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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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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 흠종은 1125년 부황 휘종에게 양위받아 즉위했으나, 금나라의 침입으로 이강을 등용하고 방어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재침으로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정강의 변이 일어나 휘종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이후 금나라에서 '중혼후'로 불리며 30년 이상 감금 생활을 하다가 116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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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흠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송흠종 어진
궁궐 초상화, 고궁박물원(타이베이, 대만) 소장
이름조환(趙桓)
다른 이름조단(趙亶, 1100–1103)
조환(趙桓, 1103–1116)
묘호흠종(欽宗)
시호공문순덕인효황제(恭文順德仁孝皇帝)
절후 이름효자연성(孝慈淵聖)
작위중혼후(重昏侯)
생몰1100년 5월 23일 ~ 1161년 6월 14일
출생지알려지지 않음
사망 장소알려지지 않음
묻힌 곳영헌릉(永獻陵, 현재의 궁이, 허난)
배우자인회황후(1116년 결혼, 1127년 사망)
자녀조진
조쉰
유가 공주
아버지휘종(徽宗)
어머니현공황후
재위
왕조송나라(북송)
즉위일1126년 1월 19일
퇴위일1127년 3월 20일
연호정강(靖康; 1126-1127)
중국어 정보
한자 (번체)宋欽宗
한자 (간체)宋钦宗
병음Sòng Qīnzōng
의미송나라의 존경받는 조상
로마자 표기Zhao Huan (Zhào Huán)
Chonghun Hou (Chónghūn Hóu)
로마자 표기 의미Doubly Muddle-headed Marquis (두 배로 멍청한 후작)
통치 이력
선대 황제휘종
후대 황제고종
황태자 임명1115년 3월 2일
정왕 임명1108년 2월 22일
경조군왕 임명1101년 6월 28일
한국공 임명1100년 9월 2일
기타
송흠종 어압
송흠종 어압

2. 생애

1125년, 아버지 휘종금나라와의 외교 정책에 실패하여 금나라가 북송을 공격하였다. 휘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태자 조환에게 양위하였고, 조환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곧 흠종이다. 이듬해 금나라가 개봉을 포위하자 흠종은 이강을 등용하여 방어에 나섰지만, 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금나라에 대한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거부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송나라의 배신에 금나라는 다시 개봉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고(정강의 변), 1128년 한주(길림 성 리수현)를 거쳐 1130년 동북의 흑룡강성 의난현으로 끌려갔다. 이때 남송의 재상 진회(秦檜)도 같이 끌려갔는데, 이후 탈출하여 남송의 재상이 되었을 때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대책 없는 강경론을 기피하는 계기가 된다.

1127년 흠종의 동생 조구(고종)가 남송을 건국하면서 흠종의 입장은 복잡해졌다. 흠종이 남송으로 돌아오면 고종은 찬탈자로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나라 측에서도 흠종의 귀환을 계획했지만, 고종의 요청으로 흠종의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고종의 생모인 위현비(현인황후)가 남송으로 귀환할 때 흠종은 위씨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귀환을 실현하도록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고 전해진다.

흠종은 중국 동북부에 30년 이상 감금된 채로 지냈다. 1135년 아버지 휘종이 사망했다. 금나라에서 희종이 즉위하자 대우가 개선된 듯하며, 1141년 2월 을유에 휘종에게 천수군왕이 추증되었고, 흠종은 천수군공으로 개봉되었다.

1161년 6월 흠종은 오국성에서 62세로 사망했다.[5]

2. 1. 금나라의 침입과 정강의 변

1125년 금나라휘종의 외교 정책 실패를 틈타 북송을 침략했다. 휘종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황태자 조환에게 양위했는데, 그가 바로 흠종이다. 이듬해 금나라가 수도 개봉을 포위하자 흠종은 이강을 등용하여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배상금 지급과 영토 할양을 거부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이에 금나라는 다시 개봉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포로로 잡혀갔으며(정강의 변), 1128년 한주(길림 성 리수현)를 거쳐 1130년 동북의 흑룡강성 의난현으로 끌려갔다.

흠종은 혼자 금나라의 침략에 대처해야 했지만, 결단력이 부족하고 판단 착오를 자주 일으켰다.[5] 장군 이강을 임명하여 금나라 군대를 막게 했으나, 곧 이강을 해임하고 동생 조구를 협상가로 보냈다가 조구가 포로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흠종이 도시를 여진족에게 넘기고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하면서 개봉에 대한 첫 번째 포위 공격은 끝났지만, 금나라 군대가 떠나자마자 흠종은 약속을 어기고 군대를 보내 금나라를 공격했다.

흠종은 북쪽 국경을 강화하라는 제안도 거부하고 군대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등 잘못된 판단을 거듭했다. 금나라에서 보낸 두 명의 사절을 금나라 황제 태종에 대항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고 믿고 밀서를 보냈지만, 사절들은 그 편지를 태종에게 넘겼다. 결국 흠종의 외교적 실책은 금나라의 재침략을 불러왔다.

흠종의 잘못된 군대 배치로 인해 금나라는 1127년 송나라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켰다. 이 사건은 흠종의 연호를 따서 정강의 변으로 불린다. 흠종은 아버지 휘종과 함께 금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혀 북송은 멸망했다. 흠종의 동생 조구는 남쪽으로 탈출하여 남송을 건국하고 고종으로 즉위했다.

두 황제와 함께, 휘종의 비 위씨, 흠종의 황후 주씨 등, 송나라 황실 가족들과 궁녀들이 금나라로 끌려갔다. 1128년 6월에는 금나라의 관설 기루인 세탁원으로 보내져 금나라 황족과 귀족을 상대로 하는 창부가 되도록 강요당했다.[2] 주황후는 이러한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3][4]

1127년 흠종의 동생 조구(고종)가 남송을 건국하면서 흠종의 입장은 복잡해졌다. 흠종이 남송으로 돌아오면 고종은 찬탈자로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나라 측에서도 흠종의 귀환을 계획했지만, 고종의 요청으로 흠종의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2. 2. 포로 생활과 최후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흠종은 굴욕적인 생활을 겪어야 했다. 1128년, 흠종은 아버지 휘종과 함께 상복을 입고 금나라 황제의 조상 사당에서 경배해야 했다.[1] 태종은 이들에게 "중혼후"(重昏侯, '두 배로 정신이 혼미한 후작')"[1] 등 모욕적인 칭호를 내렸다.

1127년, 동생 조구남송을 세우면서 흠종의 입장은 더욱 복잡해졌다. 흠종이 돌아오면 고종의 정통성이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나라에서도 흠종의 귀환을 계획했지만, 고종의 요청으로 무산되었다.

1141년, 금나라는 흠종의 칭호를 "천수군 공"(天水郡公)으로 바꾸고 봉급을 지급했다. 그러나 흠종은 인질로 잡혀 남은 여생을 금나라에서 보내야 했다.[1] 1142년, 고종이 금나라와 소흥 화약을 체결하면서 흠종의 귀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1156년, 해릉왕은 흠종과 요나라 천조제에게 폴로 경기를 강요했다. 흠종은 경기 중 말에서 떨어졌고, 탈출을 시도하던 천조제는 살해되었다.[5]

흠종은 1161년에 61세의 나이로 오국성에서 사망했다.[5] 흠종의 자손들은 해릉양왕에게 살해되어 대가 끊어졌다.

3. 치세

1125년부터 1127년까지 재위한 흠종은 즉위 이듬해인 1126년까지 총리대신 채경대리청정을 거쳐, 1127년까지 1년간 친정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휘종의 실정으로 인한 금나라의 침입과 정강의 변으로 짧은 치세는 막을 내렸다.

흠종은 즉위 초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그의 아들 채유 등을 주살하는 등[1]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금나라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배상금 지불과 영토 할양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금군 철수 후 송나라 조정에서 강경론이 대두되어 화의 조건을 파기하면서 금나라의 재침을 불렀다.

1127년, 금나라에 의해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흠종은 아버지 휘종과 함께 포로로 잡혀 중국 동북부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났다. 이후 흠종은 30년 이상 감금된 채로 지내다가 1161년 5월에 오국성에서 62세로 사망했다.[5]

흠종의 동생 조구가 남송을 세우면서, 흠종은 복잡한 입장에 놓였다. 흠종이 남송으로 돌아올 경우 고종의 정통성이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나라 측에서도 흠종의 귀환을 계획했지만, 고종의 반대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3. 1. 대외 관계

금나라와의 외교 정책 실패는 흠종 통치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흠종은 초기 이강을 등용해 금나라의 침입에 맞섰으나, 곧 화의를 맺고 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약속했다.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물러나자 약속을 어기고 금나라를 공격하는 군대를 파견했다. 이는 금나라의 재침략을 불렀고, 결국 정강의 변으로 이어져 흠종과 아버지 휘종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초래했다.[1]

흠종의 외교적 판단 착오는 여러 번 나타났다. 금나라 사절을 통해 금나라 내부 반란을 유도하려 한 시도가 대표적이다. 흠종은 사절들이 옛 요나라 귀족 출신임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금나라 태종에게 흠종이 평화 조약을 위반했다는 명분을 줬다.[2]

결과적으로 흠종의 외교 정책 실패는 북송의 멸망을 재촉했다. 흠종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중국 동북부에 감금되었고,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5]

3. 2. 내정

1125년 휘종이 금에 대한 사기적인 외교 정책에 실패하여 스스로를 죄하는 조서를 내리고 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자, 흠종이 즉위하였다. 흠종은 즉위 후 아버지 휘종 대의 대신이었던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그의 아들 채유 등 형제를 주살했다.[1] 이듬해 금나라가 개봉을 포위하자 흠종은 이강을 임명하여 방어에 임했지만, 배상금 지불과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금과 화의가 성립되었다.

3. 3. 정강의 변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송나라 관리들 사이에서 강경론이 대두되어, 배상금과 영토 분할을 거부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송나라의 배신에 금나라는 다시 개봉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는데, 이 사건을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1]

흠종은 군대를 각 지역으로 잘못 배치했기 때문에, 금나라는 결국 1127년 송나라의 수도인 변경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점령했다. 흠종은 아버지인 휘종 황제와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금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으며, 이는 북송의 멸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흠종의 동생인 조구는 남쪽으로 탈출하여 남송을 건국하였다.

선화 7년, 아버지 휘종이 금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에 실패하여 금나라가 송나라를 대규모로 공격했다. 1126년 1월 18일(1125년 12월 23일), 휘종은 스스로를 죄하는 조서를 내리고, 제위를 흠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흠종은 즉위 후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그의 아들 채유 등 형제를 처형했다. 1127년, 금나라가 개봉을 포위하자 흠종은 이강을 임명하여 방어에 임했지만, 배상금 지불과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송나라 관리들 사이에서는 금나라에 대한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배상금이나 영토 할양을 거부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이 송나라의 배신에 금나라는 다시 개봉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금나라의 천회 5년 2월 병인에 금나라 태종의 조서로 휘종과 흠종은 모두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상경으로 연행되었다. 천회 6년 8월 정축, 홑옷을 입혀 태조 묘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이어서 건원전에서 태종에게 알현했다.[1] 여기서 휘종은 혼덕공, 흠종은 중혼후에 봉해졌고, 천회 8년 10월 무인에 한주(현재의 지린성사평시이수현)를 거쳐 동북의 오국성(현재의 헤이룽장성하얼빈시이란현)으로 끌려갔다.

두 황제와 함께, 휘종의 비 위씨, 흠종의 황후 주씨 등, 송나라 궁정의 황후, 비빈, 황녀, 기타 종실의 여성 및 여관, 궁녀들이 금나라 군대의 위안을 위해 북쪽으로 연행되어 후궁에 들어간 후, 1128년 6월에는 금나라의 관설 기루인 세탁원으로 보내져, 금나라의 황족과 귀족을 손님으로 하는 창부가 되도록 강요당했다.[2] 주황후는 그 처지에 견디지 못하고, 물에 빠져 자살했다.[3][4]

4. 평가

흠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그의 통치 기간과 그 이후의 사건들은 복잡한 역사적 논쟁거리이다. 흠종은 아버지 휘종의 실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기에 즉위했으며, 금나라의 침입이라는 외부적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흠종은 즉위 후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이강을 임명하여 개봉 방어에 나서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1] 그러나 금과의 화의가 성립된 후, 송나라 조정은 강경론으로 돌아서 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거부했고, 이는 금나라의 재침을 불러왔다. 결국 정강의 변으로 흠종과 휘종은 포로로 잡혀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상경회령부로 연행되었다.

남송 건국 이후, 흠종은 동생 고종의 정통성 문제와 맞물려 복잡한 입장에 놓였다. 금나라 역시 흠종의 귀환을 이용하려 했으나, 고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흠종은 중국 동북부에 30년 이상 감금되었고, 1135년 아버지 휘종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희종 즉위 후 흠종의 대우가 개선되어 천수군공으로 개봉되기도 했지만,[5] 결국 1161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대송선화유사』에서는 1156년격구 경기 중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1. 부정적 평가

흠종은 결단력이 부족하고 유약하며, 판단력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된다.[1]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강을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게 했지만, 곧 그를 해임하고 동생 조구를 협상가로 보내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1] 조구는 포로로 잡혔고, 이는 고종이 흠종을 구출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흠종은 금나라 군대가 개봉을 떠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군대를 보내 태원을 공격하는 여진족을 격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 북쪽 국경을 강화하라는 제안도 거부하는 등 군사적 판단에서도 미숙함을 드러냈다.[1]

또한, 금나라에 사절로 온 옛 요나라 귀족들을 이용하여 금나라 태종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는 등 외교적인 판단도 잘못되었다.[1] 흠종의 밀서는 태종에게 전달되었고, 태종은 흠종이 평화 조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더 큰 군대를 보내 송나라를 공격했다.[1]

결국 흠종의 잘못된 판단과 군사적 무능함으로 인해 금나라는 1127년 송나라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켰고, 흠종은 아버지 휘종과 함께 포로로 잡혀 북송은 멸망했다. (정강의 변)[1]

포로로 잡힌 흠종은 "중혼후"(重昏侯, 문자 그대로 "두 배로 정신이 혼미한 후작")라는 모욕적인 칭호를 받는 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1]

4. 2. 중립적 평가

흠종은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했으며, 이강을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게 했다.[1] 그러나 흠종은 결단력이 부족했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금나라와의 평화 협상을 위해 이강을 해임하고 동생 조구를 보냈지만, 조구는 포로로 잡혔다.[1] 이는 고종이 흠종을 구출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흠종이 도시를 여진족에게 넘기고 매년 조공을 바치면서 개봉에 대한 첫 번째 포위 공격은 끝났다.[1]

1127년, 흠종과 그의 부친 휘종은 평민으로 강등되어 회령부로 압송되었다.[2] 1128년에는 상복을 입고 금나라 황제의 조상 사당에서 경배해야 했다.[3][4] 금 태종은 흠종을 "중혼후"(重昏侯, 문자 그대로 "두 배로 정신이 혼미한 후작")라는 모욕적인 칭호로 불렀다.[4]

1141년, 금나라가 남송과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흠종의 칭호는 천수군 공으로 변경되었고, 귀족 신분으로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4] 그러나 금나라는 흠종을 인질로 삼아 남송에 압력을 가했다.[4]

1142년, 고종이 금나라와 소흥 화약을 체결하면서 흠종의 귀환 가능성은 사라졌다.[5]

1156년, 해릉왕은 흠종과 요나라 천조제에게 폴로 경기를 하도록 명령했다.[6] 흠종은 허약하여 말에서 떨어졌고, 탈출을 시도하던 요 천조제는 여진족 궁수에게 사살되었다.[6]

흠종은 1161년, 금나라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호는 "숭조"(崇祖)이다.

5. 가족 관계

흠종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흠종의 가족 관계
관계봉호시호성씨비고
배우자황후인회황후주씨정강의 변 당시 세탁원으로 끌려가 창부가 될 것을 강요받자 자결[3][4]
배우자혜덕비주씨
배우자재인정씨이름은 경운(慶雲중국어)
배우자재인한씨이름은 정관(靜觀)
배우자재인적씨이름은 옥휘(玉輝중국어)


  • 이외에도 부인으로 척소옥, 정월궁, 장장금, 포춘접 등이 있었다.
  • 내재, 부재, 내사, 상의, 사령 등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5. 1. 조부모와 부모

5. 2. 황후와 후궁

흠종의 황후와 후궁
봉호시호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비고
황후인회황후주씨황태자비, 정강군정절부인1125년 ~ 1127년1102년 ~ 1127년
신덕비주씨1110년 ~ 1142년
재인정경운
재인한정관
재인유월아
재인노순숙
재인하봉령
재인적옥휘
부인척소옥
부인정월궁
부인장장금
부인포춘접


  • 정실: 인회황후 주씨
  • 조진, 황태자 (1117년~1128년), 장남
  • 유가공주 (1121년 출생)
  • 측실: 주신덕비 (주후의 사촌)
  • 조근 (1127년 출생), 차남
  • 딸 (1130년 출생)
  • 재인: 정경운
  • 조순 (1129년 출생), 삼남
  • 재인: 한정관
  • 아들 (1128년 출생)
  • 재인: 적옥휘 (1114년 출생)
  • 딸 (1129년 출생)

5. 3. 황자와 황녀

순번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비고
1황태자(皇太子)조심(趙諶)1117년 ~ ?인회황후 주씨숭국공(崇國公)
대령군왕(大寧郡王)
2조근(趙謹)1127년 ~ ?신덕비 주씨정강의 변 이후에 태어남.
3조훈(趙訓)1129년 ~ ?재인 정경운금나라에서 태어남.



순번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비고
1유가공주(柔嘉公主)1121년 ~ ?인회황후 주씨
2공주(公主)재인 적옥휘금나라에서 태어남.
3공주(公主)신덕비 주씨금나라에서 태어남.


6. 기타

1127년 5월에 고종에게서 효자연성황제(孝慈淵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다.

시호는 공문순덕인효황제(恭文順德仁孝皇帝)이다. 묘호는 흠종(欽宗)이고, 능은 영헌릉(永獻陵)이다.

7. 연표

연도사건
1125년아버지 휘종이 금에 대한 외교 정책 실패로 퇴위하고, 흠종이 즉위함. 채경 등을 유배시키고, 그의 아들 채유 등 형제를 처형함.[1]
1126년금이 개봉을 포위하자 이강을 임명하여 방어했으나, 배상금 지불과 영토 할양 조건으로 화의를 맺음. 금군 철수 후, 송나라 관리들 사이에서 강경론이 대두되어 배상금 및 영토 할양을 거부함.[1]
1127년금의 재침공으로 개봉이 함락되고, 정강의 변으로 휘종과 함께 금에 포로로 잡혀 서인으로 강등됨. 상경으로 연행됨. 동생 조구가 남송을 건국함.[1]
1128년홑옷 차림으로 태조 묘에 꿇어 엎드린 후, 건원전에서 태종에게 알현함. 혼덕공, 중혼후에 봉해짐. 세탁원으로 보내짐.[1][2]
1130년동북의 오국성(현재의 헤이룽장성하얼빈시이란현)으로 끌려감.[1]
1135년아버지 휘종이 사망함.[5]
1141년휘종에게 천수군왕이 추증되고, 흠종은 천수군공으로 개봉됨.[5]
1161년오국성에서 62세로 사망함.[5]


7. 1. 흠종의 연호(정강)

흠종원년2년
서력1126년1127년
간지병오정미
연호정강 원년2년


참조

[1] 서적 金史
[2] 서적 靖康稗史箋證
[3] 서적 靖康稗史箋證
[4] 서적 靖康稗史箋證
[5] 서적 宋史
[6] 서적 金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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