파로미(巴老彌), 발라군(發羅郡). 나주시
- 분차주(分嵯州): 담양군 금성면이며, 관할 현은 4개였다. 순천시로 비정되기도 한다.
- * 귀단현(貴旦縣): 원래 구사진혜(仇斯珍兮).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
- * 수원현(首原縣): 원래 매성평(買省坪). 미상
- * 고서현(皐西縣): 원래 추자혜군(秋子兮郡). 지금의 담양
- * 군지현(軍支縣): 원래 굴지(屈支縣). 담양군 창평면?
3. 1. 초기 행정 구역 (660년)
웅진도독부는 백제의 옛 영토에 도독부 직할의 13현과 지방 7주 등을 설치했다.[9] 그러나 이 지방 행정 체계는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 전쟁 등으로 인해 계획으로 그치거나 제 구실을 못하다가 결국 신라에 의해 철폐되었다.[9]도독부는 백제의 옛 수도인 사비성을 중심으로 충청남도 대부분 지역을 직할했으며, 13개 현을 두었다.[9]
- 우이현(隅夷縣): 도독부 소재지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으로 추정된다. 우이는 동이족 9종족 중 하나이다.[9]
- 신구현(神丘縣): 부여군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석성현이 있던 부여군 석성면(?)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신구는 후한이 흉노족을 토벌했던 산 이름이다.[9]
- 윤성현(尹城縣): 원래 열기현(悅己縣)으로,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이다.[9]
- 인덕현(麟德縣): 원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으로, 충청남도 청양군이다.[9]
- 산곤현(散昆縣): 원래 신촌현(新村縣)으로, 보령시 주포면이다.[9]
- 안원현(安遠縣): 원래 구시파지(仇尸波知)였으며, 위치는 미상이다.[9]
- 빈문현(賓汶縣): 원래 비물현(比勿縣)으로, 서천군 비인면이다.[9]
- 귀화현(歸化縣): 원래 마사량(麻斯良)이었으며, 위치는 미상이나 군산시 옥구면의 옛 이름인 마서량(麻西良)과 유사하다.[9]
- 매라현(邁羅縣): 마한의 만로국과 이름이 비슷하다. 만로국은 보령시 남포면에 있었다.[9]
- 감개현(甘介縣): 원래 고막부리(古莫夫里)이다. 마한의 감해비리국과 유사한데, 홍성군 금마면의 옛 이름이 감개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전까지 이 지역은 군현이 설치된 바 없었다.[9]
- 내서현(奈西縣): 미상이나, 백제 시대에 논산시 북쪽에 있던 니산현(尼山縣)과 유사하다.[9]
- 득안현(得安縣): 원래 덕근지현(德近支縣)으로 불린 논산시 가야곡면이다.[9]
- 용산현(龍山縣): 원래 고마산(古麻山)인데, 서천군 한산면으로 비정하는 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9]
웅진도독부 관할의 7주는 다음과 같다.
- 동명주(東明州): 웅진(熊津)을 중심으로 4현을 관할했다.
- 지심주(支(水변尋)州): 관할 현 수는 9현이었다. 지심주의 위치 비정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노산주(魯山州): 관할 현은 6현이었다. 노성의 옛 이름과 유사하나 지금의 익산시 일대로 비정된다.
- 고사주(古四州):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이 원래 이름이며, 5현을 관할했다.
- 사반주(沙泮州): 소재지는 영광군이었으며, 관할 현은 4개였다.
- 대방주(帶方州): 치소는 나주시 다시면이며, 관할 현은 6개였다.
- 분차주(分嵯州): 담양군 금성면이며, 관할 현은 4개였다. 순천시로 비정되기도 한다.
3. 2. 행정 구역 개편 (665년)
웅진도독부는 백제의 옛 영토에 도독부 직할의 13현과 지방 7주 등을 설치했다.[9] 이 지방 행정체계는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 전쟁 등으로 계획으로 그치거나 제 구실을 못하다가 결국 신라에 의해 철폐되었다.[9]도독부는 백제의 옛 수도인 사비성을 중심으로 충남 대부분의 지역을 직할했다.[9]
- 우이현(隅夷縣): 도독부 소재지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으로 추측된다. 우이는 동이족 9종족 중의 하나이다.[9]
- 신구현(神丘縣): 부여군 석성면(?)으로 추정된다. 신구는 후한이 흉노족을 토벌했던 산 이름이다.[9]
- 윤성현(尹城縣): 원래 열기현(悅己縣)으로, 충남 청양군 정산면이다.[9]
- 인덕현(麟德縣): 원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으로, 충남 청양군이다.[9]
- 산곤현(散昆縣): 원래 신촌현(新村縣)으로, 보령시 주포면이다.[9]
- 안원현(安遠縣): 원래 구시파지(仇尸波知)로, 위치는 미상이다.[9]
- 빈문현(賓汶縣): 원래 비물현(比勿縣)으로, 서천군 비인면이다.[9]
- 귀화현(歸化縣): 원래 마사량(麻斯良)으로, 위치는 미상이지만 군산시 옥구면의 옛 이름인 마서량(麻西良)과 유사하다.[9]
- 매라현(邁羅縣): 마한의 만로국과 이름이 비슷하다. 만로국은 보령시 남포면에 있었다.[9]
- 감개현(甘介縣): 원래 고막부리(古莫夫里)이다. 마한의 감해비리국과 유사한데 홍성군 금마면의 옛 이름이 감개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전까지 이 지역은 군현이 설치된 바가 없었다.[9]
- 내서현(奈西縣): 미상이나, 백제시대에 논산시 북쪽에 있던 니산현(尼山縣)과 유사하다.[9]
- 득안현(得安縣): 원래 덕근지현(德近支縣)으로 불린 논산시 가야곡면이다.[9]
- 용산현(龍山縣): 원래 고마산(古麻山)인데 설은 분분하다. 서천군 한산면설도 있다.[9]
동명주(東明州)는 웅진(熊津, 공주시)을 중심으로 4현을 관할했다.[9]
- 웅진현(熊津縣): 공주시이다.[9]
- 노신현(鹵辛縣): 원래 아로곡(阿老谷)인데 위치는 미상이다. 아로곡은 반남군 노안현 이름과 같지만 거리상 불가능하다.[9]
- 구지현(仇知縣): 신라시대 금지현(金池縣)인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다.[9]
- 부림현(富林縣): 원래 벌음지현(伐音支縣)으로, 신라시대에 청음현(淸音縣)으로 개명한 공주시 신풍면이다.[9]
지심주(支(水변尋)州)는 9현을 관할했다. 지심주는 위치 비정이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치소가 있던 지심현을 예산군으로 보고 산하 현들도 그 근방으로 비정되었지만 현들의 원래 이름중에 상당수가 전라북도 일원에 있던 지명과 같거나 유사하다.[9]
- 기문현(己汶縣): 원래 이름이 금물(今勿)이라 하여 신라시대에 금무현(今武縣)으로 불린 예산군 고덕면으로 비정되었는데, 《일본서기》에 기문(己汶)이라는 이름 그대로 백제와 가야의 분쟁지역으로 나오므로 위치상 백제와 가야의 경계선상에 위치했을 것이다. 우륵의 12곡 중의 하나로 나오는 하기물이 있던 남원시일 것이다.[9]
- 지심현(支尋縣): 원래 지삼(只三)이라 하여 임존성으로 추측되었다.[9]
- 마진현(馬津縣): 원래 고산(孤山), 오산(烏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예산군일대로 비정되었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의 백제 시대 지명인 마돌현(馬突縣)의 다른 이름도 마진현(馬珍縣)이었다.[9]
- 자래현(子來縣): 원래 부수지(夫首支)로, 당진군의 백제 시대 이름인 벌수지(伐首支)와 유사하다.[9]
- 해례현(解禮縣): 원래 해리이(皆利伊)로, 미상이다.[9]
- 고노현(古魯縣): 원래 고마지(古麻只)로, 미상이다.[9]
- 평이현(平夷縣): 원래 지류(知留)로, 미상이다.[9]
- 산호현(珊瑚縣): 원래 사호살(沙好薩)로, 미상이다.[9]
- 융화현(隆化縣): 원래 거사물현(居斯勿縣)로, 임실, 장수 일대이다.[9]
노산주(魯山州)는 6현을 관할했으며, 논산의 옛 이름인 노성과 유사하나 지금의 익산 일대로 비정된다.[9]
- 노산현(魯山縣): 원래 감물아현(甘勿阿縣)으로,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이다.[9]
- 당산현(唐山縣): 원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으로, 신라시대 금구현(金溝縣)인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이다.[9]
- 순지현(淳遲縣): 원래 두시(豆尸)인데 비슷한 이름으로 두시이현(豆伊縣)인 전주시 이서면이다.[9]
- 지모현(支牟縣): 원래 지마마지(只馬馬知)인데 금마저(金馬渚)로 불린 익산시 금마면이다.[9]
- 오잠현(烏蠶縣): 원래 마사지(馬知沙)로, 미상이다.[9]
- 아착현(阿錯縣): 원래 원촌(遠村)인데 이름만으로는 옛날 여수시의 이름과 같지만 거리상 다른 곳으로 여겨진다. 비슷한 이름으로 전주시의 옛 이름인 완산(完山) 또는 원산(圓山)이 있다.[9]
고사주(古四州)는 원래 이름은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이며, 5현을 관할했다.[9]
- 평왜현(平倭縣): 원래 이름은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으로, 지금의 정읍시 내이다.[9]
- 대산현(帶山縣): 원래 대시산군(大尸山郡)으로, 나중에 태인현(泰仁縣)이 되었다. 지금의 정읍시 대산면이다.[9]
- 벽성현(辟城縣): 원래 벽골(辟骨)이라 불린 김제시이다.[9]
- 좌찬현(佐贊縣): 원래 상두(上杜)로, 신라시대 상질현(尙質縣)인 고창군 흥덕면이다.[9]
- 순모현(淳牟縣): 원래 두내지현(豆乃知縣)으로, 신라시대 만경현(萬頃縣)인 김제시 만경면이다.[9]
사반주(沙泮州)의 소재지는 무시이현(武尸伊縣)이었던 영광군으로, 4현을 관할했다.[9]
- 모지현(牟支縣): 원래 무시이현(武尸伊縣)으로, 지금의 전남 영광군이다.[9]
- 무할현(無割縣): 원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으로, 지금의 전북 고창군이다.[9]
- 좌노현(佐魯縣): 원래 상노현(上老縣)으로,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이다.[9]
- 다지현(多支縣): 원래 부지(夫只)인데 백제시대 다기현(多岐縣)으로 불린 나주시 문평면으로 추정된다.[9]
대방주(帶方州)는 치소는 죽군성(竹軍城)이 있던 두힐현(豆肹縣)으로,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이며, 6현을 관할했다.[9]
- 지류현(至留縣): 원래 지류(知留)로, 위치는 미상이다.[9]
- 군나현(軍那縣): 원래 굴내(屈奈)이므로 신라시대 함풍현이 있던 전남 함평군이다.[9]
- 도산현(徒山縣): 원래 추산(抽山)으로, 진도군 군내면이다.[9]
- 반나현(半那縣): 그 이름 그대로 원래 반나부리(半奈夫里)라 불린 나주시 반남면이다.[9]
- 죽군현(竹軍縣): 원래 두힐현(豆肹縣)으로, 나주시 다시면이다.[9]
- 포현현(布賢縣): 파로미(巴老彌), 발라군(發羅郡)으로, 나주시이다.[9]
분차주(分嵯州)는 원래 파지성(波知城) 율지현(栗支縣)이 있던 담양군 금성면으로, 4현을 관할했다. 분차주는 이름 때문에 순천시로 비정되기도 한다.[9]
- 귀단현(貴旦縣): 원래 구사진혜(仇斯珍兮)로,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이다.[9]
- 수원현(首原縣): 원래 매성평(買省坪)으로, 미상이다.[9]
- 고서현(皐西縣): 원래 추자혜군(秋子兮郡)으로, 지금의 담양이다.[9]
- 군지현(軍支縣): 원래 굴지(屈支縣)로, 담양군 창평면으로 추정된다.[9]
4. 웅진도독부의 성격 변화
나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패배함으로써 웅진도독부는 한반도에서 축출당했다.[10] 670년 신라가 반란을 일으켜 웅진도독부의 82개 성을 함락시키는등 백제 옛 영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당나라가 백제 옛 영역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웅진, 사비에까지 압박하였다.[2] 당은 설인귀를 계림도총관에 임명하여 웅진도독부와 공동으로 신라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점령당하였다.[2]
677년(문무왕 17년)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옛 백제 영토를 탈환하였다.[10] 이후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의 성인 건안성(현재 중국 요녕성 영구)으로 옮겼다.[10] 안동도호부가 관할하던 안주(安州) 지역령과 합쳐졌다.[2] 여기서 웅진도독 부여융은 계속해서 중국 내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서 다스렸고 이에 당초에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을 위한 기구였던 웅진도독부는 만주에서의 백제인의 자치기구로 변화했다.[10] 그리고 백제의 문화와 풍속을 보존하며 소고구려와 공존하다가 나중에 소고구려와 같이 발해에 흡수되었다.[10]
이토 카즈히코(伊藤一彦)는 당이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676년 요동성에, 웅진도독부가 677년 건안고성으로 천도하고, 신라가 지배하는 조선반도 중·남부에서 당의 세력이 사라진 것에 대해 “유사 이래, 조선반도, 적어도 북부에는 중국(인)의 지배가 직접 미쳤으나, 이 7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그것이 끝을 고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2]
4. 1. 한반도에서의 축출과 만주 이동
나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패배함으로써 웅진도독부는 한반도에서 축출당했다.[10] 670년 신라가 반란을 일으켜 웅진도독부의 82개 성을 함락시키는등 백제 옛 영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당나라가 백제 옛 영역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웅진, 사비에까지 압박하였다.[2] 당은 설인귀를 계림도총관에 임명하여 웅진도독부와 공동으로 신라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점령당하였다.[2]677년(문무왕 17년)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옛 백제 영토를 탈환하였다.[10] 이후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의 성인 건안성(현재 중국 요녕성 영구)으로 옮겼다.[10] 안동도호부가 관할하던 안주(安州) 지역령과 합쳐졌다.[2] 여기서 웅진도독 부여융은 계속해서 중국 내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서 다스렸고 이에 당초에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을 위한 기구였던 웅진도독부는 만주에서의 백제인의 자치기구로 변화했다.[10] 그리고 백제의 문화와 풍속을 보존하며 소고구려와 공존하다가 나중에 소고구려와 같이 발해에 흡수되었다.[10]
이토 카즈히코(伊藤一彦)는 당이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676년 요동성에, 웅진도독부가 677년 건안고성으로 천도하고, 신라가 지배하는 조선반도 중·남부에서 당의 세력이 사라진 것에 대해 “유사 이래, 조선반도, 적어도 북부에는 중국(인)의 지배가 직접 미쳤으나, 이 7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그것이 끝을 고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2]
4. 2. 백제 유민 자치 기구로의 전환
나당 전쟁에서 신라에 패배한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의 건안성으로 옮겼다.[10] 웅진도독 부여융은 중국 내의 백제 유민들을 계속해서 모아 다스렸으며, 이에 따라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 기구였던 웅진도독부는 만주에서 백제인의 자치 기구로 변화했다.[10] 이들은 백제의 문화와 풍속을 보존하며 소고구려와 공존하다가 발해에 흡수되었다.[10]4. 3. 소멸
나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패배함으로써 웅진도독부는 축출당했고,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의 성인 건안성으로 옮겼다.[10] 여기서 웅진도독 부여융은 계속해서 중국 내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서 다스렸고, 이에 당초에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을 위한 기구였던 웅진도독부는 만주에서의 백제인의 자치기구로 변화했다.[10] 백제 유민들은 백제의 문화와 풍속을 보존하며 소고구려와 공존하다가 나중에 소고구려와 같이 발해에 흡수되었다.[10]5. 일본과의 관계
당(나라)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옛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도독부 내에 백제에서 활동했던 일라와 같은 왜인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6] 웅진도독부는 665년 8월에 당 칙사 유인원의 주재 하에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영토 보전 등을 약속한 화계회맹을 실현시켰으나, 그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는 『책부원귀』[3] 『자치통감』[4] 『구당서』[5]에는 화계회맹 직후에 왜인이 등장한다.[6]
같은 사료에 따르면, 화계회맹 후 백제진장 유인궤가 신라, 백제, 탐라, 왜국의 사국 사신을 이끌고 태산의 봉선 의식에 참석했는데, 의식의 모습 외에도 준비 단계부터 그들 사국을 포함한 제번 족장들이 호종을 거느리고 행렬에 참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웅진도독부가 왜인을 동행시키는 등 당시 웅진도독부 내에 왜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케우치 히로시는 이들을 웅진도독부에 억류 또는 잔류한 왜인으로 보았다.[6]
왜인들은 백강 이후에도 옛 백제 지역에 체류했는데, 반위나 일라가 때때로 백제 왕권의 입장에서 행동했던 것처럼, 왜인들이 웅진도독부에 종사했고, 664년부터 시작된 백강 전투의 전후 처리 및 대왜 협상은 웅진도독부의 왜인들의 기존 네트워크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많았다.[6]
671년에 웅진도독부는 도구, 쓰쿠시 사야마, 한시마 사바, 푸시반 4명을 당인 곽무염 일행의 선발대로 대마도에 파견했는데,[7] 『일본서기』에 따르면 쓰쿠시 사야마는 백강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웅진도독부에 있었다.[8] 또한 도구, 한시마 사바, 푸시반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으로 보인다.[6] 웅진도독부는 왜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시켜, 웅진도독부의 의향에 따라 이러한 왜인들을 외교 활동에 활발하게 활용했다.[6]
쓰쿠시 사야마의 선대는 쓰쿠시 군 반위와 관련된 호족으로 보인다.[6] 한시마 사바는 "한시마"라는 성씨를 볼 때 부젠국 우사군 신도향의 호족으로 추정된다. 웅진도독부가 당인 곽무염 일행의 선발대로 대마도에 파견한 4명 중 2명도 역사적으로 한반도 서남부(백제 지역)와 연관이 있는 북큐슈와 관련된 호족이며, 백강 이후의 웅진도독부에서도 왜인들의 기존 네트워크를 계승·활용했음을 보여준다.[6]
5. 1. 웅진도독부 내 왜인의 존재
당(나라)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옛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도독부 내에 백제에서 활동했던 일라와 같은 왜인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6] 웅진도독부는 665년 8월에 당 칙사 유인원의 주재 하에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영토 보전 등을 약속한 화계회맹을 실현시켰으나, 그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는 『책부원귀』[3] 『자치통감』[4] 『구당서』[5]에는 화계회맹 직후에 왜인이 등장한다.[6]같은 사료에 따르면, 화계회맹 후 백제진장 유인궤가 신라, 백제, 탐라, 왜국의 사국 사신을 이끌고 태산의 봉선 의식에 참석했는데, 의식의 모습 외에도 준비 단계부터 그들 사국을 포함한 제번 족장들이 호종을 거느리고 행렬에 참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웅진도독부가 왜인을 동행시키는 등 당시 웅진도독부 내에 왜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케우치 히로시는 이들을 웅진도독부에 억류 또는 잔류한 왜인으로 보았다.[6]
왜인들은 백강 이후에도 옛 백제 지역에 체류했는데, 반위나 일라가 때때로 백제 왕권의 입장에서 행동했던 것처럼, 왜인들이 웅진도독부에 종사했고, 664년부터 시작된 백강 전투의 전후 처리 및 대왜 협상은 웅진도독부의 왜인들의 기존 네트워크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많았다.[6]
671년에 웅진도독부는 도구, 쓰쿠시 사야마, 한시마 사바, 푸시반 4명을 당인 곽무염 일행의 선발대로 대마도에 파견했는데,[7] 『일본서기』에 따르면 쓰쿠시 사야마는 백강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웅진도독부에 있었다.[8] 또한 도구, 한시마 사바, 푸시반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으로 보인다.[6] 웅진도독부는 왜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시켜, 웅진도독부의 의향에 따라 이러한 왜인들을 외교 활동에 활발하게 활용했다.[6]
쓰쿠시 사야마의 선대는 쓰쿠시 군 반위와 관련된 호족으로 보인다.[6] 한시마 사바는 "한시마"라는 성씨를 볼 때 부젠국 우사군 신도향의 호족으로 추정된다. 웅진도독부가 당인 곽무염 일행의 선발대로 대마도에 파견한 4명 중 2명도 역사적으로 한반도 서남부(백제 지역)와 연관이 있는 북큐슈와 관련된 호족이며, 백강 이후의 웅진도독부에서도 왜인들의 기존 네트워크를 계승·활용했음을 보여준다.[6]
5. 2. 왜인 네트워크의 활용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옛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도독부 내에 백제에서 활동했던 일라와 같은 왜인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6] 웅진도독부는 665년 8월에 당 칙사 유인원의 주재 하에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영토 보전 등을 약속한 화계회맹을 실현시켰으나, 그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는 『책부원귀』[3] 『자치통감』[4] 『구당서』[5]에는 화계회맹 직후에 왜인이 등장한다.[6]같은 사료에 따르면, 화계회맹 후 백제진장 유인궤가 신라, 백제, 탐라, 왜국의 사국 사신을 이끌고 태산의 봉선 의식에 참석했는데, 의식의 모습 외에도 준비 단계부터 그들 사국을 포함한 제번 족장들이 호종을 거느리고 행렬에 참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이들을 웅진도독부에 억류 또는 잔류한 왜인으로 보았다.[6]
왜인들은 백강 이후에도 옛 백제 지역에 체류했는데, 반위나 일라가 때때로 백제 왕권의 입장에서 행동했던 것처럼, 왜인들이 웅진도독부에 종사했고, 664년부터 시작된 백강 전투의 전후 처리 및 대왜 협상은 웅진도독부의 왜인들의 기존 네트워크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많았다.[6]
671년에 웅진도독부는 도구, 쓰쿠시 사야마, 한시마 사바, 푸시반 4명을 당인 곽무염 일행의 선발대로 대마도에 파견했는데,[7] 『일본서기』에 따르면 쓰쿠시 사야마는 백강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웅진도독부에 있었다.[8] 도구, 한시마 사바, 푸시반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으로 보인다.[6] 쓰쿠시 사야마의 선대는 쓰쿠시 군 반위와 관련된 호족으로 보이며,[6] 한시마 사바는 "한시마"라는 성씨를 볼 때 부젠국 우사군 신도향의 호족으로 추정된다. 웅진도독부가 당인 곽무염 일행의 선발대로 대마도에 파견한 4명 중 2명도 역사적으로 한반도 서남부(백제 지역)와 연관이 있는 북큐슈와 관련된 호족이며, 백강 이후의 웅진도독부에서도 왜인들의 기존 네트워크를 계승·활용했음을 보여준다.[6] 웅진도독부는 왜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시켜, 웅진도독부의 의향에 따라 이러한 왜인들을 외교 활동에 활발하게 활용했다.[6]
참조
[1]
서적
A concise history of Korea :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2020
[2]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서적
白村江直後における熊津都督府の対倭外交
『人文×社会』編集委員会
2021-12-15
[7]
인용
[8]
인용
[9]
문서
드라마 서동요에서 아착이 익산의 옛날 이름으로 나온다.
[10]
뉴스
“백제 멸망시기 8세기 중반~ 9세기 초로 봐야”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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