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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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낙준은 189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미국 유학 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 문교부 장관, 참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및 정치 분야에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1985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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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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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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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용재(庸齋) |
출생일 | 1895년 3월 9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정주군 관주면 관삼리 (현재 북한 평안북도) |
사망일 | 1985년 1월 13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안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
본관 | 수원 백씨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예장통합) |
배우자 | 최이권 |
자녀 | 백순익(장남) 백성익(차남) 백관익(삼남) 백창익(사남) |
부모 | 백영순(부) |
친인척 | 최이순(처제) 현제명(사돈) |
학력 | |
학력 | 파크 대학교 (BA) 프린스턴 대학교 (MA) 예일 대학교 (PhD) |
직책 | |
직책 | 연희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제2대 문교부 장관 제2대 참의원 의장 국무총리 서리 |
정당 | |
정당 | 무소속 |
관직 | |
임기 | 1950년 5월 4일 ~ 1952년 10월 29일 |
대통령 | 이승만 |
국무총리 |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백낙준 국무총리 서리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장면 국무총리 허정 국무총리 서리 이윤영 국무총리 서리 장택상 국무총리 백두진 국무총리 이갑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
부통령 | 이시영 부통령 김성수 부통령 함태영 부통령 |
역대 문교부 차관 | 박종만 문교부 차관 최규남 문교부 차관 고병간 문교부 차관 |
2. 생애
백낙준은 1895년 3월 9일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러일전쟁 이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수학했다.[3]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될 뻔했으나, 신성학교 미국인 교장의 도움으로 혐의를 벗었다. 1913년 중국 톈진의 영국계 신학서원에서 공부한 후 191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3]
미국에서 파크 대학교, 프린스턴 신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예일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3][4] 1982년에는 세종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파크 대학교, 스프링필드 대학교, 디폴 대학교,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3]
1927년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가 되었고, 1936년 문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1940년 경성노회 소속 목사가 되었으며, 1941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 포교자로 허가받았다. 1942년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및 「기독교신문」 편집위원, 1943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 이사로 선임되었다.[3]
광복 후 미군정 학무국 조선인 교육위원, 서울대학교 법문학부장,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1946년), 대한소년단 총재(1948년)를 역임했다.[3] 1950년 문교부 장관, 연세대학교 이사장, 대한교육연합회 이사장,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3]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미국에서 기독교 교육기관을 시찰하고 1963년 귀국했다. 1980년 국정자문회 위원, 1983년 학술원 회원을 역임했다.[3]
2. 1. 생애 초기 및 교육 활동
1895년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삼동에서 농부 백영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3]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하다 1910년 봄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입학하였다.[3] 중학교 재학 중 선교사였던 교장 윤산온(尹山溫, McCune,G.S.) 목사의 실천에 감동받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윤산온은 백낙준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그를 신성소학교의 강사로 채용하였다. 1913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신성소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3] 같은 해 중화민국 허베이성 톈진의 신학서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1914년 이후에도 신성소학교 교사직을 유지하였다.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였다. 1918년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다. 1922년 프린스턴 신학교에 편입하여 1925년까지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1925년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역사를 공부하였고, 1927년 논문 <조선신교사 (朝鮮新敎史)>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3][4] 대학 재학 중에도 윤산온의 후원 외에 고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귀국 후 조선YMCA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여 YMCA청년회 이사가 되고 조선기독교서회 이사에도 선임되었다. 1927년 유억겸의 추천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도 출강하며 당시 이 학교 학감이던 김활란 등과도 교분을 쌓았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김성수와도 친분을 쌓았으며, 근화여자실업학교에도 문과 교수로 출강하였다. 1938년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4년 5월 7일 이병도 등과 진단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발기인 및 창립회원이 되었다. 조선민속학회 창립에도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회원으로도 추천받았다. 연희전문, 보성전문 강의 외에도 영국과 미국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학술, 강연 활동을 했으나, 조선어학회 관련자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39년 여름 강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투옥 중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직을 모두 사임하였다.
백낙준은 다양한 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종류 | 학교 | 년도 |
---|---|---|
역사학 학사 | 파크 대학교 | 1918년~1922년 |
신학 학사 | 프린스턴 신학교 | 1922년~1925년 |
역사학 석사 | 프린스턴 대학교 | 1923년~1925년 |
역사학 박사 | 예일 대학교 | 1925년~1927년 |
교육학 박사 | 세종대학교 | 1982년 |
또한, 여러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대학교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백낙준은 1927년 유억겸의 추천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가 되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도 출강하며 김활란 등과 교분을 쌓았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과장에 임명되었으며, 보성전문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던 김성수와도 친분을 쌓았다. 근화여자실업학교에도 문과 교수로 출강하였다. 1938년에는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 및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에 선임되었다.1934년 5월 7일 이병도 등과 진단학회를 창립하여 발기인 및 창립회원이 되었다. 조선민속학회 창립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고, 조선어학회 회원으로도 추천받았다. 연희전문, 보성전문 외에도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학술, 강연 활동을 하였으나, 조선어학회 관련자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39년 강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투옥 중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직을 모두 사임하였다.
1940년 경성노회 소속 목사로서 연희전문학교에서 일했으며, 1941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포교자로 허가받았다. 1942년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및 「기독교신문」 편집위원, 1943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 이사로 선임되었다.[3]
2. 2. 1. 친일 논란
백낙준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논란이 있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6]김활란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은 1943년 《매일신보》에 ‘열혈남아이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하라)는 글을 기고했다. 유진오 고려대학교 전 총장은 ‘국민총력조선연맹’ 집회에서 지원병 독려 연설을 했고, 백낙준 전 연희대 총장도 ‘조선임전대책협의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지적되기도 하였다.[6]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운영했던 김성수가 조선 학생들에게 일본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라는 글을 쓰고 재학생들에게 가정방문으로 적극적인 동참과 협력을 구하는 등 친일에 앞장서서 황국신민이 될 것을 촉구함으로써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는 했지만, 일제침략 하에서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으로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함께 활동한 김활란과 백낙준 등도 이러한 논리로 두둔받기도 한다.[6]
하지만, 이러한 상황논리는 몰가치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일본 총독부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 조선 학생들을 향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나갈 것을 조선 청년들에게 독려한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7]
숭실대학교는 일본의 신사참배에 응할 수 없다며 자진 폐교하였다가 1954년에 서울에서 다시 대학 문을 열었다. 만일 그때 모든 학교가 일본에 저항하며 폐교의 길을 함께 걸었다면, 그 응집된 힘이 오히려 일본 패망을 앞당겼을 것이고, 민족 전부가 사는 길이 앞당겨져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모두 저항하는 길 대신 일부가 무릎 꿇고 복종하는 길을 선택해, 저항하는 자들을 죽게 만들고, 배신한 자기들만 살아남았다는 비판을 받는다.[7]
2009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3]
2. 3. 광복 이후
해방 후, 백낙준은 미군정 학무국 조선인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어 경성대학교 법문학부장 및 서양사학 교수를 겸임하였다.[3] 1946년에는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을, 1948년에는 대한소년단 총재를 역임하였다.[3]1950년부터 1952년까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고, 연희대학교 이사장, 대한교육연합회 이사장,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장, 한국기독교교회연합 이사장,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사장,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 및 명예총장을 역임하였다.[3]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어 참의원 의장을 역임하였다.[3]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북장로교 교육처 고문으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남미, 인도 등의 기독교 교육기관을 시찰하고 1963년에 귀국하였다.[3] 1980년에는 국정자문회 위원, 1983년에는 학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3]
2. 3. 1. 정치 활동
1945년 9월 미군정에 의해 경성제국대학교가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개편되면서 경성대학 법문학교 교수가 되고, 법문학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미군정에 의해 설치된 조선교육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교육심의회 구성에 참여하였으며, 정부 수립 후에도 한국교육위원회로 개편되었을 때도 자문위원직을 유지하였다.1950년 5월부터 1952년 10월까지 문교부 장관을 맡아 한국 전쟁 중의 교육 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문교부 장관 재직 중,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을 세우고 의무교육과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였으며, 6.25 전쟁 중에는 전시 노천 교육과 전시 연합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5] 피난지에서 각 대학의 교수들을 소집하여 대학생들에게 각 전공, 교양 등의 과목을 수학하게 하였으며, 이때 이승만 대통령과 김성수 부통령에게 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설득하였다. 1950년 장관 재직 중에 총리 서리로 임명되어 국회에 승인요청되었으나,[8] 국회의원 재석 123명 중 찬성 21표, 반대 100표, 기권 2표로 부결되자[8][9]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다시 재심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이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유네스코(UNESCO) 제7차 총회에 한국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추가 선출되어 다녀왔다.
1953년 서울특별시 교육회 3대 회장과 4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세계 대학봉사회 한국지부 이사장, 한국 YMCA 연맹 위원장과 YMCA 청년회 유지재단 이사장에도 선출되었다. 1954년 유네스코 제8차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56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부터 한국행정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그해 10월 12일 한국행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1959년 8월 31일까지 재직했다.[10]
1960년 5월 민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참의원 의원이었고, 1960년 7월에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3표를 얻었다.[12] 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참의원 의장으로 재직하였다.[13]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국회(민의원, 참의원)가 모두 해산되면서 참의원직 및 참의원 의장직을 잃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야당 지도자로서 반박정희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윤보선, 허정, 장면, 이범석, 장택상, 박순천 등 야당의 대권주자로 호명되던 특정 인사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1966년 12월 24일 야당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14] 196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놓고 윤보선, 허정 등의 반목이 계속되자 그는 4자 회담을 주선, 유진오와 윤보선, 허정 등과 야당 통합 4자 회담을 개최하여 대통령 후보로는 윤보선, 당 총재는 유진오로 정하도록 중재하였다.
1969년부터 국토통일원 고문에 위촉되었으나 3선 개헌에 반대하였다. 197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발표하자 반대하여 국토통일원 고문을 사퇴하고 야당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1974년에는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등과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동참하였다.
2. 4. 생애 후반 및 평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야당 지도자로서 박정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윤보선, 허정 등 특정 인사를 지지하지는 않았다.[14] 1961년 연세대학교 명예 총장에 추대되었고, 1962년 세계대학봉사회 한국지부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미국 뉴욕시의 초청으로 도미, 뉴욕시 대수장(大受章)을 받고 귀국했다.[14] 1964년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회 이사, 한국연구원 이사장, 한국역사편찬회 편찬위원, 한글학회 이사에 위촉되었다.[14]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4] 같은 해부터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관여하여 고문, 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14]1966년 12월 24일 야당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 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14] 196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놓고 윤보선, 허정 등의 반목이 계속되자, 유진오와 함께 4자회담을 주선하여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 당 총재는 유진오로 정하도록 중재하였다.[14]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위촉되었으나 3선 개헌에 반대하였다.[14] 197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14] 1970년 3월 23일 최현배가 사망하자 외솔회 창립에 참여하였다.[14] 1972년 전군 기독교 신자화 후원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77년부터는 고문이 되었다.[14] 이 후원회는 후일 군복음화 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14]
1972년 10월 유신이 발표되자 국토통일원 고문을 사퇴하고 야당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1974년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등과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동참하였다.[14]
1974년 외솔회의 제2대 이사장이 되었다.[15]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관련자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15]
1980년 2월 최규하 정부의 국정자문회의 위원이 되었다.[15]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출되었다.[15] 1984년 8월 1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고혈압, 당뇨병, 심부전증,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15] 1985년 1월 1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합병증으로 서거하였다.[15]
장례는 1월 17일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윤보선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15] 시신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15]
1994년 연세대학교에서 용재 백낙준 박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95년부터 용재 백낙준 학술상을 제정하고, 용재 석좌교수 수여를 신설하였다.[15]
2005년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에서 친일파로 지목했다.[16]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지목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6]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으로 선정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 중 교육·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7]
3. 학력
학력 |
---|
4. 저서
5. 수상 경력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백영순 | |
형 | 백내문 | |
누나 | 2명 | |
부인 | 최이권 | 1905년 ~ 1990년, 서울 YWCA 회장 역임 |
아들 | 백순익 | 1933년 ~ 사망 |
며느리 | 현혜숙 | 성악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대학 교수 현제명의 딸 |
아들 | 백성익 | 1936년 ~ 사망, 미국 레이시언 컴퍼니 부사장 역임 |
아들 | 백관익 | 1941년 ~ 사망, 미국 볼티모어선 신문사 편집국 부국장 |
아들 | 백창익 | 1947년 ~ |
처제 | 최이순 | 1910년 ~ 1987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역임 |
7. 기타
1927년 유억겸의 추천으로 연희전문학교의 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기독교계 학교인 이화전문학교 등에도 출강하며 당시 이 학교 학감이던 김활란 등과도 교분을 쌓게 된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백낙준은 이 밖에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던 인촌 김성수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근화여자실업학교에도 문과 교수로 출강하였다. 1938년에는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이 되고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에도 선임되었다.
1934년 5월 7일 이병도 등과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발기인 및 창립회원이 되었다. 조선민속학회의 창립에도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조선어학회에서도 추천받아 회원이 되었다. 그는 연희전문, 보성전문의 강의활동 외에도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학술, 강연 활동을 돌아다녔으나 조선어학회 관련자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39년 여름 강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투옥 중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직을 모두 사임하였다.
백낙준은 독실한 개신교신자로 <한국기독교교회사>를 집필할 정도로 교계와 깊은 교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백낙준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과 같이 친일인사보다는 민족 교육의 선각자로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6]
1953년 서울특별시 교육회 3대 회장과 4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세계 대학봉사회 한국지부 이사장, 한국 YMCA연맹 위원장과 YMCA 청년회 유지재단 이사장에도 선출되었다. 1954년 유네스코 제8차 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56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미국 스프링필드대학교에서 명예인문학박사를 받고 1958년 디포대학에서는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1956년부터 한국행정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그해 10월 12일 한국행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1959년 8월 31일까지 재직했다.[10] 한미합동경제위원회 등과 함께 1959년 9월 1일에 발간하는 행정학 사전 편찬, 발간사업에 참여하였다.
1959년 동국대에서 백성욱 총장 회갑 기념 논문집을 발간할 때, 편찬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11]
1980년 2월에 최규하 정부의 국정자문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1년 4월 23일에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84년 8월 1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병, 심부전증, 폐렴 등이 합병증세를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5개월간 산소호흡기를 착용하며 입원하였다가 1985년 1월 11일 사경을 헤매었다.
저서로는 《한국의 사상과 현실 (韓國의 思想과 現實)》 2권과 《나의 종강록》, 《나의 인생관》, 영어로 된 《한국개신교사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에세이집인 《시냇가에 심은 나무》 등이 있으며, 사후 1986년 부인 최이권이 출간한 그의 신앙간증, 설교 모음집인 《백낙준박사 설교 모음집:인생의 닻》 등이 있다.
- 그는 교총의 전신인 대한교육연합회의 창설에도 관여하였고, 1956년에는 교육연합회(교총) 회장에도 선임되었다.
- 1960년 8월 9일부터 8월 12일까지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였다.
- 192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와 그 후신인 연희대학, 연세대학교의 문과 교수와 학장, 총장을 역임하였지만 1927년부터 12년간 그는 보성전문학교와 근화여자실업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문과 교수로도 출강했고, 1945년 9월부터 12월까지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대학에서도 3개월간 법문학부 교수 및 학과장으로 재직했다.
- 1950년 그는 의무교육 실시와 교육자치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김성수 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는 채택되어 52년 5월부터 각 시,군,구별로 시,군,구 교육청과 도 교육청이 설치되고 시,군,구 교육감 선거, 도 교육감 선거가 실시되었다. 시,군,구 교육감은 후일 교육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백낙준의 전국민 의무교육 제안은 1958년에 채택되어 58년부터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전신) 의무교육부터 단계적으로 실시되었다.
- 1959년 동국대 백성욱 총장 회갑 기념 논문집 편찬위원장으로 있을 때, 기념 논문으로 헌정된 논문 중 이을호의 정약용 연구 논문을 보고, 다산 정약용 연구에 써 달라며 500USD를 이을호에게 조건 없이 기부하였다.[11] 당시 이을호는 '유불상교(儒佛相交)의 면에서 본 정다산(丁茶山)'이라는 글을 썼다.[11] 백낙준은 이을호의 논문을 보고 전남대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을호 교수를 연세대 총장실에서 만나도록 주선해달라 하였다. 백낙준은 이을호에게 500USD가 담긴 봉투를 내밀며, 그 돈으로 정약용 연구에 전념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을호는 다산 경학 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한다.[11]
- 1966년 그는 이을호가 정약용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것을 주선해주었다. 1966년 봄, 이을호는 다산경학사상연구라는 논문을 완성했다. 당시 미국에 체류하던 백낙준에게 연락하자 그는 이을호에게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게 그 논문을 제출하라 했다. 당시 대학원장은 박종홍 교수였다. 박 교수는 논문을 보고 박사학위 신청을 권고했다. 그리고 대학원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1967년 봄 학위를 수여했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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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浪漫学会通信 第2号 高麗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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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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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hnews.co[...]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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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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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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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김삼환 시인의 “따뜻한 손”, 참을 수 없는 역사 왜곡자들의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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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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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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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전집 출간된 한국학 대가 이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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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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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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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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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연대 학생위, 학내 친일인사 7명 명단 발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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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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