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먀스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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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작곡가로, 27개의 교향곡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아나톨리 랴도프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웠으며,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평생의 우정을 나누었다. 먀스콥스키는 차이콥스키와 스크랴빈의 영향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 속에서도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스탈린상을 6회 수상했으며,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와 같은 지휘자들에 의해 그의 작품이 재조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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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먀스콥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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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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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미아스코프스키 (Miaskovsky) 미아스코프스키 (Miaskowsky) |
출생 | 1881년 4월 20일 |
출생지 | 노보게오르기옙스크, 폴란드 입헌왕국, 러시아 제국 |
사망 | 1950년 8월 8일 |
사망지 | 모스크바, 소비에트 연방 |
국적 | 소비에트 연방 |
직업 | 작곡가 교육자 |
교육 | |
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
음악 스타일 | |
장르 | 교향곡 |
관련 인물 | |
영향 |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
기타 | |
작품 목록 | 작품 목록 |
2. 생애
먀스콥스키는 러시아 제국 바르샤바 근교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에서 러시아 육군 공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페라 가수였던 아버지의 여동생 옐리코니다 콘스탄티노브나 먀스콥스카야의 손에서 자랐다. 10대 시절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음악가의 길을 권유받지 못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1896년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하는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 공연을 보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02년, 아버지처럼 공학 훈련을 마쳤다. 모스크바의 공병대대 소위로 근무하면서 레인홀트 글리에르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출된 후에는 이반 크리자노프스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 준비를 위해 배웠다. 1906년 음악원에 입학하여 아나톨리 랴도프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웠다.
늦깎이로 시작한 먀스콥스키는 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막내였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굳건한 우정을 맺었고, 이들은 먀스콥스키가 생을 마칠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1] 음악원에서 이들은 스승 아나톨리 랴도프를 싫어했는데, 랴도프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음악을 싫어했기 때문에 먀스콥스키는 현악 사중주 3번을 마무리하는 변주곡의 주제로 그리그의 주제를 선택했다.[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81-1911)
먀스콥스키는 러시아 제국 바르샤바 근교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현재 폴란드 모들린 요새)에서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1] 어머니 사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페라 가수였던 고모 옐리코니다 콘스탄티노브나 먀스콥스카야 슬하에서 자랐다.[1] 10대 시절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1]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음악가의 길을 권유받지 못하고 군에 입대했다.[1] 그러나 1896년 아르투르 니키슈 지휘의 표트르 차이콥스키 《비창》 교향곡 공연을 보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1] 1902년, 그는 아버지처럼 공학 훈련을 마쳤다.[1] 모스크바의 공병대대 소위로 근무하면서 레인홀트 글리에르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출된 후에는 이반 크리자노프스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 준비를 위해 배웠다.[1]
1906년, 먀스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아나톨리 랴도프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웠다.[1] 늦깎이 학생이었던 먀스콥스키는 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막내였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곧 굳건한 우정을 맺었고, 그들은 먀스콥스키가 생을 마칠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1] 음악원에서 그들은 스승 아나톨리 랴도프를 싫어했는데, 랴도프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음악을 싫어했기 때문에 먀스콥스키는 현악 사중주 3번을 마무리하는 변주곡의 주제로 그리그의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2]
프로코피예프와 먀스콥스키는 음악원에서 함께 적어도 한 작품, 즉 잃어버린 교향곡을 작업했으며, 그 일부는 나중에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4번의 느린 악장의 소재를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다.[1] 두 사람 모두 나중에 이 시기의 자료를 사용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프로코피예프의 경우 3번과 4번 피아노 소나타가 있었고, 먀스콥스키의 경우 10번 현악 사중주와 현재 5번 및 6번 피아노 소나타로, 모두 이 시기에 쓴 작품을 개정한 것이다.[1]
먀스콥스키의 초기 개인 스타일에 영향을 준 것은 차이콥스키였으며, 이는 그의 현존하는 교향곡 중 첫 번째 (다단조, 작품 3, 1908/1921)에서 강하게 반영되었으며, 이 곡은 그의 음악원 졸업 작품이었다.[1] 또한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영향은 먀스콥스키의 피아노 소나타 1번 라단조, 작품 6 (1907-10)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글렌 굴드는 이 작품을 "아마도 동시대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라고 묘사했고,[3] 1914년 작 교향곡 3번 가단조, 작품 15는 2개의 큰 악장으로 구성된 격정적이고 비통한 작품이다.[1]
먀스콥스키는 1911년에 졸업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그는 또한 모스크바 출판물 "무지카"에 기고하며 날카로운 음악 평론가로서의 부가적인 경력을 쌓았다.[4]
2. 2. 초기 작품 활동 (1911-1921)
먀스콥스키는 1911년에 음악원을 졸업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편을 잡았고, 모스크바 출판물 "무지카"에 글을 기고하며 음악 평론가로도 활동했다.[4] 그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러시아 내 가장 지적이고 적극적인 옹호자 중 한 명이었다.[5]초기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이는 그의 음악원 졸업 작품인 교향곡 1번 다단조, 작품 3 (1908/1921)에서 잘 드러난다.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영향은 피아노 소나타 1번 라단조, 작품 6 (1907-10)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글렌 굴드는 이 작품을 "아마도 동시대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3] 1914년 작 교향곡 3번 가단조, 작품 15는 2개의 큰 악장으로 구성된 격정적이고 비통한 작품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먀스콥스키는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신경성 쇼크를 겪었으나, 회복 기간 동안 교향곡 4번 마단조, 작품 17과 교향곡 5번 라장조, 작품 18을 작곡했다.
1918년 또는 1919년 겨울, 먀스콥스키의 아버지이자 전 차르 군 장군이었던 아버지가 기차를 기다리던 중 붉은 군대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7][20] 먀스콥스키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 붉은 군대에 복무했다.
2. 3.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및 중기 작품 (1921-1941)
1921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었고, 소련 작곡가 동맹의 회원이 되었다.[20] 1921년부터 1933년까지는 먀스콥스키가 작곡에 있어서 가장 실험적이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교향곡 10번 바단조, 교향곡 13번, 피아노를 위한 몇 개의 모음곡, 《피아노 소나타 4번》, 《현악 사중주 1번》과 같이 화성법이 매우 크게 확장된 작품들이 작곡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인 것은 《교향곡 13번》으로, 단일 악장으로 작곡되었고 푸가토로 마무리된다. 이 곡은 먀스콥스키의 작품 중 미국에서 초연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교향곡 6번》(1921년 - 1923년 작곡)은 먀스콥스키의 유일한 합창 교향곡이며, 27개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긴 작품이다.[9] 1947년에 개정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이 개정판으로 연주·녹음되는 경우가 많다. 종악장에는 그레고리오 성가 《진노의 날》과 프랑스 혁명가의 선율이 인용되었다.
1933년 이후 몇 년 동안은 실험적인 양식에서 후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스탈린의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국가의 공식적인 예술 정책 방향으로 추진된 것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먀스콥스키는 장인적인 기술을 유지하며 신낭만주의로 기울어졌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된 《바이올린 협주곡》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먀스콥스키는 이 외에도 로스트로포비치가 애호한 《첼로 협주곡》, 《서정적 소 협주곡》 작품 32를 포함하여 총 3개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1940년에 작곡된 단일 악장의 《교향곡 21번 올림 바단조》 작품 51은 간결하고 서정적인 작품으로, 1920년대와는 크게 다른 화성 언어가 사용되었다.[10]
2. 4. 후기 생애와 작품 (1941-1950)
1941년, 먀스콥스키는 하차투리안, 프로코피예프 등과 함께 카바르디노-발카르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 초기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교향곡-발라드(교향곡 22번) B단조를 작곡했다.[11] 프로코피예프의 현악 사중주 2번과 먀스콥스키의 교향곡 23번 및 현악 사중주 7번은 이 지역에서 수집한 카바르딘 민요를 공통 주제로 사용했다.이 시기 이후와 종전 시대에 작곡된 소나타 작품들, 특히 교향곡 24번, 피아노 소나티나, 현악 사중주 9번 등은 낭만적인 음색과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화성과 전개는 직접적이다. 마지막 두 개의 현악 사중주에서처럼(13번 현악 사중주는 그의 마지막 출판 작품) 신경질적인 스케르초를 즐겨 사용했으며, 첼로 협주곡(스비아토슬라프 크누셰비츠키에게 헌정, 초연)과 첼로 소나타 2번(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처럼 표현을 간결하게 하여 직접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추구했다.
이전 작품들에서 나타났던 스크랴빈이나 쇤베르크의 영향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며, 실험적인 경향도 보이지 않는다. 1947년, 먀스콥스키는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반소련적, '반프롤레타리아'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음악을 작곡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먀스콥스키는 흐렌니코프가 작곡가 동맹 회의에서 반성 연설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하지 않았다.[11] 그는 1950년 암으로 사망한 후에야 복권되었으며, 약 40년에 걸쳐 87개의 작품 번호를 남겼다.
3. 주요 작품
먀스콥스키는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만큼 음반에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은 녹음되었으며, 첼로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다수의 교향곡, 실내악 및 독주곡을 포함하여 여러 번 녹음되었다.[15]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지휘자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는 먀스콥스키의 모든 교향곡과 대부분의 다른 관현악 작품을 16개의 CD에 녹음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실현했다.[15] 소련 국립 교향악단과 러시아 연방 국립 교향악단이 참여했다. 소련 붕괴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스베틀라노프는 세션을 진행하기 위해 직접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는 소문이 있다. 녹음은 2001년 올림피아 레코드에서 서방에 발매되기 시작했지만 10집 이후 중단되었고, 나머지 음반은 2008년 상반기에 알토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2008년 7월 워너 뮤직 프랑스는 16CD 세트 전체를 박스 세트로 묶어 '에디시옹 오피셜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의 35집으로 발매했다.[15]
스베틀라노프는 먀스콥스키를 "소비에트 교향악의 창시자, 소비에트 작곡 학교의 창시자, 러시아 고전과 소비에트 음악의 다리가 된 작곡가...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슈베르트와 같은 위대한 노력가로서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 그는 러시아 음악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풍요롭게 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의 억양과 방식을 창조했다."라고 묘사했다. 또한 먀스콥스키 교향곡에 대한 현재의 무관심이 과거 구스타프 말러와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겪었던 무관심과 유사하다고 비유했다.[16]
먀스콥스키의 초창기 옹호자 중 한 명은 지휘자 콘스탄틴 사라제프였다. 그는 먀스콥스키의 교향곡 8번[17], 9번[18], 11번[19]의 초연과 교향시 '침묵', 작품번호 9(사라제프에게 헌정됨)을 지휘했다.[19] 교향곡 10번 역시 사라제프에게 헌정되었다.[19] 1934년 먀스콥스키는 '사라제프의 이름을 딴 전주곡과 푸가타'(오케스트라, 작품번호 31H, 피아노 4핸즈용으로 편곡, 작품번호 31J)를 작곡했다.[19]
1930년대 먀스콥스키는 시카고 교향악단의 지휘자 프레데릭 스톡이 후원한 두 명의 러시아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다른 한 명은 라인홀트 글리에르였으며, 그는 1940년에 만나 대규모 관현악 환상곡인 '페르가나의 축제', 작품번호 75를 작곡하도록 의뢰했다.
스톡은 1938년 3월 작곡가 연합의 초청으로 먀스콥스키를 만났다. 그는 시카고 교향악단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먀스콥스키의 교향곡 21번(올림 바단조의 교향곡-환상곡)을 위촉했다. 초연은 1940년 11월 6일 모스크바에서 열렸으며(알렉산드르 가우크 지휘), 스톡은 1940년 12월 26일 시카고 초연을 지휘했다.
3. 1. 교향곡
번호 | 조성 | 작품 번호 | 작곡 연도 | 비고 |
---|---|---|---|---|
교향곡 1번 | 다단조 | 3 | 1908년 (1921년 개정) | |
교향곡 3번 | 가단조 | 15 | 1914년 | |
교향곡 5번 | 라장조 | 18 | 1918년 | |
교향곡 6번 | 내림 마단조 | 23 | 1923년 | |
교향곡 10번 | 바단조 | 30 | 1927년 | |
교향곡 13번 | 내림 나단조 | 36 | 1933년 | |
교향곡 16번 | 바장조 | 39 | 1934년 | '항공' |
교향곡 19번 | 내림 마장조 | 46 | 1939년 | 관악합주용 |
교향곡 21번 | 올림 바단조 | 51 | 1940년 | |
교향곡 22번 | 바단조 | 54 | 1941년 | '교향 발라드' |
교향곡 27번 | 다단조 | 85 | 1949년 |
3. 2.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라단조, Op. 44 (1938)
- 첼로 협주곡 다단조, Op. 66 (1944)
3. 3. 실내악
먀스콥스키는 여러 실내악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제목 | 작품 번호 | 작곡 연도 |
---|---|---|
현악 사중주 1번 가단조 | Op. 33-1 | 1929-30 |
현악 사중주 13번 가단조 | Op. 86 | 1950 |
첼로 소나타 1번 라장조 | Op. 12 | 1911, 1935년 개작 |
첼로 소나타 2번 가단조 | Op. 81 | 1948 |
랴도프를 싫어했던 먀스콥스키는 재학 중 작곡한 《현악 사중주 3번》의 종악장에 그리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썼다.[11] (《현악 사중주 3번》의 번호는 출판사에서 붙인 것으로, 세 번째로 완성된 사중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지막 출판 작품인 13번 현악 사중주는 광적이고 거의 명암법적이지만 확실히 대조적이다.[11] 첼로 협주곡은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셰비츠키에게 헌정되었고 그가 초연했으며, 첼로 소나타 2번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되었다.[11]
3. 4. 피아노곡
- 피아노 소나타 1번 라단조, Op. 6 (1907)
- 피아노 소나타 3번 다단조, Op. 19 (1920, 2악장 개정판 1939)
- 노란 잎 작품번호 31(1907~19, 28년에 개정)
- 소나티나 마단조 작품번호 57(1941)
- 9개의 소품 작품번호 73(1946)
- 과거로부터 작품번호 74(1947)
- 다성 소묘 작품번호 78(1947)
4. 음악적 특징과 영향
먀스콥스키는 초기에는 차이콥스키와 스크랴빈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자신만의 개성을 확립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과 조성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독특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했다. 그의 음악은 서정적이고 깊은 감정을 담고 있으며, 때로는 비극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11]
1921년부터 1933년까지는 먀스콥스키가 작곡에 있어서 가장 실험적이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교향곡 10번 바단조》, 《교향곡 13번》, 《피아노 소나타 4번》, 《현악 사중주 1번》 외에도 화성법이 매우 크게 확장된 피아노를 위한 몇 개의 모음곡과 같은 작품이 완성되었다.
1933년 이후 몇 년 동안은 실험적인 양식에서 후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스탈린의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국가의 공식적인 예술 정책 방향으로 추진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인적인 기술의 훌륭함은 그 이후에도 건재했다. 이 시기부터 먀스콥스키는 견실한 기법에 힘입어 신낭만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된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먀스콥스키는 192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로는 아람 하차투리안,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바르바라 가이게로바, 비사리온 셰발린, 로디온 시체린, 게르만 갈리닌, 안드레이 에슈파이,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코즐로프스키, 알렉산드르 로크신, 보리스 차이코프스키, 예브게니 골루베프 등이 있다.
5. 평가 및 유산
먀스콥스키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스탈린상을 6회 수상했는데, 이는 소비에트 작곡가 중 최다 수상 기록이다.[13] 1920년대 평론가 보리스 아사피예프는 먀스콥스키에 대해 "그는 혁명이 좋아할 만한 작곡가가 아니다. 그는 대중의 감정과 정신을 통해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의 프리즘을 통해 삶을 반영한다."라고 평했다.[11]
먀스콥스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수줍고 예민하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11] 그는 "개인주의, 퇴폐, 비관주의, 형식주의 및 복잡성"에 대한 소련 언론의 비난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11] 먀스콥스키의 임종을 지켜본 쇼스타코비치는 그를 "가장 고귀하고, 가장 겸손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13] 먀스콥스키에게 두 번째 첼로 소나타를 헌정받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를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 일종의 진짜 러시아 지식인"이라고 회상했다.[13]
192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4] 그의 제자로는 아람 하차투리안,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비사리온 셰발린, 로디온 시체린 등이 있다.[14]
먀스콥스키는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만큼 음반에서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이 녹음되었다.[15] 1991년부터 1993년 사이에 지휘자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는 먀스콥스키의 모든 교향곡 작품과 대부분의 다른 관현악 작품을 16개의 CD에 녹음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실현했다.[15] 스베틀라노프는 먀스콥스키를 "소비에트 교향악의 창시자, 소비에트 작곡 학교의 창시자"라고 칭송했다.[16]
먀스콥스키는 1950년에 서거했으며, 40년 동안 87개의 작품을 남겼다. 생전에 6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하여, 이 상 최다 수상 작곡가이다.
6. 한국과의 관계
먀스콥스키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꾸준히 연주되고 있으며, 특히 교향곡 6번과 첼로 협주곡 등이 자주 연주된다. 2017년에는 한길봉이 서경대학교 음악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교향곡 제6번 E♭단조 Op.23 분석 연구〉를 발표했다. 먀스콥스키의 교향곡 19번 2악장은 한때 한국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S. S. Prokofiev i N. Ya. Myaskovsky Perepiska
Sovyetskii Kompozitor (Moscow)
1977
[2]
문서
[3]
서적
A Glenn Gould Reader
Faber & Faber (London)
1987
[4]
웹사이트
История еженедельника «Музыка» 1910–1916 гг.: документы и личности
https://vestnik.jour[...]
2023-11-01
[5]
서적
Stravinsky and the Russian Traditions
[6]
서적
[7]
간행물
notes to Cello Classics CC1012
[8]
서적
Soviet Diary 1927 and Other Writings
Faber & Faber (London)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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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0]
뉴스
For Russian Music Mavens, a Fabled Beast Is Bagged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0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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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iner notes to Claves CD 50-9415
[12]
간행물
liner notes to Alto ALC 1022
[13]
서적
Shostakovich: A Life Remembered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14]
웹사이트
biographical essay on Kabalevsky's music for a case in point
http://www.fortuneci[...]
[15]
문서
[16]
간행물
Evgeny Svetlanov remembers
[17]
웹사이트
Review of CD with compositions by Myaskovsky
http://home.wanadoo.[...]
[18]
웹사이트
Nikolai MIASKOVSKY (1881-1950): The Complete Symphonic Works: Volumes 6 - 9 on OLYMPIA
http://www.musicweb-[...]
2002-11
[19]
웹사이트
Compositions by Nikolai Myaskovsky
http://home.wanadoo.[...]
[20]
간행물
notes to Cello Classics CC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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