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날
1. 개요
지구의 날은 1969년 유네스코 회의에서 제안된 개념으로, 1970년 4월 22일에 처음 기념되었다. 이 날은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제정되었으며, 1970년 2천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참여한 집회로 시작되었다. 이후 192개국에서 기념되는 세계적인 행사로 발전했으며, 기후 변화, 플라스틱 오염 등 다양한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데 기여해 왔다. 1990년에는 2억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로 확대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지구 온난화와 지속 가능한 에너지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유엔에서는 2009년 4월 22일을 세계 지구의 날로 채택했다.
| 종류 | 국제적인 기념일 |
|---|---|
| 의미 | 환경 보호 지지 |
| 시작일 | 1970년 |
| 날짜 | 4월 22일 |
| 빈도 | 매년 |
| 기간 |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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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행사 |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
|---|---|
| 참여 인원 | 약 10억 명 이상 |
| 주최 기관 | 어스데이 네트워크(EARTHDAY.ORG) |
| 기원 |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 해상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름 유출 사고가 계기가 되었다. |
|---|---|
| 창시자 | 게일로드 넬슨 미국 상원의원 |
| 주요 활동가 | 데니스 헤이즈 |
| 초기 목표 |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고 환경 보호 운동을 촉진하는 것 |
| 환경 운동의 시작 | 지구의 날은 현대 환경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
| 2020년 주제 | 기후 행동 |
|---|---|
| 2022년 주제 | 우리 행성에 투자하십시오 |
| 2024년 주제 | 플라스틱 대 지구 (Planet vs. Plastics) |
| 주요 활동 | 나무 심기, 환경 정화 활동, 환경 교육, 기후 변화 대응 캠페인 등 |
| 노동 운동과의 연대 | 초기 지구의 날부터 노동 운동과 환경 운동이 협력하는 전통이 있다. |
|---|---|
| 정치적 영향 | 지구의 날은 미국 환경 보호국(EPA)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
| 세계적 확산 | 지구의 날은 전 세계적으로 기념되는 국제적인 기념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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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시작된 행사 -
한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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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시작된 행사 -
퀴어 퍼레이드
퀴어 퍼레이드는 성소수자들의 권리와 자긍심을 표현하는 행사로, 1969년 스톤월 폭동 이후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다양한 형태와 이름으로 개최되지만 상업화 논란과 반대 세력의 저항 등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
유엔 기념일 -
유엔 아랍어의 날
유엔 아랍어의 날은 아랍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랍 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매년 12월 18일에 기념되는 날로, 아랍어가 유엔 공식 언어로 채택된 것을 기념하며 아랍 문학, 예술, 과학 등의 성과를 조명하고 아랍어 교육과 문화 교류를 장려한다. -
유엔 기념일 -
국제 행복의 날
국제 행복의 날은 2012년 유엔에 의해 제정되어 2013년부터 기념되기 시작했으며, 행복의 중요성을 알리고 공공 정책에 행복을 통합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권장한다. -
지구 -
가이아 이론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생물권, 대기권, 수권, 지권이 상호작용하며 항상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거대한 자기조절 시스템으로 보는 이론으로, 지구 시스템 과학의 연구 대상이자 환경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지구 -
창백한 푸른 점
창백한 푸른 점은 보이저 1호가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촬영한 0.12픽셀 크기의 푸른 지구 사진으로, 칼 세이건은 이를 인류의 겸손함과 책임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지구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2. 역사
지구의 날은 1969년 유네스코 환경 회의에서 존 매코넬이 처음 제안했다. 1970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셉 알리오토가 최초로 지구의 날을 선포했고,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도시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다. UN 사무총장 우 탄은 매코넬의 제안을 지지하며 1971년 2월 26일 선포문에 서명했다.
1972년, UN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은 3월 춘분에 지구의 날을 기념했고, 이후 매년 3월 춘분에 UN 지구의 날 행사가 이어졌다. 마가렛 미드는 춘분 지구의 날을 지지하며, 3월 춘분을 기점으로 지구 전체가 공유하는 사건을 기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춘분에는 일본이 UN에 기증한 일본 평화의 종을 울리는 것이 관례이며, 전 세계 여러 곳에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한편,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 미국 상원 의원 게일로드 넬슨은 1970년 4월 22일을 지구의 날로 지정하고, 학생들의 토론회 참여를 독려했다. 넬슨은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날씨, 방학, 시험 기간, 공휴일 등을 고려하여 날짜를 정했다. 당시 넬슨은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생 데니스 헤이즈를 미국 내 활동 책임자로 임명했다. 헤이즈는 넬슨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이후 지구의 날 정착에 헌신했다.
1970년 4월 22일은 블라디미르 레닌 탄생 100주년이었지만, 넬슨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 날짜가 우연이 아니며 "공산주의 책략"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환경 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려는 우익 세력의 억지 주장이었다.
이후 4월 22일 지구의 날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미국에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환경보호청 설립과 다양한 환경 법률 제정으로 이어졌다.
1990년에는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이 협력하여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지구의 날 20 국제 평화 등반'이 진행되었다.
2.1. 1969년 산타바바라 기름 유출 사고와 환경 운동의 태동
1969년 1월 28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 해안에서 6km 떨어진 곳에서 유니온 오일의 유정에서 유정 분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3e6USgal가 넘는 원유가 유출되어 1만 마리 이상의 바닷새, 돌고래, 물개, 바다사자가 폐사했다. 이 재난은 환경 규제와 환경 교육, 그리고 지구의 날을 만들기 위한 운동가들의 활동을 촉발시켰다. 셀마 루빈, 마크 맥기니스, 버드 보텀스 등이 이 재난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최초의 지구의 날을 기획한 데니스 헤이즈는 게일로드 넬슨 상원의원이 산타바바라 해협의 800mi2에 달하는 기름띠를 보고 지구의 날을 만들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1970년 1월 28일, 원유 유출 사고 1주년을 맞아 환경 권리의 날이 제정되었고, 로드 내시가 작성한 환경 권리 선언이 낭독되었다. 마크 맥기니스가 이끈 환경 권리의 날 주최자들은 피트 맥클로스키 하원의원과 협력하여 미국 환경정책법 제정에 대해 논의했다. 맥클로스키 의원, 게일로드 넬슨 상원의원, 데니스 헤이스, 앨런 크랜스턴 상원의원, 폴 엘리히, 데이비드 브라우어 등 저명한 지도자들은 이 선언을 지지하고 환경 권리의 날 회의에서 연설했다.
프랜시스 사르구이스는 이 회의가 운동의 세례식과 같았다고 평가했다. 헤이스는 이 회의가 진정한 환경 운동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시, 개럿 하딘, 맥기니스 등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 캠퍼스에 최초의 환경학 학부 과정을 개발했다.
침묵의 봄의 출판, 지구돋이 사진 공개, 산타바바라 원유 유출 사건, 카이아호가 강 화재 사건 등은 넬슨으로 하여금 환경 운동을 시작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넬슨은 대학 캠퍼스에서의 환경 강좌(teach-in)가 그러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논쟁을 위해 수백 개의 대학 캠퍼스에서 강좌가 열렸다. 이러한 논쟁들은 전쟁에 대한 논의를 대중의 의식 속에 고양시켰고, 한 세대의 학생 운동가들을 참여시켰다.
넬슨은 앤서니 로이스먼에게 비영리 단체인 환경 강좌(Environmental Teach-In, Inc.)를 설립하여 캠페인을 관리하도록 요청했고, 공화당 하원의원 피트 맥클로스키에게 초당적 이사회 공동 의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1969년 9월 20일, 넬슨 상원의원은 워싱턴 대학교에서 "환경 강좌" 계획을 처음 발표했다. 그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베트남 전쟁과 시민권 문제에 대한 이 나라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데 보였던 것과 같은 관심을 환경 문제에도 보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전국적인 강좌가 열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넬슨 상원의원은 더 많은 연설에서 강좌를 계속 장려했다. 에얼리 하우스에서 11월에 있었던 연설에는 뉴욕 타임스 기자가 청중 속에 있었다. 그 결과 1면 기사가 나오면서 전환점이 되었다. 전국에서 넬슨 상원의원 사무실로 문의 편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사는 당시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스의 관심을 끌었다. 헤이스는 워싱턴 D.C.로 여행을 가서 넬슨 상원의원과 면담을 가졌고, 전국 캠페인의 사무총장이 되기 위해 하버드를 중퇴했다.
2.2. 1970년: 최초의 지구의 날
1969년 1월 28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 해안에서 발생한 유니온 오일의 유정 분출 사고는 3e6USgal가 넘는 원유 유출로 1만 마리 이상의 해양 생물을 폐사시키는 재난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환경 운동가들의 활동을 촉발시켰고, 셀마 루빈, 마크 맥기니스, 버드 보텀스(Bud Bottoms) 등이 지구의 날 제정에 앞장섰다. 데니스 헤이즈는 게일로드 넬슨 상원의원이 이 사건을 계기로 지구의 날을 만들 영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사고 1주년인 1970년 1월 28일, 환경 권리의 날이 제정되고 로드 내시(Rod Nash)가 작성한 환경 권리 선언이 낭독되었다. 마크 맥기니스가 이끈 환경 권리의 날 주최자들은 피트 맥클로스키(Pete McCloskey) 하원의원과 협력하여 미국 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 제정에 힘을 쏟았다. 넬슨 상원의원, 데니스 헤이스, 앨런 크랜스턴 상원의원 등 저명한 지도자들도 이 선언을 지지하고 연설했다.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게일로드 넬슨은 레이첼 카슨의 책 침묵의 봄, 1968년 지구돋이 NASA 사진, 산타바바라 원유 유출 사건, 카이아호가 강 화재 사건 등을 통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학 캠퍼스에서의 환경 강좌(teach-in)를 통해 환경 운동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넬슨은 베트남 전쟁 반대 강좌에서 영감을 얻어, 환경 강좌(Environmental Teach-In, Inc.)를 설립하고 앤서니 로이스먼(Anthony Roisman)에게 캠페인 관리를 요청했다. 그는 공화당 하원의원 피트 맥클로스키에게 공동 의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1969년 9월 20일, 넬슨 상원의원은 워싱턴 대학교에서 "환경 강좌" 계획을 발표했고, 11월 에얼리 하우스(Airlie House) 연설은 뉴욕 타임스 1면 기사로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스는 넬슨 상원의원과의 면담을 통해 전국 캠페인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헤이스는 "강좌"라는 명칭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판단하고, 줄리안 코에니그에게 새로운 명칭을 제안받았다. 코에니그는 "지구의 날"을 제안했고, 헤이스는 이를 즉시 채택했다. 코에니그의 광고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지구의 날"은 곧 행사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헤이스는 캠페인의 초점을 대학에서 지역 사회 조직으로 전환하고, 초중등 교육 수준에서 환경 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정했다. 월트 켈리는 "우리는 적을 만났고, 그것은 바로 우리다"라는 포고 포스터를 만들어 지구의 날을 홍보했다.
최초의 지구의 날에는 약 2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참여했으며, 현재는 192개국에서 기념되는 세계적인 행사로 발전했다. 첫 번째 지구의 날의 가장 큰 재정적 지원은 조직 노동계에서 나왔다. 월터 루터가 이끌던 전미 자동차 노동조합(UAW)은 2000USD를 기부하고, 전화 기능, 문헌 인쇄 및 우편 발송, 회원들의 시위 참여 독려 등 다양한 지원을 제공했다. 헤이스는 "UAW가 없었다면 첫 번째 지구의 날은 실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 기부금과 표준 포스터, 핀 판매도 중요한 자금 조달원이었다.
2.2.1. 4월 22일로 결정된 이유
넬슨은 대학 캠퍼스에서의 참여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생각하기에 "환경 교육"을 위한 날짜로 이 날짜를 선택했다. 그는 시험이나 봄방학 기간이 아닌 4월 19일부터 25일까지의 주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부활절이나 유월절과 같은 종교적 휴일과 겹치지 않았고, 날씨가 좋은 봄철 후반이었다. 더 많은 학생들이 수업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았고, 다른 주중 행사와의 경쟁도 적었으므로 그는 4월 22일 수요일을 선택했다. 이 날은 저명한 환경보호론자 존 뮤어의 생일 기념일 이후였다. 국립공원관리청, 존 뮤어 국립 사적지는 지구의 날(4월 21일, 22일 또는 23일)에 "생일-지구의 날"이라는 행사를 매년 개최하여 지구의 날과 존 뮤어의 환경주의와 보존에 대한 공동 의식에 대한 기여를 기념하고 있다.
넬슨은 알지 못했지만, 1970년 4월 22일은 우연히도 그레고리력(소비에트 연방이 1918년에 채택)으로 환산했을 때 블라디미르 레닌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타임지는 일부 사람들이 이 날짜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이 행사가 "공산주의의 계략"이라는 단서라고 의심했다고 보도했으며, 미국 혁명 자녀회 회원의 말을 인용하여 "파괴적인 요소들이 미국 어린이들이 자신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살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연방수사국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레닌과의 연관성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FBI가 1970년 시위에서 감시 활동을 벌였다는 주장이 있다. 지구의 날의 날짜가 레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생각은 일부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이는 레닌이 1920년에 제정한 수보트니크와 유사성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수보트니크는 사람들이 공동체 봉사를 해야 하는 날로, 일반적으로 공공 장소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재활용 가능한 물질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수보트니크는 소련의 영향권에 있는 다른 국가들, 특히 동유럽에도 부과되었고, 소련은 전성기에 레닌의 생일인 4월 22일을 전국적인 수보트니크로 지정했다. 이 날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5년 공산주의를 기념하는 국가 공휴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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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스콘신주 출신의 미국 상원 의원이었던 게일로드 넬슨(Gaylord Nelson)은 1970년 4월 22일 수요일을 지구의 날(Earth Day)로 정하고 주로 학생들에게 토론회 참여를 호소했다. 날씨가 좋고, 방학이나 시험 기간이 아니며 공휴일도 아니었던 날이었기에 학생들이 참여하기에 적합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호소에 호응한 사람은 2천만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넬슨이 미국 내 활동 총괄 책임자로 선정한 사람은 당시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즈(Denis Hayes)였다. 헤이즈는 넬슨의 구상에 협력하여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헤이즈는 이를 계기로 대학을 떠나 지구의 날 정착에 힘썼다.
2.2.2. 레닌 탄생 100주년과의 관계
1970년 4월 22일은 그레고리력(소비에트 연방이 1918년에 채택)으로 환산했을 때 블라디미르 레닌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타임지는 일부 사람들이 이 날짜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이 행사가 "공산주의의 계략"이라는 단서라고 의심했다고 보도했으며, 미국 혁명 자녀회 회원의 말을 인용하여 "파괴적인 요소들이 미국 어린이들이 자신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살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연방수사국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레닌과의 연관성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으며, FBI가 1970년 시위에서 감시 활동을 벌였다는 주장이 있다. 지구의 날이 레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생각은 일부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이는 레닌이 1920년에 제정한 수보트니크와 유사성으로 인해 생겨났는데, 사람들이 공동체 봉사를 해야 하는 날로, 일반적으로 공공 장소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재활용 가능한 물질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의 미국 상원 의원이었던 게일로드 넬슨(Gaylord Nelson)은 1970년 4월 22일 수요일을 지구의 날(Earth Day)로 정하고 주로 학생들에게 토론회 참여를 호소했다. 넬슨은 학생들이 참여하기에 적합하도록 날씨가 좋고, 방학이나 시험 기간이 아니며 공휴일도 아닌 날을 선택했다. 넬슨은 레닌 탄생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환경 보호론자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우익의 억지 주장이다.
2.3. 1970년대 이후: 지구의 날 확산과 환경 정책의 발전
1970년 지구의 날은 1969년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니온 오일(Union Oil) 원유 유출 사고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고로 1만 마리 이상의 바닷새, 돌고래, 물개 등이 폐사했고, 환경 운동가들은 환경 규제와 교육, 그리고 지구의 날 제정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셀마 루빈(Selma Rubin), 마크 맥기니스(Marc McGinnes) 등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최초의 지구의 날 기획자인 데니스 헤이즈(Denis Hayes)는 게일로드 넬슨(Gaylord Nelson) 상원의원이 비행기에서 기름띠를 보고 지구의 날을 만들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사고 1주년인 1970년 1월 28일, 환경 권리의 날이 제정되었고, 로드 내시(Rod Nash)가 작성한 환경 권리 선언이 낭독되었다. 마크 맥기니스(Marc McGinnes) 등 환경 운동가들은 미국 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 제정에 힘썼다.
침묵의 봄(Silent Spring) 출판, 1968년 지구돋이(Earthrise) NASA 사진, 산타바바라 원유 유출 사건, 카이아호가 강(Cuyahoga River) 화재 등은 넬슨이 환경 운동을 시작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게 했다. 넬슨은 대학 캠퍼스에서의 환경 강좌(teach-in)를 통해 환경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다.
넬슨은 환경 강좌(Environmental Teach-In, Inc.)를 설립하고, 공화당 하원의원 피트 맥클로스키(Pete McCloskey)와 함께 공동 의장을 맡았다. 1969년 9월 20일, 넬슨 상원의원은 "환경 강좌"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데니스 헤이스(Denis Hayes)가 전국 캠페인 사무총장으로 합류했다. 줄리엔 코에니그가 "강좌"라는 명칭 대신 "지구의 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했고, 그의 광고는 큰 성공을 거두어 "지구의 날"이 행사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헤이스는 캠페인의 초점을 대학에서 지역 사회 조직으로 전환하고, 초중등 교육 수준에서 환경 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정했다. 월트 켈리는 "우리는 적을 만났고, 그것은 바로 우리다"라는 인용구가 적힌 포스터를 만들어 지구의 날을 홍보했다.
첫 번째 지구의 날에는 약 2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참여했으며, 현재는 192개국에서 기념되는 세계적인 행사로 발전했다. 월터 루터가 이끌던 유나이티드 오토 워커스(UAW)는 첫 번째 지구의 날을 지원하기 위해 2000USD를 기부했다.
지구의 날 이후, 환경 교육 운동 직원들은 환경 행동(Environmental Action, EA)으로 이직하여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EA는 더티 더즌(Dirty Dozen) 캠페인을 통해 환경 기록이 좋지 않은 의원들을 낙선시키는 데 기여했고, 이는 깨끗한 공기법, 깨끗한 물법, 멸종 위기 종 보호법 등 환경 법안 제정으로 이어졌다.
미시간 대학교에서는 1970년 3월 11일부터 14일까지 환경 관련 강좌를 개최하여 지구의 날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컬럼비아 대학교 학생들은 뉴욕시 활동을 주도했으며, 존 린지(John Lindsay) 뉴욕 시장의 지원을 받아 5번가를 폐쇄하고 행사를 진행했다. 유니온 스퀘어에는 하루 동안 1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필라델피아 페어마운트 공원(Fairmount Park)에서는 에드먼드 머스키(Edmund Muskie) 상원의원이 기조연설을 했고, 랠프 네이더(Ralph Nader), 이언 맥하그(Ian McHarg), 조지 월드(George Wald) 등이 참석했다.
1970년대는 청정대기법, 청정수역법, 멸종위기종 보호법 등 환경 관련 법률이 제정되고, 미국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이 설립되는 등 환경 정책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1980년 지구의 날 행사는 축제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었으며, 1990년 지구의 날 행사는 141개국 2억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환경 문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지구 정상 회의의 길을 열었다.
1990년 지구의 날에는 에드워드 후리아가 조직한 지구의 날 20재단과 데니스 헤이스가 조직한 1990년 지구의 날 위원회, 두 개의 그룹이 결성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인해 힘을 합치지 못했다. 짐 휘태커가 이끈 1990년 지구의 날 국제 평화 등반은 에베레스트 산에서 2톤 이상의 쓰레기를 수거했다.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는 1990년에 지구의 날 테마의 싱글 "내일의 세계"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핫 컨트리 송 차트에서 74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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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스콘신주 출신의 미국 상원 의원이었던 게일로드 넬슨(Gaylord Nelson)은 1970년 4월 22일 수요일을 지구의 날(Earth Day)로 정하고 학생들에게 토론회 참여를 호소했다. 넬슨은 당시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즈(Denis Hayes)를 미국 내 활동 총괄 책임자로 선정했다. 헤이즈는 개렛 듀벨(Garrett DeBell)을 편집자로 하여 토론회를 위한 자료를 만드는 등 넬슨의 구상에 협력하여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대학을 떠나 지구의 날 정착에 힘썼다.
이후 4월 22일 지구의 날 집회라는 운동 형태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환경보호청이 설립되고 각종 환경 보호 법률이 정비되었다.
1990년에는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이 협력하여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는 '지구의 날 20 국제 평화 등반(Earth Day 20 International Peace Climb)'이 실시되었다.
2.4. 1990년: 지구의 날 20주년과 국제적인 협력
1990년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이 협력하여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지구의 날 20 국제 평화 등반(Earth Day 20 International Peace Climb)'은 짐 휘태커가 이끌었으며, 미국, 소련, 중국 산악인들이 함께 등반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들은 이전 등반대가 남긴 2톤 이상의 쓰레기를 수거하여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90년 지구의 날에는 141개국 2억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전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는 전 세계적인 재활용 노력에 큰 영향을 주었고,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지구 정상 회의 개최에 기여했다.
1970년 첫 지구의 날과 달리, 20주년 기념 행사는 TV와 라디오를 적극 활용하고, 수백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는 등 더욱 강력한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1990년 지구의 날 행사를 위해 에드워드 후리아가 조직한 지구의 날 20재단과 데니스 헤이스가 조직한 1990년 지구의 날 위원회, 두 그룹이 결성되었다. 게일로드 넬슨 상원의원은 두 그룹 모두의 명예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조직 구조와 전략에 대한 의견 차이로 두 그룹은 통합되지 못했다. 특히, 지구의 날 20재단은 1990년 지구의 날 위원회 이사회에 휴렛 패커드를 포함시킨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휴렛 패커드가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두 번째로 많은 프레온을 배출하는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는 1990년에 지구의 날을 기념하는 싱글 "내일의 세계"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여러 컨트리 가수들이 참여했으며, 핫 컨트리 송 차트에서 74위를 기록했다.
2.5. 2000년대 이후: 지구 온난화와 지속 가능한 에너지에 대한 관심 증대
새천년이 다가오면서, 데니스 헤이즈는 지구 온난화에 초점을 맞추고 청정 에너지를 추진하는 또 다른 캠페인을 이끌기로 합의했다. 2000년 4월 22일 지구의 날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활동가들을 연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날 전 세계 5,000개의 환경 단체가 참여하여 184개국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아프리카 가봉에서는 토킹 드럼이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했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 모이는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2001년에는 구글의 첫 지구의 날 두들(Doodle)이 등장했다.
2003년 지구의 날 주제는 '물, 삶의 근원(Water for Life Campaign)'이었다. 이 해, 지구의 날 네트워크(Earth Day Network)는 "당신의 물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What's in Your Water?)"라는 수질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토고, 이집트, 쿡 제도, 요르단, 팔레스타인, 일본, 베네수엘라, 슬로베니아, 나이지리아, 캐나다를 포함한 모든 대륙에서 물 관련 워크숍, 전시회,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2004년 미국에서는 지구의 날 네트워크와 파트너들이 지구의 날을 맞아 수십만 명의 유권자 등록에 집중했다. 대규모 나무 심기 행사도 진행되었다.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연례 환경 정화 활동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열린 "제3회 환경 보건 및 정의를 위한 지역 사회 기반 솔루션 컨퍼런스"가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2005년 지구의 날 주제는 '어린이를 위한 건강한 환경'(Healthy Environments for Children)이었다.
2006년 지구의 날은 과학과 신앙에 초점을 맞췄다. 유럽으로 확대되어 대부분의 EU 국가에서 행사와 연설이 열렸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열린 "기후변화 축제"는 "석유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지구의 날 창립자인 데니스 헤이즈 등이 참여했다.
2007년 후반에는 전 세계적으로 글로벌 음악 이벤트인 라이브 어스(Live Earth)가 개최되었다.
2008년 지구의 날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기후를 위한 촉구(Call For Climate)'라는 운동으로 결집시켰다. 미국에서는 의회에 기후변화 관련 법안을 추진하도록 100만 건의 전화를 걸 것을 촉구했다.
2009년 전국 지구 온난화 해결책 강좌(National Teach-In on Global Warming Solutions)는 미국 전역의 대학, 시민 단체, 종교 단체에 도달했다. 의회 의원들은 화상 회의를 통해 지역구 대학 및 고등학교에 연설했다.
2010년 지구의 날 4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약 10억 명이 행동에 나섰다. 약 2만 개의 파트너 기관이 기후 집회, 10억 그린 행동(Billion Acts of Green™) 등을 통해 녹색 경제 구축과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2011년 지구의 날에는 튀니스 시에서 처음으로 기념 행사가 열렸고, 이라크 전역의 초등학교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삼림 벌채가 진행된 17개국에서 지구의 날 네트워크는 11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전 세계적으로 1억 개가 넘는 녹색 행동이 등록되었다.
2.6. 2010년대 이후: 기후 변화 대응과 플라스틱 오염 문제 해결
2010년대에 들어 지구의 날은 전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 대응과 플라스틱 오염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약 2만 개의 파트너 기관이 참여하여 기후 변화 및 기타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2010년 지구의 날 40주년을 맞아 약 10억 명이 행동에 나섰으며, 39개국 이상의 200명이 넘는 선출직 공무원들이 지속 가능한 녹색 경제를 창출하고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노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전 세계 학생들은 지역 사회 청소, 태양 에너지 시스템 설치, 학교 정원 가꾸기, 환경 교육 과정 참여 등 학교 환경 개선 활동에 참여했다. 지구의 날 네트워크는 2010년 말까지 15개국에서 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11년에는 17개국에서 11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가 완료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1억 개가 넘는 녹색 행동이 등록되었다. 2012년에는 "10억 개의 녹색 행동"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었으며,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환경 운동으로 여겨진다.
2013년 지구의 날에는 "기후 변화의 얼굴"이라는 주제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강력한 행동을 촉구했다. 2014년에는 "녹색 도시"를 주제로, 도시들이 보다 깨끗하고 건강하며 경제적으로 더욱 실현 가능한 미래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2015년 지구의 날은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다"라는 주제로, 기후 변화에 관한 구속력 있는 조약을 기대하며 환경 운동을 촉구하고 기후 소통과 교육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2016년에는 '지구를 위한 나무'를 주제로, 인도, 카리브해 지역, 베트남, 모로코 등에서 나무 심기 활동이 이루어졌다.
2017년 지구의 날 주제는 환경 및 기후 교육이었으며, 2020년까지 전 세계적인 환경 및 기후 교육을 목표로 설정했다. 2018년에는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주제로, 플라스틱 사용의 환경적, 기후적, 건강적 결과를 이해하는 교육받은 시민들의 세상을 건설하는 데 전념했다.
2019년 지구의 날 주제는 "종 보호"였으며, 종의 멸종이 증가하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정보를 전파했다. 2020년 지구의 날 50주년에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많은 활동들이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2021년 지구의 날 주제는 "지구를 회복하자"였으며, 기후 교육, 환경 정의, 청년 주도의 기후 관련 문제에 대한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1 기후 정상회의를 개최하여 40명의 세계 지도자와 수십 명의 연사가 참여했다.
2022년과 2023년 지구의 날 주제는 "우리의 지구에 투자하자"였으며, 10억 명이 넘는 시민들이 지구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2024년 Earthday.org의 주제는 "행성 대 플라스틱"이며, 2040년까지 플라스틱 생산량을 전 세계적으로 60% 감축할 것을 촉구했다.
3. 한국에서의 지구의 날
1990년 지구의 날 20주년 행사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의 중요성을 알리고 재활용 노력을 촉진했으며,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지구 정상 회의 개최에 기여했다. 이 행사는 이전과 달리 TV와 라디오를 활용하고 더 큰 예산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1990년 지구의 날 행사를 위해 에드워드 후리아가 조직한 지구의 날 20재단과 데니스 헤이스가 조직한 1990년 지구의 날 위원회, 두 그룹이 조직되었다. 게일로드 넬슨 상원의원은 두 그룹 모두의 명예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두 그룹은 조직 리더십과 전략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협력하지 못했다. 특히, 지구의 날 20재단은 1990년 지구의 날 위원회 이사회에 휴렛 패커드를 포함시킨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휴렛 패커드가 프레온 배출량이 많은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날 20재단은 풀뿌리 운동 방식을, 1990년 지구의 날 위원회는 포커스 그룹 테스트, 직접 우편 모금, 이메일 마케팅 등의 전략을 사용했다.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는 1990년에 지구의 날을 주제로 한 싱글 "내일의 세계"를 발매하기도 했다.
3.1. 지구의 날 선언문
지구의 날 선언문은 인간이 환경 파괴와 자원 낭비로 인해 자연과 조화롭게 살던 전통적 가치가 파괴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의 생활 문화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3.2. 한국의 지구의 날 행사
2006년 지구의 날 서울조직위원회에 따르면 184개국 약 50,000여 개의 단체가 지구의 날 행사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환경부는 2020년 4월 22일부터 28일까지 제12회 기후변화주간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4. 국제연합(UN)과 지구의 날
1969년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환경 관련 회의에서 존 매코넬이 처음으로 지구의 날 개념을 제안했다. 지구의 깃발을 지구의 날 상징으로 제작했던 매코넬의 제안은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우 탄트의 지지를 받았으며, 3월 21일은 유엔에 의한 지구의 날로 이어지고 있다. 우 탄트를 포함한 전 세계 36개국 유력자들의 서명이 모였으며, 2000년에는 구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마지막 서명을 했다. 우 탄트의 요청으로 지구 찬가도 만들어졌고, 우 탄트는 이 노래가 유엔에서 국가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기를 바랐다.
매년 이 날에는 유엔 본부에 있는 "일본의 평화의 종"이 울린다.
4.1. 춘분 지구의 날
존 매코넬은 1969년 유네스코 환경 회의에서 "지구의 날"이라는 세계적인 휴일을 처음 제안했다. 최초의 지구의 날 선포는 1970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셉 알리오토에 의해 발표되었다.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주 데이비스 등 여러 도시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으며, 데이비스에서는 수일간에 걸친 거리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UN 사무총장 우 탄은 매코넬의 이러한 연례 행사 기념에 대한 세계적인 구상을 지지했으며, 1971년 2월 26일 그에 대한 선포문에 서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의 아름다운 지구호가 차갑고 넓은 우주에서 따뜻하고 연약한 생명체들을 싣고 계속해서 자전하고 공전하는 동안, 앞으로 평화롭고 즐거운 지구의 날만 있기를 바랍니다.
1972년에는 UN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이 3월 춘분에 비슷한 의식으로 지구의 날을 기념했으며, 이후 매년 3월 춘분에 UN 지구의 날 행사가 계속되었다(UN은 4월 22일 세계 행사 주최측과도 협력하고 있다). 마가렛 미드도 춘분 지구의 날을 지지했으며, 1978년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춘분 순간에는 일본이 UN에 기증한 일본 평화의 종을 울리는 것으로 지구의 날을 기념하는 것이 전통이다. 수년에 걸쳐 UN 기념 행사와 동시에 전 세계 여러 곳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 2008년 3월 20일에는 UN 행사 외에도 뉴질랜드에서 기념식이 열렸고, 캘리포니아, 비엔나, 파리, 리투아니아, 도쿄 등 많은 지역에서 종이 울렸다. UN의 춘분 지구의 날은 지구협회 재단에서 주관한다.
평화의 종을 울리는 지구의 날은 전 세계 많은 도시에서 기념되며, 비엔나, 베를린 등지에서 평화의 종을 울린다. 제네바 UN에서 기억에 남는 행사가 열렸는데, 제네바 우호 협회와 세계 청년 재단의 도움으로 일본 시나가와 평화의 종을 울리며 평화를 위한 1분을 기념했다. 이는 10일 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한 깊은 애도 직후에 이루어졌다.
북반구의 춘분 외에도 9월 남반구의 춘분 기념 또한 매우 중요하다. 세계 평화의 날은 9월 21일에 기념되며, 따라서 존 매코넬, 우 탄 등의 원래 의도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5. 비판
지구의 날에 대한 비판으로는 환경 운동이 중산층의 반기업 운동이며 주류 보전 정치에 매달린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환경 인종차별과 계급차별의 희생자인 소수 민족과 빈곤층의 요구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판으로는 수년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지구의 날의 존재는 현재 인류의 노력이 미래의 환경 재앙을 없애기에 충분하다는 착각을 조장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