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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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지는 촉한의 인물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허정의 집에서 자랐다. 촉에서 명성을 얻어 선조랑으로 출사했으며, 시중, 상서령을 거쳐 진군장군을 역임했다. 그는 유선의 총애를 받았으나, 환관 황호와 결탁하여 정사에 관여하고, 강유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진수는 진지를 황제에게 아첨하고 환관에게 아부하는 정치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진지가 죽은 후 황호의 권력이 커지면서 촉나라는 멸망에 이르렀다. 유선은 진지에게 충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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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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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진지 |
원어 이름 | 陳祗 |
로마자 표기 | Chen Zhi |
자 | 봉종(奉宗) |
시호 | 충후(忠侯)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258년 9월 28일 |
사망 장소 | 성도, 사천성 |
출신지 | 예주 여남군 평여현 |
가족 관계 | 허정 (외종조부) |
자녀 | 진찬 진우 |
관직 | |
관직 | 상서령 |
임기 시작 | 251년 |
임기 종료 | 258년 |
군사 직위 | 진군장군(鎮軍將軍) |
임기 시작 | 251년 |
임기 종료 | 258년 |
다른 직위 | 시중(侍中) |
임기 시작 | 246년 |
임기 종료 | 258년 |
군주 | 유선 |
전임자 | 여의 |
후임자 | 동궐 |
2. 생애
진지는 유남군 출신으로, 허징의 형의 외손자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어 숙부 허징에게 길러졌다.[1]
연희 16년(253년) 정월, 비의가 위의 항장 곽순에게 암살되었다. 강유는 군사 문제로 외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 비의 사후 진지가 유선을 보좌하며 촉의 국정을 담당했다.
방굉(방통의 적자)은 성격이 솔직하고 인물 평가를 좋아했지만, 진지를 얕보고 불손한 태도를 보여 진지의 압력을 받아 승진하지 못하고 부릉태수로 사망했다.[16]
경요 원년(258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진지가 죽은 후, 후원자를 잃은 강유는 북벌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 유선은 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살아생전 진지의 활동을 격찬하는 조칙이 남아 있으며, '충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선은 장남 진찬에게 관내후를 내리고, 차남 진유를 황문시랑에 임명했다. 이후 서진 시대에 진유는 나헌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초주가 『원수국론』을 저술하는 장면에서도 진지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2. 1. 초기 생애와 출사
진지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허정의 집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었을 때 촉나라에서 명성을 얻었고, 선조랑(選曹朗)으로 출사했다.[1] 엄숙하고 위엄 있는 용모를 지녔으며, 다재다능하여 천문, 역, 점 등에도 통달했다.[2]연희 7년(244년) 동윤이 죽자, 비의는 진지를 높게 평가하여 동윤의 뒤를 이어 시중(侍中)에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3] 진지는 시중이 된 후 환관 황호와 결탁하였으며, 황호는 이때부터 정사에 관여하게 되었다.[4]
2. 2. 비의의 발탁과 황호와의 관계
비의는 진지의 성격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연희 9년(246년) 동윤이 사망하자 비의의 추천으로 후임 시중에 발탁되었다.[3] 연희 14년(251년) 여예가 사망하자 상서령으로 승진하여 진군장군이 되었다.[6]진지는 황호와 결탁하여 정사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유선에게 아부하며 총애를 받았다.[4] 유선은 진지와 황호의 말을 듣고 죽은 동윤을 원망하기까지 했다.[5] 진지는 유선에게 깊은 신임과 총애를 받아 강유보다 더 실권이 컸다.[7]
2. 3. 상서령 임명과 권력 강화
연희 14년(251) 여예가 죽은 뒤, 진지는 그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되었고, 진군장군을 겸하였다. 진지는 위로는 황제 유선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환관 황호와 결탁하여 유선의 깊은 신임과 총애를 받아 강유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다.[7]진지는 황호와 동맹을 맺어 정치 무대를 함께 장악했다. 황호는 동윤이 자신을 불신하여 생전에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동윤 사후 처음으로 권력을 잡았다.[4] 진지가 유선의 총애를 받는 관리가 된 이후, 유선은 점차 동윤을 원망하며 "거만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진지와 황호는 유선 앞에서 종종 동윤을 헐뜯어 황제가 동윤을 더욱 미워하게 만들었다.[5]
경요 원년(258)까지 강유가 여러 차례 북벌을 감행하자, 초주는 백성들이 피폐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원수국론』을 써서 강유를 비판했다.[17] 이 『원수국론』은 초주와 진지의 논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진지와 강유는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북벌에 관해서는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진지는 군사 실무 경험이 없었고, 강유는 행정 실무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량처럼 행정과 군사를 통괄하는 정책을 펼칠 수 없어 북벌 부진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18]
2. 4. 사망과 사후
경요 원년(258) 유선은 진지가 세상을 떠나자 비통해하며 충후(忠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촉의 대신 중에서 시호를 받았던 이는 법정, 제갈량, 장완, 비의, 하후패,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방통, 조운 정도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유선의 총애가 컸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11]진지가 죽은 후, 황호는 승진을 거듭하며 더 큰 권력을 얻었고, 그의 지지자와 그에게 아첨하는 자들에게 특혜를 베풀었다. 촉나라 정부는 또한 황호의 영향력 아래 부패해졌고, 263년 최종 멸망에 이르렀다.[12]
진지의 사후, 아들 진찬은 관내후에 봉해졌고, 작은 아들 진유는 황문시랑이 되었다.
3. 평가
진지는 둥윤과 달리 유선에게 간언하지 않았고, 환관 황호가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용인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진수는 "유선이 죽은 둥윤을 매번 그리워하게 된 한 원인은 진지와 황호에게 있었다"라고 평했으며,[1] "진지의 정치는 황제에게 아첨하고 환관에게 아부하는 것이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1] 다만, 《후주전》에 따르면 황호가 처음 정치적인 권한을 손에 넣은 것은 진지가 죽은 후인 경요 원년(258년)부터라고 한다.[1]
3. 1. 부정적 평가
진지는 둥윤과 달리 유선에게 간언하지 않았고, 환관인 황호가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용인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진수는 "유선이 죽은 둥윤을 매번 그리워하게 된 한 원인은 진지와 황호에게 있었다"라고 평했으며,[1] "진지의 정치는 황제에게 아첨하고 환관에게 아부하는 것이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1]다만, 《후주전》에 따르면 황호가 처음 정치적인 권한을 손에 넣은 것은 진지가 죽은 후인 경요 원년(258년)부터라고 한다.[1]
4. 가족
참조
[1]
서적
陳祗字奉宗,汝南人,許靖兄之外孫也。少孤,長於靖家
Sanguozhi
[2]
서적
弱冠知名,稍遷至選曹郎,矜厲有威容。多技藝,挾數術
Sanguozhi
[3]
서적
費禕甚異之,故超繼允內侍
Sanguozhi
[4]
서적
陳祗代允為侍中,與黃皓互相表裏,皓始預政事
Sanguozhi
[5]
서적
自祗之有寵,後主追怨允日深,謂為自輕,由祗媚茲一人,皓搆閒浸潤故耳
Sanguozhi
[6]
서적
呂乂卒,祗又以侍中守尚書令,加鎮軍將軍,大將軍姜維雖班在祗上,常率衆在外,希親朝政
Sanguozhi
[7]
서적
祗上承主指,下接閹豎,深見信愛,權重於維
Sanguozhi
[8]
서적
景耀元年卒
Sanguozhi
[9]
서적
秋八月丙子,領中護軍陳祗卒
Huayang Guo Zhi
[10]
서적
景耀二年
Huayang Guo Zhi
[11]
서적
景耀元年卒,後主痛惜,發言流涕,乃下詔曰:「祗統職一紀,柔嘉惟則,幹肅有章,和義利物,庶績允明。命不融遠,朕用悼焉。夫存有令問,則亡加美謚,謚曰忠侯。」
Sanguozhi
[12]
서적
祗死後,皓從黃門令為中常侍、奉車騎都尉,操弄威柄,終至覆國
Sanguozhi
[13]
서적
賜子粲爵關內侯,拔次子裕為黃門侍郎
Sanguozhi
[14]
서적
華陽国志
[15]
서적
三国志 董允伝
[16]
서적
三国志 龐統伝
[17]
서적
三国志 譙周伝
[18]
논문
蜀漢的軍事優先型経済体系
汲古書院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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