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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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태규는 일제강점기 강원도 정선군 출신으로, 대한일보 기자, 제헌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48년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 후 1950년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후 북한에서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9년 사망했다. 북한으로 간 경위에 대해서는 납북 또는 월북 논란이 있다.

최태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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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규
원어명崔泰奎
출생1919년 3월 30일
출생지정선
사망2009년 10월 16일
직업정치인
경력
경력제헌의원
기타
대한민국헌정회대한민국헌정회 프로필
월북 관련 기사"월북 제헌의원 최태규씨 생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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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사 (깨진 링크)동아일보 기사 (깨진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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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력

일제강점기 강원도 정선군 출신이다. 제1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 후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는 재북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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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약력
구분내용
학력정선군 화동공립국민학교 졸업
학력센슈 대학 법학부 3년 수료 (징병으로 귀국)
경력전재동포원호회 소비조합 이사
경력대한일보 정경부 기자
경력대동신문 기자
경력제헌 국회의원 (강원도 정선군, 무소속) (1948년)
사건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 및 투옥
이동북한으로 이동 (1950년 6월경, 본인 수기에서 월북 주장, 남한에서는 납북으로 알려짐)
학력인민경제대학 졸업 (북한)
경력평양시 소비협동조합 중앙회 사무원 (1952년 8월~)
경력재북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 발기인, 상무위원, 부위원장 (1956년 7월~)
경력노동자 (1959년 초~)
경력북한 내 사망 한국인 묘지 이설 사업 총책임자
수상조국통일상
사망2009년 10월 24일 (향년 90세, 심장마비)

2.1. 생애 초기와 언론 활동

일제강점기 강원도 정선군에서 태어났다. 군화동 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전수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으나, 3학년 때 징병을 피해 귀국했다. 해방 이후에는 전재동포원호회 소비조합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이후 대한일보 정경부와 대동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2.2. 제헌 국회의원 당선과 활동

1948년 제1대 총선거에 강원도 정선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투옥 중이던 1950년 6월경 북한으로 갔다. 남한에서는 그가 납북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최태규 본인은 훗날 화보 『조선』 2003년 3월호에 실린 수기에서 여운형의 강연을 듣고 스스로 월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가 북한으로 갈 당시 그의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북한에서는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 8월경부터 평양시 소비협동조합 중앙회 사무원으로 일했다. 1956년 7월에는 재북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 발기인이자 상무위원을 맡았다. 1959년 초에는 노동자가 되었지만, 상무위원직을 계속 유지했는지 혹은 이후 복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92년에는 남한 측의 '납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1998년 평양방송에 출연하여 미국이 조선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다수 약탈했다고 주장했으며, 1999년에는 평양출판사에서 자신의 수기를 출판했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 사망한 남한 출신 인사들의 묘지를 옮기는 사업의 총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북한에서 여러 훈장과 메달을 받았으며, '조국 통일(남북 통일)과 강성대국 건설 사업에 모든 힘과 지혜를 바쳤다'는 공로로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2009년 10월 24일, 통일신보는 최태규가 심장마비로 9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2.3. 한국전쟁과 납북/월북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중이던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북한으로 갔다. 대한민국 측에서는 이를 납북으로 보고 있으나, 최태규 본인은 2003년 북한의 화보 『조선』 3월호에 실린 수기에서 여운형의 강연을 듣고 감화되어 자진 월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의 아들은 최태규가 북한으로 갈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유복자였다.

북한에서는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 8월경부터 평양시 소비협동조합 중앙회 사무원으로 일했다. 1956년 7월에는 재북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여 발기인이자 상무위원을 맡았다. 1959년 초에는 노동자가 되었으나, 상무위원직을 계속 유지했는지 혹은 이후 복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92년에는 대한민국 측의 '납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1998년에는 평양방송에 출연하여 미국이 조선의 문화유산을 다수 약탈했다고 주장했다. 1999년에는 평양출판사에서 자신의 수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에서 사망한 남한 출신 인사들의 묘지를 이장하는 사업에서 총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북한 정권으로부터 여러 훈장과 메달을 받았으며, '조국 통일과 강성대국 건설 사업에 모든 힘과 지혜를 바쳤다'는 공로로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2009년 10월 24일, 북한의 통일신보는 최태규가 심장마비로 향년 90세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3. 북한에서의 활동

북한으로 간 이후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였다. 1952년 8월경 평양시 소비협동조합 중앙회 사무원으로 일했으며, 1956년 7월에는 재북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의 발기인이자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59년 초에는 노동자가 되었으나, 상무위원직을 계속 유지했는지 혹은 이후 복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3.1. 초기 활동

일제강점기 강원도 정선군 출신이다. 군화동 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전수대학 법학부 3학년 재학 중 징병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해방 이후 전재동포원호회 소비조합 이사, 대한일보 정경부 기자, 대동신문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948년 제1대 총선거에 정선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1950년 6월경 북한으로 갔다. 북한으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납북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태규 본인은 2003년 북한의 화보 『조선』 3월호에 실린 수기에서 여운형의 강연을 듣고 월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최태규가 북한으로 갈 당시 그의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아 유복자가 되었다.

3.2. 북한 체제 선전 활동

1992년에는 대한민국 측의 '납치' 주장에 대해 담화를 발표하며 반박했다. 1998년에는 평양방송에 출연하여 미국이 북한의 문화유산을 약탈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1999년에는 평양출판사에서 자신의 수기를 출판했다. 2003년 3월 북한의 화보 『조선』에 실린 수기에서는 여운형의 강연을 듣고 스스로 월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북한에서 사망한 남한 출신 인사들의 묘지 이장 사업에서 총책임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또한 여러 훈장과 메달을 받았으며, '조국 통일과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사업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3.3. 수상 및 사망

북한에서 훈장과 메달을 수훈했으며, '조국 통일과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사업에 모든 힘과 지혜를 바쳤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2009년 10월 24일, 통일신보는 최태규가 심장마비로 인해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4.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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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대수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결과비고
1948총선1대국회의원강원 정선군무소속7,75731.82%1위당선초선

5. 논란

제1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야당 및 소장파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후 그의 행적, 특히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한에서는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의 발기인이자 상무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8년에는 평양방송에 출연하여 "미국은 조선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다수 약탈했다"는 취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북한에서의 활동은 남한의 입장에서는 비판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5.1. 납북/월북 논란

1948년 제1대 총선거에 강원도 정선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1950년 6월경 한국 전쟁 발발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본인의 주장이 엇갈린다.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그가 투옥 중 납북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최태규 본인은 2003년 북한의 화보 『조선』 3월호에 실린 수기를 통해 "여운형의 강연을 듣고 월북을 결심했다"고 밝혔으며, 1992년에는 남한 측의 '납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북한으로 가게 될 당시 그의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