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청동기마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청동기마상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에 위치한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다. 예카테리나 2세의 명으로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가 제작했으며, 1782년에 제막되었다. 동상은 표트르 대제가 말을 타고 네바 강을 가리키는 모습을 묘사하며, 받침대는 '천둥 돌'로 불리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이 기마상은 러시아 문학 작품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청동 기마상'의 소재가 되었으며, 레닌그라드 포위전 중에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어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마상 - 천리마동상
    김일성 49번째 생일에 맞춰 공개된 천리마동상은 만수대 창작사에서 제작한 김일성 헌정 기념비로, 인민 예술 발전 연설을 계기로 건립되어 인민상을 수상했으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붉은 편지"와 벼 이삭을 든 노동자와 농민이 천리마에 올라탄 모습으로 표현된 총 높이 46m의 조형물이다.
  • 기마상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은 2세기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묘사한 청동 기마상으로, 아들로쿠티오 자세로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독교 황제로 오인되어 보존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어 캄피돌리오 광장에 설치되었다.
청동기마상
기본 정보
청동 기마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청동 기마상
명칭청동 기마상
러시아어: Медный всадник (몌드니 ㅂ사드니크)
영어: The Bronze Horseman (더 브론즈 호스먼)
위치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
제작 정보
종류기마상
재료청동
화강암 (좌대)
제작 기간1768년 – 1782년
비문
내용
번역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 1782년
추가 정보

2. 건립 배경 및 제작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에 세워진 기념비적인 조각상이다. 이 동상은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기리고 자신의 통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제작되었다.[2] 여제는 드니 디드로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에게 제작을 의뢰했으며[3], 팔코네는 1766년 러시아에 도착하여 작업을 시작했다.

동상 제작은 1770년부터 1782년까지 총 12년이 소요되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는데, 특히 청동 주조 과정에서 주형 파손으로 인한 화재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주조공 에밀리안 카일로프의 헌신으로 위기를 넘겼다.[3] 표트르 대제의 얼굴은 팔코네의 조수였던 젊은 조각가 마리-안 콜로가 담당했으며, 거대한 화강암 받침대인 '천둥 돌'의 운반은 공학자 마리노스 카르부리스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1782년 8월, 마침내 동상이 완성되어 성대한 제막식이 열렸지만, 제작을 총괄했던 팔코네는 예카테리나 2세와의 불화로 인해 이미 러시아를 떠난 상태였고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3] 청동 기마상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 정신과 러시아 제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동시에, 복잡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 1. 건립 배경

머리(원형)는 마리-안 콜로가 팔코네의 기념비를 위해 석고로 제작한 모델이다. 러시아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 이바노비치 수리코프의 ''청동 기마상''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구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있다. 이 동상은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건립되었다. 독일 공주 출신으로 로마노프 왕조와 결혼하여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인 표트르 대제와 자신을 연결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기마상 건립을 추진했다.[2]

동상의 받침대에는 라틴어와 러시아어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라틴어로는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 러시아어로는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표트루 페르보무 예카테리나 프토라야, 레타 1782ru'''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가, 1782년'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동시에, 자신이 그의 위업을 잇는 적법한 후계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그의 친구인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를 추천받았다. 여제는 디드로의 조언을 받아들여 팔코네를 초청했고, 그는 1766년 러시아에 도착하여 기념비 제작을 맡게 되었다.[3]

동상 제작은 1770년에 시작되어 1782년에 완성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주조 작업은 1775년 주조공 에밀리안 카일로프의 감독 아래 시작되었으나, 작업 중 주형이 파손되어 녹은 청동이 쏟아져 나오면서 화재가 발생하는 큰 사고가 있었다. 다른 작업자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카일로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아 주조물을 구해냈다.[3] 이후 손상된 부분을 다시 녹여 주조하여 동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차르의 얼굴은 당시 18세였던 젊은 조각가 마리-안 콜로가 만들었다. 그녀는 팔코네의 조수로 1766년 함께 러시아에 왔으며, 표트르 대제의 데스 마스크와 여러 초상화를 참고하여 얼굴을 모델링했다. 디드로는 그녀를 "마드모아젤 빅토아르"(승리의 아가씨)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동상의 오른손은 1771년 네덜란드 보르부르크의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 손을 모델로 삼았다.

''천둥 돌 운반 장면과 예카테리나 2세''; 유리 펠텐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I. F. 슐레이의 조각, 1770


동상의 거대한 받침대로 사용된 돌은 '''천둥 돌'''(Thunder Ston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라파키비 화강암 거석이다. 이 돌은 1768년 핀란드 만에서 내륙으로 약 6km 떨어진 라흐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천둥 돌'이라는 이름은 번개가 돌을 내리쳐 조각을 냈다는 현지 전설에서 유래했다. 팔코네는 돌을 발견된 자리에서 다듬기를 원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돌을 먼저 원로원 광장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돌은 절반쯤 땅에 묻혀 있었고 주변은 습지였기 때문에 운반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 과업은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중령이자 공학자인 마리노스 카르부리스(Μαρίνος Χαρμπούρης|마리노스 하르부리스el)가 맡았다. 카르부리스는 땅이 얼어붙는 겨울을 기다렸다가, 지름 약 13.5cm 크기의 청동 구슬 위를 미끄러지는 금속 썰매를 고안하여 돌을 운반했다. 이는 현대의 볼 베어링과 유사한 원리였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돌의 운반은 오직 400명의 인력만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물이나 기계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9개월 동안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숙련된 석공들은 계속해서 돌을 다듬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종종 작업 현장을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지켜보았다. 작업자들은 평지에서 하루에 150m 이상 돌을 옮겼고, 바다에 도착한 후에는 천둥 돌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거대한 바지선에 실어 운반했다. 약 2년간의 노력 끝에 돌은 1770년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도전에 가까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메달이 발행되었다.

원래 천둥 돌의 크기는 7m x 14m x 9m에 달했으며, 무게는 약 1500ton으로 추정되었다. 팔코네는 이 돌을 조각하여 현재의 받침대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된 받침대의 무게는 이보다 훨씬 가볍다.

''표트르 대제 기념비 제막식''. A. P. 다비도프의 그림을 A. K. 멜니코프가 판화로 제작, 1782


1782년 8월 7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제막식이 열렸다. 그러나 정작 동상을 만든 팔코네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와의 의견 차이와 갈등으로 인해 제막식 4년 전에 이미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점차 팔코네의 공적을 잊고, 청동 기마상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게 되었다.[3]

동상은 표트르 대제가 말을 타고 네바 강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 영웅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말은 가파른 절벽 끝에서 뒷발로 서 있는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고 있으며, 발굽 아래에는 뱀을 짓밟고 있다. 이 뱀은 표트르 대제와 그의 개혁에 반대했던 세력, 즉 반역이나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4] 동상 자체의 높이는 6m이고 받침대 높이는 7m으로, 전체 높이는 약 13m에 달한다.[5]

2. 2. 제작 과정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 건설은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독일 출신 공주였던 예카테리나 2세는 로마노프 왕조와 결혼하였고, 궁정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표트르 대제와의 연결고리를 만들려 했다.[2] 이를 위해 기마상 받침대에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la라는 라틴어 문구와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페트루 페르보무 예카테리나 프토라야, 레타 1782ru라는 러시아어 문구를 새기도록 지시했다. 두 문구 모두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1782년'이라는 뜻으로, 선대 황제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자신이 그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드니 디드로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그의 친구인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를 추천받았고, 1766년 팔코네는 러시아에 도착하여 작업에 착수했다.[3]

동상 주조는 1775년 주조공 에밀리안 카일로프의 감독 아래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조 과정에서 주형이 파손되어 녹은 청동이 흘러나오면서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다. 작업자들이 모두 도망쳤지만 카일로프는 목숨을 걸고 남아 주조물을 지켜냈다.[3] 이후 손상된 부분을 다시 녹여 주조하여 동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차르의 얼굴은 당시 18세였던 젊은 조각가 마리-안 콜로가 제작했다. 팔코네의 조수로서 함께 러시아에 온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데스 마스크와 여러 초상화를 참고하여 얼굴을 모델링했다. 디드로는 그녀를 "마드모아젤 빅토아르"(승리의 아가씨)라고 불렀다. 동상의 오른손은 1771년 네덜란드 보르부르크의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 청동 손을 모델로 삼았다.

동상 제작에는 받침대, 말, 기수를 포함하여 총 12년(1770년~1782년)이 걸렸다. 완성된 동상은 표트르 대제가 네바 강을 향해 팔을 뻗은 채 말을 타고 절벽 가장자리에 극적으로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말발굽 아래에는 뱀이 짓밟혀 있는데, 이는 반역, 악, 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4] 동상 자체의 높이는 6m이며, 받침대 높이는 7m으로 총 높이는 약 13m에 달한다.[5]

기마상의 거대한 받침대로 사용된 돌은 '천둥 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라파키비 화강암 거석이다. 이 돌은 1768년 핀란드 만에서 내륙으로 약 6km 떨어진 라흐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천둥 돌'이라는 이름은 천둥이 돌을 쪼갰다는 현지 전설에서 유래했다. 팔코네는 돌을 발견된 장소에서 조각하길 원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운반 후에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돌이 절반쯤 땅에 박혀 있고 주변 지역이 습지였기 때문에 운반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의 중령이었던 그리스 출신 공학자 마리노스 카르부리스(Μαρίνος Χαρμπούρηςel)가 이 과제를 맡았다. 그는 땅이 얼어붙는 겨울을 기다렸다가, 지름 약 13.5cm 크기의 청동 구슬 위를 미끄러지는 금속 썰매를 고안하여 돌을 운반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는 현대의 볼 베어링과 유사한 원리였다.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은 오직 인력으로만 이루어졌으며, 동물이나 기계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400명의 인부가 9개월 동안 돌을 옮겼고, 그동안 숙련된 석공들이 계속해서 화강암 덩어리를 다듬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종종 현장을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가장 큰 도르래는 32명이 돌려야 겨우 바위를 움직일 수 있었고, 100m 길이의 운반용 트랙을 계속해서 분해하고 재설치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평지에서는 하루에 150m 이상 이동시켰다. 바다에 도착한 후에는 천둥 돌만을 위한 특수 제작된 거대한 바지선을 이용해 운반했으며, 양옆에서 군함 두 척이 호위했다. 약 2년간의 작업 끝에 천둥 돌은 1770년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를 기념하여 "도전에 가까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메달이 발행되었다.

원래 천둥 돌의 크기는 가로 7m, 세로 14m, 높이 9m였으며, 무게는 약 1500ton으로 추정되었다. 팔코네가 받침대 모양으로 다듬으면서 최종 무게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소련에서 표트르 대제 기념비를 기념하기 위해 1988년에 발행된 기념 주화


1782년 8월 7일, 받침대 굴착이 시작된 지 14년 만에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제막식이 열렸다. 그러나 조각가 팔코네는 예카테리나 2세와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제막식 4년 전인 1778년에 러시아를 떠나야 했고, 결국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점차 팔코네를 잊고 기마상을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여겼다.[3]

3. 조형 및 특징

청동 기마상은 표트르 대제가 네바 강을 향해 팔을 뻗은 채, 뒷발로 선 말 위에 영웅적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는 말이 극적인 절벽 가장자리에서 뒷발을 드는 순간을 포착했으며, 말발굽 아래에는 뱀을 짓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 뱀은 반역, 악, 또는 표트르 대제와 그의 개혁에 대한 적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4]

동상 자체의 높이는 6m이며, '천둥 돌'이라 불리는 거대한 화강암 받침대는 7m 높이로, 전체 높이는 약 13m에 달한다.[5] 받침대의 독특한 형태와 거대한 크기는 기마상 자체만큼이나 인상적인 특징이다. 받침대에는 라틴어러시아어로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1782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건립을 명령한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2] 표트르 대제의 얼굴 조각은 팔코네의 조수였던 마리-안 콜로가 담당했다.

3. 1. 동상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상트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구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위치해 있다. 이 동상은 러시아 제국예카테리나 2세가 자신의 통치 정통성을 강화하고 스스로를 표트르 대제의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건립을 명령했다.[2] 예카테리나 2세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법적인 계승권이 부족하다고 여겨,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잇는 적법한 후계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동상 건립을 위해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 사상가 드니 디드로와 서신을 교환하며 조언을 구했고, 디드로는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를 추천했다. 여제는 이를 받아들여 1766년 팔코네를 러시아로 초청했다.[3]

동상 제작은 1770년에 시작되어 12년 만인 1782년에 완성되었다. 주조 작업은 1775년 주조공 에밀리안 카일로프의 감독 아래 시작되었으나, 과정 중에 주형이 파손되어 녹은 청동이 쏟아져 나오면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작업자들이 모두 도망쳤지만 카일로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아 주조물을 지켜냈다.[3] 이후 손상된 부분을 다시 녹여 주조하여 동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표트르 대제의 얼굴은 팔코네의 조수였던 젊은 조각가 마리-안 콜로가 만들었다. 그녀는 1766년 팔코네를 따라 러시아에 왔으며, 표트르 대제의 데스 마스크와 여러 초상화를 참고하여 얼굴을 조각했다. 디드로는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Mademoiselle Victoire|마드모아젤 빅토아르프랑스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얼굴을 그의 데스 마스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견한 수많은 초상화를 바탕으로 모델링했다. 동상의 오른손은 1771년 네덜란드 포룸 하드리아니의 고대 로마 도시 유적지인 보르부르크에서 발견된 로마 청동 손을 모델로 했다.

1782년 8월 7일, 받침대 굴착이 시작된 지 14년 만에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완성된 동상의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팔코네는 여제와의 오해로 심각한 갈등을 겪으면서 불참했다. 그 결과, 그는 프로젝트가 완료되기 4년 전에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예카테리나는 그를 잊어버렸고, 이후 ''청동 기마상''을 자신의 작품으로 여기게 되었다.[3]

동상은 표트르 대제가 영웅적으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의 뻗은 팔은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조각가는 그의 말이 극적인 절벽 가장자리에서 뒷발을 드는 정확한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의 말은 뱀을 짓밟고 있는데, 이는 반역, 악, 또는 표트르와 그의 개혁의 적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4] 동상 자체는 6m 높이이며, 받침대는 7m 높이로, 총 13m 정도이다.[5]

받침대 오른쪽에 라틴어로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 라고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러시아어로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 라고 새겨져 있다. 둘 다 한국어로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1782년"이라는 뜻이다. 이는 예카테리나 2세가 선대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동시에 자신이 그의 위대한 계보를 잇는 통치자임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완성 기념식은 1782년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라틴어 비문이 새겨진 측면. 받침대의 다른 면에는 동일한 비문이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기마상은 네바강 좌안에 있는 구 해군성 옆, 원로원 광장에 위치해 있다. 소련 시대에는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고 불렸으나, 2008년에 원래의 명칭으로 돌아갔다.

3. 2. 받침대



기마상의 받침대로 사용된 거대한 바위는 천둥 돌(Гром-камень|그롬-카멘ru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돌은 1768년 라흐타 지역에서 발견된 라파키비 화강암 거석으로, 당시 핀란드 만에서 6km 내륙에 위치해 있었다.[3] '천둥 돌'이라는 이름은 천둥이 쳐서 돌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는 현지 전설에서 유래했다.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는 돌을 발견된 장소에서 바로 다듬기를 원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돌을 먼저 옮긴 후에 작업하라고 지시했다.[3]

돌은 무게가 엄청났고 절반쯤 땅에 묻혀 있었으며, 주변 지역은 습지였기 때문에 운반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러시아 제국군의 그리스인 중령이었던 마리노스 카르부리스(Μαρίνος Χαρμπούρης)가 이 운반 작업을 맡았다. 카르부리스는 에서 공학을 공부한 기술자였다. 그는 땅이 얼어붙는 겨울을 기다렸다가, 청동 구슬 위를 미끄러지는 금속 썰매를 고안하여 운반 작업을 진행했다. 이는 볼 베어링과 유사한 원리였다. 놀랍게도 이 작업은 동물이나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400명의 인력만으로 이루어졌다. 작업자들은 9개월 동안 돌을 옮겼으며, 그 과정에서 숙련된 석공들이 계속해서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를 조각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종종 작업 현장을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감독했다. 100m 길이의 트랙을 계속해서 분해하고 재설치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작업자들은 평지에서 하루에 150m 이상 돌을 옮기는 성과를 보였다.[3]

바다에 도착한 후에는 천둥 돌만을 위한 거대한 바지선이 특별히 제작되었고, 양쪽에서 군함 두 척이 바지선을 호위했다. 약 2년간의 고된 작업 끝에, 천둥 돌은 1770년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 도착했다. 이 역사적인 운반을 기념하기 위해 "도전에 가까이(Close to Daring)"라는 문구가 새겨진 메달이 발행되었다.[3]

1882년 프랑스 과학 저널 ''라 나튀르'' 가을호에 따르면, 운반되기 전 천둥 돌의 크기는 대략 7m × 14m × 9m였다. 화강암의 밀도를 고려할 때, 원래 무게는 약 1500ton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팔코네는 이 돌을 깎아 받침대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된 받침대의 무게는 이보다 상당히 가볍다. 받침대의 높이는 7m이며, 그 위에 6m 높이의 동상이 세워져 총 높이는 약 13m에 이른다.[5] 이 받침대는 단순히 동상을 지지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특한 형태를 지닌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받침대에는 라틴어와 러시아어로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가, 1782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2]

4. 명문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 받침대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에 따라 새겨진 명문이 있다. 이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계승하여 정통성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대제의 계승자임을 강조하고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2]

받침대의 양면에는 각각 라틴어러시아어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라틴어 (오른쪽 면):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lat
  • 러시아어 (왼쪽 면):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Petru pervomu Ekaterina vtoraya, lěta 1782rus


두 문구 모두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1782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예카테리나 2세가 선대 황제인 표트르 대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동시에, 자신이 러시아의 위대한 통치자 계보를 잇는 적법한 후계자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2] 동상의 공식 제막식은 명문에 새겨진 해인 1782년에 거행되었다.

5. 역사적 의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명에 따라 1770년에 건설이 시작된 이 기마상은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느 모리스 팔코네(Étienne Maurice Falconet)가 주로 제작하여 1782년에 완성되었다. 전체 높이는 13m이며, 동상 자체의 높이는 6m이다.

동상의 받침대에는 양쪽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는 라틴어로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lat라고 쓰여 있으며, 왼쪽에는 러시아어로 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лѣта 1782rus라고 새겨져 있다. 두 문구 모두 한국어로 "표트르 1세에게,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1782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상의 완성 기념식은 1782년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청동 기마상은 네바강 좌안에 있는 구 해군성 옆, 원로원 광장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광장은 소련 시대에는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 불렸으나, 2008년에 다시 원래 이름인 원로원 광장으로 변경되었다.

5. 1. 레닌그라드 포위전

19세기부터 청동 기마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서 있는 한, 적군이 도시를 정복할 수 없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제2차 세계 대전독일군이 900일간 도시를 포위했던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년-1944년)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기간 동안 청동 기마상은 파괴를 막기 위해 받침대째 모래주머니와 나무 보호시설로 꼼꼼하게 덮여 보호되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동상은 900일간의 격렬한 폭격과 포격 속에서도 거의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전설처럼 레닌그라드 역시 독일군의 점령을 피할 수 있었다.[3]

5. 2. 문화적 영향

알렉상드르 베누아의 시 삽화 (1904)


'청동 기마상'은 알렉산드르 푸시킨1833년에 쓴 시의 제목으로, 러시아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널리 여겨진다. 이 시의 인기로 인해, 동상 자체도 "청동 기마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의 주요 주제는 국가의 필요와 일반 시민의 필요 사이의 갈등이다.

시에서 푸시킨은 가난한 남자 예브게니와 그의 연인 파라샤의 운명을 네바 강의 홍수 속에서 묘사한다. 예브게니는 부적절한 장소에 도시를 건설하여 간접적으로 그의 연인의 죽음을 초래한 표트르 대제에게 분노하여 동상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이에 살아난 기마상이 도시를 가로질러 예브게니를 쫓는다. 시는 강가에서 떠내려온 폐허가 된 오두막에서 젊은이의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903년 화가 알렉상드르 베누아는 자신의 삽화와 함께 이 시의 판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아르 누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푸시킨의 시는 다른 장르의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는 이 시를 바탕으로 발레를 안무했으며, 니콜라이 먀스콥스키의 교향곡 10번 (1926–7) 역시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또한, 이 동상 자체는 조지프 콘래드의 1904년 정치 소설 ''노스트로모''에 등장하는 유사한 동상의 영감 또는 모델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 ''노스트로모''의 정치적 사건은 콘래드의 1905년 에세이 "Autocracy and War"의 러시아 주제 및 그의 1912년 소설 ''서구인의 눈으로'' (푸시킨의 시 및 폴란드의 정치적 문제와도 관련됨)와 암묵적으로 연결된다.[9]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St. Petersburg in Architecture: The Bronze Horseman https://web.archive.[...] University of Michigan Taubman College of Architecture + Urban Planning 2007-04-22
[3] 웹사이트 Bronze Horseman http://www.saint-pet[...] Optima 2007-04-23
[4] 웹사이트 The Bronze Horseman http://www.saint-pet[...] Saint-Petersburg.com 2007-04-22
[5] 웹사이트 Saint Petersburg https://web.archive.[...] TourArena 2007-04-22
[6] 웹사이트 Lakhta https://web.archive.[...] Saint Petersburg Encyclopaedia 2007-04-22
[7] 웹사이트 Transport du piédestal de la statue de Pierre le Grand http://cnum.cnam.fr/[...] 2007-04-22
[8] 웹사이트 Thunder-Stone https://web.archive.[...] Saint Petersburg Encyclopaedia 2007-04-22
[9] 논문 Pushkin, Mickiewicz, and 'The Horse of Stone' in Nostrom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