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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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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태준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활동한 인물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수학하며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창립에 관여했고, 조선학 연구와 발전에 기여했다. 1939년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지하 활동을 했으며, 중국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고 조선의용군에 입대했다. 해방 후 남조선로동당 문화부장을 역임했으나, 1949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소설사》, 《조선한문학사》 등이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간송 전형필에게 알린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학문적 업적과 함께 해방 후 남로당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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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1905년)
기본 정보
본관안동 김씨(구 안동)
포석(抱石)
인물 정보
출생1901년 11월 13일
사망1981년 8월 21일 (향년 79세)
직업문학평론가, 국문학자
학력
학력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경력
주요 경력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수상
수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55)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
3·1문화상 (1966)
국민훈장 모란장 (1971)
인촌상 (1978)

2. 생애

김태준은 평안북도운산군 출신으로,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는 유진오의 경제연구회에 가입했고, 1929년에는 제대생의 동인지 『신흥』에도 참여했다. 1931년 조선어학회와 1934년 진단학회 창립에 관여했으며[1], 같은 해 법문학부 지나어학 지나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조선어학과 강사 및 경학원(현 성균관대학교) 내부에 설치된 명륜학원 전임 연구원이 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어와 민족 문화를 억압하였다. 이에 김태준은 조선어학회와 진단학회 등을 통해 조선학 연구와 발전에 힘썼다. 1939년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이재유가 옥사한 1944년 가을에는 경찰의 보호 관찰 하에 있었지만, 박진홍 등과 함께 서울에서 중국 연안으로 탈출했다. 그곳에서 재중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민족 통일 전선 조직인 "조선독립동맹"에 참여했고, 무정이 이끄는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무장 훈련을 받았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남조선로동당 문화부장이 되어 반미 투쟁을 전개했지만, 1949년 가을[2]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소설사"(1933년 초판, 헤이본샤 동양문고의 일본어 번역은 1939년 개정판에 따름), "조선한문학사"(1933년, 천태산인 명의), "조선가요집", 중국 기행 "연안행"(1946년부터 47년에 걸쳐 집필, 헤이본샤 판 『조선소설사』의 "해설" 내에서 일본어로 번역됨) 등이 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평안북도 운산군 출신으로, 1926년 이리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4]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1931년 같은 대학 법문학부 중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신흥》지에 참여하였으며, 유진오의 경제연구회에도 가입했다.[1]

2. 2. 학문 활동과 훈민정음 발굴

1940년 여름,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우리 집안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는[6] 이야기를 듣고, 문화재 수집가이자 연구가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훈민정음의 행방을 애타게 기다려온 전형필은 일제의 감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인수했다. 소유주가 1000KRW을 불렀으나 전형필은 10배인 1만을 지불했다.[7]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책을 소개한 김태준은 따로 수고비 1000KRW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해례본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 책의 존재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글 창제 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 사후 1962년 12월 국보 70호로 지정된 데 이어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8]

2. 3. 사회주의 활동과 항일 운동

1940년 사회주의자 이현상의 소개로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가 검거되어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5]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조선의용군이 주둔하던 옌안(延安)으로 가서 아내 박진홍과 함께 무장 훈련을 받았다. 1945년 4월 옌안에서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도보로 귀국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조선어 및 민족 문화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조직하여 조선학 연구와 발전에 힘썼다.

2. 4. 해방 후 활동과 죽음

1945년 11월 귀국한 김태준은 12월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 초대 총장에 선출되었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5] 1946년 11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문화부장에 임명되어 문화공작 및 특수정보 분야에서 지하활동을 했다. 이는 예술인들이 ‘빨치산’을 지원하는 활동이었다. 1949년 이현상이 이끄는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들을 대상으로 특수문화 공작을 하다가 전북 남원에서 국군토벌대와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11월 서울 수색 근처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5]

3. 주요 저서

《조선소설사》(1933년 초판, 1939년 개정판), 《조선한문학사》(1931), 《조선가요집》, 《연안행》(1946~1947년 집필) 등이 있다.[1]

4. 평가

김용직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김태준을 해방 이전에는 반제 투쟁의 투사로 평가했지만, 해방 이후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가 많은 인명 살상을 초래한 점을 들어 공과가 엇갈린다고 평가했다.[9]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사상에 관계없이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무엇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일제강점기 김태준 선생의 행적은 명백히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9]

5. 기타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훈민정음이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화재 수집가이자 연구가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6] 전형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인수하면서 소유주가 제시한 가격의 10배인 10000KRW을 지불했고, 김태준은 소개비로 1000KRW을 받았다.[7] 이를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으며, 해방 후 한글 창제 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8]

그의 저서 중 하나인 《연안행》은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집필되었으며,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현실 인식과 문학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참조

[1] 서적 1975
[2] 서적 1975
[3] 웹사이트 김태준 [金台俊] https://terms.naver.[...]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1998
[4] 서적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5 웅진출판 1991
[5] 웹사이트 김태준 [金台俊]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6] 문서 엄밀히 자신의 집안이 아니고 자신의 처가인 광산김씨 종가,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광산김씨 집안의 가보였다. 그는 처가 몰래 훔쳐내서 긍구당 직인이 찍힌 첫 장은 찟어내고 팔았다
[7] 웹사이트 보성 중학교 인수과 훈민정음 구입 http://kansong.org/k[...]
[8] 저널 [김은주의 시선] 전형필의 문화유산 지키기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7-07-27
[9] 저널 최고의 한글학자도, 백마 탄 여장군도… 좌익 낙인에 ‘지워진 독립운동’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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