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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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 버닝은 메이저 리그에서 17시즌 동안 활약한 우완 투수였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1957년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을 차지하고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1958년에는 노히터를, 1959년에는 임마큘레이트 이닝을 기록했다. 1963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된 후 1964년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고, 두 리그에서 노히터와 100승, 1,000탈삼진을 기록한 최초의 투수가 되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미국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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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버닝 | |
---|---|
기본 정보 | |
![]() | |
포지션 | 투수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55년 7월 20일 |
데뷔 팀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일 | 1971년 9월 3일 |
최종 팀 | 필라델피아 필리스 |
수상 내역 | 9× 올스타 (1957년, 1959년, 1961년–1964년, 1966년) AL 승리 리더 (1957년) 3× 탈삼진 리더 (1959년, 1960년, 1967년) 1964년 6월 21일 퍼펙트 게임 달성 1958년 7월 20일 노히터 달성 필라델피아 필리스 No. 14 영구 결번 필라델피아 필리스 명예의 전당 헌액 |
명예의 전당 링크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유형 | 국가 |
명예의 전당 입성 년도 | 1996년 |
명예의 전당 선정 방식 | 베테랑 위원회 |
선수 기록 | |
승패 기록 | 224승 184패 |
평균자책점 | 3.27 |
탈삼진 | 2,855 |
구단 | |
소속 구단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필라델피아 필리스 (–) 피츠버그 파이리츠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필라델피아 필리스 (–)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931년 10월 23일 |
출생지 | 켄터키주, 사우스게이트 |
사망일 | 2017년 5월 26일 |
사망지 | 켄터키주, 에지우드 |
배우자 | 메리 캐서린 사이스 (1952년 결혼) |
자녀 | 9명 |
학력 | 자비에르 대학교 (문학사) |
직업 | 야구 선수, 중개인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거주지 | 켄터키주 사우스게이트 |
정치 경력 | |
상원 의원 | 켄터키주 |
임기 시작 | 1999년 1월 3일 |
임기 종료 | 2011년 1월 3일 |
이전 의원 | 웬델 포드 |
다음 의원 | 랜드 폴 |
하원 의원 | 켄터키주 제4선거구 |
하원 임기 시작 | 1987년 1월 3일 |
하원 임기 종료 | 1999년 1월 3일 |
이전 하원 의원 | 진 스나이더 |
다음 하원 의원 | 켄 루카스 |
주 상원 의원 | 켄터키주 제11선거구 |
주 상원 임기 시작 | 1980년 1월 1일 |
주 상원 임기 종료 | 1984년 1월 1일 |
이전 주 상원 의원 | 도널드 존슨 |
다음 주 상원 의원 | 아트 슈미트 |
소속 정당 | 미국 공화당 |
음성 |
2. 야구 선수 경력
짐 버닝은 뛰어난 제구력과 다양한 구종을 바탕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17시즌 동안 활약한 우완 투수였다.
== 초기 경력 및 선수 시절 ==
짐 버닝은 자비에 머스킷티어스에서 투구를 한 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프로 계약을 맺었다.[4][7] 1950년부터 1954년까지, 그리고 1955년 시즌 일부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서 보낸 후,[8] 1955년 7월 2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57년에는 20승 8패로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최다승)을 차지하고[3] 올스타전에서 아메리칸 리그 선발 투수로 출전하는 등 괄목할 만한 시즌을 보냈다.[3]
1958년 7월 20일, 버닝은 타이거스 소속으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첫 노히터를 달성했다.[3] 1959년 8월 2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는 9개의 공으로 3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임마큘레이트 이닝을 달성한 역대 다섯 번째 아메리카 리그 투수가 되었다.[9]
1963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뛰었던 버닝은 윈터 미팅 동안 거스 트리안도스와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고, 타이거스는 돈 데미터와 잭 해밀턴을 받았다.[4] 필리스에서의 첫 시즌인 1964년 6월 21일, 버닝은 뉴욕 메츠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트레이시 스탤러드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10] 이는 1880년 이후 내셔널 리그 투수가 던진 첫 번째 퍼펙트 게임이자, 1906년 조니 러시 이후 필리스 투수가 기록한 첫 번째 노히터였다.[3]
버닝은 사이 영, 랜디 존슨 등과 함께 퍼펙트 게임과 노히터를 모두 달성한 투수 중 한 명이며,[3] 두 리그에서 노히터를 던진 다섯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17] 그는 또한 두 리그에서 100승과 1,000탈삼진을 기록한 최초의 투수였다.[17]
버닝은 1967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뛰었고, 이후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거쳐[4] 1969년 시즌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마무리했다. 1970년 필리스로 돌아와 1971년에 은퇴했다.[4]
버닝의 통산 2,855개의 탈삼진은 은퇴 당시 월터 존슨에 이어 역대 2위였으며,[19] 1959년, 1960년, 1967년에는 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했다. 1967년에는 사이 영 상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1964년 6월에는 NL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59년8월 2일의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는 9회 초에 메이저 역대 10번째 3타자 연속 3구 삼진을 기록했다.
투수로서의 구종은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이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영구 결번으로 2001년 지정.
==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
짐 버닝은 1963년 윈터 미팅 동안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4] 필리스에서의 첫 시즌인 1964년 6월 21일, 버닝은 뉴욕 메츠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트레이시 스탤러드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10][11] 이 경기에서 버닝은 4이닝 동안 4개의 삼진을 잡았고,[11] 5회에는 2루수 토니 테일러의 훌륭한 수비로 퍼펙트 게임을 이어갔다.[12] 또한 6회에는 2루타를 치고 2타점을 올리는 등 타석에서도 활약했다.[11] 메츠 팬들조차 버닝의 노력을 응원했으며,[13] 그는 단 두 명의 타자에게만 쓰리볼 카운트를 허용했고, 찰리 스미스를 팝아웃, 대타 조지 알트먼과 존 스티븐슨을 삼진으로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11] 이는 1880년 이후 내셔널 리그 투수가 던진 첫 번째 퍼펙트 게임이었으며, 1922년 찰리 로버트슨 이후 첫 번째 정규 시즌 퍼펙트 게임이었다.[15] 또한 1906년 5월 1일 조니 러시 이후 필리스 투수가 기록한 첫 번째 노히터였다.[3]
버닝의 퍼펙트 게임은 아버지의 날에 이루어져 더욱 의미가 깊었다.[14] 그는 이 경기에서 슬라이더가 자신의 최고의 구종이었다고 언급했다.[14] 버닝은 랜디 존슨, 샌디 쿠팩스, 애디 조스, 사이 영, 마크 부어리, 로이 할러데이와 함께 퍼펙트 게임과 노히터를 모두 달성한 7명의 투수 중 한 명이며,[3] 영, 존슨, 놀란 라이언, 노모 히데오와 함께 두 리그에서 노히터를 던진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17] 그는 두 리그에서 노히터, 100승, 1,000탈삼진을 기록한 최초의 투수였다.[17]
1964년, 필리스는 시즌 대부분 내셔널 리그에서 압도적인 리드를 유지했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18] 감독 진 모치는 버닝과 크리스 쇼트를 많이 기용했고, 두 선수는 9월에 지친 모습을 보였다.[18] 필리스는 9월 21일 6.5경기 차로 앞서 있었지만, 10연패를 당하며 2위로 마감했다.[18]
1967년, 버닝은 개인 통산 최다 탈삼진(253개)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19] 그는 17승 15패, 평균 자책점 2.29, 6완봉승, 40선발, 302.1이닝, 253탈삼진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19] 이 해는 버닝이 사이 영 상 투표에서 유일하게 표를 받은 해로, 마이크 매코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버닝은 1967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뛰었다.[4] 1996년에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1] 2001년, 필리스는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22]
== 선수 생활 말년 및 은퇴 ==
버닝은 1970년에 필리스로 복귀하여[4] 197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4] 은퇴 당시 통산 2,855개의 탈삼진은 월터 존슨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19]
버닝은 1955년7월 20일에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3] 1957년에는 20승 8패로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다.[3] 1958년7월 20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으며,[3] 1964년6월 21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는 역대 7번째이자 내셔널 리그 최초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3] 그는 사이 영, 랜디 존슨과 더불어 양대 리그에서 모두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역대 2번째 투수이다.[3] 또한, 버닝은 양대 리그에서 1,000 탈삼진을 기록한 최초의 투수이기도 하다.[17]
1959년8월 2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는 9회 초에 메이저 리그 역대 10번째로 3타자 연속 3구 삼진을 기록했다.[9]
1996년 베테랑스 위원회의 추천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1] 2001년에는 버닝의 필리스 재적 당시 등번호 ''''14''''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22]
== 은퇴 이후 활동 ==
짐 버닝은 선수 은퇴 후, 필리스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리딩 필리스, 유진 에메랄드, 톨레도 머드 헨스, 오클라호마 시티 89ers를 감독했다.[4] 1996년에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21] 2001년에는 필리스 시절 등번호 14번이 영구 결번되었다.[22] 1984년에는 필라델피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0]
== 선수 노조 활동 ==
1960년대 중반부터 야구 은퇴 시점까지 버닝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MLBPA)에서 활동하며 선수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섰다.[23] MLBPA는 1950년대 초 선수들의 급여, 복지, 근로 조건 개선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나, 구단주들은 연대하여 급여를 제한하고 열악한 근로 조건을 제공하며 선수들을 압박했다. 당시 신입 선수의 연봉은 현재 가치로 약 47,000달러(1965년 기준 6,000달러)였고, 평균 연봉은 약 112,000달러(1965년 기준 14,000달러)에 불과했다.
버닝은 선수 생활 초기에 MLBPA에 참여하여 아메리카 리그 선수들의 연금 대표와 협회 집행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65년, 버닝은 MLBPA 창립자인 로빈 로버츠와 함께 마빈 밀러를 전임 집행 이사로 영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밀러는 1983년까지 집행 이사직을 맡으며 선수 협회를 이끌었고, 1968년 MLBPA는 구단주들과의 첫 번째 단체 교섭 계약을 체결하여 선수들의 급여, 복지 및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버닝이 은퇴할 무렵, 메이저 리그 선수들의 최저 연봉과 평균 연봉은 거의 두 배로 증가했으며, 2015년에는 최저 연봉이 50만 달러 이상, 평균 연봉은 400만 달러 이상으로 크게 상승했다. MLBPA는 보류 조항을 폐지하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반독점법에서 면제되는 것을 철폐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선수들은 트레이드를 거부할 권리와 자유 계약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은퇴 후, 버닝은 선수 에이전트로 활동하며 한때 최대 30명의 선수를 대표하기도 했다.[24] 버닝의 사망 당시, MLBPA 집행 이사였던 토니 클락은 "모든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 구단주들과의 관계에서 공정한 대표를 받도록 할 필요성을 인식한 짐은 동료들과 함께 여러 세대의 선수들을 위한 길을 열었다"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 선수 성적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완투 | 완봉 | 승리 | 패배 | 세이브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55 | DET | 15 | 0 | 0 | 3 | 5 | 1 | .375 | 241 | 51.0 | 59 | 8 | 32 | 2 | 3 | 37 | 1 | 0 | 38 | 36 | 6.35 | 1.78 |
1956 | 15 | 0 | 0 | 5 | 1 | 1 | .833 | 245 | 53.1 | 55 | 6 | 28 | 4 | 0 | 34 | 3 | 0 | 24 | 22 | 3.71 | 1.56 | |
1957 | 45 | 14 | 1 | 20 | 8 | 1 | .714 | 1081 | 267.1 | 214 | 33 | 72 | 5 | 11 | 182 | 4 | 1 | 91 | 80 | 2.69 | 1.07 | |
1958 | 35 | 10 | 3 | 14 | 12 | 0 | .538 | 923 | 219.2 | 188 | 28 | 79 | 4 | 10 | 177 | 5 | 3 | 96 | 86 | 3.52 | 1.22 | |
1959 | 40 | 14 | 1 | 17 | 13 | 1 | .567 | 1037 | 249.2 | 220 | 37 | 75 | 0 | 11 | 201 | 1 | 1 | 111 | 108 | 3.89 | 1.18 | |
1960 | 36 | 10 | 3 | 11 | 14 | 0 | .440 | 1024 | 252.0 | 217 | 20 | 64 | 7 | 11 | 201 | 2 | 0 | 92 | 78 | 2.79 | 1.12 | |
1961 | 38 | 12 | 4 | 17 | 11 | 1 | .607 | 1110 | 268.0 | 232 | 25 | 71 | 3 | 9 | 194 | 2 | 0 | 113 | 95 | 3.19 | 1.13 | |
1962 | 41 | 12 | 2 | 19 | 10 | 6 | .655 | 1103 | 258.0 | 262 | 28 | 74 | 3 | 13 | 184 | 4 | 0 | 112 | 103 | 3.59 | 1.3 | |
1963 | 39 | 6 | 2 | 12 | 13 | 1 | .480 | 1051 | 248.1 | 245 | 38 | 69 | 3 | 5 | 196 | 4 | 0 | 119 | 107 | 3.88 | 1.26 | |
1964 | PHI | 41 | 13 | 5 | 19 | 8 | 2 | .704 | 1145 | 284.1 | 248 | 23 | 46 | 3 | 14 | 219 | 2 | 0 | 99 | 83 | 2.63 | 1.03 |
1965 | 39 | 15 | 7 | 19 | 9 | 0 | .679 | 1191 | 291.0 | 253 | 23 | 62 | 10 | 12 | 268 | 1 | 0 | 92 | 84 | 2.60 | 1.08 | |
1966 | 43 | 41 | 5 | 19 | 14 | 1 | .576 | 1254 | 314.0 | 260 | 26 | 55 | 8 | 19 | 252 | 5 | 1 | 91 | 84 | 2.41 | 1.00 | |
1967 | 40 | 40 | 6 | 17 | 15 | 0 | .531 | 1216 | 302.1 | 241 | 18 | 73 | 20 | 13 | 253 | 4 | 1 | 94 | 77 | 2.29 | 1.04 | |
1968 | PIT | 27 | 3 | 1 | 4 | 14 | 0 | .222 | 684 | 160.0 | 168 | 14 | 48 | 6 | 8 | 95 | 3 | 0 | 75 | 69 | 3.88 | 1.35 |
1969 | 25 | 4 | 0 | 10 | 9 | 0 | .526 | 654 | 156.0 | 147 | 10 | 49 | 4 | 6 | 124 | 4 | 1 | 74 | 66 | 3.81 | 1.26 | |
LAD | 9 | 1 | 0 | 3 | 1 | 0 | .750 | 238 | 56.1 | 65 | 5 | 10 | 0 | 1 | 33 | 0 | 0 | 23 | 21 | 3.36 | 1.33 | |
'69 합계 | 34 | 5 | 0 | 13 | 10 | 0 | .565 | 892 | 212.1 | 212 | 15 | 59 | 4 | 7 | 157 | 4 | 1 | 97 | 87 | 3.69 | 1.28 | |
1970 | PHI | 34 | 4 | 0 | 10 | 15 | 0 | .400 | 937 | 219.0 | 233 | 19 | 56 | 9 | 8 | 147 | 1 | 0 | 111 | 100 | 4.11 | 1.32 |
1971 | 29 | 1 | 0 | 5 | 12 | 1 | .294 | 484 | 110.0 | 126 | 11 | 37 | 7 | 6 | 58 | 1 | 0 | 72 | 67 | 5.48 | 1.48 | |
MLB:17년 | 591 | 151 | 40 | 224 | 184 | 16 | .549 | 15618 | 3760.1 | 3433 | 372 | 1000 | 98 | 160 | 2855 | 47 | 8 | 1527 | 1366 | 3.27 | 1.18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는 기록 없음
- 다승: 1회 (1957년)
- 탈삼진: 3회 (1959년, 1960년, 1967년)
- MLB 올스타전 선출: 7회 (1957년, 1959년, 1961년 - 1964년, 1966년)
- 노히트 노런: 1회 (1958년 7월 20일, 대 보스턴 레드삭스전)
- 퍼펙트 게임: 1회 (1964년 6월 21일, 대 뉴욕 메츠전)
2. 1. 초기 경력 및 선수 시절
짐 버닝은 자비에 머스킷티어스에서 투구를 한 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프로 계약을 맺었다.[4][7] 1950년부터 1954년까지, 그리고 1955년 시즌 일부를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서 보낸 후,[8] 1955년 7월 2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57년에는 20승 8패로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최다승)을 차지하고[3] 올스타전에서 아메리칸 리그 선발 투수로 출전하는 등 괄목할 만한 시즌을 보냈다.[3]1958년 7월 20일, 버닝은 타이거스 소속으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첫 노히터를 달성했다.[3] 1959년 8월 2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는 9개의 공으로 3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임마큘레이트 이닝을 달성한 역대 다섯 번째 아메리카 리그 투수가 되었다.[9]
1963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뛰었던 버닝은 윈터 미팅 동안 거스 트리안도스와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고, 타이거스는 돈 데미터와 잭 해밀턴을 받았다.[4] 필리스에서의 첫 시즌인 1964년 6월 21일, 버닝은 뉴욕 메츠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트레이시 스탤러드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10] 이는 1880년 이후 내셔널 리그 투수가 던진 첫 번째 퍼펙트 게임이자, 1906년 조니 러시 이후 필리스 투수가 기록한 첫 번째 노히터였다.[3]
버닝은 사이 영, 랜디 존슨 등과 함께 퍼펙트 게임과 노히터를 모두 달성한 투수 중 한 명이며,[3] 두 리그에서 노히터를 던진 다섯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17] 그는 또한 두 리그에서 100승과 1,000탈삼진을 기록한 최초의 투수였다.[17]
버닝은 1967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뛰었고, 이후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거쳐[4] 1969년 시즌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마무리했다. 1970년 필리스로 돌아와 1971년에 은퇴했다.[4]
버닝의 통산 2,855개의 탈삼진은 은퇴 당시 월터 존슨에 이어 역대 2위였으며,[19] 1959년, 1960년, 1967년에는 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했다. 1967년에는 사이 영 상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1964년 6월에는 NL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59년8월 2일의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는 9회 초에 메이저 역대 10번째 3타자 연속 3구 삼진을 기록했다.
투수로서의 구종은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이었다.
2. 2.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짐 버닝은 1963년 윈터 미팅 동안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4] 필리스에서의 첫 시즌인 1964년 6월 21일, 버닝은 뉴욕 메츠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트레이시 스탤러드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10][11] 이 경기에서 버닝은 4이닝 동안 4개의 삼진을 잡았고,[11] 5회에는 2루수 토니 테일러의 훌륭한 수비로 퍼펙트 게임을 이어갔다.[12] 또한 6회에는 2루타를 치고 2타점을 올리는 등 타석에서도 활약했다.[11] 메츠 팬들조차 버닝의 노력을 응원했으며,[13] 그는 단 두 명의 타자에게만 쓰리볼 카운트를 허용했고, 찰리 스미스를 팝아웃, 대타 조지 알트먼과 존 스티븐슨을 삼진으로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11] 이는 1880년 이후 내셔널 리그 투수가 던진 첫 번째 퍼펙트 게임이었으며, 1922년 찰리 로버트슨 이후 첫 번째 정규 시즌 퍼펙트 게임이었다.[15] 또한 1906년 5월 1일 조니 러시 이후 필리스 투수가 기록한 첫 번째 노히터였다.[3]버닝의 퍼펙트 게임은 아버지의 날에 이루어져 더욱 의미가 깊었다.[14] 그는 이 경기에서 슬라이더가 자신의 최고의 구종이었다고 언급했다.[14] 버닝은 랜디 존슨, 샌디 쿠팩스, 애디 조스, 사이 영, 마크 부어리, 로이 할러데이와 함께 퍼펙트 게임과 노히터를 모두 달성한 7명의 투수 중 한 명이며,[3] 영, 존슨, 놀란 라이언, 노모 히데오와 함께 두 리그에서 노히터를 던진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17] 그는 두 리그에서 노히터, 100승, 1,000탈삼진을 기록한 최초의 투수였다.[17]
1964년, 필리스는 시즌 대부분 내셔널 리그에서 압도적인 리드를 유지했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18] 감독 진 모치는 버닝과 크리스 쇼트를 많이 기용했고, 두 선수는 9월에 지친 모습을 보였다.[18] 필리스는 9월 21일 6.5경기 차로 앞서 있었지만, 10연패를 당하며 2위로 마감했다.[18]
1967년, 버닝은 개인 통산 최다 탈삼진(253개)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19] 그는 17승 15패, 평균 자책점 2.29, 6완봉승, 40선발, 302.1이닝, 253탈삼진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19] 이 해는 버닝이 사이 영 상 투표에서 유일하게 표를 받은 해로, 마이크 매코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버닝은 1967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뛰었다.[4] 1996년에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1] 2001년, 필리스는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22]
2. 3. 선수 생활 말년 및 은퇴
버닝은 1970년에 필리스로 복귀하여[4] 197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4] 은퇴 당시 통산 2,855개의 탈삼진은 월터 존슨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19]버닝은 1955년7월 20일에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3] 1957년에는 20승 8패로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다.[3] 1958년7월 20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으며,[3] 1964년6월 21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는 역대 7번째이자 내셔널 리그 최초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3] 그는 사이 영, 랜디 존슨과 더불어 양대 리그에서 모두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역대 2번째 투수이다.[3] 또한, 버닝은 양대 리그에서 1,000 탈삼진을 기록한 최초의 투수이기도 하다.[17]
1959년8월 2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는 9회 초에 메이저 리그 역대 10번째로 3타자 연속 3구 삼진을 기록했다.[9]
1996년 베테랑스 위원회의 추천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1] 2001년에는 버닝의 필리스 재적 당시 등번호 ''''14''''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22]
2. 4. 은퇴 이후 활동
짐 버닝은 선수 은퇴 후, 필리스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리딩 필리스, 유진 에메랄드, 톨레도 머드 헨스, 오클라호마 시티 89ers를 감독했다.[4] 1996년에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21] 2001년에는 필리스 시절 등번호 14번이 영구 결번되었다.[22] 1984년에는 필라델피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0] 2005년에는 국제 스포츠에 상당한 공헌을 한 개인에게 수여하는 미국 스포츠 아카데미의 최고 영예인 이글 상을 받았다.[78] 199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으며, 버닝과 필리스의 전설들인 리치 애시번, 스티브 칼튼, 로빈 로버츠, 마이크 슈미트에게 헌정되었고, 이들은 모두 시구를 했다.[79]2. 5. 선수 노조 활동
1960년대 중반부터 야구 은퇴 시점까지 버닝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MLBPA)에서 활동하며 선수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섰다.[23] MLBPA는 1950년대 초 선수들의 급여, 복지, 근로 조건 개선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나, 구단주들은 연대하여 급여를 제한하고 열악한 근로 조건을 제공하며 선수들을 압박했다. 당시 신입 선수의 연봉은 현재 가치로 약 47,000달러(1965년 기준 6,000달러)였고, 평균 연봉은 약 112,000달러(1965년 기준 14,000달러)에 불과했다.버닝은 선수 생활 초기에 MLBPA에 참여하여 아메리카 리그 선수들의 연금 대표와 협회 집행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65년, 버닝은 MLBPA 창립자인 로빈 로버츠와 함께 마빈 밀러를 전임 집행 이사로 영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밀러는 1983년까지 집행 이사직을 맡으며 선수 협회를 이끌었고, 1968년 MLBPA는 구단주들과의 첫 번째 단체 교섭 계약을 체결하여 선수들의 급여, 복지 및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버닝이 은퇴할 무렵, 메이저 리그 선수들의 최저 연봉과 평균 연봉은 거의 두 배로 증가했으며, 2015년에는 최저 연봉이 50만 달러 이상, 평균 연봉은 400만 달러 이상으로 크게 상승했다. MLBPA는 보류 조항을 폐지하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반독점법에서 면제되는 것을 철폐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선수들은 트레이드를 거부할 권리와 자유 계약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은퇴 후, 버닝은 선수 에이전트로 활동하며 한때 최대 30명의 선수를 대표하기도 했다.[24] 버닝의 사망 당시, MLBPA 집행 이사였던 토니 클락은 "모든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 구단주들과의 관계에서 공정한 대표를 받도록 할 필요성을 인식한 짐은 동료들과 함께 여러 세대의 선수들을 위한 길을 열었다"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3. 정치 경력
버닝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비에르 대학교에 다니면서 공화당에 입당했다.[25] 1977년부터 켄터키주 포트 토머스 시의원을 2년간 역임했고, 1987년부터 1999년까지 하원 의원을 지냈다.
1998년, 켄터키주 출신 상원 의원을 24년간 역임한 웬델 H. 포드가 사임을 표명하자 출마를 표명했다. 접전을 벌여 상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2004년에 재선되었다.
재임 당시 상원의 가장 보수적인 의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2006년 4월에는 타임지의 "미국 상원 의원 워스트 5" 중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2008년 12월,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이른바 "빅3 구제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빅3의 본거지인 미시간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야구 팬들을 위한 사인회가 중지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2010년 중간 선거에서 출마를 포기하고 은퇴했다. 2011년 1월 3일을 기점으로 같은 공화당 소속인 랜드 폴에게 연방 상원 의원직을 물려주었다.
이후 은거 생활을 보냈지만, 2016년에 뇌경색을 겪었고, 다음 해 2017년 5월 27일에 사망했다[81] 85세였다.
3. 1. 초기 정치 경력 (켄터키주)
짐 버닝은 1977년 켄터키주 포트 토머스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26] 2년간 시의원으로 재임한 후, 1979년 켄터키주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7] 그는 공화당 동료들에 의해 소수 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신임 의원에게는 드문 일이었다.[28]
1983년, 버닝은 켄터키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주당 후보 마사 레인 콜린스에게 패배했다.[29]
3. 2. 미국 하원의원 시절 (1987-1999)
1986년, 버닝은 10선 의원이었던 공화당 소속 진 스나이더가 은퇴한 후 켄터키 제4선거구에서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구는 신시내티 광역권에 속하는 켄터키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그는 11월 선거에서 쉽게 승리했고, 켄터키에서 가장 공화당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별다른 반대 없이 다섯 번 더 재선에 성공했다. 공화당이 1995년 하원을 장악한 후, 버닝은 1999년까지 하원 세입 위원회 사회 보장 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3. 3. 미국 상원의원 시절 (1999-2011)
1998년 상원 소수당 원내총무 웬델 포드가 24년간의 상원 재임 후 은퇴하면서, 버닝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당 스코티 베슬러 후보를 근소한 차이(0.5%p)로 이기고 당선되었다.[31][32]상원에서 버닝은 가장 보수적인 의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내셔널 저널은 2007년 3월 버닝을 짐 드민트에 이어 두 번째로 보수적인 상원의원으로 평가했다.[33]
버닝은 2004년 버닝-베로이터-블루머나우어 홍수 보험 개혁법을 발의했다.[34]
2004년 켄터키주 연방 상원 선거에서 버닝은 민주당 다니엘 몬지아르도 후보를 상대로 재선에 도전했다. 선거 과정에서 버닝은 몬지아르도를 "사담 후세인의 아들 중 한 명처럼" 생겼다고 묘사해 논란을 일으켰고, 여론의 압력으로 사과해야 했다.[36] 또한, 몬지아르도와의 텔레비전 토론에 직접 출연하지 않고 위성 링크를 통해 참여하고 자동 롤지를 사용한 것에 대해 비판받았다.[37] 버닝은 자신의 아내가 몬지아르도 지지자들에게 공격받았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몬지아르도를 "무기력한 손목"이라고 부르는 등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36] 결국 버닝은 1% 남짓의 근소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40]
버닝은 의회에서 야구계 스테로이드 사용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41][42][43] 벤 버냉키의 연방 준비 제도(Federal Reserve) 의장 임명에 반대한 유일한 미국 상원 은행, 주택 및 도시 문제 위원회 위원이었다.[44]
2006년 타임은 버닝을 "미국 최악의 상원 의원 5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하고, "저조한 성과"를 보이며 야구 외의 정책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판했다.[45]
2006년 버닝은 로버트 게이츠의 미국 국방장관 임명에 반대 투표를 했다.[46]
2009년 버닝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췌장암으로 9개월 안에 사망할 것이라고 예측하여 논란을 일으켰고, 이후 사과했다.[49][50]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 버닝은 역사적인 건강 관리 개혁 법안 투표에 결석한 유일한 상원 의원이었다.[52][53][54]
2010년 버닝은 실업 보험 연장 법안에 대해 지불-사용 원칙을 들어 반대하며, 제프 머클리 의원에게 "젠장(tough shit)"이라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55][56][58]
2010년 재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랜드 폴을 지지했다.[71][72]
버닝은 은행, 주택 및 도시 위원회, 예산 위원회, 에너지 및 천연 자원 위원회, 재무 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3. 3. 1. 논란 및 평가
2004년 켄터키주 연방 상원 선거에서 짐 버닝은 상대 후보였던 다니엘 몬지아르도를 "사담 후세인의 아들 중 한 명처럼" 생겼다고 묘사하여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켰다.[36] 여론의 압력으로 그는 사과해야 했다.[36]2006년 4월, ''타임'' 잡지는 짐 버닝을 "미국 최악의 상원 의원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45] ''타임''은 그를 "저조한 성과"를 낸다고 평가하며, "야구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정책에 거의 관심이 없다"고 비판했다.[45] 또한 그의 직원 및 동료 상원 의원에 대한 적대감과 2004년 선거에서의 "기이한 행동"도 지적했다.[45]
2009년 2월, 짐 버닝은 켄터키주 하딘 카운티 공화당 링컨 데이 만찬에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대법원 대법관이 9개월 안에 췌장암으로 사망할 것이라고 예측하여 논란이 되었다.[49] 이후 버닝은 긴즈버그에게 사과하고, 그의 생각과 기도를 전했다.[50] 2019년 7월 NPR 인터뷰에서 긴즈버그는 버닝이 사망했고 자신은 "아주 살아 있다"고 언급했다.[51]
2010년 2월, 짐 버닝은 실업 보험 연장 법안에 대해, 이 연장이 지불-사용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는 이 법안에 대한 자금을 2009년 경기 부양 법안에서 조달하려는 수정안을 제안했다.[55][56] 제프 머클리 상원 의원이 혜택을 30일 연장하는 것에 대한 그의 반대를 철회하라고 촉구하자, 버닝은 "젠장(tough shit)"이라고 대답하여 비판을 받았다.[58]
4.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79년 선거 | 켄터키 주 상원의원 (제11부) | -대 | 공화당 | 50.79% | 10,862표 | 1위 | |
1983년 선거 | 켄터키 주지사 | 56대 | 공화당 | 44.11% | 454,650표 | 2위 | 낙선 |
1986년 선거 | 미국 하원의원 (켄터키 제4선거구) | 100대 | 공화당 | 55.09% | 67,626표 | 1위 | |
1988년 선거 | 미국 하원의원 (켄터키 제4선거구) | 101대 | 공화당 | 74.22% | 145,609표 | 1위 | 25px |
1990년 선거 | 미국 하원의원 (켄터키 제4선거구) | 102대 | 공화당 | 69.33% | 101,680표 | 1위 | 25px |
1992년 선거 | 미국 하원의원 (켄터키 제4선거구) | 103대 | 공화당 | 61.64% | 139,634표 | 1위 | 25px |
1994년 선거 | 미국 하원의원 (켄터키 제4선거구) | 104대 | 공화당 | 74.15% | 96,695표 | 1위 | 25px |
1996년 선거 | 미국 하원의원 (켄터키 제4선거구) | 105대 | 공화당 | 68.39% | 149,135표 | 1위 | 25px |
1998년 선거 | 미국 상원의원 (켄터키 제3부) | 106대 | 공화당 | 49.75% | 569,817표 | 1위 | |
2004년 선거 | 미국 상원의원 (켄터키 제3부) | 109대 | 공화당 | 50.66% | 873,507표 | 1위 | 25px |
짐 버닝은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켄터키주 제4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1] 각 선거의 자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민주당 | 득표수 | 득표율 | 공화당 | 득표수 | 득표율 | 제3 정당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
1998년 | 스코티 베이즐러 | 563,051 | 49.2% | 짐 버닝 | 569,817 | 49.7% | 찰스 R. 아베거스트 | 개혁 | 12,546 | 1.1% | ||||
2004년 | 다니엘 몽기아르도 | 850,855 | 49% | 짐 버닝 | 873,507 | 51% |
5. 사망
짐 버닝은 2016년 10월 뇌졸중을 앓은 후, 2017년 5월 26일, 85세의 나이로 켄터키주 에지우드에 있는 세인트 엘리자베스 호스피스에서 사망했다.[74][75] 켄터키주 코빙턴에 있는 코빙턴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켄터키주 캠벨 카운티에 있는 세인트 스티븐 묘지에 안장되었다.[76]
6. 기타
렉싱턴 헤럴드 리더는 2008년 12월 18일, 짐 버닝 재단(Jim Bunning Foundation)이 수익금의 25% 미만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상원 및 세금 기록에 따르면, 이 재단은 1996년 이후 50만 4천 달러를 모금했다. 그 기간 동안 짐 버닝은 재단에서 주당 1시간 근무하며 18만 달러의 급여를 받았다. 짐 버닝 재단 이사회에는 그의 아내 메리와 신시내티 타이어 딜러 밥 서머럴이 포함되어 있다. 2008년 기록에 따르면 짐 버닝은 전국 10개의 야구 쇼에 참석하여 사인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자선 단체에 61,631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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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荷大(인하대) 투수 崔桂勳(최계훈) "高校(고교)때 優勝(우승)못한 울분꼭 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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