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신민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민회는 1907년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이회영,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 단체이다. 공화정을 이상으로 삼고, 민족 교육과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추구했으며,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다양한 계몽 활동을 펼쳤다. 대성학교, 오산학교 설립과 같은 교육 사업, 태극서관 운영, 대한매일신보 지원 등 민족 산업과 문화 진흥에도 힘썼다. 만주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을 추진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신민회의 활동과 정신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제국의 문화 - 단발령
    단발령은 1895년 고종이 위생상의 이유로 시행한 머리를 자르는 정책으로,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반발과 을미사변으로 항일 의병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신교육과 여성 단발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 대한제국의 문화 - 상투
    혼례를 치른 남성이 머리카락을 모아 올린 전통적인 머리 형태인 상투는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어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으나 단발령 이후 쇠퇴하였다.
  • 1906년 설립된 단체 - 대한자강회
    대한자강회는 1906년 장지연, 윤효정 등이 조직한 애국계몽 운동 단체로, 자강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했으나, 고종 강제 퇴위 반대 후 1907년 강제 해산되었으며, 대한협회가 그 이념을 계승했다.
  • 1906년 설립된 단체 - 미국 함대전력사령부
    미국 함대전력사령부는 1906년 창설된 대서양 함대를 기원으로 하며, 예하 부대 훈련 및 미국 본토 방위 역할을 수행하고, 대서양 함대 사령관이 사령관을 겸임한다.
  • 대한제국의 단체 - 독립협회
    독립협회는 1896년 서재필 등에 의해 결성되어 자주적 근대화와 백성의 권리 신장을 추구하며, 자주 국권 운동, 자유 민권 운동, 자강 개혁 운동을 펼치다 고종의 견제 등으로 1898년 해산된 단체이다.
  • 대한제국의 단체 - 청년학우회
    청년학우회는 1909년 신민회 주도로 조직된 청년 계몽 단체로, 표면적으로는 수양 단체를 표방하며 개인의 역량 강화에 힘썼으나 실제로는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청년운동을 전개하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해산되었다.
신민회
개요
이름신민회 (新民會)
영문 명칭New People's Association
창립1907년 4월
해산1911년
성격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이념민족주의, 공화주의
활동 목표민족 교육 진흥
산업 육성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주요 활동 지역국내외 (만주)
창립 주도 인물
주요 인물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이동휘(李東輝)
이승훈(李承薰)
전덕기(全德基)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김구(金九)
김좌진(金佐鎭)
이회영(李會榮)
이상설(李相卨)
신채호(申采浩)
조성환(曺成煥)
최광옥(崔光玉)
홍언(洪堰)
박장호(朴長浩)
윤기섭(尹琦燮)
조직 및 활동
조직중앙총회, 지방조직
주요 활동대성학교(大成學校), 오산학교(五山學校) 등 민족 교육 기관 설립 및 지원
태극서관(太極書館), 자기회사(자기회사) 등 민족 산업 육성
만주 삼원보(三源堡)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독립군 양성)
해체
계기105인 사건으로 조직 와해
관련 사건
주요 사건105인 사건

2. 역사적 배경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고종이 국민들의 집회 금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대한제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 일본 제국은 을사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외교권을 박탈했다.[1] 이 조약은 1907년 한일 신협약과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의 토대가 되었다.[2]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통해 조약의 부당함을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알리려 했지만, 열강들은 이를 무시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감 이회영을 중심으로 서울 지역 인사들과 안창호를 비롯한 평양 중심 서북 지역 인사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보다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구국 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2. 1. 창립

1907년 4월, 상동교회 청년학원 교감 이회영을 중심으로 서울 지역 인사들과 안창호를 비롯한 평양 중심의 서북 지역 인사들이 신민회를 결성하였다.[10] 신민회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비밀결사 형태로 조직되었지만, 그 활동은 대부분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회원으로 영입하여 민족 역량을 결집하고자 했다. 경성에 와 있는 지방 인사들을 통해 각지의 개혁 운동가들을 회원으로 가입하게 하였고, 경기, 황해, 평안, 함경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회원 수를 늘려갔다. 1910년 경에는 회원 수가 약 800명에 달했으며, 기밀 누설을 막기 위해 입회 심사는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입회 시에는 서약 의식까지 행해졌다.[10]

2. 2. 강령 및 규약

신민회는 4대 행동 강령을 채택하였다.[1]



신민회의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1]

마관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의 먹물이 아직 마르기 전에 외교권이 하루아침에 동쪽으로 넘어가고 정부의 차석(次席)에는 외국이 나란히 앉아서 군경과 법도를 낱낱이 인계하고 광산과 삼림과 토지를 마디마디 할양하여 빼앗기고 있다.

슬프다, 동포여! ... (중략) ... 어찌 일시적 비분으로써 분연히 자결을 기도하며, 또한 염세적 비판으로써 호연 은거함으로 돌아갈 바이랴. 신민회는 무엇을 위하여 일어남이요?

민습의 완고 부패에 신사상이 시급하며, ... (중략) ... 정치의 부패에 신개혁이 시급이라. 천만 가지 일에 신(新)을 기다리지 않는 바 없도다.

무릇 우리 대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연합으로써 그 진로를 정하고 독립자유로써 그 목적을 세움이니, ... (중략) ... 간단히 말하면 오직 신정신을 불러 깨우쳐서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 ... (중략) ... 과거 4천 년, 구한국의 말년에 망국혼을 지으려는가. 장래 억만 년 신한국의 초년에 흥국민(興國民)을 지으려는가. 오라! 우리 대한신민이여!

신민회는 한국 독립의 기본으로, 개개인의 행동 개조와 사상 개혁을 중점 과제로 채택하였다.[1]

신민회의 주요 정치 이념은 민주주의공화주의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독립협회가 옹호했던 입헌군주제와는 매우 달랐다. 또한,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민들이 먼저 새로운 사람(신민, 新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들은 한국 독립의 기회를 위해 국민들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1]

3. 주요 활동

신민회는 교육, 산업, 문화 등 다방면에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고, 만주 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준비했다.

대성학교,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자기 회사, 태극서관을 운영했으며, 대한매일신보 발간을 지원하고 조선 광문회를 조직했다.[11]

만주에 독립군 훈련 기지 건설을 시도했으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삼원보와 밀산부(서간도)에 한흥동,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11]

3. 1. 교육 사업

신민회는 민족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서구의 신문물과 신학문을 보급하고자 평양에 대성학교정주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11] 신민회는 남녀 차별을 과거 4천 년간의 최대 악습으로 규정하고, 여성 교육과 여성에게 신문물,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 과제로 채택했다.[11] 신민회는 계몽이 국력을 강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믿었기에, 한국에서 교육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고, 수백 개의 중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4]

3. 2. 민족 산업 육성

신민회는 민족 산업 육성을 위해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설립하고, 대구에 태극서관을 운영하여 민족 자본 육성에 힘썼다.[11]

3. 3. 출판 및 문화 사업

신민회는 민족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서구의 신문물과 신학문을 보급하고자 대성학교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민족 산업 육성을 위해 평양에 자기회사, 대구에 태극 서관을 운영하였다. 민족문화를 양성하고자 대한매일신보 발간 사업과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고전문학 등을 간행하였다.[11] 학생들을 위한 월간 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한국 근대 문화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1908년 11월에는 최남선이 신민회의 기관지 성격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3. 4. 독립군 기지 건설

신민회는 만주 지역에 독립군 병력을 양성하기 위한 훈련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1] 하지만 감리교회와 장로교 등 개신교 교회의 지원으로 토지 확보 계획을 추진했고, 이는 훗날 남만주에 삼원보와 밀산부(서간도)에 한흥동,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11]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대한 광복군, 대한독립군, 조선혁명군, 의열단 등 무장 독립 투쟁 단체에 인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조직 및 구성원

1906년 말, 샌프란시스코의 항일 운동 단체 공립협회안창호, 이강 등이 신민회 결성에 합의하고, 대한신민회 취의서 및 통용 장정을 기초했다. 1907년 2월, 미국에서 안창호가 귀국하여 동지를 모았고, 양기탁이 공개 결사를 제안했지만, 최종적으로 비밀 결사로 하는 안건에 찬동하여, 4월에 한성부에서 신민회를 결성했다.

총감독(당수)에는 양기탁, 총서기에 이동녕, 회계는 전덕기, 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집행위원에 안창호, 이동휘 등이 임명되었고, 다른 창립 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당시 애국 계몽 단체의 주요 멤버가 많이 참여하여 계몽 운동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고, 1910년 경에는 회원 수가 약 800명에 달했다. 기밀 누설을 막기 위해 입회 심사는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입회 시에는 서약 의식까지 행해졌다.

4. 1. 조직

1907년 4월,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교감인 이회영을 중심으로 서울 지역 인사들[10]안창호를 위시한 평양 중심의 서북지역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표방하였고, 사회 각층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하였는데, 비밀단체임에도 그 활동은 거의 대부분 합법성을 띠고 이루어졌었다.[10]

1906년 말 경, 샌프란시스코의 항일 운동 단체 공립협회안창호, 이강 등이 신민회 결성에 합의하고, 대한신민회 취의서 및 통용 장정을 기초했다.

1907년 2월, 미국에서 안창호가 귀국하여 동지를 모았다. 권유받은 양기탁이 공개 결사를 제안했지만, 최종적으로 비밀 결사로 하는 안건에 찬동하여, 4월에 한성부에서 신민회를 결성했다.

조직 당시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총감독(당수)양기탁
총서기이동녕
회계전덕기
집행위원안창호, 이동휘
각 도 총감창립 위원



당시 애국 계몽 단체의 주요 멤버가 많이 참여하여 계몽 운동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고, 1910년 경에는 회원 수가 약 800명에 달했다. 기밀 누설을 막기 위해 입회 심사는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입회 시에는 서약 의식까지 행해졌다. 신민회가 조직된 이후 경기, 황해, 평안, 함경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회원 수를 늘려갔다.

4. 2. 주요 구성원


신채호

5. 탄압과 해산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안중근에게 암살당하는 사건 이후,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이 강화되었다.[7] 1911년, 일제는 안악 사건을 조작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검거되었고,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다.[7] 체포된 인사들 중 일부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투신자살하기도 하였다. 이승만, 김규식 등은 망명길에 올랐다.

5. 1. 105인 사건 재판

1심에서 일본 측은 윤치호를 신민회 회장으로 인정했지만, 2심에서 윤치호는 회장 명의를 빌려준 청년학우회가 신민회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회장이 되었을 뿐이며, 운영도 안창호에게 맡겨두고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고 전면 부인했다.[7] 윤치호는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도 교장이라는 명의만 빌려주었을 뿐, 모든 일은 안창호 혼자서 처리하였다고 주장했다.

1912년 9월 28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음모 사건으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1913년 3월 20일, 99명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고, 10월 9일, 6명에게 유죄가 확정되었다.

6. 해산 이후

신민회는 강제 해산되었지만, 그 정신과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승되었다. 안창호는 상하이 임시 정부 참여 이후 신민회의 부흥을 제안받았지만, 임시 정부의 연대에 방해가 된다며 거절했다.[8]

7. 의의와 평가

신민회는 근대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이상향으로 지향한 단체로서, 한국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실력 양성론과 독립 전쟁론을 결합하여, 장기적인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교육, 산업, 문화 등 다방면의 활동을 통해 민족 역량 강화에 기여하였다. 105인 사건으로 인한 일제의 탄압은 신민회의 활동을 위축시켰지만, 독립운동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리지는 못했다. 신민회의 정신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Korea, pp.461~462
[2] 서적 Pamphlet 43: "Korea, Treaties and Agreements," p. vii. https://books.google[...] 1921
[3] 서적 Korea Old and New: A History 1990
[4] 웹사이트 신민회 http://100.naver.com[...]
[5] 문서 韓国民族文化大百科
[6] 간행물 東光 2月号 1927
[7] 문서 105人事件公判始末書 I〜II、105人事件訊問調書 I〜II
[8] 문서 内野直子 朝鮮近代史における「百五人事件」と新民会像にかんする再考察
[9] 논문 105인 사건과 청년학우회 연구 숭실대학교 대학원 2011
[10] 문서 이동녕을 비롯한 7인의 창건위원
[11] 문서 이승훈은 사건 관련자들이 용산역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리다가, 이 장면을 목격한 한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12] 문서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피신했고, 김규식은 오스트레일리아 유학을 핑계로 출국한 뒤 상하이로 건너갔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