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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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번쾌는 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본래 개 도축업자였으나 유방을 따라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홍문의 회에서 유방을 변호하여 목숨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열후에 봉해졌으며, 여러 반란 진압에도 참여하여 상국에 이르렀다. 고조 사후에는 여씨 일족의 모함으로 처형될 뻔했으나, 고조의 죽음으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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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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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번쾌 |
원어 이름 | 樊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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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연도 (추정) | 기원전 242년? |
출생지 | 장쑤성 펑현 |
사망 연도 | 기원전 189년 |
배우자 | 여수 |
자녀 | 번항 번시인 딸 1명 |
직업 | 장군 |
시호 | 무후(武侯) |
작위 | 무양후(舞陽侯) |
2. 일대기
번쾌는 사수군 패현 출신의 강인한 인물로, 원래 개 도살업을 했다.[5] 유방(고조)이 봉기하자 이에 가담하여 평생 유방을 섬기며 무공을 세웠다. 함양에 들어간 유방이 호화로운 재물에 현혹되자 장량과 함께 간언하기도 했다. 홍문의 연회에서는 항우로부터 유방의 목숨을 구하는 등 활약했으며, 진나라를 멸망시킨 공으로 현성군에 봉해졌다. 또한 유방의 아내 여치의 여동생 여서를 아내로 맞아, 장군들 사이에서도 왕실의 신뢰가 두터웠다.[6]
한나라 건국 후에도 유방을 따라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 토벌에 종군했다. 기원전 196년에는 한신의 모반에 동조한 거록 군수 陳豨|진희중국어를 역상과 함께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6]
영포의 난 진압 중 중상을 입고 병상에 누운 고조가 주발, 관영 등 신하들의 접견을 금지하자, 번쾌는 직접 궁문을 밀치고 들어가 고조를 알현하고 다시 접견하기를 청했다. 다른 신하들도 번쾌를 따라 함께 고조를 알현했다.
노관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조가 번쾌를 상국으로 임명하여 군을 이끌고 가게 하였는데, 그 사이 번쾌가 여씨와 결탁하여 척부인과 유여의를 죽이려 한다는 참소가 들어왔다. 고조는 주발과 진평을 보내 번쾌를 대신하게 하고 진평에게 번쾌를 처형하라고 명했으나, 진평은 황후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번쾌를 죽이지 않고 장안으로 압송했다. 번쾌가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조가 사망한 뒤여서 석방되었다.[6]
혜제 6년(기원전 189년)에 사망하여 무후(武侯)라는 시호를 받았다.[6]
2. 1. 초기 생애 및 진나라 말기 봉기 참여
개 도축업자로 일하다가,[5] 고조가 거병하자 그를 따라 패를 함락했다. 고조가 패공이 되자 사인이 되었고, 사수와 패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국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패공이 장함의 군사를 복양에서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성에 오르는 공을 세워 열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호유에서 삼천군수 이유를 무찔러 상간작을 받았다. 동군수 등이 지키는 성무를 격파해 오대부가 되었다. 개봉에서 조분의 군대를 격파하고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경작을 받았다. 완릉 공격에서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후에 봉해지고 현성군의 봉호를 받았다. 장사와 환원을 공격하고, 남양수 의가 지키는 양성을 공격하고 완성에서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이 공적들로 봉읍이 더 늘어났다.[6]기원전 206년, 패공이 관중에 들어가 함양을 점령하고 궁궐에 들어가 쉬려 하자, 장량과 함께 간언하여 성내 약탈을 막았다.[7] 패공이 함곡관을 닫아 노공 항우를 분노시켰기 때문에 벌어진 홍문의 회에서, 범증이 패공을 암살할 계획을 짰다. 번쾌는 일이 급하게 되었다고 듣자 방패를 들고 영채로 들어가 패공을 호위했다. 번쾌의 호위 덕분에 패공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몰래 달아나 범증의 꾀에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6]
항우가 곧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으로 봉하자, 번쾌는 열후가 돼 임무후의 호를 받았고, 낭중이 됐다.[6]
번쾌는 유방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패현 (현재의 장쑤성 펑현)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개고기를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백정이었다. 유방의 부인 여치의 여동생인 여허를 아내로 맞이했다. 유방이 죄수들을 풀어주고 망당산(현재의 융청시, 허난성)에서 무법자가 되었을 때, 기원전 209년 다저샹 봉기 이후 배현의 현령 또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소하와 조참의 조언에 따라 번쾌를 망당산으로 보내 유방과 그의 부하들을 초청하여 자신을 돕게 하려 했으나, 현령은 마음을 바꾸어 유방의 입성을 거부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유방의 부름에 호응하여 현령을 죽였고, 유방과 그의 부하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유방은 이때부터 "패공"으로 불렸으며, 번쾌는 그의 측근이자 경호원으로 활동했다. 번쾌는 강력한 전사이자 유능한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유방의 편에서 많은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했다.
2. 2. 초한전쟁 시기 활약
기원전 206년, 패공이 관중에 들어가 함양을 점령하고 궁궐에서 쉬려 하자, 장량과 함께 간언하여 성내 약탈을 막았다.[7] 패공이 함곡관을 닫아 노공 항우를 분노하게 만들어 벌어진 홍문의 회에서는, 범증이 패공을 암살하려 하자 방패를 들고 영채로 들어가 패공을 호위했다. 번쾌의 호위 덕분에 패공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6]항우가 곧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으로 봉하자, 번쾌는 열후가 되어 임무후의 호를 받았고, 낭중이 되었다.[6]
한왕이 삼진으로 진격할 때, 번쾌는 별도로 군사를 이끌고 서현승을 공격했으며 장함의 경기병과 경전차를 무찔렀다. 이후에도 옹 · 태를 무찔렀고, 장평이 있는 호치를 격파했고, 가장 먼저 적진에 올랐다. 조분 · 하미 · 괴리 · 유중 · 함양을 쳤고, 폐구 수공에서 공적이 으뜸이었다.[8] 외황[9]에서 왕무와 정처를 격파하고 노[10] · 하구[11] · 설[12] 등을 함락했다. 그러나 팽성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번쾌의 점령지는 모두 항우가 수복했다. 이후 번쾌는 광무를 수비했고, 한왕 5년(기원전 202년), 한왕이 항우를 추격할 때 번쾌는 양가[13]를 함락했다. 항우를 진에서 포위해 격파했고, 호릉을 도륙했다. 항우가 죽자, 전공을 인정받아 식읍 8백 호를 더 받았다.[6]
홍문연에서 번쾌는 유방을 죽이기 위한 함정이었던 연회에서 유방을 변호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항우의 책사 범증이 유방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방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갔다. 번쾌는 항우를 공개적으로 꾸짖으며 유방의 업적을 이야기하고, 항우가 유방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항우는 번쾌의 용맹함에 감명을 받아 그에게 연회에 참석할 자리를 내주었다. 유방은 나중에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연회에서 탈출했고, 번쾌가 그를 따라갔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이전 진 제국을 18제후왕으로 나누고, 유방을 "한왕"으로 임명하여 촉 땅을 그의 봉토로 삼았다. 유방은 삼진의 땅을 점령하고, 중국의 패권을 놓고 항우와 오랜 권력 투쟁을 벌였는데, 역사적으로 이를 초한 쟁패라고 부른다. 번쾌는 두 세력 간의 많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의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유방이 함양을 함락시킨 후, 항우의 군대가 함곡관에서 발이 묶였다. 항우는 유방이 자신을 속이고 왕이 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분노하여 죽이려 했다. 항백, 장량 등의 중재로, 홍문에서 변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번쾌는 경호원으로서 유방을 따랐다.
본영에는 유방과 장량만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연회 자리에서, 유방을 암살하려는 검무가 시작되었다. 유방의 위기를 알게 된 번쾌는 소지하고 있던 방패로 제지하는 병사를 밀쳐 넘어뜨리고, 본영 안으로 들어가 "축하연에 걸맞는 행동이 없다!"라고 외쳤다. 그 위세에 검무는 중단되었다. 항우는 그에게 큰 잔의 술과 생 돼지의 어깨살을 주었다. 번쾌는 술을 다 마시고, 날 돼지고기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항우에게 "함양을 함락시킨 것은,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라고 해명한다. 항우는 이에 침묵해 버린다. 그 후, 유방과 번쾌는 탈출하고, 장량이 남아 사과했다. 이로 인해 항우는 유방을 칠 기회를 잃고, 유방은 위기를 벗어난다. 이 공적으로 유방이 한왕이 된 후 임무후에 봉해졌다.
변소에 가는 것을 이유로 연회 자리를 벗어난 유방을, 그대로 탈출시키려고 하자, 항우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것(예의를 잃은 것)을 유방이 신경 써 연회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번쾌는 "대행불고세근대례불사소양(大行不顧細謹大禮不辭小譲: 큰일을 이루려 할 때는, 세세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큰 예는 작은 양보를 사양하지 않는다: 큰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세세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라고 말하며 데리고 나와 탈출에 성공했다.
2. 3. 한나라 건국 이후
기원전 206년, 패공이 관중에 들어가 함양을 점령하고 궁궐에 들어가 쉬려 하자, 장량과 함께 간언하여 성내 약탈을 막았다.[7] 함곡관을 닫아 노공 항우를 분노하게 만들어 벌어진 홍문의 회에서는, 범증이 패공을 암살하려 하자 방패를 들고 영채로 들어가 패공을 호위했다. 번쾌의 호위 덕에 패공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6]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으로 봉하자, 번쾌는 열후가 되어 임무후 칭호를 받고 낭중이 되었다.[6] 한왕이 삼진으로 진격할 때 별도로 군사를 이끌고 서현승을 공격하고, 장함의 경기병과 경전차를 무찔렀다. 옹 · 태, 호치, 조분 · 하미 · 괴리 · 유중 · 함양을 쳤고, 폐구 수공에서 큰 공을 세웠다.[8] 외황[9]에서 왕무와 정처를 격파하고 노[10] · 하구[11] · 설[12] 등을 함락했다. 그러나 팽성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번쾌의 점령지는 모두 항우에게 넘어갔다. 이후 번쾌는 광무를 수비했고, 한왕 5년 한왕이 항우를 추격할 때 양가(陽夏)[13]를 함락했다. 항우를 진에서 포위해 격파했고, 호릉을 도륙했다. 항우가 죽자, 전공을 인정받아 식읍 8백 호를 더 받았다.[6]
한고조 5년 7월,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7] 고조를 따라 종군해 장도를 사로잡고 반란을 평정했다. 초왕 한신이 반란을 모의하자 다시 고조를 따라 한신을 사로잡고 초나라를 평정했다. 열후에 봉해지고 무양을 봉읍으로 받았다. 한왕 신이 모반하자 고조를 따라 종군해 주발과 함께 곽인에서 운중까지 평정했다. 진희와 만구신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했고 청하에서 상산까지 이르는 27현을 항복시켰다. 이 공으로 상국이 되었다. 계속해서 진희의 별장 왕황과 한왕 신을 공격했고 부하가 한왕 신을 죽였으며, 대나라 장군 조기를 베었고, 승상 풍량(馮梁) 등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연왕 노관이 모반하자 영포의 난 진압에서 중상을 입어 임종을 눈앞에 둔 고조를 대신해 상국을 맡아 진압군의 대장으로 출진해 노관의 승상 저를 계남에서 격파하고 열여덟 현을 평정했다.[6]
영포의 난 진압에서 중상을 입은 고조가 침상에 누워 주발, 관영 등 모든 신하들의 접견을 금지하자, 직접 궁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대신들도 그 뒤를 따라 함께 고조를 알현하고 다시 접견하기를 청했다.
노관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조가 번쾌를 상국으로 봉해 군을 이끌고 간 사이, 번쾌가 황후의 친정이자 자신의 처가인 여씨와 결탁해 고조가 총애하는 첩 척부인과 그 소생 유여의를 죽이려 한다는 참소가 들어왔다. 고조는 이를 믿어 주발과 진평을 보내 주발로 번쾌를 대신하게 하고 진평에게 번쾌를 처형하라고 하였으나, 진평은 황후의 보복을 두려워해 번쾌를 죽이지 않고 다만 장안으로 압송했다. 장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고조가 죽어서 석방되었다.[6]
혜제 6년(기원전 189년)에 죽어, 시호를 무후라 했다.[6]
3. 가계 및 후손
번쾌의 아들 번강이 작위와 식읍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번쾌의 부인 여수의 행패가 심하여, 여씨 일족이 축출될 때 번강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6]
전한 문제 즉위 후, 대가 끊어진 번쾌의 후사는 서자 번시인이 이어받았다. 번시인은 29세에 죽어 강후(荒侯)라는 시호를 받았다.[6]
번시인의 뒤는 번타광이 이었다. 그러나 6년 후, 번씨 집안의 사인이 죄를 짓고 원망하여 번타광이 번시인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고변하였다. 조사 결과 번타광은 작위를 빼앗기고 무양후 봉국은 멸망했다.[6]
원광 4년(기원전 131년), 조서를 통해 번쾌의 증손인 장릉불경 번승객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14] 평제의 원시 2년에는 번쾌의 6세손(현손의 아들)인 번장이 무양후로 복위되었다.
4. 현대적 평가 및 대중문화
번쾌는 중국 민간 신앙에서 때때로 정육점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 액션 RPG 게임 ''진왕''에서는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유방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조는 자신의 장수이자 경호원인 허저를 "나의 번쾌"라고 칭하며, 번쾌는 용감한 경호원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번쾌의 직계 후손들은 여전히 그의 고향인 패현([])에 살고 있으며, 가문의 명성을 지키고 지역 사회에서 전통 중국 의학 기술로 유명하다. 현대 중국 시각 예술과 공필화 교육에 훌륭한 역할을 한 번뢰([樊蕾|번뢰중국어])는 중국 문화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4. 1. 현대적 평가
중국 민간 신앙에서 번쾌는 때때로 정육점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2] 액션 RPG 게임인 ''진왕''에서 번쾌는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플레이어는 그에게서 유방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다.현실에서 그의 직계 후손들은 여전히 번쾌의 고향인 패현([])에 살고 있다. 그들은 가문의 좋은 이름을 지키며 지역 사회에서 효과적인 전통 중국 의학 기술로 유명하며, 그를 존경하고 있다. 번뢰(번뢰)(樊蕾|번뢰중국어)는 현대 중국 시각 예술과 공필화 교육에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며 중국 문화의 좋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4. 2. 대중문화
중국 민간 신앙에서 번쾌는 때때로 정육점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2] 액션 RPG 게임 ''진왕''에서 번쾌는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플레이어는 그에게서 유방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다.현실에서 그의 직계 후손들은 여전히 번쾌의 고향인 패현()에 살고 있다. 그들은 가문의 좋은 이름을 지키며 지역 사회에서 효과적인 전통 중국 의학 기술로 유명하며, 그를 존경하고 있다. 번뢰(樊蕾)는 현대 중국 시각 예술과 공필화 교육에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며 중국 문화의 좋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호위(虎士)"로 알려진 조조의 장수이자 경호원인 허저가 등장한다. 조조는 그를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번쾌다!"라고 칭했다. 번쾌는 용감한 경호원의 전형이다.
5. 홍문의 회
기원전 206년, 패공이 관중에 들어가 함양을 점령하고 궁궐에 들어가 쉬려 하자, 장량과 함께 간언하여 성내를 약탈하는 것을 막았다.[7] 패공이 함곡관을 닫아 노공 항우를 분노시켰기 때문에 벌어진 홍문의 회에서, 범증이 패공을 암살할 계획을 짰다. 번쾌는 일이 급하게 되었다고 듣자 방패를 들고 영채로 들어가 패공을 호위했다. 번쾌의 호위 덕분에 패공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몰래 달아나 범증의 꾀에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6]
번쾌는 유방을 죽이기 위한 함정이었던 홍문연에서 유방을 변호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항우의 책사 범증이 유방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방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갔다. 번쾌는 항우를 공개적으로 꾸짖으며 유방의 업적을 이야기하고, 항우가 유방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항우는 번쾌의 용맹함에 감명을 받아 그에게 연회에 참석할 자리를 내주었다. 유방은 나중에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연회에서 탈출했고, 번쾌가 그를 따라갔다.
유방이 함양을 함락시킨 후, 항우의 군대가 함곡관에서 발이 묶였다. 항우는 유방이 자신을 속이고 왕이 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분노하여 죽이려 했다. 항백, 장량 등의 중재로, 홍문에서 변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홍문의 회'이다. 번쾌는 참승(參乘), 즉 경호원으로서 유방을 따랐다.
본영에는 유방과 장량만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연회 자리에서 유방을 암살하려는 검무가 시작되었다. 유방의 위기를 알게 된 번쾌는 소지하고 있던 방패로 제지하는 병사를 밀쳐 넘어뜨리고, 본영 안으로 들어가 "축하연에 걸맞는 행동이 없다!"라고 외쳤다. 그 위세에 검무는 중단되었다. 항우는 그에게 큰 잔의 술과 생 돼지의 어깨살을 주었다. 번쾌는 술을 다 마시고, 날 돼지고기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항우에게 "함양을 함락시킨 것은,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라고 해명했다. 항우는 이에 침묵했다. 그 후, 유방과 번쾌는 탈출하고, 장량이 남아 사과했다. 이로 인해 항우는 유방을 칠 기회를 잃고, 유방은 위기를 벗어났다. 이 공적으로 유방이 한왕이 된 후 임무후에 봉해졌다.
변소에 가는 것을 이유로 연회 자리를 벗어난 유방을, 그대로 탈출시키려고 하자, 항우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것(예의를 잃은 것)을 유방이 신경 써 연회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번쾌는 "대행불고세근대례불사소양(大行不顧細謹大禮不辭小譲: 큰일을 이루려 할 때는, 세세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큰 예는 작은 양보를 사양하지 않는다: 큰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세세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라고 말하며 데리고 나와 탈출에 성공했다.
참조
[1]
기타
[2]
웹사이트
Concordence:Asian Gods
https://web.archive.[...]
2007-05-02
[3]
서적
史記』巻95樊酈滕灌列伝
[4]
서적
漢書』巻11樊酈滕灌傅靳周列伝
[5]
웹인용
왕도와 패도의 사이 전호근의 동양고전 『맹자』 제5강
http://nabeeya.net/n[...]
책읽는사회문화재단
2015-12-02
[6]
서적
사기》 권95 번역등관열전제35
[7]
서적
사기 권8 고조본기
[8]
기타
[9]
기타
[10]
기타
[1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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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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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4]
서적
한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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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6]
기타
[1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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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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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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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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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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