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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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정원 목사는 1912년 출생하여 2010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목회자이다. 신사참배 거부, 임마누엘 예수교 교단 창설, 대구신학교 설립 등 목회 사역을 펼쳤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설교와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임마누엘 연경원 운영, 성경 강해, 저술 활동을 했다.

최정원 (목회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 이름최정원
출생일1912년 1월 19일 (음력)
출생지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고흥군
사망일2010년 3월 26일
사망 장소대한민국
국적대한민국
종교대한예수교장로회
임마누엘 예수교
배우자손소출 사모
가족아들 최진호, 최진숙, 최명자, 최창호 목사, 손녀 최해림, 최해신, 손자 최사무엘 목사
학력
학력경성성서학원 신학 학사
사역
목회목사와 신학자 사역
직책임마누엘 예수교 설립자
당 교회중문교회, 동문교회, 공평동 교회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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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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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회 사역

최정원 목사는 부친 최공진과 모친 박옥지에게서 태어나 손소출 사모와 결혼하여 최진호, 최진숙, 최명자, 그리고 최창호 목사를 자녀로 두었다. 최창호 목사는 최해림, 최해신, 그리고 최 사무엘 목사를 낳았다. 어릴 적부터 성경을 통독하여 성경이 보여지게 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성경적 지식과 신앙으로 일찍부터 교회 목사이자 부흥사로 한국교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1943년에는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하였으나, 최정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대구에서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를 재판하던 담당관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이듬해인 1944년에는 만주 용정 등지에서 순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45년 8월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격변기에는 교계 지도자들의 신사참배 문제로 혼란한 전국 교계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6.25전쟁 때에는 교계 전국 전시대책 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1952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임마누엘 예수교 교단을 창설하여 1950년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공평동성결교회, 칠성동교회, 비산동교회, 봉산교회, 남덕교회, 동성교회, 포항중부교회 등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진 양성을 위해 현재 대신대학교의 전신인 대구신학교를 설립하였다.

2.1. 교단 설립

최정원 목사는 부친 최공진과 모친 박옥지에게서 태어나 손소출 사모와 결혼하여 최진호, 최진숙, 최명자, 그리고 최창호 목사를 자녀로 두었다. 최창호 목사는 최해림, 최해신, 그리고 최 사무엘 목사를 낳았다. 어릴 적부터 성경을 통독하여 성경이 보여지게 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성경적 지식과 신앙으로 일찍부터 교회 목사이자 부흥사로 한국교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1943년에는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하였으나, 최정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대구에서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를 재판하던 담당관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이듬해인 1944년에는 만주 용정 등지에서 순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45년 8월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격변기에는 교계 지도자들의 신사참배 문제로 혼란한 전국 교계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6.25전쟁 때에는 교계 전국 전시대책 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1952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임마누엘 예수교 교단을 창설하여 1950년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공평동성결교회, 칠성동교회, 비산동교회, 봉산교회, 남덕교회, 동성교회, 포항중부교회 등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진 양성을 위해 현재 대신대학교의 전신인 대구신학교를 설립하였다.

2.2. 해외 사역

3. 생애와 주요 활동

최정원 목사는 1912년 1월 19일(음력)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모친은 꿈에 천사로부터 두 개의 죽순, 은 나팔, 책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14세에 집사 직분을 받고, 대구에서 생애 처음으로 『중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934년 22세 때 대구 상동에서 밤낮없이 기도하던 중 『가미노 카렌다(하나님의 카렌다)』가 나타난 계시를 받았다. 1945년에 일본은 망하고 우리나라가 8월에 해방될 것, 이후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될 것과 금덩어리가 큰 용으로 바뀌는 것과 그 용이 지구를 감싸고 있는 것, 그리고 그 후 곧 지구가 폭파되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장차 이 세상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며 그 후 얼마 안 가서 세상이 사탄의 역사로 인해 폭파되고 멸망할 것을 알려주었다.

이후, 경성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간판을 보고 들어가 순수하게 성경만 연구한다는 뜻을 좋게 여겨 함께 모임을 가졌고, 이 모임이 후에 성결교단이 되었다. 1935년(25세) 경성 무교동 교회, 독립문교회 등 당시 국내 성결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로 가라는 성결교 총회 권고를 사양하고 대구시 비산동 나환자촌이던 빈민굴로 들어가 『대구 비산동교회』를 설립하였다.

25세 때부터 신사 불 참배 선구자로서 전국에 유명해졌다. 교회가 연합으로 모이면 언제나 사회를 맡고 국기 배례, 국민 서사, 동방요배 없이 순수하게 예배를 인도하였다. (일본 순사들의 감시가 심하므로 동방 요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사회를 맡지 않으려고 하는 때이었다) 1943년 5월 24일 (비산동교회 재임 시) 신사 불 참배로 투옥(32세 때 대구 달성동 312번지 사택에서 일본 순사에게 체포됨)되었고, 투옥 즉시 성결 단체는 문 닫기고 그 단체 교역자들 몇 명이 같이 투옥되었다. 투옥 첫날, 홍시(紅柹)가 들어오는 날 풀려나실 것을 묵시로 알게 되었다. 6개월 후(1943년 12월) 대구 감옥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재판하던 일본 판사들이 최정원 목사의 신앙 정신에 감동하여 그들도 기독교 신자가 됨으로써 풀려났다. 그들이 원하므로 집에 가지고 있던 책을 그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22세 때 받은 묵시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풀려난 즉시 그해(1943년) 동포들이 살던 중국 연변지역으로 갔다. 일본이 곧 망하고 북쪽은 공산진영이 될 것이므로 동포들이 속히 조국으로 들이가도록 권하였다. (도문, 왕청, 용정, 간도, 연길, 길림, 조양천, 명월구, 신경, 봉천)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용정에서 현지 조선인 목사들이 시기하여 일본 정부에 반역자로 고발하였다. 만주 봉천 『북문교회』에서 한국 보수신앙의 거두 박형룡 목사를 처음 만났다. 또 이때 김창인 목사가 그 지역 정미소 서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신학공부 할 것을 권고하였다. 후에 김창인 목사는 서울 중심가에 『충현교회』를 세웠다.

1944년 7월경(32세) 중국 연변지역 전도를 마치고 한국으로 나왔다. 1945년 8월 해방 - 대구 형무소장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쓰와겐쇼”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신사참배 하지 않은 가장 훌륭한 목사를 찾다가 자기가 지은 『중문교회, 동문교회, 공평동 교회』, 자기 집, 논 50마지기를 보내왔다. 『공평동 교회』만 목회하고 다른 것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그 외에도 신자들이 보내온 땅이 많았다. 이승만 박사가 함께 나라 재건에 동참하자고 수차 권했으나 신앙 운동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교회 운동하라고 대구 인근 대지 30만 평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다. (현재 경북대학교가 거기에 세워짐)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신현돈 박사가 땅을 희사하였다. 그곳에 현재 대구 『칠성동 교회』를 세웠다.

1945년 해방 후 성결 단체 대표지들의 부탁으로 인천 작약도에서 성결단체 9명을 모아 재건모임을 주도하였다. 한 달 후 서울 『아현성결교회』에서 다시 재건회의로 모여 참여한 모든 교역자들에게 신사 참배한 죄를 회개하도록 설교함으로 그들이 눈물로 회개하였다. 후에 종신 성결대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952년 4월 12일, 하나님의 지시로 대구 『봉산동 교회』, 성결교총회 마지막 날 홀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교계가 여전히 너무 속화되어 함께 갈 수 없으므로 엘리야처럼 홀로 걸어가야 할 감동을 받았다. 직접 세운 교회들을 놔두고 홀로 독립하였으나, 직접 세운 영호남 10여 교회들을 나중에 성결 단체에서 최정원 목사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 교회들이 『임마누엘예수교』 명칭으로 현재까지 우리 단체 교회가 되었다. 1952년 8월 13일, 목포역 앞에 『임마누엘예수교 목포제일교회』를 세우고(현재 목포 『로뎀나무교회』의 전신) “정재선 목사”를 담임목사로 위촉하였다.

1967년 7월 9일 밤 성 삼위께서 직접 나타나사 지시하셨다. ① “앞으로는 교회가 되지 않는 시대이니 네가 세운 단체를 후배들에게 맡기고 너 홀로 일하라. ② 네 모든 재산(현 시가로 적어도 1조원 넘음)을 후배들에게 맡기라 내가 네 경제 문제를 책임지겠다.” ⓷ 87세(1999년)에 “너를 부르겠다”(이 지시가 '세상에서 데려가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때 '다시 새로운 사명을 위해 부르신다'는 의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후 생명을 연장해 주시기를 계속 기도함.) 이 세 가지 지시를 받은 다음 날 직접 설립한 “임마누엘 예수” 단체를 제자 “박재식 목사”에게 맡기고 떠나 방 한 칸 셋집을 얻어 가족만 데리고 홀로 나왔다. 그 즉시 전국에서 부흥회 초청이 쇄도하므로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약 2년간 전국 부흥회만 계속하였다. 1969년. 서울 장교여관에서 <성탄을 통해 본 하나님>을 집필 중 12월경 과거 춘천 부흥회에서 은혜받은 “진용상 변호사” 가정의 초청으로 그 댁에서 거하였다.

1974년, 미국 교회 관계자들이 교회를 설립해 달라고 초청함으로 미국으로 도미 후 다시 귀국하였다. 1976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유정광 집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교회 설립 1978년 동부로 갈 예정이던 중 샌프란시스코에 큰 지진이 일어날 묵시를 받았다. 교회와 신자들이 두려워하므로 그냥 남겨둘 수 없어 워싱턴으로 갈 계획을 취소하고 샌프란시스코에 함께 머물며 기도하였다. 1979년. 지진이 잠잠해지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동부 워싱턴으로 이동하였다. 시카고에 교회 설립 (이용삼 목사, 『헤브론교회, 가나안교회』) 미국 동부 매릴랜드 대학 안에 『유니버시티 한인교회』 설립(임마누엘 교단) 동부 콜롬비아 지역에 3백여 명 모이는 『베델교회』 설립(지금은 수천 명 모임) 그후 새로운 우리 단체 이름으로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계획으로 그 교회에서 나왔다.

1980년 1월 6일. 땅끝까지 바른 복음운동을 해야겠다는 정신으로 미국 워싱턴 D.C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시작하고 그 단체 이름을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교”로 명칭을 정하고 막내 아들 최창호 목사와 함께 미국 우리 단체 최초 교회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교 레남교회』를 설립하였다. 제자들의 신앙 운동은 앞으로 이 이름으로 할 것을 지시하고 국내외에서 교회를 인도하였다. 1983년경 볼티모어에 『디모니움 교회』 등 미국에 약 10개 교회를 세우며 인물 양성에 힘쓰고 교역자로 세웠다.

1983년 한국으로 귀국 연세대학교 총장 “백낙준 박사” 호의로 서울 시청 앞 프레지던트 호텔 특실에 상당 기간 머물렀다. 1983년 12월 4일, 한국에서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서울 장충동 『대학문화원』 강당을 빌려 초 교파 성경 연구원 “연경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일요일 오후 초 교파로 성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 2월 17일. 교회 설립하기를 거절하고 성경 강의만 하기를 원하였으나 연경원 모임에 참석하던 신자들의 계속되는 강권으로 그 장소에서 생애 마지막 교회인 『임마누엘 예수그리스도교 반석교회』를 설립하였다. 1995년 1월 8일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에 교회를 건축하고 반석교회를 이전하였다. 2010년 3월 26일(향년 99세) 서울아산병원에서 오전 3시경 노환으로 소천하였다.

3.1. 초기 생애와 신앙

최정원 목사는 1912년 1월 19일(음력)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집사 직분을 받고 대구에서 중동교회를 설립했다.

22세 때 대구 상동에서 기도하던 중 '가미노 카렌다(하나님의 카렌다)' 계시를 받았는데,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 남북 분단, 그리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경성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에서 순수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을 가졌고, 이는 후에 성결교단이 되었다. 1935년(25세)에는 성결교 총회의 권고를 사양하고 대구 비산동 나환자촌에 대구 비산동교회를 설립했다.

25세 때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며, 1943년 5월 24일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 6개월 후 대구 감옥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재판하던 일본 판사들이 그의 신앙에 감동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풀려났다.

석방된 후, 1943년 만주로 건너가 동포들에게 귀국을 권했으나, 현지 목사들의 시기로 일본 정부에 반역자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만주 봉천 북문교회에서 박형룡 목사를 처음 만났고, 김창인 목사에게 신학 공부를 권고했다.

1944년 귀국, 1945년 해방 후에는 쓰와겐쇼에게서 중문교회, 동문교회, 공평동 교회, 집, 논 50마지기를 받았으나 공평동 교회만 목회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함께 나라 재건에 동참하자고 제안하고 대구 인근 대지 30만 평을 제안했으나, 받지 않았다.

3.2. 계시 체험

최정원은 1934년 22세 때 대구 상동에서 기도하던 중 '가미노 카렌다(하나님의 카렌다)'가 나타나는 계시를 받았다. 1945년에 일본이 망하고 한국이 8월에 해방되며, 이후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될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금덩어리가 큰 용으로 바뀌어 지 구를 감싸고, 곧 지구가 폭파되는 계시를 통해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후 사탄의 역사로 인해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게 되었다.

1967년 7월 9일 밤에는 성 삼위로부터 세 가지 지시를 받았다. 첫째, 교회가 되지 않는 시대이므로 설립한 단체를 후배에게 맡기고 홀로 일할 것, 둘째, 모든 재산(현 시가 1조 원 이상)을 후배에게 맡기고 경제 문제는 주님께 맡길 것, 셋째, 87세(1999년)에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이 지시를 받은 다음 날, 최정원은 '임마누엘 예수' 단체를 제자 박재식 목사에게 맡기고 홀로 나왔다.

3.3. 신사참배 반대와 투옥

최정원은 1943년 5월 24일 대구 달성동 312번지 사택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투옥 즉시 성결교단은 문을 닫았고, 일부 교역자들도 함께 투옥되었다. 투옥 첫날, 최정원은 홍시(紅柹)가 들어오는 날 풀려날 것을 묵시로 알게 되었다. 6개월 후인 1943년 12월, 대구 감옥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재판하던 일본 판사들이 최정원의 신앙에 감동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풀려났다. 석방 당시 최정원은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일본 판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최정원은 25세 때부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선구자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교회 연합 모임에서 사회를 맡아 국기 배례, 국민 서사, 동방 요배 없이 순수하게 예배를 인도했다. 당시 일본 순사들의 감시가 심해 동방 요배를 하지 않으면 사회를 맡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최정원은 성결교단 재건에 힘썼다. 인천 작약도에서 성결교단 대표 9명을 모아 재건 모임을 주도했고, 한 달 후 서울 아현성결교회에서 열린 재건 회의에서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도록 설교하여 교역자들이 눈물로 회개하게 했다. 이후 최정원은 종신 성결대학장으로 임명되었다.

3.4. 해방 이후 활동

최정원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 대구 형무소장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쓰와겐쇼"로부터 중문교회, 동문교회, 공평동 교회, 집, 논 50마지기를 받았다. 공평동 교회에서만 목회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었으며, 신자들에게서 받은 땅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함께 나라 재건에 동참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신앙 운동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대구 인근 대지 30만 평을 받았으나 사양했다(현재 경북대학교 위치).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신현돈 박사가 희사한 땅에 현재 대구 칠성동 교회를 세웠다.

해방 후 성결교단 대표들의 부탁으로 인천 작약도에서 성결교단 9명을 모아 재건 모임을 주도했다. 한 달 후 서울 아현성결교회에서 다시 재건 회의를 열고, 참여한 모든 교역자들에게 신사 참배한 죄를 회개하도록 설교하여 그들이 눈물로 회개하게 했다. 이후 종신 성결대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952년 4월 12일, 하나님의 지시로 대구 봉산동 교회, 성결교총회 마지막 날 홀로 독립을 선포했다. 교계가 속화되어 엘리야처럼 홀로 걸어가야 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직접 세운 교회들을 놔두고 홀로 독립하였으나, 직접 세운 영호남 10여 교회들을 나중에 성결교단에서 다시 돌려주었고, 이 교회들이 임마누엘예수교 명칭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2년 8월 13일, 목포역 앞에 임마누엘예수교 목포제일교회(현재 목포 로뎀나무교회 전신)를 세우고 정재선 목사를 담임목사로 위촉했다.

1967년 7월 9일 밤, 성 삼위로부터 세 가지 지시를 받았다. ① 앞으로 교회가 되지 않는 시대이니 직접 세운 단체를 후배들에게 맡기고 홀로 일할 것, ② 모든 재산(현 시가로 1조 원 이상)을 후배들에게 맡기고 경제 문제는 책임지겠다는 것, ③ 87세(1999년)에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지시를 받은 다음 날, 직접 설립한 "임마누엘 예수" 단체를 제자 박재식 목사에게 맡기고 떠나 가족과 함께 셋집에서 생활했다. 그 즉시 전국에서 부흥회 초청이 쇄도하여 약 2년간 전국 부흥회를 인도했다. 1969년, 서울 장교여관에서 <성탄을 통해 본 하나님>을 집필하던 중, 과거 춘천 부흥회에서 은혜받은 진용상 변호사 가정의 초청으로 그 댁에서 거했다.

1974년, 미국 교회 관계자들의 초청으로 도미했다가 귀국했고, 197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유정광 집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교회를 설립했다. 1978년 동부로 갈 예정이었으나 샌프란시스코에 큰 지진이 일어날 묵시를 받고,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기도했다. 1979년, 지진이 잠잠해지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동부 워싱턴으로 이동했다. 시카고에 헤브론교회, 가나안교회를 설립하고(이용삼 목사), 미국 동부 매릴랜드 대학 안에 유니버시티 한인교회(임마누엘 교단)를 설립했다. 동부 콜롬비아 지역에 3백여 명 모이는 베델교회를 설립(현재 수천 명 모임)하고, 새로운 단체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왔다.

1980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새로운 신앙 운동을 시작하고, 단체 이름을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교"로 정했다. 막내 아들 최창호 목사와 함께 미국 최초 교회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교 레남교회를 설립했다. 제자들의 신앙 운동은 이 이름으로 할 것을 지시하고 국내외에서 교회를 인도했다. 1983년경 볼티모어에 디모니움 교회 등 미국에 약 10개 교회를 세우고 인물 양성에 힘썼다.

1983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연세대학교 총장 백낙준 박사의 호의로 서울 시청 앞 프레지던트 호텔 특실에 머물렀다. 1983년 12월 4일, 한국에서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울 장충동 대학문화원 강당을 빌려 초교파 성경 연구원 "연경회"를 시작, 매주 일요일 오후 초교파로 성경을 강의했다. 1985년 2월 17일, 신자들의 강권으로 생애 마지막 교회인 임마누엘 예수그리스도교 반석교회를 설립했다. 1995년 1월 8일,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에 교회를 건축하고 반석교회를 이전했다. 2010년 3월 26일, 향년 99세로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소천했다.

3.5. 임마누엘 예수교 독립

최정원은 1952년 4월 12일, 대구 봉산동 교회에서 열린 성결교총회 마지막 날에 독립을 선포했다. 교계가 속화되어 엘리야처럼 홀로 걸어가야 한다는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독립 후, 자신이 설립한 영호남 지역 10여 개 교회들이 성결교단에서 최정원에게 다시 돌아왔고, 이 교회들은 '임마누엘예수교'라는 명칭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2년 8월 13일에는 목포역 앞에 임마누엘예수교 목포제일교회(현재 목포 로뎀나무교회의 전신)를 세우고 정재선 목사를 담임목사로 위촉했다.

4. 사역의 특징

총신대학교 정정숙 교수는 최정원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임마누엘 연경원 사역이다. 연경원이란 ‘성경을 연구하는 곳’으로 성경학교 또는 신학교이다. 최정원은 경성신학교(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 부학장의 경력을 가졌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가 가르치던 임마누엘 연경원은 정부의 법인 인가를 받은 단체였다. 후에 이 인가를 합동 측 대구신학교(오늘의 대신대학교)가 이어받아 인가있는 학교로서의 바탕을 이루었다.

둘째, 인재 양성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최정원의 문하로 몰려들어 성경을 배웠다. 이들은 오늘날 대구와 경북 지방 합동 측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김덕신 목사(대구 동부교회, 총회장 역임), 미국의 홍의만 목사(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근무), 장로로는 김추호(이 교단의 첫 장로, 대신대 이사장을 역임한 김신길 장로의 부친), 박기동, 우성기(서성로교회, 부총회장 역임), 정규만(서현교회) 등이 있다.

셋째, 성경강해의 실시다. 최정원은 1983년 12월 4일, 서울특별시 장충동의 대학문화원 강당을 빌려서 <연경회>를 시작했다. 그의 성경강해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주일 오후의 집회에는 타교회에서 5~6백 명이 모여 들었다.

4.1. 임마누엘 연경원 사역

최정원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났으며, 그가 가르치던 임마누엘 연경원은 정부의 법인 인가를 받은 단체였다. 이 인가는 후에 합동 측 대구신학교(오늘의 대신대학교)가 이어받아 인가있는 학교로서의 바탕을 이루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최정원의 문하로 몰려들어 성경을 배웠으며, 이들은 오늘날 대구와 경북 지방 합동 측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김덕신 목사(대구 동부교회, 총회장 역임), 미국의 홍의만 목사(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근무), 장로로는 김추호(이 교단의 첫 장로, 대신대 이사장을 역임한 김신길 장로의 부친), 박기동, 우성기(서성로교회, 부총회장 역임), 정규만(서현교회) 등이 있다.

최정원은 1983년 12월 4일, 서울 장충동의 대학문화원 강당을 빌려서 <연경회>를 시작했으며, 그의 성경강해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주일 오후의 집회에는 타교회에서 5~6백 명이 모여 들었다.

4.2. 인재 양성

최정원은 많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으며, 이들은 대구와 경북 지방 합동 측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덕신 목사(대구 동부교회, 총회장 역임), 미국의 홍의만 목사(웨스트민스터신학교 근무), 장로로는 김추호(이 교단의 첫 장로, 대신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김신길 장로의 부친), 박기동, 우성기(서성로교회, 부총회장 역임), 정규만(서현교회) 등이 있다.

4.3. 성경 강해

총신대학교 정정숙 교수는 최정원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임마누엘 연경원 사역이다. 연경원이란 ‘성경을 연구하는 곳’으로 성경학교 또는 신학교이다. 최정원은 경성신학교(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 부학장의 경력을 가졌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가 가르치던 임마누엘 연경원은 정부의 법인 인가를 받은 단체였다. 후에 이 인가를 합동 측 대구신학교(오늘의 대신대학교)가 이어받아 인가있는 학교로서의 바탕을 이루었다.

둘째, 인재 양성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최정원의 문하로 몰려들어 성경을 배웠다. 이들은 오늘날 대구와 경북 지방 합동 측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김덕신 목사(대구 동부교회, 총회장 역임), 미국의 홍의만 목사(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근무), 장로로는 김추호(이 교단의 첫 장로, 대신대 이사장을 역임한 김신길 장로의 부친), 박기동, 우성기(서성로교회, 부총회장 역임), 정규만(서현교회) 등이 있다.

셋째, 성경강해의 실시다. 최정원은 1983년 12월 4일, 서울 장충동의 대학문화원 강당을 빌려서 <연경회>를 시작했다. 그의 성경강해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주일 오후의 집회에는 타교회에서 5~6백 명이 모여 들었다.

5. 설교의 특징

5.1. 철저한 성경 중심

최정원 목사는 유년 시절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청년기까지 신구약을 수천 번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신학교에서 후배를 가르칠 때, 최 목사는 빠른 속도로 성경 책장을 넘기면서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성경을 많이 읽으면 책장만 넘겨도 내용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소년 시절에는 10년간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성경을 읽었으며, 눈꺼풀이 닫히지 않도록 성냥개비를 사용하기도 했다.

최정원 목사의 설교는 성경을 조직적으로 쉽게 해석하고, 평범한 말로 깊은 진리를 풀어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설교 중심은 "말씀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5.2. 철저한 회개 중심

최정원 목사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 믿음이 얻어진다고 강조한다. 회개 없는 믿음은 도적이요, 담 넘어 온 신자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신앙관은 설교의 중심 내용을 이룬다. 어거스틴은 젖먹이 시절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어 어머니가 아파할 때 웃었던 일을 회개하며 자신의 악한 본성을 슬퍼했다고 한다. 최정원 목사 또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 온전히 거룩을 향해 전진하는 회개하는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3. 거룩한 신앙 중심

최정원 목사의 모든 설교는 종말론적 성결사상에 연결되어 있다. 즉, 정결한 처녀로서 기름을 준비하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마다 죄를 회개하고 말씀 읽을 것과 기도생활을 반복해서 말한다. 특히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죄의 정욕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칼빈보다 웨슬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 속죄공로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죄의 정욕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별도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최정원 목사가 말하는 성령의 세례는 흔히 유행하는 방언이나 은사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성령과 불로 태워 없애는 불세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이 성경을 배운 것은 3년 반을 배웠고, 성령 받을 때 기도는 열흘 기도해서 받은 것처럼 성령세례는 반드시 먼저 충만한 말씀이 저장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최정원 목사의 설교는 항상 맨 먼저가 회개, 두 번째가 말씀, 세 번째가 기도이다.

5.4. 말대로 이루어지는 설교

최정원 목사만이 가진 권위는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단순히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의 모든 말이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최정원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가 있었다. 그의 말은 사람의 말이면서도 사람의 말에서 그치지 않고, '될 것이라'하면 되어지고 '안될 것이라'하면 안되어지는, 틀리는 법이 없는 것이었다. 평소의 일상적인 말의 권위가 그러하므로 설교에서 한 말의 권위는 더욱 위엄이 있었으며, 그의 입은 선지자의 입과 같은 권위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어느 한 낱말도 무시할 수 없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6. 저서

*‘하나님의 최대은사’
*‘참 구원의 길’
*‘유다서(정통과 이단)’
*‘성탄을 통해 본 하나님’ 외 다수의 성서강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