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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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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후패는 조위의 장군으로, 황초 연간에 편장군으로 촉 정벌에 참여하고, 정시 연간에는 옹주 수비를 맡았다. 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조상과 가까웠던 그는 촉한으로 망명하여 거기장군에 임명되었고, 강유와 함께 위의 공세를 막았다. 260년에는 이미 시호를 받았다. 위나라에서 하후패는 아버지 하후연의 뒤를 이어 800가구의 세입을 받았으며, 조진의 촉한 공격에 선봉으로 나섰다. 곽회와의 갈등으로 촉한으로 망명했으며, 촉한에서는 장비의 아내였던 하후씨 부인 덕분에 유선의 신임을 얻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연의 장남으로 등장하며, 강유의 북벌에 참여하다가 등애와의 전투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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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하후패
원어 이름夏侯霸
중권(仲權)
출생미상 (188년 이전 추정)
사망255년 ~ 259년경
소속조위 → 촉한
직위조위: 우장군(右將軍), 토촉호군(討蜀護軍), 거기장군(車騎將軍)
촉한: 거기장군(車騎將軍)
봉작박창정후(博昌亭侯)
아버지하후연
형제하후위 (동생)
하후휘 (동생)
하후화 (동생)
친척하후씨 (사촌)
자녀양호의 부인, 아들 최소 2명
생애
주요 활동 시기3세기
기타
관련 인물조방
유선
장비
양호

2. 생애

하후패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배송지가 인용한 『위략』에 따르면 촉한의 공신 장비의 아내 하후씨가 그의 종매(사촌 여동생)이므로, 187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2] 그는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아버지 하후연과 아우 하후영유비 군의 황충에게 전사한 일로 인해 촉한에 깊은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황초 연간(220년-226년)에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었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22] 태화 4년(230년) 조진촉한 정벌에 선봉으로 참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22] 이후 우장군(右將軍)으로 승진하고, 정시 연간(240년-249년)에는 토촉호군(討蜀護軍) 우장군으로서 옹주의 수비를 맡으며 박창정후(博昌亭侯)에 봉해졌다.[23][22] 이 시기 그는 병사들을 잘 보살피고 서융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6] 247년에는 강족의 반란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10]

가평 원년(249년),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숙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3] 조상과 가까웠던 하후패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특히 조상의 사촌이자 자신의 가까운 친척인 하후현마저 낙양으로 소환되자(후에 처형됨)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22][23] 게다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회가 하후현의 후임으로 정서장군에 임명된다는 소식을 듣고,[22] 결국 같은 해 정월(연희 12년) 촉한으로 망명했다.[24]

촉한에서는 황제 유선의 황후들(경애황후, 장황후)이 그의 외조카(사촌 여동생 하후씨의 딸들)였기 때문에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22][16] 유선은 그를 조운에 버금가는 예우로 대하며 거기장군이라는 높은 관직에 임명했다.[22][16] 하후패는 망명자 출신인 대장군 강유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의 북벌에 참여했으며,[22] 연희 18년(255년) 적도 전투에서는 강유와 함께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하후패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촉한에서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등에게 시호를 내린 경요 3년(260년) 이전에 이미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다는 기록과,[25] 경요 2년(259년) 요화장익이 좌우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18] 대략 259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하후패가 촉으로 망명한 후 위나라에 남겨진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 하후연의 공로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낙랑군으로 유배되었다고 전해진다.[17]

2. 1. 위나라에서의 활약

황초 연간(220년-226년)에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었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22] 220년, 아버지 하후연의 작위 일부를 물려받아 800가구의 식읍을 받았다.[3] 그는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아버지 하후연과 동생 하후영이 촉나라 장수 황충에게 전사한 것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항상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2]

태화 4년(230년), 대장군 조진이 촉(蜀) 정벌을 추진하자 하후패는 선봉으로 참전했다.[4][22] 그는 병력을 이끌고 한중군으로 향했으며, 험준한 자오우도(子午道)를 통과하는 경로를 택했다. 촉나라 장수 위연이 설치한 흥세(興勢) 진영 근처 협곡에 진을 쳤으나, 지역 주민에게 발각되어 촉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5] 조진의 본대 도착이 늦어지면서 위기에 처했으나, 참호 사이에서 직접 싸우며 분전했고, 조진의 원군이 도착하여 위기를 넘겼다.[5] 그러나 한 달 이상 지속된 폭우로 인해 계곡 길이 통행 불가능해지고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위연이 후방의 비한족(非漢族) 부락들을 선동하여 위군에 대항하게 만들자 결국 조진과 함께 철수해야 했다.[6]

이후 우장군(右將軍)으로 승진했으며,[6] 농서군에 주둔하며 군대를 훈련시켰다. 그는 병사들을 잘 보살피고 이 지역의 서융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6] 정시 연간(240년-249년)에는 토촉호군(討蜀護軍) 우장군(右將軍)이 되어 옹주의 수비를 맡았고, 박창정후(博昌亭侯)에 봉해졌다.[23][7]위략》에 따르면, 먼저 우장군이 되었고 사졸을 잘 다독이고 서융과 화합했으며, 정시 연간에 하후유를 대신해 정촉호군(征蜀護軍)이 되어 정서장군 하후현 아래에 속했다고도 한다.[22] 이 시기 하후패는 당시 위나라 황제 조방의 섭정이자 조진의 아들인 조상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7]

정시 5년(244년), 조상이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촉한과의 전쟁(흥세 전투)을 결정했을 때, 하후패는 하후현 휘하의 호군(護軍)으로 참전했다.[8] 그러나 이어진 전투에서는 하후패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위나라 장군 곽회가 선봉을 맡았다.[9] 이번에 위군은 촉한 영토로 가는 더 짧은 길인 당락도(儻駱道)를 선택했지만, 수원이 부족하여 다시 보급 문제를 겪었다. 결국 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병사들이 돌아오는 길에 갈증으로 사망했다. 전쟁 후, 곽회는 시기적절하게 병력을 철수시킨 공으로 하후패보다 높은 군사적 권위를 인정받았다.[9]

정시 8년(247년), 농서, 남안, 금성, 서평 일대에서 강족(羌族)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패는 군대를 이끌고 위지(爲翅)에 주둔했다. 촉한의 강유가 이 반란에 호응하여 출병해 하후패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곽회가 구원하러 오자 강유는 물러났다.[10] 하후패는 곽회의 지휘 아래 여러 반란군을 격파하고 많은 수를 항복시켰다.[10] 그러나 강족의 어차색(蛾遮塞)과 호족의 치무대(治无戴) 등은 저항을 계속했고, 248년 강유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지원하러 나섰다. 이 시점에서 하후현이 아닌 곽회가 현장의 실질적인 지휘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졌다. 예를 들어, 곽회강유의 부하인 요화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 하후패는 곽회의 명령에 따라 강유의 주력을 서쪽으로 추격해야 했다.[11] 요화가 공격받는 것을 알게 된 강유곽회의 예상대로 부하를 돕기 위해 급히 돌아갔고[12], 이로 인해 반란군은 촉한의 지원으로부터 고립되었다. 《화양국지·유후주지》에 따르면, 하후패와 곽회강유와 교전했으나 패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 진압의 공과 명예는 대부분 곽회에게 돌아갔고, 그는 그 업적으로 향후(鄕侯)로 승진했지만, 하후패는 이 전투에서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거의 받지 못했다.[13]

가평 원년(249년),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을 주살하고, 조상과 가까운 친척이자 하후패의 종자(일족 중 한 세대 아래)인 하후현마저 조정으로 소환하자(후에 처형됨), 조상과 두터운 관계에 있던 하후패는 신변에 큰 위협을 느꼈다.[23] 당초 하후현이 소환될 때 하후패는 가지 말라고 만류하기도 했다.[22] 이러한 불안한 상황 속에서, 평소 사이가 나빴던 곽회하후현의 후임으로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된다는 소식을 듣자[22], 하후패는 더 큰 두려움을 느껴 결국 같은 해(연희 12년) 정월에 촉한으로 망명했다.[24]

2. 2. 촉한으로의 망명

가평 원년(249년) 사마의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을 제거하자, 조상과 가까웠던 하후패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23][14] 당시 정서장군으로 있던 조상의 사촌동생 하후현이 사마의에 의해 수도로 소환되자(후에 살해됨), 하후패는 더욱 불안해졌다.[22][14] 하후패는 하후현에게 함께 촉한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했지만, 하후현은 "나는 오랑캐의 나라에서 객으로 살고 싶지 않다!"라며 거절했다.[14] 게다가 과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회가 하후현의 후임으로 정서장군에 임명된다는 소식을 듣고, 하후패는 망명을 최종 결심했다.[22][14]

결국 하후패는 연희 12년(249년) 정월, 홀로 위나라를 떠나 촉한으로 향했다.[24][14]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하후패는 길을 잃고 깊은 산골짜기에서 헤맸으며, 식량이 떨어지자 타고 온 말을 잡아먹어야 했다. 계속된 도보로 다리에 부상을 입기까지 했으나,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5] 현지 주민들이 하후패를 발견하고 촉한 조정에 알렸고, 의 황제 유선은 즉시 사람을 보내 그를 수도 성도로 안전하게 데려왔다.[15]

하후패가 촉한에서 환대받은 데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오래전 하후패의 사촌 여동생인 하후씨가 장비에게 사로잡혀 그의 아내가 되었고,[22]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경애황후 또는 장황후)이 유선의 황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선은 자신의 아들을 가리켜 "이 아이 또한 하후씨의 외종손"이라 말하며 하후패를 안심시켰고,[16] 조운에 버금가는 예우를 갖추었다.[22] 유선은 하후패를 거기장군에 임명하며 중용했다.[16] 거기장군 취임 후, 당시 촉의 명장으로 알려진 장익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으려 했지만, 너무 서두른다는 이유로 장익에게 충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하후패는 강유와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위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촉한을 위해 활동했다.[22] 한편, 하후패가 촉으로 망명한 후 위에 남겨진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 하후연의 공로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낙랑군으로 유배되는 데 그쳤다고 한다.

2. 3. 촉한에서의 삶

가평 원년(249년), 위나라의 권력자 사마의정변을 일으켜 조상을 주살하자, 조상과 가까웠던 하후패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23] 당시 하후패는 토촉호군 우장군으로 옹주에 주둔하며 서융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군사들을 잘 양성하고 있었다.[23][22] 사마의가 조상의 사촌이자 하후패의 가까운 친척인 하후현을 수도로 소환하자, 하후패는 하후현에게 가지 말라고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설상가상으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회가 하후현의 후임으로 정서장군에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후패는 결국 촉한으로 망명을 결심했다.[22] 이는 촉한의 연희 12년 정월이었다.[24]

촉한으로 망명한 하후패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의 사촌 여동생 하후씨는 일찍이 장비에게 납치되어 아내가 되었고,[22] 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경애황후, 장황후)이 모두 촉한의 황제 유선의 황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하후패는 유선의 깊은 신임을 얻었으며, 조운이 생전에 받았던 것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22]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장군이라는 높은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후패는 위나라 출신 망명자라는 복잡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같은 망명자 출신인 대장군 강유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강유는 하후패에게 위나라의 정세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한번은 강유가 사마의가 촉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해 묻자, 하후패는 "그들은 이제 막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당장은 외부 문제에 신경 쓰지 못할 것이다. 다만 젊은 종회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장차 오나라와 촉나라 모두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19][20] 하후패의 조언은 강유가 제갈량의 북벌 의지를 이어받아 위나라를 상대로 지속적인 군사 활동(강유의 북벌)을 펼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후패는 강유의 북벌에 여러 차례 동행했으며, 특히 연희 18년(255년) 적도 전투에서 강유와 함께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대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모든 촉한의 장수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아니다. 위나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일부 동료들로부터 차별이나 불신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에 따르면, 하후패는 남쪽 이민족 정벌로 명성이 높았던 노장 장니와 친분을 쌓으려 했으나, 장니는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도 나를 모른다. [...] 말을 아껴 3년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라며 거리를 두었다.[18] 또한 촉의 명장으로 알려진 장익에게도 접근하여 친분을 다지려 했지만, 너무 서두른다며 나무람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적도 전투 이후 하후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촉한에서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등에게 시호를 내린 경요 3년(260년) 이전에 이미 하후패에게 시호가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어,[25] 그 이전에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요 2년(259년)에 요화장익이 각각 좌우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하후패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거기장군직을 이들이 계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하후패는 259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하후패가 촉으로 망명한 후 위나라에 남겨진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 하후연이 위나라 건국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사형을 면하고, 당시 위나라의 영토였던 낙랑군(현재의 북한 지역)으로 유배되었다.[17]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연의 장남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자(字)가 차남을 의미하는 "중권(仲權)"으로 설정되어 있어 실제와는 모순이 생긴다(백중숙계 참고). 첫 등장은 장판 전투인데, 이때 장비에게 찔려 강물에 떨어진다. 다만, 이때 등장한 "하후패"는 동명이인이거나, 일부 판본에서는 "하후걸"이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동일 인물로 본다면, 장판 전투 이후 20년 이상 등장이 없다가 제갈량의 북벌 즈음 사마의의 천거로 아우들과 함께 다시 등장한다.

촉(蜀)으로 망명한 후에는 강유의 참모로서 북벌에 여러 차례 참가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의 최후를 실제 역사와 다르게 여러 방식으로 묘사한다. 한 판본에서는 262년 북벌 당시 조양성에서 등애(鄧艾)와 싸우다 활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다른 판본에서는 같은 해 위나라의 촉 침공 때 도양 전투에서 위군의 매복에 걸려 화살과 돌에 맞아 전사했다고 하며, 또 다른 묘사에서는 8번째 북벌 중 공성계에 걸려 전사했다고도 한다.

4. 대중문화 속의 하후패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의 일곱 번째 작품에서 처음으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또한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백일, 비스듬히 기울다에도 등장한다.

참조

[2]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3] 서적 Sanguozhi vol. 9
[4]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5]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6]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7] 서적 Sanguozhi vol. 9
[8]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9] 서적 Sanguozhi vol. 26
[10] 서적 Sanguozhi vol. 26
[11] 서적 Sanguozhi vol. 26
[12] 서적 Sanguozhi vol. 26
[13] 서적 Sanguozhi vol. 26
[14]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15]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16]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17] 서적 Sanguozhi vol. 9
[18] 서적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9] 서적 Zizhi Tongjian
[20]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22] 서적 《위략》
[23] 서적 《삼국지》 제하후조전
[24] 서적 《삼국지》 후주전
[25] 서적 《삼국지》 관장마황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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