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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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장통은 후한 말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뛰어난 기억력과 글쓰기 능력을 보였다. 청주, 서주 등지를 유학하며 학문을 익혔으며, 고간에게 비판적인 조언을 하여 명성을 얻었다.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를 섬겼으며, 저서 《창언》을 남겼다.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중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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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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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중장통(仲長統)
시대후한
생몰180년 ~ 220년
공리(公理)
본관 · 출신연주 산양군 고평현
관직상서랑(尙書郞) →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

중장통은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공리(公理)이며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하여 기억력이 좋았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 상서령 순욱의 천거로 상서랑이 되었고, 이후 참승상군사가 되어 조조를 섬겼다. 옛날과 지금의 일을 비교하며 항상 분개하고 탄식하였고, 《창언》을 저술하였다. 연강 원년 41세(만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1. 젊은 시절과 학문

젊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책을 많이 읽었고 기억력과 글 쓰는 능력이 뛰어났다. 20세가 지나고 청주, 서주, 병주, 기주 등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익혔고, 상당군에서 만난 상림, 무습 등은 중장통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무습은 그가 전한가의, 동중서, 유향, 양웅의 뒤를 이을 재능을 가졌다며 극찬하였다.

병주자사 고간은 각지의 선비들을 초빙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중장통 또한 고간을 찾아갔고, 고간이 세간의 일을 물으니 "당신은 큰 뜻을 품고는 있으나 큰 재능은 갖고 있지 않고, 선비를 좋아하나 사람을 고를 줄은 모릅니다. 이를 심히 경계하여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고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중장통은 고간의 곁을 떠났다. 훗날 고간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죽었고, 때문에 병주·청주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중장통은 세상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었으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나서기도 하였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를 '미친 선비'(狂生)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나 군에서 초청을 하여도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2.2. 고간과의 만남과 비판

병주자사 고간은 각지의 선비들을 초빙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중장통 또한 고간을 찾아갔고, 고간이 세간의 일을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고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중장통은 고간의 곁을 떠났다. 훗날 고간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죽었고, 이로 인해 병주와 청주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2.3. 은둔과 관직 생활

젊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책을 많이 읽었고 기억력과 글 쓰는 능력이 뛰어났다. 20세가 지나고 청주, 서주, 병주, 기주 등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익혔고, 상당군에서 만난 상림, 무습 등은 중장통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무습은 그가 전한가의, 동중서, 유향, 양웅의 뒤를 이을 재능을 가졌다며 극찬하였다.

병주자사 고간은 각지의 선비들을 초빙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중장통 또한 고간을 찾아갔고, 고간이 세간의 일을 물으니 "당신은 큰 뜻을 품고는 있으나 큰 재능은 갖고 있지 않고, 선비를 좋아하나 사람을 고를 줄은 모릅니다. 이를 심히 경계하여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고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중장통은 고간의 곁을 떠났다. 훗날 고간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죽었고, 때문에 병주·청주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중장통은 세상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었으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나서기도 하였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를 '미친 선비'(狂生)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나 군에서 초청을 하여도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상서령 순욱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상서랑(尙書郞)에 천거하였으며, 그 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가 되어 조조를 섬겼다.

2.4. 저술과 죽음

젊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었으며, 기억력과 글 쓰는 능력이 뛰어났다. 20세가 지나고 청주, 서주, 병주, 기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문을 익혔다. 상당군에서 만난 상림, 무습 등은 중장통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무습은 그가 전한가의, 동중서, 유향, 양웅의 뒤를 이을 재능을 가졌다며 극찬하였다.

중장통은 세상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었으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나서기도 하였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를 '미친 선비'(狂生)이라고 불렀다. 주나 군에서 초청하여도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상서령 순욱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상서랑(尙書郞)에 천거하였으며, 그 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가 되어 조조를 섬겼다.

중장통은 옛날과 지금의 일을 비교하며 항상 분개하고 탄식하였고, 때문에 《창언(昌言)》을 지었다.

연강 원년(220년)에 4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3. 주요 저작

* 《창언》

4. 평가

중장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하여 기억력이 좋았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 20세가 넘어 청주, 서주, 병주, 기주를 유학하며, 상림, 무습 등 많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무습은 중장통을 전한가의, 동중서, 유향, 양웅에 버금가는 인재라고 칭찬했다.

고간에게 웅대한 뜻은 있으나 재능이 부족하고,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없다고 직언했다가, 고간이 반란을 일으켰다 패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광생'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를 섬기게 되었다.

옛일과 당시의 일을 논하며 분개하여 탄식했고, 34편 10여 만 자에 달하는 『창언』을 저술했다. 연강 원년(220년)에 40세로 사망했다.

4.1. 당대의 평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하여 기억력이 좋았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 20세가 넘었을 무렵부터 청주, 서주, 병주, 기주를 유학했다. 상당군에 피난해 있다가 그를 만난 상림이나, 동해군의 무습 등 그와 교류가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 무습은 늘 "중장통은 전한가의, 동중서, 유향, 양웅의 뒤를 이을 만한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다.

고간은 병주에서 각지의 선비를 초빙했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았다. 중장통도 고간의 곁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고, 고간으로부터 당시 세상의 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중장통은 "귀하는 웅대한 뜻을 품고 있어도 웅대한 재능은 갖추지 못했고, 선비를 좋아하지만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없습니다.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고간은 자부심 때문에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중장통은 그의 곁을 떠났다. 그 후 고간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사했다. 이로 인해 병주와 기주의 사람들은 중장통을 알게 되었다.

중장통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으로 직언을 꺼리지 않았으며, 갑자기 침묵하거나 말을 꺼냈기 때문에, 그를 광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주나 군에서 등용하려는 초빙이 있어도, 병을 핑계 삼아 나아가지 않았다.

순욱이 그의 재능을 알고 높이 평가하여 상서랑으로 추천했다. 그 후 승상 군사가 되어 조조를 섬겼다.

중장통은 옛일이나 당시의 일을 논하기 시작하면 항상 분개하여 탄식했다. 그래서 『창언』이라는 34편에 걸쳐 10여 만 자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

4.2. 후대의 평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하여 기억력이 좋았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 20세가 넘었을 무렵부터 청주, 서주, 병주, 기주를 유학했다. 상당군에 피난해 있다가 그를 만난 상림이나, 동해군의 무습 등 그와 교류가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 무습은 늘 "중장통은 전한가의, 동중서, 유향, 양웅의 뒤를 이을 만한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다.

병주의 고간은 각지의 선비를 초빙했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았다. 그의 곁을 방문한 중장통도 환대를 받았고, 고간으로부터 당시 세상의 일을 질문받았다. 중장통은 "귀하는 웅대한 뜻을 품고 있어도 웅대한 재능은 갖추지 못했고, 선비를 좋아하지만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없습니다.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고간은 자부심 때문에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중장통은 그의 곁을 떠났다. 그 후 고간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사했다. 이로 인해 병주와 기주의 사람들은 중장통을 알게 되었다.

중장통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으로 직언을 꺼리지 않았으며, 갑자기 침묵하거나 말을 꺼냈기 때문에, 그를 광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주나 군에서 등용하려는 초빙이 있어도, 병을 핑계 삼아 나아가지 않았다.

순욱이 그의 재능을 알고 그를 높이 평가하여 상서랑으로 추천했다. 그 후 승상 군사가 되어 조조를 섬겼다.

중장통은 옛일이나 당시의 일을 논하기 시작하면 항상 분개하여 탄식했다. 그래서 『창언』이라는 34편에 걸쳐 10여 만 자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