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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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추정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황건적의 난과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유비, 관우, 장비 등과 함께 황건적 토벌에 참여했으며, 공손찬과 함께 오랑캐를 물리치기도 했다. 185년에는 북군중후의 직책으로 황보숭과 량주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추정은 오환병 대신 선비병을 기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년에는 장순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손찬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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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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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추정(鄒靖) |
직업 | 군인 |
생애 | |
활동 시기 | 후한 말기 |
주요 활동 | 황건적 토벌 |
관직 | 파로교위(破虜校尉), 북군중후(北軍中侯) |
2. 생애
조정은 파로교위(破虜校尉)로 복무하며 황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1] 이후 공손찬과 함께 오랑캐와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2]
185년, 량주 반란이 일어나자 장군 황보숭과 함께 반란군을 공격했으며, 황실 친위대의 고위 지휘관인 북군중후(北軍中候) 직책을 맡았다. 이때 조정은 오환족 대신 선비족에서 병사를 모집할 것을 제안했으나, 응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 188년에는 공손찬을 도와 장순의 난을 진압했다.[4]
2. 1. 황건적의 난 진압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참여했다.[1] 조정은 파로교위(破虜校尉)로 복무하며 관군을 이끌고 유주에서 반란군을 공격했고, 유비는 의용군을 이끌고 추정과 함께 싸웠다.[1] 황건적이 봉기하자, 유비, 관우, 장비, 간옹, 전예 등을 따라 종군하여 토벌에 나섰다.《삼국지연의》에서는 황건적이 유주로 쳐들어왔을 때, 유주 태수인 유언에게 "적은 많고, 아군은 적습니다. 급히 병사를 모아 대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말하며 의용병 모집을 건의했다. 이에 유비가 의용병을 모아 등장하여 함께 황건적을 토벌하게 된다. 청주 태수 공경의 원군으로 향해 청주 황건적을 토벌한 후, 노식에게로 가는 유비와 헤어져 철수한다.
2. 2. 이민족과의 전투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은 파로교위(破虜校尉)로서 관군을 이끌고 유주에서 반란군을 공격했다. 이때 유비는 의용군을 이끌고 조정과 함께 반란군과 싸웠다.[1]《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조정은 공손찬과 함께 이민족과의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번은 조정이 함정에 빠져 오랑캐에게 포위되었는데, 공손찬이 군대를 이끌고 오랑캐를 공격하여 포위를 풀었다. 이후 두 사람은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는 오랑캐를 공격하여 북쪽 국경에서 몰아냈다.[2]
185년, 량주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장군 황보숭과 함께 반란군을 공격했다. 이때 조정은 황실 친위대의 고위 지휘관인 북군중후(北軍中候)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시기에 조정은 반란군을 공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오환족 대신 선비족에서 병사를 모집할 것을 제안했다. 군 장교 한탁(韓卓)은 조정의 의견에 동의하며, 선비 기병 5,000명이 있다면 반란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응소(應劭)는 선비족이 오환족보다 탐욕스럽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두 의견을 논의했고, 결국 응소의 의견을 채택했다.[3]
황건적이 봉기하자, 유비와 그의 동료인 관우, 장비, 간옹, 전예 등을 따라 종군하여 토벌에 참여했다.
185년, 황보숭이 한수·변장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오환병 3천 명의 증원을 요청했을 때, 북군중후였던 추정은 "오환병은 약하니 선비병을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응소가 "선비병은 전지에서 약탈을 자행할 것이다"라고 반대했기 때문에 추정의 의견은 기각되었다. 이때 추정에 동조한 한탁의 말에 따르면, 추정은 변방 근처에서 살면서 이민족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188년 9월, 공손찬은 장순의 난에 대응했다. 파로 교위였던 추정은 공손찬과 함께 호족을 추격하다가 포위되었는데, 이를 공손찬에게 구원받았다.[4]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Yingxiong Ji
[3]
서적
Houhanshu
[4]
서적
太平御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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