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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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회는 남송 시대의 재상으로, 111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1127년 금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송 고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에 올랐다. 그는 금과의 화친을 추진하며, 당시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악비 등의 주전파를 숙청하고 악비를 역모죄로 처형하여 매국노로 비난받았다. 진회는 공포 정치를 펼치며 19년간 재상직을 유지했고, 사후에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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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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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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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진회 (秦檜) |
자 | 회지 (會之) |
다른 이름 | 진장퇴 (秦長腿) |
로마자 표기 | Qin Hui 또는 Qin Kuai |
로마자 표기 (병음) | Qín Huì 또는 Qín Kuài |
로마자 표기 (웨이드-자일스) | Ch'in² Hui⁴ 또는 Ch'in² K'uai¹ |
로마자 표기 (광둥어) | ceon4 kui2 |
로마자 표기 (중국어 발음) | 또는 |
주요 활동 | |
직업 | 송나라의 재상 |
주요 업적 | 악비를 모함하여 죽게 함 |
역사적 평가 | 매국노로 비판받음 |
관련 정보 | |
관련 링크 | 발견된 진회의 유언장 진회의 동창생에 대한 이야기 |
2. 약력
秦檜|친회중국어는 1115년 과거에 합격하여 순조롭게 출세하였다.[19] 1127년 정강의 변(금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휘종, 흠종 황제를 끌고 간 사건)이 발생하여 진회는 많은 신하들과 함께 포로 신분으로 끌려갔다.
정강의 변으로 화북지역을 점령한 금나라는 화북 통치를 위해 꼭두각시 국가인 초나라를 세우려고 했지만, 진회는 이것을 맹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금나라 수뇌부에 의해 북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금나라의 중신이 달려와 밀약을 맺고, 남송의 주전론을 억누르고 화친을 결정했다고 소문을 흘린 후에 풀려났다.[19]
1130년, 진회는 금나라를 탈출해 가까스로 남송의 황제 고종에게 도착했다. 고종은 진회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당일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19] 다음 해에는 재상에 임명하였다. 그 후 일시적으로 재상에서 파면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고 금나라와의 화평교섭 추진에 노력을 다했다.
당시는 금나라와의 교전에서 공을 세운 악비 등의 군벌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고, 주화파는 진회를 비판했다. 이에 진회는 군벌 간의 알력을 이용하여 군벌의 힘을 견제하고, 그 군대를 중앙군에 편입하여 주전파들을 숙청하였다.
1141년, 진회는 화친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를 탄압하고 관직에서 추방했다. 특히 당시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던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그는 한세충에게 처형 이유를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일이 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라고 설명했다.[17] 이는 훗날 진회에 대한 평가를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주전파를 억누른 진회는 다음 해인 1142년에 금나라와의 화친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이 화친 조약은 황하 강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 양보하고, 매년 은 과 비단 을 조공으로 바치며, 남송 황제가 금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 등 굴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진회는 매국노, 즉 한간(漢奸)으로 비난받았고, 그 후에도 이러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송의 재상이었던 진회는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
1155년 진회는 재상에 있은 지 20년 만에 66세로 사망했다. 사망하자 신왕(申王)으로 추증되었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9]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秦檜|친회중국어는 1115년 과거에 합격하여 순조롭게 출세하였다.[19] 1127년 정강의 변(금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휘종, 흠종 황제를 끌고 간 사건)이 발생하여 秦檜|친회중국어는 많은 신하들과 함께 포로 신분으로 끌려갔다.정강의 변으로 화북지역을 점령한 금나라는 화북 통치를 위해 꼭두각시 국가인 초나라를 세우려고 했지만, 秦檜|친회중국어는 이것을 맹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금나라 수뇌부에 의해 북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금나라의 중신이 달려와 밀약을 맺고, 남송의 주전론을 억누르고 화친을 결정했다고 소문을 흘린 후에 풀려났다.[19]
1130년, 秦檜|친회중국어는 금나라를 탈출해 가까스로 남송의 황제 고종에게 도착했다. 고종은 秦檜|친회중국어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당일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19] 다음 해에는 재상에 임명하였다. 그 후 일시적으로 재상에서 파면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고 금나라와의 화평교섭 추진에 노력을 다했다.
2. 2. 정강의 변과 포로 생활
1127년 정강의 변(금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휘종, 흠종 황제를 끌고 간 사건)이 발생하여 진회는 다른 많은 신하들과 함께 포로 신분으로 금나라에 끌려갔다.[17] 금나라는 정강의 변으로 화북지역을 점령하고, 화북 통치를 위해 꼭두각시 국가인 초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진회는 이에 맹렬히 반대하여 금나라 수뇌부에 의해 북으로 압송되었다.[17] 이때 금나라의 중신이 달려와 밀약을 맺고, 남송의 주전론을 억누르고 화친을 결정했다는 소문을 흘린 후에 풀려났다.[17]1130년, 진회는 금나라를 탈출해 가까스로 남송의 황제 고종에게 도착했다.[17] 고종은 진회가 돌아온 것을 매우 기뻐하며 당일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 다음 해에는 재상에 임명했다.[17] 이후 일시적으로 재상에서 파면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복귀하여 금나라와의 화평 교섭 추진에 힘썼다.[17]
진회는 정강의 변에 끌려갔던 경험으로 인해 힘을 갖추지 못한 대책 없는 주전론에 의한 피해자였으며, 악비를 비롯한 강경파 주전론자들을 극도로 경계하였다.[17]
2. 3. 남송 귀환과 재상 등용
1130년 진회는 금나라를 탈출해 가까스로 남송의 황제 고종에게 도착했다. 고종은 진회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당일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 다음 해에는 재상에 임명했다.[17] 그 후 일시적으로 재상에서 파면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여 금나라와의 화평 교섭 추진에 힘썼다.당시는 금나라와의 교전에서 공을 세운 악비 등의 군벌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고, 주화파는 진회를 비판했다. 이에 진회는 군벌 간의 알력을 이용하여 군벌의 힘을 견제하고, 그 군대를 중앙군에 편입하여 주전파들을 숙청하였다.
2. 4. 주전파와의 갈등과 악비 처형
1141년, 진회는 화친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를 탄압하고 관직에서 추방했다. 특히 당시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던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그는 한세충에게 처형 이유를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일이 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라고 설명했다.[7] "모수유(莫須有)"는 조작된 죄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8][9] 이 사건은 훗날 진회에 대한 평가를 매우 부정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된다.주전파를 억누른 진회는 다음 해인 1142년에 금나라와의 화친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이 화친 조약은 황하 강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 양보하고,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조공으로 바치며, 남송 황제가 금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 등 굴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진회는 매국노, 즉 한간(漢奸)으로 비난받았고, 그 후에도 이러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송의 재상이었던 진회는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
2. 5. 소흥화의와 그 결과
1141년, 진회는 화친에 반대하는 주전파를 탄압하고 관직에서 추방했다. 특히 당시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던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는데, 그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일이 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라는 말로 처형 이유를 한세충에게 설명했다.[17] 이는 훗날 진회에 대한 평가를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주전파를 억누른 진회는 1142년에 금과의 화친을 추진한다. 이 화친 조약으로 황하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 양보하고, 매년 은 과 비단 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며, 남송의 황제가 금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해야 했다. 이러한 내용은 양국의 역관계를 반영한 굴욕적인 결과였다.
이 때문에 진회는 매국노, 즉 한간(漢奸)으로 비난받았다. 이후에도 진회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지만, 남송의 재상이었던 진회는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18][19]
2. 6. 권력 장악과 공포 정치
1130년, 진회는 금나라를 탈출해 남송의 황제 고종에게 도착했다. 고종은 진회가 돌아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당일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 다음 해에는 재상에 임명했다. 그 후 일시적으로 재상에서 파면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고 금나라와의 화평 교섭 추진에 노력했다.[17]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끌려갔던 진회 자신도 힘을 갖추지 못한 대책 없는 주전론에 의한 피해자였으며, 악비를 비롯한 강경파 주전론자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당시 금과의 교전에서 공을 세운 악비 등의 군벌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고, 주화파인 진회를 비판했다. 이에 진회는 군벌 간의 알력을 이용하여 군벌의 힘을 견제하고, 그 군대를 중앙군에 편입하여 주전파들을 숙청하였다.
1141년, 화친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를 탄압하고 관직에서 추방하였다. 특히 당시 구국의 영웅이라고 일컬어졌던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그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일이 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라는 말로 처형 이유를 한세충에게 설명했다. 이것이 후에 그의 평가를 현저하게 낮추는 이유가 된다.[17]
주전파를 억눌렀던 진회는 다음 해 1142년에 금과의 화친을 추진한다. 그러나 이 화친은 양국의 역관계를 반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화친 조약으로 황하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게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조공 바쳐야 했고,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한다는 것이 화친 조약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그 후 진회는 매국노, 즉 한간(漢奸)으로 지탄받았고, 그 후에도 진회에 대한 비난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남송의 재상이었던 진회는 그러한 반대파에 대해서는 철저한 탄압을 하는 공포 정치를 펼쳐 반대파를 강경하게 탄압했다.[17]
2. 7. 사망과 후대의 평가
1155년 진회는 재상에 있은 지 20년 만에 66세로 사망했다. 사망하자 신왕(申王)으로 추증되었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9] 1206년 남송 영종(寧宗) 개희(開喜) 2년 4월, 왕작(王爵)이 추탈되고 시호는 유축(謬丑)으로 변경되었다. 1254년 남송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 2월, 시호는 유한(謬狠)으로 다시 변경되었다.[24]진회는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던 인물로, 악비를 비롯한 강경파 주전론자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1141년 화친을 반대하는 주전파를 탄압하고 관직에서 추방했으며,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던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그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일이 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라는 말로 처형 이유를 설명했는데, 이는 후대에 그의 평가를 현저하게 낮추는 이유가 된다.[17]
1142년 금나라와의 화친을 추진, 황하 강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 양보하고 매년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조공으로 바치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진회는 매국노, 즉 한간(漢奸)으로 지탄받았으며, 이후에도 그에 대한 비난은 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회는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18]
송 효종은 악비를 사후 사면하는 등 진회의 정적 대부분을 사면했다. 이후 진회는 중국 역사가들에게 끊임없이 비난받았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신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주희(朱熹)는 진회를 "사대부(士大夫) 중의 소인(小人)"이라 칭하며, 화의(和議)를 주창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이적(夷狄)의 힘을 빌려 천자(天子)를 현혹시켰으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짓밟고 부모와 임금을 잊었다고 비판했다.[21]
원나라 때 편찬된 『송사』는 진회를 “간신전(姦臣傳)”에 수록하고,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9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천자를 위협하고 악의를 품었으며, 강화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원수를 잊고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망쳤다"라고 혹평했다.[24]
명나라 정덕 8년(1513년) 악왕묘 앞에 죄인 모습의 진회 부부와 만사설(악비 심문을 실행한 진회의 부하) 동상이 만들어졌고, 만력 연간에는 장준(악비와 적대했던 진회파 군인)의 상도 추가되었다. 이 상에 침을 뱉는 습관이 최근까지 있었기에 “상에 침을 뱉거나, 두들기면 안 된다”라는 게시물이 생겨났다.
3. 평가
진회는 죽은 뒤 매국노라는 오명을 얻었다. 악비를 숙청하여 처형한 행위는 후세에 큰 비난을 받았으며[1], 이로 인해 진회 부부는 악왕묘에 포박된 채 꿇어앉아 전시되고 있다.[1] 옛날 중국에서는 이 상에 침을 뱉거나 차는 습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금지되었다.[1]
악비의 이야기에 따르면, 진회는 악의적인 누명을 씌워 악비, 악운, 장헌을 체포했다. 진회 부부는 "동쪽 창가"에서 장군 석방 요구 편지를 받고 걱정하다, 귤 껍질 안에 처형 명령서를 넣어 보내는 계략으로 이들을 사형시켰다.[4] 이 음모는 "동창지변(東窗事變)"으로 알려졌으며,[5] 명나라 시대에는 ''동창지(東窗記)''라는 소설로도 만들어졌다.[6] 한세충이 악비의 죄를 묻자, 진회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의 "모수유(莫須有, mò xū yǒu)"라고 답했는데,[7] 이는 조작된 죄명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8][9]
악비의 죽음에 가담한 진회, 왕씨, 만기설, 장준의 철제 동상은 악비 묘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만들어졌다. 이 동상들은 수 세기 동안 저주와 침 뱉기, 소변의 대상이었으나, 현대에는 역사적 유물로 보호받고 있다.[10]
남송 멸망 후에도 악비는 영웅시되었고, 진회는 매국노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다.[1] 밀가루 반죽으로 진회 부부의 모습을 만들어 튀겨 먹은 유탸오는 진회에 대한 불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2]
금과의 강화는 국토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국가를 그르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1140년 악비의 북벌이 보급 문제와 고종의 부당한 철군 명령으로 실패한 것도 협금의 계책 때문이라고 여겨진다.[20]
2000년대 이후, 중국의 역사공정 작업으로 금나라도 중국 역사의 일부로 인정되면서, 진회는 유연한 외교로 국가를 구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1] 그러나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1]
3. 1. 긍정적 평가
청나라 시대에 들어서면서, 청나라의 조상이 건국한 금나라와 화의를 맺은 진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례가 몇 가지 나타났다.- 선대흔은 송나라와 금나라는 원수이므로 이치로 따지면 강화를 해서는 안 되지만, 소흥연간(紹興年間)의 군신이 화의를 관철시킨 것에 대해 후세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장이 많았고, 송나라는 자주 군대를 움직였으므로 진회의 화의 의도는 백성의 부담 경감이라고 생각하며, 시세로 볼 때 실책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25]
- 조익은 도리론(의리의 설)과 현실론(시세의 논)은 흔히 일치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도리에 따라 행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도리도 현실을 직시해야 하며, 그것이 진정한 도리(진의리)라고 하였다. 두 황제가 포로가 되고 중원을 잃었으니, 복수하고 수치를 씻고자 하는 것은 도리이나, 계속 패배하여 쇠약해졌고, 북벌하여 황제를 귀환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회가 등장하기 전에도 화의를 모색하는 지식인이 있었다고 평가했다.[26]
3. 2. 부정적 평가
진회는 죽은 뒤 매국노라는 오명을 얻었다. 군사력이 약한 남송의 현실적인 처세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악비를 숙청하여 처형한 행위가 후세에 큰 비난을 받았다.[4] 진회는 악비를 죽인 것에 대해 번민했지만, 아내의 재촉으로 악비를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는 악왕묘에 포박된 채 꿇어앉아 전시되고 있다. 과거 중국에서는 이 상에 침을 뱉거나 차는 습관이 있었으나, 현재는 금지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남송이 멸망한 후에도 악비는 영웅시되었고, 진회는 매국노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다.
유탸오는 진회에게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밀가루 반죽으로 진회 부부의 모습을 만들어 튀겨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2]
2000년대 이후, 중국에서 외부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는 역사공정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송을 정복한 금나라도 중국 역사의 일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악비는 평가절하되고 진회는 유연한 외교로 국가를 구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악왕묘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송 효종은 악비에 대한 사후 사면을 포함하여 진회의 정적 대부분을 사면했다. 그때부터 진회는 중국 역사가들에게 끊임없이 비난을 받았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부패한 신하의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岳飛의 이야기에 따르면, 진회는 악의적인 누명을 씌워 악비(岳飛), 악운(岳雲), 장헌(張憲)을 체포했다. 진회와 그의 아내 왕씨(王氏중국어)는 "동쪽 창가"에서 장군을 석방하라는 백성들의 편지를 받고 걱정했다. 진회는 두 달 동안 고문에도 악비가 반역 누명을 인정하지 않아 풀어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시녀가 귤을 가져오자, 왕씨는 귤 껍질 안에 처형 명령서를 넣어 심문 판사에게 보내는 계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장군과 그의 동료들은 사형당했다.[4] 이 음모는 "동창지변(東窗事變)"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명나라 시대에는 이 이야기를 다룬 소설 ''동창지(東窗記)''가 쓰여졌다.[6]
한세충(韓世忠) 장군이 악비의 죄를 묻자, 진회는 "그가 반역할 만한 일을 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고 답했다.[7] "모수유(莫須有, mò xū yǒu)"라는 표현은 조작된 죄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중국어에 들어왔다.[8][9]
악비의 죽음에 가담한 진회, 왕씨, 그리고 진회의 두 부하인 만기설(万俟卨, Moqi Xie)과 장준(張俊, Zhang Jun)의 철제 동상은 악비의 묘(항저우(杭州)의 서호 근처에 위치)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만들어졌다. 수 세기 동안 이 동상들은 저주를 받고, 침을 뱉고, 소변을 보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 동상들이 역사적 유물로 보호받고 있다.[10] 동상을 둘러싼 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다.
> "푸른 언덕은 충신 장군의 묘지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흰 철은 역적의 동상이 된 것을 불운으로 여긴다." [11]
당시 남송은 “금에 항거한 명장”으로 불리는 유능한 장군들을 다수 배출했고, 군사력이 충실했던 시기였기에, 금과의 강화는 국토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국가를 그르친 것이라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1140년 악비의 북벌이 개봉 근처까지 이르렀으나 보급 문제와 고종의 부당한 철군 명령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협금의 계책 때문이라고 여겨진다.[20]
진회보다 40세 어린 주희(朱熹)는 진회 정권 하의 1148년 과거에서 진사(進士)가 된 후, 진회를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하였다.[21]
- 진회는 옛날에는 품행이 정순한 사람이었지만, 말년에는 훌륭한 벗들로부터 멀어져 모두 망쳐 버렸다.
- 진회는 사대부(士大夫) 중의 소인(小人)이다.
- 진회는 화의(和議)를 주창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이적(夷狄)의 힘을 빌려 천자(天子)를 현혹시켰으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짓밟고, 부모와 임금을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이것이 진회의 큰 죄이다.
주희는 온주에서 과거 지사를 지낸 진회가 존숭되어 현학(縣學)에 사당이 세워져 있는 것을 알고 철거를 명령하였다(『晦庵先生朱文公文集』권 99 「제진회사이문(除秦檜祠移文)」).[23]
원나라 때 편찬된 『송사』는 친회(秦檜)를 “간신전(姦臣傳)”에 싣고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24]
-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9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천자를 위협하고 악의를 품고, 강화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원수를 잊고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망쳤다. 당시의 충신과 명장들은 거의 모두 없애 버리고, 완고하고 어리석고 파렴치한 무리가 친회의 앞잡이가 되었다.
명나라 정덕 8년(1513년)에는 악왕묘 앞에 죄인 모습의 친회 부부와 만적절(악비의 심문을 실행한 친회의 부하)의 동상이 만들어졌고, 만력 연간에는 장준(악비와 적대했던 친회파의 군인)의 상도 추가되었다. 이 상에 침을 뱉는 습관이 최근까지 있었기에 “상에 침을 뱉거나, 두들기면 안 된다”라는 게시물이 생겨났다.
구준처럼 친회를 변호하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친회는 간신이라는 견해가 다수였다.
3. 3. 현대적 재평가
진회는 사후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당시 군사력이 약한 남송의 현실적인 처세였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악비를 숙청하여 처형시킨 행위가 후세에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1] 진회 자신도 악비를 죽인 것에 대하여는 상당히 번민하였지만 아내의 재촉을 받고 죽일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1] 그 때문에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는 아직도 악왕묘에 포박된 채로 꿇어앉아서 전시되고 있다.[1] 옛날 중국에는 이 상에 침을 뱉거나 차는 습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침을 뱉거나 차서는 안 된다는 안내가 붙어 있다.[1]남송이 망한 이후에도 악비가 영웅시되었으며, 그에 반해 진회의 악명은 점점 높아져 매국노의 대명사로 다루어졌다.[1]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쓰지 않는다.[1]
일설에 따르면 유탸오는 진회에 불만을 가진 민중이 밀가루 반죽으로 진회의 모습을 만들어 튀겨 먹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1]
2000년대에 들어서, 중국에서 외부 민족의 역사를 끌어안아 중국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는 역사공정 작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송을 정복한 금나라 역시 중국 역사의 일부로 인정되면서,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반대로 대항자 악비가 절하되고, 진회는 유연한 외교로 국가를 대환란에서 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1] 그러나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으며, 악왕묘 역시 그대로 유지되는 중이다.[1]
4. 진회 관련 설화
진회와 관련된 설화는 악비 이야기부터 명나라 시대 민간 설화까지 다양하게 전해진다.
악비 이야기에 따르면, 진회는 악비, 악운, 장헌을 모함하여 체포했다. 진회 부부가 악비를 처형할 방법을 모의하던 중, 왕씨가 귤껍질 속에 처형 명령서를 넣어 보내는 계략을 냈고, 이 사건은 "동창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세충이 악비의 죄를 묻자 진회는 "모수유(莫須有)"라고 답했는데, 이는 조작된 죄명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서유기보충에서는 손오공이 저승에서 진회를 심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손오공은 진회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결국 마법 호리병을 사용하여 그를 처벌한다. 이 과정에서 유관이 등장하여 유교적 가르침을 전하기도 한다.
명나라 시대에는 진회의 후손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항주의 새 순무이자 진회의 후손인 관리가 악왕묘에 있는 진회 부부의 철제 동상을 서호에 몰래 버렸는데, 호수가 검게 변하고 악취가 풍기는 이변이 일어났다. 동상이 다시 떠오르는 기적이 일어나자 관리는 도망쳤다는 이야기다.
남송 시대 승려 풍파(馮波)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풍파는 악비가 투옥된 후 진회에게 "나라의 기둥을 죽이려 하는가?"라고 꾸짖고, 빗자루로 그의 얼굴을 쓸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풍파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4. 1. 유탸오의 기원
진회는 사후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악비를 숙청하여 처형시킨 행위가 후세에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회 자신도 악비를 죽인 것에 대하여는 상당히 번민하였지만 아내의 재촉을 받고 죽일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1] 그 때문에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는 아직도 악왕묘에 포박된 채로 꿇어앉아서 전시되고 있다.[1]일설에 따르면 유탸오가 진회에 불만을 가진 민중이 밀가루 반죽으로 진회의 모습을 만들어 튀겨 먹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1]
4. 2. 동창사건(東窗事變)
악비 이야기에 따르면, 진회(秦檜)는 악비(岳飛), 악운(岳雲), 장헌(張憲)을 모함하여 체포했다. 진회와 그의 아내 왕씨(王氏)는 "동쪽 창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장군의 석방을 요구하는 편지를 받았다. 진회는 거의 두 달 동안 고문했음에도 악비가 반역 누명을 인정하지 않아 풀어줘야 할 처지에 놓여 걱정했다. 그러나 시녀가 귤을 가져오자, 왕씨는 장군을 처형할 계획을 세웠다. 왕씨는 진회에게 귤 껍질 안에 처형 명령서를 넣어 심문 판사에게 보내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황제나 진회 자신이 공개적인 처형 명령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장군과 그의 동료들은 사형당할 것이었다.[4] 이 사건은 "동창지변(東窗事變)"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명나라 시대에는 이 이야기를 다룬 익명의 소설 ''동창기(東窗記)''가 쓰여졌다.[6]한세충(韓世忠)이 악비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묻자, 진회는 "반역할 만한 일을 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7] "모수유(莫須有, mò xū yǒu)"라는 표현은 조작된 죄명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어에 들어왔다.[8][9]
악비의 죽음에 가담한 진회, 왕씨, 진회의 두 부하 만사설(万俟卨)과 장준(張俊)의 철제 동상은 악비의 묘(항저우(杭州) 서호 근처)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만들어졌다. 수 세기 동안 이 동상들은 저주를 받고, 침을 뱉고, 소변을 보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역사적 유물로 보호받고 있다.[10] 동상을 둘러싼 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다.
"푸른 언덕은 충신 장군의 묘지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흰 철은 역적의 동상이 된 것을 불운으로 여긴다." [11]
진회와 그의 아내 이야기는 유탸오의 기원이라고도 한다.[12]

『서유기보충』(西遊補, 1640년)은 『서유기』에 대한 명나라 시대 부록으로, 61장 끝과 62장 시작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에서 손오공은 자신의 육욕을 상징하는 존재와 마주하고,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거울이 가득한 탑에 갇힌다. 한 거울은 그를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시간 여행하게 한다. 거기서 몇몇 하급 악마들이 나타나 저승의 왕 염라대왕이 최근 병으로 죽었다고 말하며, 적절한 대체자가 발견될 때까지 손오공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손오공은 결국 최근 사망한 재상 진회의 운명을 심판하게 된다. 그는 진회를 고문하여 죄를 자백하게 한다. 고문에는 수백만 개의 자수정이 살 속에 박히고, 풀처럼 갈리고, 칼과 창산에 던져지고, 잘게 썰어지고, 사람의 고름을 마시게 하고, 갈비뼈를 뜯어내어 잠자리 모양으로 만드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악마는 마법의 숨결을 사용하여 진회를 원래 모습으로 "불어넣는" 임무를 맡는다. 손오공은 하늘로 악마를 보내 강력한 마법 호리병을 가져오게 하는데, 이 호리병은 앞에서 말하는 사람을 모두 빨아들여 피투성이 스튜로 녹인다. 그는 이 호리병을 진회의 최종 처벌에 사용한다. 한편, 손오공은 유관의 귀신을 저승으로 초대하여 세 번째 스승으로 삼는다. (1) 불멸의 수보리에게 도교 마법을, 2) 승려 삼장법사에게 불교의 자제를, 3) 유관에게 유교 이상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진회가 액체로 변할 때까지 유관을 접대하고, 장군에게 진회의 "피주" 한 잔을 권한다. 그러나 유관은 그것을 마시면 영혼이 더럽혀질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손오공은 하급 악마에게 그 술을 마시게 하는 실험을 한다. 얼마 후, 악마는 피주의 악한 영향 아래 있는 듯 자신의 개인 종교 교사를 살해하고, "귀신의 문"으로 도망쳐 다른 존재로 환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관은 천상의 거처로 돌아간다. 손오공은 저승의 수백만 주민 모두가 절하게 함으로써 그를 존경심으로 배웅한다.[13]
4. 3. 풍파(馮波)의 빗자루

남송 시대에는 “미친 스님” 지공(濟公)과 “광인 스님” 풍파(馮波)라는 두 명의 유명한 불교 승려가 있었다. 풍파는 岳飛 시대에 살았으며, “빗자루로 친회(秦檜)의 얼굴을 쓸어버렸다”는 일화로 유명해졌다.[15]
이야기에 따르면, 악비가 누명을 쓰고 투옥된 후 친회가 자신의 운세를 보려고 영인사(靈隱寺)에 갔다. 거기서 풍파는 웃으며 친회에게 “조조도 한때 큰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다. 친회는 어리둥절하여 그 뜻을 물었다. 풍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분명하다. 충성과 배신은 저절로 드러난다. 선과 악에는 상응하는 보상이나 응보가 따른다. 당신은 재상으로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나라의 기둥과 같은 중요한 인물을 죽이려 하는가? 나라의 안전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느냐?”
친회는 “나라의 기둥이 누구냐?”라고 반문했다. 풍파는 “장군 악비!”라고 소리쳤다. 친회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자 풍파는 웃으며 “어리석은 자여! 늦기 전에 회개하라!”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빗자루를 잡아 재상의 얼굴을 쓸고 재빨리 달아났다. 창피함을 느낀 친회는 패배한 사람처럼 궁궐로 돌아왔다.[15]
스님의 대담함은 일반 백성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나타나 아무리 깨끗한 곳이라도 바닥을 쓸며 “친을 쓸어낸다”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반역자 친회를 권좌에서 몰아내기 위해 단결하라고 일깨웠다고 한다. “광인 스님” 풍파는 후에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15]
“광인 스님”과 “미친 스님”의 조각상은 남송 시대의 여러 사찰에서 함께 볼 수 있었다. 구화산(九華山)의 잠탄림(湛潭林)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이러한 아라한상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신(神)의 모습을 한 “미친 스님” 지공이고, 다른 하나는 한 손에는 먼지털이를, 왼쪽 겨드랑이에는 빗자루를 끼고 서서 언제든지 악독한 재상에게 다시 빗자루질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광인 스님” 풍파이다.[15]
이 이야기는 악비의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를 각색한 것으로, 원전에는 “쓸어내는” 내용이 전혀 없다. 점쟁이의 이름은 “성도(成都)의 사인부(謝仁甫)”였으며, 그는 변장한 고종과 친회의 운세를 용음사(龍吟寺)에서 봐주었다. 친회는 궁궐로 돌아와 점쟁이를 체포하라고 사람들을 보냈지만, 점쟁이는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이미 도시를 떠나 도망쳤다.[4]
4. 4. 진회 후손과 관련된 이야기
명나라 시대, 항주의 새로운 순무(巡撫)이자 진회와 왕씨 부인(王氏)의 직계 후손이었던 관리가 밤중에 철로 만든 두 개의 동상을 서호에 버렸다. 다음 날, 호수는 칠흑처럼 검어졌고 구토 냄새가 났다. 마을 사람들은 호수의 상태가 동상이 사라진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씨 관리가 현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진회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동상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 누군가 정말로 호수에서 동상을 건져 올린다면, 나는 벼슬을 내놓고 벌을 받겠다"라고 큰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 탁한 물이 맑아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린 듯 동상이 물가로 떠올랐다. 이 기적적인 광경을 본 비겁한 관리는 황급히 가마에 올라탔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도망치는 가마에 돌을 던졌고, 많은 돌이 가마의 커튼을 찢어 그의 머리에 큰 혹을 만들었다. 그날 밤, 친씨 관리는 항주에서 도망쳐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1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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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現秦檜遺囑後 考古隊向秦檜磕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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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檜一同學,從小看不起秦檜,陷害岳飛後被卸磨殺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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