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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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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준은 북송 시대의 인물로, 979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뛰어난 연설가이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로, 송 태종이 불쾌감을 느껴 자리를 뜨려 하자 옷자락을 붙잡고 앉혀 끝까지 듣게 할 정도였다. 1004년에는 재상에 올라 요나라의 침략에 맞서 송 진종의 친정을 주장하여 전연의 맹을 맺는 데 기여했다. 이후 왕흠약의 모함으로 파면되었으나, 1017년 재상으로 복직했다가 다시 좌천되어 뇌주사호참군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34년에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소설 《양가장연의》에서는 충신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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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역대 명신 화상해에 수록된 구준의 초상 (아마도 19세기 후반)
이름구준 (寇準)
평중 (平仲)
출생961년 또는 962년 1월
출생지화 주, 송나라
사망1023년 10월 24일
사망지뢰 주, 송나라
배우자서씨 (許)
송씨 (宋)
자녀딸 3명
아버지구상 (寇相)
어머니조씨 (趙)
시호충민 (忠愍)
관직 정보
관직송나라의 재상
재임 시작 (1)1004년 8월 25일
재임 종료 (1)1006년 3월 27일
군주 (1)송나라 진종
재임 시작 (2)1019년 7월 17일
재임 종료 (2)1020년 7월 9일

2. 생애

구준은 강직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송명신언행록』에는 "구준이 어전에 오르면 백관들이 떨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1]

태평흥국 5년(980년) 진사에 급제했다. 같은 해의 진사로는 왕단, 향민중, 소이간, 장영, 조경, 사필, 마량 등 북송 초기의 명신으로 칭송받는 이들이 많았다.

1004년, 송 진종 치세에 북방의 요나라 군대가 대규모 침략을 시작하여 송나라 수도에 가까이 다가왔다.[1] 왕흠약 등은 황제가 도시를 버리고 중국 남부로 피난할 것을 제안했지만, 구준은 황제가 전선으로 가서 송나라 군대의 사기를 북돋을 것을 제안했다.[1] 진종은 구준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연의 맹을 맺고 요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1]

그러나 왕흠약은 구준을 질투하여 진종에게 구준이 황제를 도박의 판돈으로 삼았다는 참언을 하여 진종이 구준을 불신하게 만들었다.[1]

경덕 2년(1005년)에 중서시랑과 공부상서를 겸임했다.[2]

소설 『양가장연의』에서는 양씨 일족을 돕고 간신 반인미를 옥에 가두는 충신으로 그려져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979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1] 훌륭한 연설가였으며,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1] 한번은 송 태종이 불쾌감을 느껴 자리를 뜨려 하자,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앉아서 끝까지 듣도록 강요했다.[1] 태종은 "구준을 곁에 두는 것은 마치 당 태종위징을 곁에 두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

994년 참지정사가 되었고, 진종 즉위 후에는 공부, 형부, 병부에서 직무를 역임했다.

2. 2. 전연의 맹과 정치적 부침

경덕 원년(1004년)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올라 재상이 되었다. 같은 해 겨울, 거란이 성종과 승천태후의 친정으로 군대를 남하시켜 하북의 영주 등을 포위하자, 북송 조정은 당황하였다. 왕흠약 등이 남천을 주장하는 가운데, 구준은 진종의 친정을 주장했고, 친정이 실현되었다. 단주에서 전선이 교착 상태가 되어 전연의 맹이 맺어졌다.[2]

경덕 3년(1006년) 왕흠약의 참언으로 인해 파면되었다.[2]

천희 원년(1017년)에 재상으로 복직했지만, 천희 4년(1020년), 정위・전유연 등의 참언으로 인해 재상에서 쫓겨나 뇌주사호참군으로 좌천되었다. 부임지에서 63세로 사망했다.[2]

2. 3. 유배와 죽음

1020년, 정위, 전유연 등의 참언으로 재상에서 쫓겨나 뇌주사호참군으로 좌천되었다. 부임지에서 63세로 사망했으며, 1034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송사』 열전 40에 전기가 실려 있으며, 후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구준은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로 평가받는다. 『송명신언행록』에는 "구준이 어전에 오르면 백관들이 떨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다. 송 태종은 구준을 당 태종에게 직언을 한 위징에 비유했다. 한번은 송 태종이 불쾌해 자리를 뜨려 하자, 구준이 옷자락을 붙잡고 앉아서 끝까지 듣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왕흠약은 구준을 질투하여 송 진종에게 그가 황제를 도박판의 판돈처럼 여겼다고 모함했고, 이로 인해 진종은 구준을 불신하게 되었다.

3. 1. 후대의 평가

소설 『양가장연의』에서는 양씨(楊氏) 일족을 돕고 간신 반인미를 옥에 가두는 충신으로 그려져 있다. 강직한 성격으로 "구준이 어전에 오르면 백관들이 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한국의 고려시대 과거 시험에 구준 관련 문제가 출제될 정도로 그의 강직함이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구준의 강직함과 소신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정치적 소신을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구준의 강직함이 때로는 지나치게 독선적이었다고 비판하며, 그의 정치적 행보가 왕흠약 등 다른 충신들의 입지를 좁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참조

[1] 서적 Song Shi http://zh.wikisource[...]
[2] 서적 Song Shi http://zh.wikisource[...]
[3] 서적 Xu Zizhi Tongjian Changbian http://zh.wiki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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